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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나리 비오는 날, 살포시 고개를 숙이고 피어있는 개나리 |
ⓒ 김민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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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가 종일 내린다.
반죽을 내가 할 터이니 점심에는 해물칼국수를 해 먹자 아내를 졸랐다.
밀가루에 쑥과 검은 깨를 갈아 넣고 칼국수를 빚어 갖가지 해물을 넣고 '검은깨쑥칼국수해물탕'이라는 신메뉴를 만들어 온 식구가 배부르게 먹었다.
행복한 포만감, 이럴 땐 낮잠을 한 번 자는 것도 좋을 것 같고, 찜질방에 가서 몸을 지지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한 번뿐인 시간을 낮잠으로 죽이기도 그렇고, 찜질방에 가자니 가계에 주름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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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달래 꽃술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으로 치장을 하고 있다. |
ⓒ 김민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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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설겆이는 내가 할테니 산책할 준비나 하시구랴."
"우산 바쳐 줄 여비서가 필요한 모양이네."
"봄비가 오시는데, 오는 봄 맞이하러 가야지. 집에 콕 박혀 있는 것도 봄날에는 죄짓는 일이여."
비오는 날 담을 사진의 소재도 많다.
그러나 혼자서 나가면 여간 까다롭지가 않다. 누군가 우산을 받쳐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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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수나무 새순이 비이슬을 하나씩 달고 잔뜩 부풀어 오른다. |
ⓒ 김민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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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봄이 많이 왔구나!"
"봄은 왜 이렇게 천천히 왔다가 그렇게도 빨리 가는지 몰라."
"그게 인생이지 뭐."
"그려, 길지 않은 인생 마음 편하게 삽시다."
마음 편하게 살려면 큰 맘 먹어야 하는 현실이다.
"당신 첫 데이트에 먹었던 것이 뭔지 알아?"
"글쎄....."
"남자들이란, 참... 곱창 먹었잖아."
"아, 그래. 성남종합시장에서 곱창 먹었다."
"첫 데이트에 그런 걸 먹으러 가자고 했냐."
"그래도 좋다고 따라와놓고는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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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리나무의 흔적 가는 것은 섭섭하다. 가는 것에 또 가야할 것이 맺혔다. |
ⓒ 김민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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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 속에서 20년도 더 지난 추억들을 꺼낸다. 그러고 보니 4월에 결혼20주년 기념일이 들어 있다. 20년, 짧지 않은 세월인데 뭐 하나 이뤄놓은 것이 없는 것 같다.
서로를 위로하며 "우리 아이들 셋 다 건강하고, 그동안 잘 자라준 것만으로도 고맙지 뭐"한다. 어쩌면 체념일지도 모른다.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내일에 대한 불안감, 중압감으로 오늘도 제대로 살아내질 못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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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매 황매의 줄기에 맺힌 비이슬, 봄비에 피어나는 비이슬 |
ⓒ 김민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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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런 생각을 아예 하지 않으려고 의도적으로 노력을 해도 나도 모르게 '에고, 힘들어!'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자연을 바라본다.
그 속에서 '무심(無心)', '마음 없음'을 본다.
그냥 하루하루 주어지는 날에 최선을 다하는 자연, 어제 혹은 내일에 대한 염려없이 그저 오늘 주어진 하루에 최선을 다하는 자연은 오늘의 일에도 조차 마음을 주지 않는다. 자신들이 지금 하는 일에 대해서 조차 무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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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타세콰이어 떨어지 나뭇가지에 걸린 이파리, 그 이파리에 걸린 비이슬 |
ⓒ 김민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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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바라보면서 여러 생각들을 하다보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길이 보인다.
그 길은 많은 이들이 걸어가는 길이 아니라 걷기 망설여지는 길이지만 누군가 걸어가고 있다. 세상의 맘몬적인 것들에 초연하거나 경쟁하지 않고 살아가도 아무 문제가 없다면 당연히 걸어가야 할 길이다.
지금 당장 그 길을 걸어가지 못해도, 이미 걸어가는 이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내는 일도 중요한 일이다. 더 많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섭섭해 하지 말고, 나로 인해 더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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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순 새순, 그것은 신비다. 그리움이며 설렘이다. |
ⓒ 김민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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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환해져야 하는데, 살만한 세상이라고 느껴져야 하는데 들려오는 소식들마다 귀를 닫고 외면하고 싶은 소리들이다. 그런 소식들이 뉴스거리가 되어 회자되고, 마음 깊은 곳에 감동을 주는 소리들은 애써 찾아도 쉽게 보이질 않는다.
유괴살인사건, 경부운하, 대학등록금, 유전자조작식품, 삼성중공업기름유출사고, 생쥐머리......
이런 단어들이 판을 치니 간혹 악몽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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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뭇가지 꺾인 나뭇가지 거꾸로 매달리고, 그 곳에 또 비이슬 거꾸로 매달리고.... |
ⓒ 김민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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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흠뻑 젖은 자연은 수줍은 듯 피어 있다.
이제 비가 그치고 햇살이 비치면 힘차게 기지개를 펴고 자라날 것이다.
"여보, 지금 우리는 봄비를 맞는 시기야."
"조금 추워도 겨울비보다는 따스하지?"
"봄비 지나고 봄햇살 나면 활짝 피어날 봄날, 머지 않아 올 거야."
"그래, 얘들 셋 키우면서 이 정도 힘들지 않은 집이 있을라고."
20년 같이 살더니만 말이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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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풍나무 아직도 남은 흔적들이 봄비에 무거워졌다. 이제 곧 떠나야 한다. |
ⓒ 김민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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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아직 가지 못한 것들이 봄비의 도움을 받아 제 갈길로 간다.
새순이 나올 때까지 남아 있으면 추할 것 같으니 어서 가자고 재촉하는 것 같다.
그렇게 지난 가을부터 하나 둘 이별을 했는데 긴 겨울 칼바람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었던 나뭇잎도 차마 이번 봄비는 그냥 보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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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어있는 봄의 빛깔 아련하게 피어난 꽃들이 새순을 내는 나무를 유혹하고 있다. |
ⓒ 김민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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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이미 완연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이런저런 봄의 빛깔들이 비오는 날 수채화처럼 피어났다.
진달래, 개나리, 연록의 새싹들의 향연이 한창인 봄날 봄비가 내린다.
봄날 우중산행 끝에 '가는 것은 섭섭하고, 오는 것은 반갑더라'고 되뇌인다.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데 '가니 속 시원하고, 올까 두려운' 삶을 살아가면 안되는데, 안되는데, 그런 사람이 되면 안되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