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2. 나폴레옹은 검은 고양이를 싫어했다.
성문란을 막기 위해 생긴 날?
연인들의 축제일 발렌타인. 그러나 이것은 사실 카톨릭 교회가 당시 성대하게 이교의 제전을 말살하려는 의도로 만든 것이다. 기원전 4세기부터 로마에는 해마다 루페르크스라고 하는 신의 제전이 있었는데, 그 제전에서 젊은 남자들은 연인이 될 사람을 찾기 위해 제비를 뽑는 관습이 있었다. 십대의 처녀들이 자신의 이름을 써서 상자 속에 넣으면 그것을 남자들이 뽑는다. 이 제비뽑기로 생긴 커플은 다음해 제비뽑기를 할 때까지 연인(종종 성적인 의미에서도)이 된다. 초기 교회의 신부들은 800년 동안이나 계속된 이 음란한 행사를 그만두게 하려고 루페르크스를 대신할 연인들의 수호성인을 찾고 있었다. 그리하여 200년이나 거슬러 올라가 연인들을 위해서 순교한 발렌타인이라는 신부를 생각해냈다. 발렌타인이 순교한 것은 270년, 폭군 황제 크로디아스 2세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었다. 본시 국민의 원성 따위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던 황제 크로디아스는 결혼한 병사는 가족에게 신경을 써서 사기가 떨어진다고 하는 이유로 병사들에게 결혼 금지령을 내렸다. 그런데도 인테라무나에서 신부로 있던 발렌타인은 결혼을 간절히 원하는 젊은 연인들을 몰래 자신의 성당으로 불러서 결혼식을 올려 주었다. 크로디아스 황제는 이 '연인들의 친구'의 존재를 알게 되자 화를 내고 체포해서 연행해 오라고 명했다. 궁정으로 끌려온 젊은 신부는 품위와 신념으로 가닥 차 있었다. 그 모습에 마음이 움직인 황제는 로마교로 개종을 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발렌타인은 그 제의를 거부하면서 거꾸로 황제에게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권했다. 270년 2월 24일, 마침내 발렌타인은 몽둥이와 돌로 얻어맞고 참수를 당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옥사에서 처형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간수의 눈먼 딸 아스테리우스와 사랑에 빠져, 그 깊은 사랑의 힘으로 기적을 일으켜서 처녀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고 한다. 발렌타인이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의 끝을 장식한 '당신의 발렌타인으로부터'라는 문구는 발렌타인이 죽고 나서 한참 뒤에 '당신의 연인으로부터'라는 의미의 발렌타인 데이의 상투적인 문구가 되었다. 교회 쪽에서 보면 인기 있는 루페르크스를 대신할 성자로서 발렌타인은 정말로 안성맞춤이었다. 기원전 496년, 마침내 엄격한 교황 게라시우스는 2월 15일에 루페르크스 제전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로마 사람들이 도박을 좋아하는 것을 잘 알고 있던 교황은 제비뽑기 행사만은 남겨 놓았다. 다만 상자 안에는 연인이 될 처녀의 이름이 아니라 기독교의 여러 성인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남자든 여자든 제비를 뽑은 사람은 일 년 동안 제비뽑기로 나온 성인의 덕행을 본받아서 실천하며 지내라는 것이었다. 이전의 제비뽑기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랐다. 아가씨의 이름을 기대하고 제비를 뽑은 로마의 젊은이들은 그곳에 성자의 이름이 쓰여 있는 것을 보고 정말로 크게 낙담했을 것이다. 이 새로운 행사를 주관하는 것이 연인들의 수호성인 발렌타인이었다. 이윽고 로마인들은 본의는 아니었지만 이교도의 제전 루페르크스제를 단념하고, 교회의 성스러운 날로 대신하게 된 것이다.
본래 2월 15일인 루페르크스 제전은 로마의 젊은이에게 파트너가 될 젊은 여성을 찾거나 유혹할 수 있는 둘도 없는 좋은 기호였다. 그 루페르크스 제전의 제비뽑기가 사라지고 아무도 그것을 부활시키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그런 일은 커다란 죄에 해당하니까)로마의 젊은이들은 전날인 2월 14일, 좋아하는 처녀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쓴 카드를 건네주고 유혹할 것을 생각해 냈다. 그리고 약삭빠르게 그 카드에 성 발렌타인의 이름을 쓰는 것을 잊지 않았다. 기독교가 널리 퍼져 나가면서 발렌타인 카드도 보급되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 된 발렌타인 카드는 1415년, 런던 탑에 유폐되어 있던 오를레앙 공 샤를이 아내에게 보낸 것으로서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6세기에 제네바의 신부 성 프랑수아 드 사르는 발렌타인 카드를 보내는 관습을 폐지하고 '성인의 이름이 새겨진 제비뽑기'를 부활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독교도가 길을 잃고 있어 길 안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제비뽑기는 교황 게라시우스의 제비뽑기보다도 훨씬 평판이 나빴고 오래 가지 못했다. 발렌타인 카드는 없어지기는커녕 점점 더 성행하였고 디자인도 화려해져 갔다. 그 무렵 발렌타인 카드의 그림으로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은, 사랑의 묘약에 적신 화살을 활 시위에 건 발가벗은 큐피드의 그림이었다. 로마 신화에서 큐피드는 미와 사랑의 여신 비너스의 아들로 이 사랑의 축일을 상징하는 데는 딱 들어맞았다.
17세기가 되자 손으로 만든 카드는 점점 더 커지고 복잡해졌고, 한편 기성품 카드는 작으면서 값이 비쌌다. 1797년에는 영국의 어떤 출판사가 스스로 멋진 문구를 생각해낼 수 없는 청년들을 위해서 낭만적인 애정 표현을 소개한 "젊은이를 위한 발렌타인 카드 쓰는 법"이라는 책을 냈다. 인쇄업자 중 몇몇 사람들은 이미 그림과 글귀가 들어간 카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19세기에 들어서 우편요금이 내리게 되자 손으로 건네주는 것 대신에 카드를 우송하는 간단하고 편리한 방법이 유행했다. 그런데 우편으로 보내면 익명으로도 카드를 보낼 수가 있었기 때문에 점잔을 빼는 빅토리아 시대였는데도 아슬아슬한 문구가 쓰여진 익명의 발렌타인 카드가 크게 유행했다. 카드에 쓰인 외설스러운 말은 점점 더 정도를 넘어서서 끝내는 몇몇 나라에서 발렌타인 카드의 교환을 금지할 정도였다. 19세기 말경, 시카고 우체국은 취급하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하면서 약 2만 통의 카드 우송을 거부했다. 미국에서 최초로 발렌타인 카드를 인쇄한 것은 인쇄업자이자 화가였던 에스터 하우랜드였다. 손으로 그린 카드가 35달러에 팔리던 1870년대 무렵에 아름다운 레이스 무늬가 인쇄된 하우랜드의 카드는 겨우 5~10달러만 주면 살 수 있었다. 그 뒤부터 발렌타인 카드 사업은 더욱 번창하여 오늘날 미국인이 보내는 발렌타인 데이 카드는 크리스마스 카드 다음으로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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