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5. 스칼렛은 배꼽티를 좋아했다
파리의 비키니 수영복 대회
수영복이 하나의 특별한 의상으로 탄생한 것은 1800년대 중반이다. 그때까지 수영이나 물놀이는 그다지 인기 있는 레크리에이션이 아니었다. 그래서 남성이든 여성이든 수영을 할 때는 내복이나 알몸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수영이 환영받게 되었고 수영복의 필요성이 생겨났을까? 1800년대 유럽의 의사들은 '마음의 우울함'을 고치는 레크리에이션으로서 수영이 효과적이라며 권유하기 시작했다. '마음의 우울함'이라는 말에는 상사병 같은 한때의 심심풀이부터 결핵성 수막염처럼 죽음이 확실한 증세까지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고치는 것이 광수, 샘물, 바닷물 등의 '물'이라는 것이었다. 이로써 몇 세기에 걸쳐 온몸을 물에 적시는 일은 죽음과 같다고 생각하고 있던 유럽인이 몇 천 명씩 호수나 시냇가나 해변을 돌아다니면서 흠뻑 젖어 물놀이를 하게 되었다. 이 수요에 발맞춰 등장한 수영복은 외출복의 디자인을 모방했다. 예를 들어 여성용 수영복을 보면 천은 플란넬이나 알파카 또는 서지 등으로 몸에 딱 맞는 정도였으며, 하이 넥 칼라에 팔꿈치까지 오는 소매, 무릎까지 내려가는 스커트 밑으로 블루머, 검은 스타킹, 마포로 만든 낮은 운동화를 신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두터운 천으로 만들어진 수영복이 물에 젖으면 입고 있는 사람 자신의 몸무게만큼 무거워져서 익사 사고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영국과 미국의 사고 사망자 기록에 따르면 썰물의 파도 때문에 익사한 해수욕객이 매우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번거로움이나 위험성 면에서는 남성의 수영복도 여성의 수영복과 비슷한 형편이었다. 나중에 나온 좀더 가벼운 '수영용' 수영복과 비교하면 초기의 수영복은 실로 '목욕용' 수영복인 셈이었다.
1880년 무렵부터 여성들은 '이동 편의 오두막' 덕택에 해수욕을 안심하고 즐길 수 있게 된다. 트랩과 탈의실이 달린 이 진기한 고안물에는 해변에서 얕은 여울까지 이동할 수 있는 자동차가 달려 있다. 여성들은 이 오두막 안에서 드레스를 벗고 목 부분을 끈으로 조이게 되어 있는 긴 플란넬 의상을 입고 트랩으로부터 바다로 내려간다. 게다가 '모디스티푸드(신중함을 위한 햇빛 가리개)'라고 부른 차양막이 달려 있어서 해변에 있는 남성들의 눈으로부터 여성들을 숨겨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또한 이 이동 편의 오두막에는 '디퍼'라는 여성 감시인이 있어서 어슬렁거리는 남성들을 내쫓았다.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기 얼마 전 몸에 딱 맞는 원피스식 수영복이 확산된다. 하지만 아직은 소매가 달려 있고 길이도 무릎까지 내려오는 모양이었다. 여성용 수영복에는 치마가 달려 있었다. 그러다가 덴마크계 미국인인 칼 얀센이 직물 기술을 획기적으로 개량함으로써 대대적인 수영복 혁명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1883년에 덴마크의 오르후스에서 태어난 얀센은 미국으로 이주하여 1913년에 오리건 주의 포틀랜드 편물 제작소의 공동 경영자가 된다. 이 회사는 울 스웨터나 양말, 챙이 없는 모자 같은 제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1915년에 얀센은 편물기를 사용하여 신축성이 뛰어나며 몸에 딱 맞고 가벼운 울 스웨터를 만들려고 시도하여 신축적인 리브 짜기를 고안한다. 이 울 니트는 스웨터 생산에 사용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포틀랜드 보트 팀의 한 친구가 얀센에게 더욱 '탄력성'이 있는 경기용 옷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몸에 딱 맞는 리브 짜기로 만든 얀센의 신축적인 옷은 곧이어 포틀랜드 보트 팀 전원이 입게 되었다. 포틀랜드 사는 회사 이름을 얀센 편물 제작소로 바꾸었고 슬로건을 내건다. "목욕을 수영으로 바꾼 수영복!"
1930년대에 들어서자 수영복은 노출 부분이 많아진다. 여성 수영복은 어깨끈이 가늘고 등이 없는 디자인이 되었다가 곧이어 홀더 넥의 윗부분과 팬티로 나누어진 투피스식 수영복으로 바뀐다. 그 뒤에 등장하는 것이 비키니다. 이 이름 때문에 비키니 패션은 불안정한 시대의 도래와 영원히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것이 된다. 1946년 7월 1일 미국은 비키니 환초로 알려진 태평양의 마샬 제도 해역에서 원폭을 투하했고 평화시의 핵실험을 시작했다. 원폭은 그보다 1년 전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파괴한 것과 똑같은 것으로 전 세계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다. 파리에서는 루이 레아르라는 디자이너가 지극히 작은 면적의 천을 사용한 대담한 투피스 수영복을 발표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수영복에는 아직 이름이 붙지 않았다. 신문은 온통 원폭 투하에 대한 기사로 메꾸어져 있었다. 레아르는 자신이 만든 수영복이 매스컴의 주목을 받기를 원했고 그 디자인의 위력도 폭발적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 사이에 화제의 중심이었던 '비키니'를 그 이름으로 삼았다. 원폭 투하 4일 뒤인 7월 5일, 레아르의 톱 모델인 미슐란 베르나르디는 역사상 처음으로 비키니를 입고 파리의 자동차 도로를 퍼레이드 한다. 1946년은 수영복이 원폭 못지 않게 숱한 논쟁과 관심 그리고 비난을 불러일으킨 해라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