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2. 나폴레옹은 검은 고양이를 싫어했다.
설날은 1월 1일이 아니다
설날은 명절 중에서 가장 오래 전부터, 그리고 또 가장 널리 찾아볼 수 있는 명절이다. 그 시작은 달력이 생기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달력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설날이 있었다는 것이 이상하지만,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보라. 기록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 된 새해 축하 행사는, 오늘날 이라크의 아르히라 도시에 가까이 있던 고대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에서 있었다. 당시 새해라는 의미는 농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봄에 씨앗을 뿌리고 나서 수확할 때까지 일년이라는 기간이 걸렸는데, 바빌로니아에서는 봄이 시작되는 3월, 그러니까 씨 뿌리는 계절을 한 해의 시작으로 여기고 새해를 경축하였다. 그 축제는 열하루 동안 계속되었으며, 오늘날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성대했던 것 같다. 첫째 날은 해뜨기 두 시간 전에 일어나서 성스러운 유프라테스 강물로 몸을 깨끗이 씻고 나서, 고대 바빌로니아의 주신이고 농업 신이기도 한 마르둑에게 다음해의 풍작을 기원하고 신성한 노래를 바쳤다. 그리고 작은 양의 머리를 잘라내고 거기서 나오는 피를 신전의 벽에 발라 그 성스러운 건물, 나아가서는 이듬해의 농작물을 온갖 병충해로부터 지켰다. 이 의식은 '쿠풀' 이라고 불렸으며 그 당시 헤브루인들 사이에서도 이와 비슷한 의식이 유태교의 '속죄의 날'에 행해졌다고 한다. 축연에는 많은 음식과 술이 나왔으나 이것은 사람들이 즐기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마르둑에게 지난해 수확의 풍요함을 보여주고 감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엿샛날에는 가면을 쓴 배우의 무언극이 열렸는데 이는 풍작의 여신에게 바쳐졌다. 그 뒤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개성을 살린 옷을 입고 화려한 춤을 추는 웅장한 퍼레이드가 신전을 출발해서, 종점인 '뉴이어 하우스' 라고 불리는 특별한 건물로 향하여 축하행사를 벌였다. 바빌론 시 교외의 뉴 이어 하우스 유적은 고고학자에 의해서 발굴되었다.
이렇게 본래 봄의 씨 뿌리는 시기에 행해지던 새해 축하 행사가 어떻게 해서 한겨울로 옮겨졌을까. 이야기는 2,000년 전의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천문학적으로나 농업적인 견지에서 말해도 한겨울인 1월을 농경의 주기나 한 해의 시작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게다가 각각 계절의 시작이라고 하는 춘분, 추분, 동지, 하지 때처럼 태양이 천구상의 기준점에 있는 것도 아니다. 새해의 시작을 굳이 1월로 한 것은 로마의 원로원이었다. 로마 시대에도 처음에는 봄의 시작인 3월 25일을 새해가 시작되는 날로 경축하였다. 그런데 대대로 황제나 정치가들이 자신의 임기를 조금이라도 연장시키려고 한 달의 길이와 일년의 길이를 제멋대로 주물러댔기 때문에 천문학 견지에서 본 달력은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달력이 너무나 형편없이 되자 기원전 153년, 로마 원로원은 잘못된 달력을 바로잡고 새해를 1월 1일로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 뒤에도 권력자들의 달력 고치기는 계속되어 달력은 일정하지 못했다. 기원전 46년에 줄리어스 시저는 다시 잘못된 달력을 바로잡고 1월 1일을 새해로 했으나, 그때 잘못을 시정하기 위해서 그 해를 445일로 정해야만 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혼란의 해' 이다. 시저가 바로잡은 새로운 달력은 그 이름을 따서 율리우스력이라고 불렀다.
4세기 때 로마의 국교가 기독교로 변했는데도 황제들은 계속해서 새해를 경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초기 카톨릭 교회는 이교의 온갖 제전을 폐지하기 위해서 이들 제전에 기독교도의 참가를 금지시켰다. 이윽고 신자를 늘리고 그 영향력을 강화한 기독교 교회는 이미 사람들 사이에 정착되어 있는 여러 가지 이교의 제전을 교묘하게 기독교 의식으로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교회가 새해 축하 행사에 대신하는 것으로 준비한 것은 기독교의 할례였다. 오늘날에도 카톨릭, 루터 교회, 동방정교회의 신자들은 1월 1일을 기독교의 할례제로서 경축하고 있다. 중세에 들어와서도 교회는 이 이교의 행사를 계속 적대시했기 때문에 기독교가 지배적이었던 도시나 나라에서는 새해 축하 행사는 한동안 전혀 행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새해를 경축하게 되었을 때, 새해 첫날을 언제로 하느냐는 문제가 생겼다. 11세기에서부터 13세기까지 영국에서는 새해를 3월 25일, 프랑스에서는 이스터의 날로 하고, 이탈리아에서는 처음에는 크리스마스로 했다가 나중에는 12월 15일로 바꿨다. 이 무렵 유럽에서 1월 1일을 설날로 삼았던 것은 이베리아 반도뿐이었다.
오늘날과 같이 설날이 1월 1일로 정해진 것은 사실은 아직 400년밖에 되지 않았다. 옛날부터 섣달 그믐날 밤은 일년 중에서 가장 시끄러운 밤이다. 옛날 유럽의 농민들은 섣달 그믐날 밤에 요란스럽게 풀피리를 불고 큰 북을 두드리며 곡물의 해충신을 내쫓았다. 중국에서는 이날 밤, 빛의 힘, '양' 과 어둠의 힘 '음' 이 만난다고 믿었으며, 사람들은 모여서 징을 두드리고 폭죽을 터뜨리는 관습이 있었다. 미국에서는 섣달 그믐날 밤을 경축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로, 오늘날의 뉴욕 근처를 중심으로 뉴암스테르담이라는 식민 도시를 건설한 네덜란드인들이다. 본래 그들에게 섣달 그믐날 밤에 떠들고 노는 것을 가르친 것은 본시 그곳에 살고 있던 인디언들이었다. 사람들이 신세계로 찾아오기 훨씬 전부터 이로쿼이 인디언(뉴욕 주에 살던 인디언)들은 이듬해 옥수수가 잘 되기를 기원하며 섣달 그믐날 밤에 의식을 지내는 관습이 있었다. 그 해에 남은 옥수수와 그 밖의 곡물, 헌옷이나 나무로 만든 가재 도구 등을 들고 다 같이 모여서 신년과 새로운 생활의 시작을 기원하며 그것들을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속에 던져 불태운다. 학자가 이러쿵저러쿵 추측할 것도 없이 새해의 시작을 축하하는 참으로 명쾌한 의식이었다.
인류학자 제임스 프레이저는 자신이 쓴 "황금의 가지" 라는 책에서, 이로쿼이 인디언의 섣달 그믐날의 관습을 또 한가지 소개하고 있다. "남자 여자 모두 가지각색으로 변장하고, 부락의 판잣집에서 판잣집으로, 주위에 있는 것을 닥치는 대로 부수거나 내던지면서 걸어간다. 인디언들은 섣달 그믐날 밤에는 정신이 나간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것을 면죄부로 자기가 하고 싶은 짓을 마음놓고 한다." 인디언들의 즐거워 보이는 난리법석을 직접 눈으로 보고 이주민들도 질세라 법석을 떨기 시작했다. 다만 식량과 옷, 가구 등이 부족했던 탓으로 모닥불 속에 던져 넣을 수는 없었다.
1773년 뉴욕에서는 섣달 그믐날 너무나도 시끄러워서 두 달 뒤에 새해 축하용 폭죽이나 손으로 만든 꽃불, 공포를 사용하는 것이 법률로 금지될 정도였다. 이렇게 설날이 왔다갔다 한 데서 파생한 것이 바로 만우절이다. 16세기 초, 프랑스에서도 새해는 봄이 시작되는 3월 25일이었다. 그런데 1564년에 그레고리력이 도입되자 샤를 9세는 새해를 1월 1일로 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렇게 바뀌는 것을 싫어하거나 또는 깜빡 잊어버린 채 여전히 파티가 끝나는 날인 4월 1일에 선물을 교환하거나 파티를 여는 사람들이 많았다.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에게 장난 삼아서 선물을 보내거나, 있지도 않은 파티에 초대하거나 하면서 그들을 놀려먹었다. 그리고 이처럼 놀려먹는 대상이 된 사람들은 '4월 물고기' 라고 불렀다(4월에는 태양이 물고기자리의 구역을 떠나버리니까). 사실 그 유명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도 두 번째 아내 마리아 루이자와 결혼한 것이 1810년 4월 1일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그들을 '4월의 물고기' 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그 후 몇 년이 지나자 그레고리력에 따른 새해에 완전히 익숙해지고 나서도 프랑스인들은 이 기묘한 만우절의 습관을 갖고 있었다. 이것이 영국에 전해지게 된 것은 200년 후. 미국에 전해지는 것은 그보다 더 훗날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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