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6. 마리 앙투아네트와 패션 민주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바셀린 사나이
처음에 바셀린은 아주 폭넓게 사용되고 남용되었다. 반투명한 젤리 물질인 바셀린을 낚시꾼은 송어를 끌어들이기 위해 낚싯바늘에 발랐고, 무대 여배우는 빛나는 이 연고를 눈물로 보이기 위해 뺨에 발랐다. 바셀린은 여간해서는 얼지 않기 때문에 북극 탐험가인 로버트 피어리는 살갗이 트지 않도록 피부를 보호하는데 썼으며, 기계 장비가 녹슬지 않도록 발라서 북극점까지 가지고 갔다. 그리고 고온다습한 열대 지방의 더위 속에서도 역겨운 냄새가 나지 않았으므로 아마존의 원주민은 바셀린으로 요리를 했고, 빵에 발라 먹었으며, 돈 대신에 바셀린으로 거래를 하기도 했다. 바셀린의 발명자인 브루클린 출신의 화학자 로버트 오거스터스 치즈블로는 바셀린을 모든 곳에서 갖가지 용도로 사용한다는 얘기를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치즈블로는 96세까지 살았는데 바셀린 덕분에 오래 살았다고 말했다. 그는 날마다 바셀린을 한 스푼씩 먹고 있었던 것이다. 1859년에 로버트 치즈블로는 파산을 벗어날 방법을 찾고 있었다. 당시에는 등유가 가정과 산업용의 주된 연료원이었으나 펜실베이니아의 석유 붐으로 석유 연료가 좀더 싸질 거라는 전망 때문에 그가 브루클린에서 하고 있던 등유 사업은 위협받고 있었다. 브루클린의 이 젊은 화학자는 석유 사업에 참여할 작정으로 석유가 발견된 중심지인 펜실베이니아 주 테이터스빌로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보링 막대기에 끈적끈적 달라붙어 꼼짝 않는 풀 모양의 파라핀 같은 석유 찌꺼기를 보고 화학자로서 호기심을 느꼈다.
치즈블로의 질문을 받은 현장의 작업원들은 펌프를 막히게 하는 이 물질에 재미삼아 이름을 몇 개 붙여 놓고 있었으나 그 물질의 화학적인 성질에 대해서는 아무도 전혀 짐작을 하지 못했다. 다만 작업원들은 그것을 칼에 베인 상처나 화상에 바르면 치료가 빨라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치즈블로는 석유 사업에는 참여하지 않고, 이상한 석유 폐기물을 병에 담아 브루클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풀 모양의 그 폐기물을 정제하고 정분을 추출하기 위해 몇 개월에 걸쳐 실험을 했다. 그러자 화합물은 투명하고 매끄러운 물질로 되었으며 그는 그것을 '석유 젤리'라고 불렀다. 치즈블로는 자신이 모르모트가 되어 젤리의 치유력을 시도하기 위해 손과 팔에 크고 작은 베인 상처와 찰과상, 화상을 입혔다. 그리고 추출물을 바르자 상처는 병균 감염도 없이 즉시 낫는 듯했다. 1870년에 치즈블로는 세계 최초의 바셀린 석유 젤리를 제품화하고 있었다.
바셀린(vaseline)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치즈블로는 어느 쪽도 부정하지 않았던 것 같다. 1800년대 후반에 그의 친구들이 주장했던 것이 그 하나다. 치즈블로가 이 물질을 정제하고 있던 초기 무렵, 아내의 꽃병을 실험용 비커로 사용한 점에 착안하여 'vase'(꽃병)에 당시 의약품의 접미사로 인기가 있던 '린'(line)을 붙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치즈블로가 설립한 제조 회사의 직원에 따르면, 치즈블로는 좀더 과학적으로 독일어인 'wasser'(물)와 그리스어인 'elaion'(올리브유)이라는 두 낱말을 합성한 것이라고 말했다. 로버트 치즈블로는 자신이 만든 제품의 실험대 제 1호가 되었을 뿐 아니라 가장 강력한 광고인도 되었다. 그는 말 한 마리가 끄는 이륜마차를 타고 뉴욕 주 북부를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베인 상처나 화상에 바셀린을 사용하겠다고 약속한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공짜로 배달했다. 사람들의 반응은 굉장했다. 6개월 안에 치즈블로는 마차로 도는 세일즈맨 20명을 고용하여 약 30그램당 1페니에 바셀린을 팔기 시작했다. 뉴잉글랜드 사람들은 바셀린을 베인 상처와 화상 외에도 사용하고 있었다. 주부들은 바셀린이 나무 가구의 때나 얼룩을 지워 반짝반짝하게 해주고 나무의 표면을 보호해 준다고 말했다. 또한 바싹 말라 버린 가죽 제품이 바셀린 덕분에 되살아난다고도 보고해 왔다. 농부들은 집 밖에서 사용하는 기계에 바셀린을 듬뿍 발라 두면 녹슬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프로 화가는 바닥에 바셀린을 얇게 펴두면, 물감이 튄 것이 눌러 붙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바셀린을 누구보다 찬양한 것은 약방 주인들로 그들은 불순물이 없는 깨끗한 이 연고를, 자신들 고장에서 만드는 고약이나 크림, 화장품의 재료로 사용했던 것이다. 20세기 초에 바셀린은 가정용 상비약의 중심적인 존재가 되어 있었다. 로버트 치즈블로는 끈적끈적하고 성가신 폐기물을 백만 달러 산업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1912년에 뉴욕의 커다란 보험 회사 본사에 큰 불이 났을 때, 화상을 입은 사람들의 치료에 바셀린이 사용된 것을 알고 치즈블로는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제는 병원에서 널리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당시 신흥 자동차 업계에서는 바셀린을 바르면 차의 배터리 단자가 부식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여 바셀린은 공업계에서도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 또한 스포츠 세계에서도 일반화가 되었다. 장거리 수영 선수는 바셀린을 몸에 발랐으며, 스키어는 얼굴에 발랐고, 야구 선수는 가죽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글러브에 문질러 발랐다. 이렇게 다종다양한 이용법이 나오는 동안 바셀린의 발명자는 날마다 한 스푼의 바셀린을 먹는 것을 거르지 않았다. 50대 후반에 늑막염에 걸렸을 때 치즈블로는 담당 간호사에게 정기적으로 전신을 바셀린으로 마사지하라고 지시했다. 그의 조크대로 치즈블로는 바셀린 때문에 죽음의 손길에서 벗어났으며, 그 뒤로도 40년이나 더 살아 1933년에 사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