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가 쏟아지는 우리선인들 이야기
건방진 놈이다. 묶어라
옛날 산중에 있는 이름없는 절간의 스님들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어쩌다 생기는 불공의 수입 가지고는 건물 유지조차 힘이 들고, 민간으로 나돌아 다니며 활동을 해야 하는데, 여간한 수단 가지고는 그것도 용이치 않았다. 충청도 어느 산간 조그만 암자의 스님 한 분이 궁여지책으로 시냇물을 따라가며 닥나무를 심었다. 한지를 뜨는 닥나무는 그런 곳이라야 잘자라고, 또 지역이 넓어 곧 많은 수의 나무를 심어 그것을 베었다. 그로부터의 공정이 보통 힘드는 일이 아닌데, 중은 도 닦는 기분으로 그것을 끈질기게 해냈다. 도랑물을 이끌어 물방아를 걸어서 재료를 찧고, 껍질을 벗기고 난 속대를 말리어 삶아 쪄서는 거기 넣고 다시 찧었다. 힘드는 여러 과정을 두루 거쳐 종이를 떠냈는데, 전문 직공이 아니다보니 힘은 곱이나 들고 성과도 아마 번지르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벽에 붙여 말려서 떼어내 스무 장씩 겹쳐서 접으니 그것이 한 권이요, 그것을 단위로 하여 매매하는 것인데, 그것을 여러권 포개 짐을 묶어서 멜빵을 걸어 지고 산을 내려갔다. 인간 많은 곳에 가야 팔겠어서 한나절을 걸려 청주를 찾아갔더니, 가는 날이 장날이면 오죽 좋으랴만, 하필이면 날짜를 잘못 짚어 장날이 아니어서, 누구 하나 거들떠보는 이 조차 없다. 전방 차린 데를 찾아갔더니 성수기가 아니라는 핑계를 대고 턱없는 헐값에 거저 뺏으려 든다. 간신히 어떤 집에서 점심 한끼를 얻어먹고, 호젓한 길가 담모퉁이 편편한 곳을 찾아 종이짐을 내려놓고, 멜빵을 내려 팔에 걸친 채 짐에 기대어 앉아 다리를 쉬다가 식곤증이 생기어 어느덧 가무락 가무락 졸음이 오고, 새벽부터 험한 길을 걸어온 피로마저 포개어, 내처 고개를 떨군 채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데 대처라면 으레 눈감으면 코 베어간다는 말 그대로, 해가 설핏해 중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에는 빈 멜빵만 팔에 걸쳐 있을 뿐, 종이 짐은 온데간데가 없다. 정신이 번쩍 든 중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훔친 자취를 남겨두고 갈 멍청한 도둑놈은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다. 중은 그만 맥이 탁 풀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한참을 멍청히 있다가, 다시 일어나 어슬렁 어슬렁 그곳 원님이 계신 곳을 찾아갔다. 파수가 허술했든지 관아의 삼문을 무사히 들어선 중은 정면 원님 처소 그 아래로 가 엎드리며 두 손을 짚고 울음부터 터뜨렸다.
“웬 중인데 이리 소란을 떠는고?”
손님을 대해 앉아 약주를 들고 있던 원님은, 미닫이를 열고 내다보며 물었다. 중의 푸념 섞인 하소연을 다 듣기도 전에 원님은 미닫이를 소리나게 쾅 닫았다.
“나, 웬 미친 놈의 중도 다 보겠다. 제가 실수해 잃어버려 놓고, 그런 것까지 관에 와 찾아달래? 어서 그 잔 비우게... 여봐라! 그놈 꼭두잡이 시켜서 내쫓아라.”
해가 설핏할 무렵 술자리가 파하여 손님은 일어나 가고, 원님은 배웅할 겸 대청까지 나섰다가 불현듯이 영을 내렸다. 어느 영이라 지체하랴? 더구나 원님은 낮부터 자신 술에 얼굴이 대춧빛이지 않은가? 관청 안이 들끓어 총동원되고 앞 뒤 배종에 육방관속이 말타고 뒤따르는 행렬은 지체없이 정비되었으며, 원님은 풍채좋은 군복 차림에 상모를 휘날리며 등채를 짚고 백마에 높이 올라 일동은 말발굽 소리 요란하게 삼문을 나섰다.
“저녁 안개 스미는 황금빛 벌판, 수수잎 버석이는 건들바람...”
원님은 글귀를 읊조리며 얼마를 가다가 좌우를 둘러보았다.
“한번 달리자꾸나.”
말은 어흥 소리를 지르며 네 굽을 모아 달리고 때아닌 돌개바람은 흙먼지를 일으켰다. 얼마를 달리다가 걸음을 늦춘 원님은 땀을 닦았다. 곧 먼 데까지 나갔다가 거의 땅거미가 져서 돌아오는 길에 원님은 엉뚱한 소리를 하였다.
“저건 웬 놈이냐?”
길가에 서 있는 장승을 채찍으로 가리키며 하는 소리다.
“그건 장승이올시다.”
“장승이여? 성은 장가인데 이름은 외자로 지었구. 어디 장가인고?”
“사또! 그것은 장승이올시다.”
“장승이! 너희가 모두 이름을 아는 것을 보니 그놈 이름 있는 왈패인 게로구나!
건방진 놈, 관장이 지나시는데 뻣뻣이 서서..., 그중에 술을 쳐먹었더냐? 웬 얼굴은 저리 붉고 무엄하게끔 눈깔을 부릅뜨고..., 저놈 잡아 묶어라.”
여럿은 얼굴을 서로 쳐다 보았다.
`낮술 안주에 무엇을 잘못 자신 거나 아닌가? 잘못 독버섯을 먹으면 미친 짓을 하다가 끝내는 죽고 만다는데...` 서로 눈을 끔뻑이며 하라는대로 오랏줄로 장승을 겹겹이 묶어 말에 실었다. 관청에 돌아온 원님은 모두를 세워 놓고 엄숙하게 일렀다.
“저놈을 단단히 치죄할 것이로되,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 옥에 내려 가두고 비상령을 내려서 관속들 모두가 모여서 밤새도록 지키게 하라. 흉악한 놈이니 밤사이 도망하면 큰일이로다.”
그리고는 능글맞은 행수기생이 상대로 또다시 술상을 대하여, 큰 잔으로 연거푸 기울였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큰일이 벌어졌다. 원님이 좌기를 차리고 장승을 대령하라는데 간 곳이 없다. 물론 밤사이 행수기생이 영리한 사람을 시켜 갖다 감춘 것이다.
“네놈들 듣거라. 내 그처럼 엄중 감시하라 했는데 기어이 놓쳐 버렸으니 이놈들을 그저 모조리...”
펄펄 뛰는 원님을 비서격인 책방이 뜯어 말려서 간신히 무마시켰다. “내 책방의 청을 들어 체벌만은 않을 것이로되, 일후를 징계하여 벌로 물건을 받으려 하니, 매 인당 창호지 두 권씩을 바치되 지체하면 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관속들은 종이를 구하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청주 성안의 종이는 시시각각 값이 올랐으나 그나마 바닥이 났다.
“여봐라, 어제 여기 왔던 중놈이 가지 않고 거리에서 서성거리고 있을데니 그놈을 데려오도록 하라.”
얼마만에 맥없이 끌려온 중에게 원님은 인자한 얼굴로 일렀다.
“네가 억울한 생각이 들었을 게다만 이 중에서 어떤 종이가 네가 뜬 것인지 가려내봐라.”
중은 거침없이 그 중에서 상당량의 종이를 추려냈다. 종이 끝에 꿰어 단 꼬리표를 점검해 그 종이 바친 사람들을 따로 모았다.
“너희는 이 종이를 어디서 구했더냐?”
그리하여 범인은 쉽사리 잡히고, 여럿이 바친 많은 양의 종이는 관청 창고에 들여 놓고 쌓았다.
“이 종이는 다른 데 쓸 것이 아니다. 너희들 중에, 두드러진 공로있는 자가 생기면 그때마다 상급으로 줄 것이니 그리 알도록 하라.”
“...”
경주 이씨의 오성대감 이항복의 현손인 이광좌에 얽힌 얘기인데, 이렇게 기발한 안을 낼 정도로 유능한 분이라, 뒷날 영의정에까지 올라 나랏일에 공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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