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가 쏟아지는 우리선인들 이야기
미남은 괴로워
조선왕조 초기의 대표적인 학자요, 정치가로 정인지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초대 임금인 태조 5년에 나서 성종 9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이씨 왕조의 초창기 왕성한 운세를 타고, 천품의 재주를 한껏 발휘하여 출세하고 또 많은 공적을 남긴 분이다. 19세로 식년 문과에 장원하였으니 뛰어난 글재주를 짐작케 한다. 순탄하게 벼슬길을 걸어 세종이 즉위하자 특별히 총애를 받아 예조와 이조의 정랑을 거쳐, 집현전 학사로 뽑혔으니 그의 학문은 날로 깊이를 더하였고, 세종 9년 32세로 문과 중시에 또한번 장원하여 곧장 좌필선에 선임되고 이듬해 부제학, 시강관을 겸임하기에 이른다.
필선과 시강관은 둘 다 시강원의 요직으로 다음 왕위에 오를 세자의 직접 선생님이니, 세종의 신임과 총애가 어떠하였나를 짐작할 만하다. 그런 그의 소년시절의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하려고 한다. 그의 출생을 놓고 석성현감 홍인의 아들로 권우의 문인이라고 하였으니, 결코 혁혁한 가문은 못된다. 집안에 신동이 태어났다고 모두의 기대를 한몸에 모았겠는데, 또한 사명감을 갖고 학문에 열중하였을 것은 물론이다. 옛날 공부라는게 학문으로 된 원전을 주로 참고하며 읽어 이해하고는, 책을 펼쳐놓은 채 눈길을 코끝으로 모아 책은 보는지 마는지 몸을 전후 또는 좌우로 흔들며, 낭랑한 목소리로 읽고 외우는 것이라, 가다가 막힐 때나 잠시 눈을 들어 본문을 보고, 다시 본래 자세로 돌아가 왱왱 외우는 것이 태반이다. 어두운 호롱불 아래서는 또 그렇게 하는 공부밖에 달리 할 길이 없다. 어느 가을, 밤도 이슥하여 주인공이 이렇게 글을 외우고 있는데, 시늉만의 등불이 펄렁이더니 앞이 갑자기 훤한 것이다. 눈을 들어 보니 묘령의 여인 하나가 다소곳이 서 있지 않은가?
“사불범정이라니 요망한 귀신이거든 썩 물러가고 사람이거든 어인 사람이며 무슨 일로 왔는가를 말하라.”
잔뜩 율기를 하고 묻는 말에 상대방은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그러나 똑똑히 말한다.
“곁의 집에 사는 처자이온대 도련님의 글 읽으시는 소리를 듣고, 사모하옵는 마음을 억제치 못하와 그만 이렇게...”
금방이라도 다가올 모양이라 언사를 부드럽게 하여 차분히 일렀다.
“우리나라는 예의지국이라, 자고로 예절을 숭상하는 터에 젊은 남녀가 사사로이 만나는 건 도리가 아닌 줄로 아오. 오늘은 그냥 돌아가고 중매를 놓아 청혼하면 달리 방도가 있을 것이니 그리 알고 어서...“
상대는 기안에 눌리어 다시 더 아무말 못하고 소리없이 사라져 갔다.
“어휴...”
큰 숨을 몰아 쉰 그는, 밝은 날로 부모님을 졸랐다.
“집 팔고 이사갑시다.”
이리하여 그는 무사히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이보다 더한 예로 고려 초기의 강감찬 장군의 일화가 있다. 그는 천병만마를 호령하는 장군도 아니다. 문과 출신으로 체수도 적고, 얼굴은 박박곰보에 검기는 왜 그렇게 까맣든지, 흔히 외모론 보잘 것 없으면서 재주 있는 사람을 그렇게 별명지어 부르기까지 하는 그런 분이다. 옛날엔 청년들이 자기도 당당한 남아라고 뽐낼 때 하는 말이 있었다.
“나도 임마! 홍역, 마마 다한 놈이다.”
마마는 천연두 증세도 대단했고, 혹 살아 남더라도 그 흉터가 말이 아니다. 그래서 날짜를 채우고 환자가 머리를 들고 일어나게 되면, 호구별성마마 배송낸다고 마마귀신을 전별하는 의식을 치렀다. 시원스러게 어서어서 가라고 평화적이긴 하나 쫓아내는 절차다. 그런데 소년 강감찬이 그런 자리에 와서 두 손을 모아 빌더라지 않은가?
“별성마마님, 이 집을 떠나거든 제발 내게로 와 주시오.”
간데마다 쫓아내는데 오라고 환영하는 데가 있으니 오죽 좋은가? 강감찬은 그길로 몸져 누워 앓아 사경을 헤맸다. 얼굴에 손등에 무섭게 돋았던 것이 딱정이가 질 때 곱게 넘기면 흉터가 안남는 것인데, 이 딱한 소년은 제 얼굴을 제가 사정없이 할퀴었다. 어른들이 말려도 듣지 않고... 그리하여 박박 얽어뱅이가 되어 일어앉은 그는 흡족한 듯이 웃었다.
“이제 됐어, 얼굴이 좀 곱상하다 보니 계집애들이 어찌나 따르는지! 이젠 마음놓고 공부하고 장부답게 일도 해야지. 에헴!”
박차오르는 필흥
조선조 때 조씨라던가 하는 명필의 얘기가 있다. 주인공되는 조모라는 분은 물론 상당한 벼슬자리에 있고, 또 처신이 고결하여 사회의 칭송을 받는 분이었다. 그가 하루는 오랜만에 한가한 시간이 생겨 하인 하나만을 데리고 나귀를 몰아 대문을 나섰는데, 사실은 어디라고 뚜렷한 목표도 없이, 심심하니까 그저 바깥구경이나 할까 하고 그래서 나섰을 뿐이다. 그런데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연전에 작고한 매형 생각이다. 촉망받은 분이었는데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혼자된 누님이 아이들을 데리고 바느질 품으로 어려운 살림을 꾸려 가고 계신 터였다.
“옳지! 게나 가 보아야겠다.”
그래도 살던 끝이라 아담하게 꾸민 중문을 들어서니 그댁 하인이 알아보고 반색을 한다.
“마님, 사직골 나으리께서 행차하셨사와요.”
옛날 법에 조관이라고 하여 양반이 하는 벼슬은 정1품부터 종9품까지 아홉 품수에 정과 종이 있어 18단계로 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6품 이상은 정, 종 품수 안에 다시 두 계층이 있어서 모두 30계단이다. 그리고 정3품은 동반(문관)일 경우 통정대부와 통훈대부로 갈리고, 서반(무관)을 절충장군과 어모장군으로 나뉘어서, 통정대부와 절충장군은 같은 정3품이면서도 당상관이라 하였고 나머지 둘은 당하관 품계였다. 그리하여 정2품 이상일때는 대감이라는 칭호를 올리고, 종2품과 정3품의 당상관을 영감이라 불렀으며, 그 이하는 모조리 나으리 - 한자로 쓸때는 진역 - 라 하는 법이었다. 그러니까 벼슬지위가 높으면 젊은 영감도 있게 마련이나, 당상관에 오르기는 참으로 쉽지않은 일이다.
“어이구, 어쩐 일이셔? 동생이 우리집엘 다 납시니...”
누님의 영접을 대청에 올라서며 보니, 잘 정돈된 안방 방바닥엔, 중국서 들여온 좋은 비단이 이제 옷을 마르려고 펼쳐져 있다.
“동생! 잠깐 앉아 계시게. 내 장국상 차릴테니... 그동안 심심하더라도 잠깐 혼자 앉아 계셔야겠네.”
앞치마를 두르며 호들갑을 떨고 뜰에 내려서 갔는데, 동생되는 나으리는 딴 생각이 들었다. 방 안을 휘둘러보니 매형이 쓰던 문방구가 그냥 있는데, 아껴쓰던 용연도 그대로다. 얼른 잡아다니어 물을 붓고 먹을 갈았다.
“이크! 알맞은 크기의 붓도 그냥 있고...”
말이 장국상이지, 오랜만에 찾아온 동생을 대접하려고 점심상을 차리는덴 시간이 조만히 걸렸다. `그게 오히려 다행이지.` 나으리는 잘 갈린 먹을 붓에 찍어 공글렸다. 그리고는 예의 중국비단을 폭 맞춰 방바닥에 깔아 폈다. 슬쩍 안마당의 기척을 살피고 나서, 팔을 걷어부치고 무릎걸음으로 비단폭 앞에 섰다. 고문진보나 문장궤범의 실린 글은 달달 외우는 터라, 구중의 좋은 글 하나를 책을 보지 않고 웅얼거리면서, 붓끝은 사뭇 바람을 일구어 행서와 초서를 섞어가며 써 내려가는데, 얘기쟁이 표현마따나 그냥 소맷자락에서 비파소리가 날 지경이다.
“아이구, 저걸 어쩌나?”
점심상을 마루에 놓으며 소스라쳐 놀라는 누님을, “쉬이잇!” 손을 저어 제지하고, 여울에 흐르듯 용트름치며, 내려가는 필세에 누님도 혀를 내둘렀다. 동생이 명필이라는 말은 들어왔지만 참으로 놀랍다. 마지막 서명까지 하더니, 이마에 솟은 땀을 소매자락으로 닦아 올리면서 물러나 서서히 훑어본다. 그리곤 히죽이 웃으면서,
“누님! 모처럼의 바느질감을 버려놨으니 어떡하우?”
“얘,칠복아! 이것 갖고 종로 육주비전 배주부에게 갖다주고 이와 똑같은 비단으로 한 필, 그리고 돈을 줄테니 쌀과 나무를 사서 지워가지고 오너라.”
방엔 글씨가 마르지 않은 채 있어서 점심상은 마루에서 받았다.
“역시 우리 누님이셔, 술도 마련하셨구려! 글씨를 쓰고 나서 컬컬하니, 그냥 이 공기에다 부어 주슈.”
연거푸 몇 잔을 들이키고 다른 음식도 걸신 들린 사람모양 탐스럽게 자셔 치웠다.
“동생! 식성은 변하지 않으셨네 그랴?”
“그게 아니예요. 흥이 나서 글을 쓰고 났으니까 이렇게 먹히는 거지요.”
퇴침을 끌어당겨 베더니 이내 잠이 든다. 해가 설핏하여 하인 칠복이가 돌아오는데 아, 이게 다 뭐지? 쌀이 몇 섬, 나무가 바리 바리, 그것만이 아니다. 마루가 쾅 하도록 돈도 한짐을 내려놓았다. 나으리가 일어나 앉아 싱그레 웃었다.
“역시 배주부가 알아보는군!”
그 뒤 나으리는 누님에게 졸리고 배주부에게 부대끼었다. 그때 그런 글씨 다시 한 번 써 달라는 거다.
“그런 글씨가 그렇게 쉽게 써지나요? 벅차오르는 필홍이 일순 돋아야지!”
어느 원로 출판인이 애써 만든 책의 제호를 누구에게 써달라나 하고 궁리가 많았는데, 마침 마음에 드는 서체를 발견해 그의 댁을 찾았더란다. 이차저차 말씀 드렸더니 쾌히 승낙하면서 아무 날 오라 하기에 갔더니 글씨 쓴 종이 둘을 내어 놓더란다.
“이중 마음에 드시는 걸로...”
“어느 게 먼저 쓰신 겁니까?”
그래 이쪽 거라 하길래
“네, 그것을 쓰겠습니다. 나중 쓰신거야 첫장의 모자라는 점을 보강해 겉모양은 정제돼 있겠지만, 기가 살아있는 건 처음 것일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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