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속 신선 이야기 - 민경환
1. 때아닌 귀신소동
"화장실 좀 같이 가요."
청월 사형이 겁먹은 얼굴로 화장실에 같이 가자고 한다. 오후 수련타임을 끝내고 근사하게 녹차를 우려먹고 있는 운치 있는 이 시간에 냄새나는 화장실에 가려면 말 없이 혼자 갔다오지 뜬금없이 같이 가자는 건 또 뭘까?
"왜요? 뭐 도와드릴 거 있어요?" "아니, 그게 아니고 좀 무서워서 그래요." "무섭긴 뭐가 무서워요? 벌건 대낮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 무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평소 도화제 최고 신기(神氣)라고 불리는 청월이 대낮에 화장실을 같이 가자고 할 때는 무언가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궁금한 마음에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캐물어도 청월은 대답도 하지 않고 화장실로 몸을 돌린다. 지금은 석촌동에 본원이 자리를 잡았고 도장도 전국은 물론 미국에까지 진출해 있지만, 삼성동에 도장이 있을 그 당시엔 지원이라 해봐야 광양과 부산에 고작 두 개였다. 본원도 고작 수련생 열 명이면 꽉차는 수련실에 사범실, 원장실까지 빈틈없이 닥지닥지 붙어 있는 답답한 전세살이였다. 문제의 화장실은 도장 문을 나서면 우측에 붙어 있는 조그마한 공간이었다. 대변기가 설치된 남녀 화장실 중에 남자 쪽은 생계(?)를 위한 세탁기를 설치하느라고 과감히 철거를 하고, 치마 입은 여자가 그려진 여자 화장실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막상 따라가긴 했지만 이상한 소음(?)과 냄새를 마주하며 그것도 여자 화장실 표시를 앞에 두고 서 있자니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청월이 끙끙대며 한마디 던진다.
"뭐 안 보여요?" "아뇨? 별로, 뭔데 그래요?" "아니에요. 내 착각인가 보죠 뭐."
이 사람이 무언가 보기는 본 모양인데, 내 눈엔 보이지 않으니 분명 내 능력부족이 아니면 청월의 허상일 것이다. 하긴, 이제야 겨우 기맛을 알아 대맥운기에 들어가 있던 내가 사람 마음까지 읽어 내는 선인법 수련을 하는 청월 사형이 보는 대로 따라 보려고 했던 것 자체가 주제넘은 짓이었다. 일이 다 끝났는지 우루루 물소리가 들리고 도장으로 들어가기 위해 먼저 화장실을 나왔을 때다.
"어어?"
도장 현관 바로 앞에서 무언가 허연 물체가 천장 쪽으로 휭하니 올라가 사라지는 것이 또렷하게 내 눈에 보였다.
"청월 사형, 방금 못 봤어요?" "뭐요?" "금방 허연 소복 같은 게 현관에서 천장으로 올라갔는데?" "그래요? 내가 잘못 본 게 아니구먼. 아까 차를 마시는데 소복 입은 여자가 자꾸 나를 쳐다보길래 저게 허상인가 아닌가 헷갈렸는데 화장실까지 따라와서 멍하니 쳐다보더라구요. 기운으로 쳐도 도망도 안 가고... 보통 귀신들은 기운으로 치면 무서워서 도망가는데 말이에요. 그 참, 희한한 일이네..."
참으로 딱할 노릇이다. 바지 내리고 큰일을 보고 있는데 벌건 대낮에 그것도 허연 소복 입은 여인이 멀뚱멀뚱 그 장면을 쳐다보고 있었으니 얼마나 환장할 노릇이었겠는가? 사건의 전모를 둘이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다음 타임 수련을 위해 회원들이 하나 둘 자리를 같이 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의 일은 말할 것도 없었다. 도장에 실무진으로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목격된, 그것도 내 눈으로 확인한 귀신 이야기를 오고 가는 회원들마다 반복해서 설명하느라 혀가 다 마비될 지경이었다.
"그래요?" "어머, 어쩜." "그 참 희한한 일이네."
신기해하는 회원들과 이야기가 무르익으면서 이야기는 살에 살이 붙여져서, 결국은 청월의 호흡수련 이전의 귀신 목격담으로까지 흘러갔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영 찜찜했다. 실제로 소주천 정도의 수련이 완성된 사람이 신을 모신 점집에 가면 점이 나오지가 않는다. 점은커녕, 아예 문전박대를 당하기가 일쑤인 것이다. 나중에 설명되겠지만, 나 또한 도를 찾아 젊은 날을 헤매다 끝내 못 찾고 절망한 나머지 차라리 신을 받아 무당이 되어 불쌍한 사람들 대상으로 복이나 지으며 살다가 죽으면 다음 생엔 좋은 인연 만날 수 있겠지... 이런 희망으로 내림굿 날짜까지 받아 놓았던 전력이 있던 터라 귀신들의 습성에 대해서는 나도 거의 반도사 수준이었던 것이다. 하물며 선인법 수련을 하는 사범 앞에, 그거도 도광영력이 항상 서려 있는 도장에 허연 소복 입은 귀신이 출현한다는 것이 어찌 괴이한 일이 아니겠는가? 항상 궁금한 것이 있으면 한당 선생님께 여쭈어 보고 문서로 보관을 하는 버릇이 있는지라 선생님 오시기만을 기다리며 한가롭게 다담을 나누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여전히 부시시한 얼굴로 선생님이 외출에서 돌아 오셨다.
"무슨 재미있는 얘기들을 하고 있지?"
어떻게, 무슨 이유로, 허연 소복의 주인공이 도장을 들락거렸는지 다들 궁금해 반은 미칠 지경인지라 선생님 눈치만 보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고맙게도 선생님께서 먼저 물어주시니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하리. 내가 총대를 메고 사건의 전모를 말씀드렸다.
"선한 영은 도장을 안 무서워하지. 나쁜 영들이나 겁을 먹고 접근을 못 하는 거야. 선한 영이라 할지라도 큰맘을 먹어야 할텐데, 도장까지 왔으면 무슨 사연이 있다는 얘기로군? 한 번 알아 봐야겠네?"
도장 회원들은 알고 있겠지만, 선생님과 마주앉아 도담을 나누는 기회라는 게 그렇게 쉽게 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측면으로 따져보면 도장이 발전되어 커져 버린 지금보다는 조그마했지만, 선생님과 동거동식을 할 수 있었던 삼성동 시절이 그립기만 하다. 도안으로 떡 살펴보시더니(불과 몇 초) 측은한 표정을 지으신다.
"불쌍한 여자구먼. 예전에 도장 뒤쪽에서 사내들한테 집단으로 윤간을 당하고는 충격을 못 잊어 자살을 한 여자야. 자살을 했으니 저승사자가 데리러도 오지 않고 여기저기 헤매 다니다가 도장에서 서기가 뻗쳐 나오니까 저기 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해서 찾아온 거지. 그래서 도계로 불러 올려 원래 수명 중에 남은 기간을 공부하게 하고 다음에 태어날 때는 좋은 인연을 만날 수 있게 해주었다."
모두들 측은지심이 발동되는지 분위기가 무거워진다. 요즘같이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증가하는 때에, 당하고도 말 못하고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여성들의 수는 얼마나 많을 것인가? 게다가 집단 윤간을 당하고 자살이라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소복여인의 과거가 새삼 안타깝기만 하다. 자살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알면 자살할 일도 없을 텐데, 그것을 모르니 현실도피를 위해 소중한 생명까지 포기하게 된다. 아무쪼록 공부를 많이 해서 내생에는 좋은 인연 만나기를 새삼 축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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