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3. 끔찍하고 잔인했던 어린이들 이야기
드라큘라의 모델은?
19세기의 아일랜드 작가 브람 스토커가 뜻하지 않게 자신의 소설 "드라큘라"의 소재를 찾아낸 것은 대영박물관에서 연구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곳에서 스토커는 동유럽의 전승 민화 원고를 발견했다. 15세기 왈라키아 공국의 전투적인 군주 부라도 공에 대해 쓴 민화였다. 루마니아의 전설에 따르면 이 가학적인 군주는 사람을 꼬챙이에 끼워서 문 밖에 늘어 세워 놓고 신음소리를 들으면서 밥을 먹고, 식사의 한 코스에 희생자의 피를 흘려넣었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초자연적인 힘이 몸에 생긴다고 믿었다. 부라도의 범죄는 엄청난 것이었다. 새빨갛게 구운 쇠꼬챙이에 적이 된 친구나 자기에게 부정을 저지른 여자들을 끼워 놓고 살가죽을 벗겨냈다. 또 자기 자신을 감금하고 쥐나 새들을 잔인하게 괴롭히며 즐겼다. 산 위에 있는 부라도의 별장은 드라큘라 성이라고 불렸다. 스토커의 소설 제목은 여기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스토커는 드라큘러의 모델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소설의 무대에 대한 힌트는 친구인 부다페스트 대학의 교수에게서 얻었다. 그가 스토커에게 트란실바니아의 흡혈귀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다. 스토커는 트란실바니아로 찾아가서 어둡고 무거운 공기가 잠겨 있는 산들, 새벽녘의 안개,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한 성에 금세 매료되고 말았다. "드라큘라"는 1897년 다갈색 표지로 출판되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 소설 덕분에 괴기 공포 소설의 인기가 부활하여, 오늘날의 책이나 영화에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런데 괴기 소설의 대표격인 "드라큘라"보다 먼저 세상에 나온 소설이 있었다. 메어리 셸리가 쓴 괴기 소설 "프랑켄슈타인 또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는 1816년 6월 스위스의 제네바 근교에서 며칠 밤에 걸쳐 열린 '이야기를 만드는 모임'에서 생겨났다. 19세기의 메어리의 남편인 24세의 퍼시 비슈 셸리, 18세의 시누이 클레어 클레어몬트(애인인 바이런 경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데리고 있었다), 28세의 바이런 그리고 그의 주치의인 23세의 존 폴리드리였다. 비가 계속 내리던 일요일에 바이런이 유령 이야기를 창작해서 즐기자고 제안했다. 어느 날 밤 메어리는 난로 옆에서 셸리와 바이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영감이 번뜩인 것은 그때였다. 그들은 사람의 생명의 근원은 무엇인가, 생명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뜨겁게 의견을 주고받고 있었다. 당시의 과학 연구의 중심이 전류였기 때문에 이 두 시인은 그들이 말하는 '생명의 열기'를 불어넣는 것으로 전기를 통해 시체를 되살려낼 수 있는지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늦게야 두 사람의 토론은 끝났고 메어리 셸리는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공상에 잠겨서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1831년판의 "프랑켄슈타인" 속에서 메어리 셸리는 그때 번뜩였던 영감을 선명하게 상기하고 있다. "나는 보았다. 신경이 예민하게 모아졌고 감은 눈 속으로 그 광경이 뚜렷이 떠올랐다. 사악한 작업에 전념하는 창백한 얼굴의 연구자가 자신이 만들어낸 것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광경이... 소름이 오싹 끼치는 남자의 시체가 길게 누워 있고, 강력한 기계 장치의 힘으로 무엇인가 천천히 생명의 조짐을 보이고, 그 생명체가 조금씩 움직이는 것을, 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섬광처럼, 그리고 선명하게 그 아이디어는 나의 뇌리에 번뜩였다... 이튿날 아침, 나는 멋진 이야기를 생각해 냈다고 모두에게 알렸다. 그날 우선 '11월의 어느 음울한 밤의 일이었다'고 쓰기 시작했고, 그 다음은 비몽사몽간 꿈에서 본 을씨년스러운 공포 이야기를 계속 써나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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