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4. 고대엔 남성들도 화장을 했다.
금지 1호였던 가발
대머리를 숨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장용품이었던 가발. 가발의 역사는 대대적인 유행과 교회에 의한 금지를 되풀이해 왔다. 고대 세계에서 이발사의 지위가 최고였던 곳은 앗시리아였으나, 그보다 약 1500년이나 전에 이집트인은 가발을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서구 사회에서도 독자적으로 가발이 고안되었는데 대머리를 숨기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순전히 정장용품의 하나였다. 많은 이집트의 가발이 오늘날까지 매우 양호한 상태로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깨끗하게 세 갈래로 땋은 가발은 화학적인 분석에 따르면 식물 섬유와 천연 모발로 만들어져 있다. 장식용 가발 중에는 지나치게 큰 것도 있으며 무척 무겁다. 기원전 900년에 이시무케브 여왕이 국가 행사 때 쓴 가발은 너무 무거워서 하인들이 보행을 도와야 할 정도였다. 현재 카이로 박물관에 있는 이 가발은 화학 분석 결과 100퍼센트 갈색의 천연 모발로 만들어졌음이 밝혀졌다. 당시의 다른 가발도 그렇지만 머리 위로 높이 솟구치는 디자인은 왁스를 발라 형태를 보존했다. 금발 가발이 기원전 1세기의 로마에서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리스의 고급 창녀들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표백하거나 머리카락 가루를 붙이는 일을 좋아했으나 로마 여성들은 게르만족 포로의 머리에서 잘라낸 깨끗한 아마색 머리카락을 좋아했다. 게르만족 머리카락으로 여러 가지 디자인의 금발 가발이 만들어진 것이다.
1세기의 로마 시인인 오비디우스는 "마음대로 자를 수 있는 게르만족의 머리카락이 풍족할 만큼 많아서 로마인은 남성이건 여성이건 대머리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고 쓰고 있다. 금발 가발은 결국 로마 창녀들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고 창녀촌에 자주 드나드는 사람들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기도 했다. 방탕한 황제비인 메살리나는 로마에서 악명 높은 '매춘굴 순례'를 할 때 '노란 가발'을 썼다. 가장 미움받은 로마 황제인 칼리굴라는 밤마다 쾌락을 좇아 거리를 어슬렁거렸는데 그도 역시 똑같은 가발을 쓰고 있었다. 금발 가발은 현재 창녀들의 하얀 부츠와 미니 스커트처럼, 척 보면 신분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기독교 교회는 어떤 목적으로든 가발을 일절 금지하려고 계속해서 시도를 했다. 1세기 때의 성직자들은 가발 착용자는 기독교의 축복을 받을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2세기의 그리스 신학자인 테르툴리아누스는 "가발이란 모두 엄청난 속임수이며 악마의 발명품이다"라고 설교했다. 이어서 3세기에는 성직자인 키프리아누스가 "여러분이 이교도에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하며 가발 착용자들을 심하게 규탄했고 전체 가발 또는 부분 가발을 쓴 기독교도의 예배 참배를 금지했다. 가발에 대한 심한 비난은 692년에 절정을 이루었다. 이 해에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가발 착용을 그만두지 않는 기독교도를 파문했다. 국왕의 성직자 임명권을 둘러싸고 교회와 정면으로 대립하여 결국은 파문 당한 헨리 4세조차 교회가 추천한 짧은 스트레이트로 아무 장식도 없는 헤어 스타일을 따랐고 궁정에서의 장발과 가발을 금지할 정도였다. 1517년의 종교개혁으로 교회는 신도가 줄어든 어려운 상황에 부닥치자 처음으로 가발이나 헤어 스타일에 대한 규제를 완화했다. 1580년까지 가발은 또다시 헤어 패션의 최신 유행이 되어 있었다. 웨이브를 풀고 염색을 한 가발의 부활에 누구보다 공헌한 사람은 엘리자베스 1세였다. 그녀는 빨강이 섞인 오렌지색 가발을 엄청나게 많이 갖고 있었는데, 사용 목적은 주로 심각하게 벗겨지는 이마와 엷어져 가는 머리카락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가발이 아주 당연한 것이 되자 가발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스코틀랜드 여왕인 메어리는 다갈색 가발을 쓰고 있었으나 그녀와 가까웠던 사람조차도 그녀의 목이 단두대에서 날아갈 때까지 그 사실을 몰랐다. 가발의 인기가 최고였던 17세기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는 40명의 상근 가발 제작자가 입주하여 고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교회가 가발 반대를 들고 일어섰다. 하지만 이번에는 많은 사제들이 당시에 유행한 긴 웨이브의 가발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의 위계질서가 내부로부터 깨져 버렸다. 17세기의 문헌에 따르면 가발이 없는 사제가, 미사를 보러 가거나 신의 축복을 기원하러 가는 하급 성직자의 가발을 빼앗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샹롱 출신의 프랑스 성직자인 장 바프티스트 티에르는 가발의 해악, 가발 착용자를 찾아내는 방법, 살짝 다가가서 가발을 빼앗는 방법에 대한 책을 썼다. 교회는 결국 절충안으로 이 논쟁에 결말을 냈고 평신도는 대머리이거나 몸이 약한 고령자이면 가발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단지 교회 안에서는 금지되었다. 여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18세기의 런던에서는 법정 변호사의 매우 값비싼 가발이 자주 도둑맞았다. 가발 도둑은 바구니에 작은 소년을 담아서 어깨에 짊어지고 사람들이 많은 길에서 가발을 훔쳤다. 바구니에서 재빨리 손을 내밀어 지나가는 신사의 가발을 실례하는 것이 소년의 역할이었다. 가발을 도둑맞은 신사는 푸르뎅뎅하게 깎은 까까머리처럼 보기 흉한 자신의 머리 모습 때문에 사람들 속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일을 대부분 포기했다. 법정 변호사들에게 가발은 법정에서 정식 의상의 일부였는데, 20세기인 지금까지 착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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