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1. 약탈혼이 정당하던 시절
신부를 약탈하던 풍습
여자와 남자가 사랑으로 결합하는 결혼. 하지만 결혼에 사랑이나 합의가 필요 없었던 시대도 있었다. 2세기의 북유럽, 게르만인의 고트족 남자는 자기 부락에서 결혼할 여자가 없으면 근처 마을로 가서 신부를 약탈해 왔다. 예비 신랑은 친구의 도움을 받아, 혼자서 마을을 돌아다니는 젊은 여자를 찾아내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약탈했던 것이다. 신랑 들러리의 관습은 이 무장한 2인조에 의한 약탈혼의 흔적이다. 친구를 도와서 신부를 약탈하는 중요한 임무는 들러리가 아니면 안 될 일이었다. 이 약탈혼은 문자 그대로 신부를 약탈해 오는 것이기 때문에, 신랑이 신부를 안고 신방에 들어가는 풍습도 역시 그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서기 200년경의 신랑 들러리가 휴대하고 있던 것은 결혼 반지만이 아니었다. 신부의 가족이 그녀를 되찾으려고 언제 들이 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무기를 휴대하고 있었다. 들러리는 신랑 옆에 서서 결혼식이 올려지는 동안 내내 무장한 채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신랑 들러리는 신방에까지 가서 감시를 서는 일도 있었다. 신부의 가족은 신부를 되찾아 가려고 결혼식 장소에 들이닥쳤다. 그 증거로 고대의 많은 민족(훈족, 고트족, 서고트족, 반달족 등)의 교회 제단 밑에는 곤봉이나 칼, 창 따위의 무기가 숨겨져 있었다.
신부가 신랑의 왼쪽에 서야 하는 전통도 단순한 관례가 아니다. 로마인이 말하는 '북유럽의 야만인'은 신부 가족의 갑작스런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 왼손으로는 약탈해 온 신부를 안아야 했고 오른손은 무기를 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결혼 반지도 일설에 의하면 약탈된 신부가 남자의 집에 매어져 있던 때의 족쇄의 자취라고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반지 교환 관습은 남녀평등의 증거라고 할 수 있을까. 또 다른 설은 실제로 결혼식에 반지가 나타나기 시작한 시대에 주목하고 있다. 처음으로 결혼 반지가 나타난 것은 기원전 2800년경의 이집트 제3왕조이다. 당시 이집트에서는 시작도 끝도 없는 고리는 영원을 나타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결혼의 징표로서 반지를 사용했던 것이라고 한다. 부유한 이집트인이라든가 후기 로마인이 귀중하게 생각한 것은 금반지였다. 폼페이의 유적에서는 2000년 전의 반지가 많이 출토되고 있다. 그 중에는 훨씬 뒤 유럽이나 1960~70년대 히피 시대의 미국에서 유행한 독특한 디자인의 반지도 있었는데 그것은 오늘날 '우정의 반지'라고 불리는 황금 결혼 반지로 두 손이 악수를 하고 있는 그림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가난한 로마 청년은 결혼으로 인해 무일푼이 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초기 기독교 신학자인 테르툴리아누스가 2세기에 쓴 책에는, '대부분의 여성은 자기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결혼 반지 이외에 금 따위는 본 적도 없다.'는 글이 있다. 평범함 주부의 경우, 밖에서는 자랑스럽게 금으로 된 결혼 반지를 끼고 있어도 집에 돌아오면 그것을 벗고 대신 무쇠 반지를 꼈다는 것이다. 고대의 반지 디자인에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 많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로마 시대의 반지에는 작은 열쇠가 붙어 있는데, 남편의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라는 등 로맨틱한 이유에서 붙여진 것은 아니다. 이것은 로마법에 따른 혼인 계약의 기본이 되는 사고방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즉 아내는 결혼과 함께 남편 재산의 절반에 대해 권리를 가지며 밀이건 옷감이건 남편이 갖고 있는 재산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내가 갖는 이러한 권리는 한 번 상실되어 다시 나타날 때까지 무려 2000년이 걸렸다. 결혼 반지를 왼손 약지에 끼는 서양의 관습은 어디서 유래하는 걸까. 고대 헤브루인은 결혼 반지를 검지에 끼었고, 인도인은 엄지에 끼는 것이 보통이었다. 왼손 약지에 끼는 관습은 그리스에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하지만 맨 처음 유래는 그리스인의 잘못된 인체해부학의 지식에 있었다. 기원전 3세기 때 그리스 의사는 '사랑의 혈관'이라는 혈관이 약지에서부터 곧바로 심장까지 흐르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마음으로부터 사랑을 상징하는 반지를 약지에 끼게 된 것이다. 그리스인의 인체해부도를 도용한 로마인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약지에 결혼 반지를 끼었다. 만에 하나라도 잘못 끼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결혼 반지를 끼는 손가락은 '제일 작은 손가락의 옆 손가락'이라고까지 씌어져 있다. 또한 의사들도 약지로 약을 조제하였는데, 약지의 혈관이 심장에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조합한 약에 어떤 독성이 있게 도면 환자에게 주기 전에 의사의 심장에서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기독교인들은 결혼반지는 왼손의 약지에 끼었지만 사랑의 혈관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랑은 신부의 집게손가락에 반지를 살짝 끼우고, '인자하신 신과'라고 말한 다음 이번에는 가운뎃손가락에 끼우고,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이라는 기도를 한 다음 약지에 끼웠다. 이것을 삼위일체 방식이라고 한다. 오늘날까지 교회에 그 모습이 남아 있는 결혼 공고는 프랑크왕, 카를 대제의 칙령으로 정착되었다. 카를 대제는 서기 800년 크리스마스에 황제의 왕관을 받아 로마 황제가 되고 신성로마제국의 기초를 쌓았다. 광대한 지역을 다스리게 된 카를 대제에게는 결혼 공고를 철저하게 해야 할 의학상의 이유가 있었다. 당시 빈부를 불문하고 혼외정사가 다반사였던 이 나라에서는 부모가 분명하지 않은 아이들이 상당수였고 그 결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복 형제 자매와 결혼하게 되는 일이 많이 일어났다. 근친 결혼과 그에 따른 기형아 출산이 점점 많아지자 위태롭게 생각한 대제는 드디어 결혼 공고를 의무화하는 칙령을 내렸다. 그에 따르면 결혼하고자 하는 남녀는 적어도 7일 전에 그 사실을 공고해 자기들이 혈연관계에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해야만 했다. 즉 두 사람이 실은 형제라든가 이복형제라는 것을 알고 있는 자는 이 기간 중에 신고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