문학상은 ‘문학의 육성과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단체나 출판사, 신문사 등의 기관이 우수한 작품이나 작가에게 수여하는 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세계 여러 나라의 문학상은 우리나라처럼 다양하다.
전 세계 작가를 대상으로 수여하는 상으로 스웨덴의 ‘노벨문학상’ 러시아의 ‘레닌상’이 있다. 자국 내의 작가나 작품을 대상으로 수여하는 프랑스의 ‘공쿠르상’, 미국의 ‘퓰리처 문학상’ 등은 1년에 1회,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시(市)에서 제정한 ‘괴테상’은 3년에 1회, 일본의 ‘아쿠타가와상’, ‘나오키상,은 1년에 2회 수여한다. 작품대상은 장르별로 수상하는데 프랑스의 ’생트 뵈브상‘은 평론에 대해서만 수여하는 특수한 상이다.
‘공쿠르상’은 19세기 프랑스 문학자 공쿠르 형제가 남긴 뜻에 따라 제정된 것으로서 상금은 50프랑이고 일단 수상 된 작품은 놀라울 정도로 많은 발행부수를 기록한다. 이 상은 해마다 뛰어난 작품을 발표한 신인 작가에게 상을 수여한다는 규정이 있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기성 작가인 시몬드 보부아르, 로제 바양 등이 포함되었다.
한국의 문학상은 1953년 아시아재단이 제정한 문학상이 최초이고, 1955년에는 현재 ’현대문학상’으로 바뀐 현대문학사의 ’현대문학신인문학상‘이 제정되었다. 1970년대에 급격한 증가를 보여 1980년대에만 50여 개의 문학상이 제정되었다. 그 중 한국문인협회가 제정한 ’한국문학상‘을 비롯, 조선일보의 ’동인(東仁)문학상’, 창비(창작과비평사)의 ‘만해(萬海)문학상’, 민음사의 ‘오늘의 작가상’, 문학사상사의 ’이상(李箱)문학상’, 현대문학사의 ‘현대문학상’ 등 권위 있는 상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현재 한국에서 시행되는 순수문학상은 일시 중단된 것과 신인상(신춘문예 제외)을 합치면 대략 200여 종이 넘는 것으로(2008년 통계) 알려져 있으며 2008년에 시행된 문학상만도 170여개에 이른다. 분야별로 보면, 대부분 시·소설을 대상으로 하거나 수필 등 문학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상이 많다. 그 밖에 희곡만을 다루는 ‘한국희곡문학상’이 있고, 평론만을 심사 대상으로 하는 ‘김환태평론문학상’ ‘이헌구비평문학상’ ‘팔봉 비평문학상’등이 있다. 아동문학상으로는 세계적인 아동문학상으로는 미국의 1992년에 ‘뉴베리상’, 1919년에 ‘콜더컷상’, 영국의 1936년에 ‘카네기상’, 1955년에 ‘그린어웨이상’이 각각 제정되어 각 도서관, 단체의 추천에 따라 해마다 가장 우수한 책을 1권씩 선정하고 있다. 한국의 아동문학상으로는 ‘세종아동문학상’ ‘한국아동문학상’ ‘소천문학상’등이 있다.
문학상의 본래의 뜻에는 이의를 달거나 반대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문학상의 병폐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문학상의 남발로 본래의 뜻에 반하고 문학의 저해요소로 남는다면 상의 근본 의미는 퇴색되고 우리 문단에 적잖은 피해를 끼칠 것이다. 물론, 문학상만 병폐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세간에는 상으로 문인을 사고판다는 얘기가 심상찮게 나도는 것도 사실이다. 상을 미끼로 순수한 문학정신을 훼손해서는 절대 안 된다. 어떤 곳은 자신이 제정한 상을 본인 자신이 수상하고 돌아가면서 끼리끼리 ‘돌려막기 식’으로 수상한다는데 이런 형태를 어찌 상이라고 말 할 수 있겠는가, 문학상을 훼손한다면 돈에 눈이 먼 악성 상인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문학상에 눈이 어두워 갈피를 잡지 못하는 문학인이 적지 않다고 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자기 자신이 마음대로 제정해 놓고 입맛대로 수상하고 수여하는 허울 좋은 문학상은 단호히 거부하고 거절하는 참다운 문학인이 많을수록 우리 문학은 건전하게 발전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상이 병폐가 있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진정으로 우리 문학의 발전과 우수한 문인을 발굴하기 위한 흔적이 뚜렷한 신생 문학상이 빛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한번쯤 되새겨 볼만 하다. 여기에 해당하는 문학상 중 하나가 ‘제비꽃서민소설상’이다. 제1회 수상자는 고 이청준 선생의 ‘눈길’이다. 이 문학상은 빈껍데기의 거부라는 기치가 빛나는 문학상이다. 이와 반대로 우리 문단에는 구린내 나는 빈껍데기 상들이 널려 있음을 알게 되리라. 이런 상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잘 포장된 것 같지만 어디에선가 구린내가 나는 법이다.
구인환 소설가는 『2009 작품으로 말한다.』라는 책자, 권두언 ‘한국문단 그 새로운 지표’에서 한국문단의 병폐를 이렇게 진단하고 있다.
“한국문단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문단이 과연 지식정보사회에서 어떤 위상에 있고,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문답답게 그 위상을 정립하여 문학공간을 형성하여 그 본래의 중추적 소임을 다하고 문화적 유대를 이루고 있는가, 만 여명이 넘은 문인이 어떻게 문단에 동참할 수 있는가, 과연 신인다운 신인을 배출하고, 그 향기가 높고 품위가 있는 문학상을 수여하고 있는가, 문단이 문인과과의 수평성을 일탈하여 수직으로 군림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작가수업을 치열하게 하는 신인을 등단시켜야하고, 남발되거나 파당지지 않은 문학상을 수여해야 하며, 수직적으로 패권화되는 지도부가 함량 미달이 아닌 개방적이고 적재인재가 추대되어야하며, 문예지가 신인장사와 문학상 장사를 하지 말아야 하고, 문단이 독서 운동을 하여 문학을 생활화해야 한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고 문단은 품위 있는 봉사로 서야 한다.”
필자도 한때 무료출판을 낼 요량으로 꽤 이름 있는 문예지에 실린 문학상 안내 글을 보고 시집 한 권 분량(시 원고)을 보낸 적이 있다. 원고를 보내고 한 보름쯤 되었을까,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사무실로 한 번 왔으면 좋겠다는 전갈이다. ‘긴가민가’하면서 문학상 운영위원 사무실을 찾아갔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 ‘긴가민가’했던 우려가 현실로 드러났다. 시집을 내는 조건으로 문학상을 주겠단다. 물론 시집은 자비로 발간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 좀 해보겠다.”라며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그 후로부터 나의 머릿속에 문학상에 대한 이미지는 좋지 않게 각인되어 있다. 문예지를 보다가 구린내 나는 문학상을 수상한 문인들 프로필을 볼 때면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 일까, “나 이런 상 탓 네!”하고 자랑하는 사람들, 참 꼴불견이다.
요즈음에는 우스갯소리로 “상 받지 않은 사람이 진정한 수상자”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문학상이 오염되어 있다. 필자는 한국의 문단이 정말로 떳떳하고 당당한 문학상이 자리매김하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내가 아는 존경하는 시인 한 분이 계신다. 시인은 등단 경력 33년을 넘긴 고희(古稀)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시에 대한 열망만큼은 젊은이들 못지않다. 늘 올곧은 심성으로 살아오신 분이기에 더더욱 존경스럽다. 언제인가 시인께 여쭤보았다. “선생님께서도 이젠 큰 상 하나 타실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선생님은 얼굴빛이 갑자기 변하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신다.
“상 타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데, 난 상 복이 없어”
“김 시인, 요즈음 상 못 타는 사람이 최고로 좋은 상 받는 거야.”
좌중에는 한바탕 폭소가 터져 나왔다. 시인의 한 마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슴이 시려온다.
*일부 내용은 인터넷사전을 참고 했음을 밝혀둔다
■ 김형출
수필가. 국제펜클럽한국본부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