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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티우스와 식민주의적 열망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22> 근대 자연법의 형성과 식민주의 ②
3. 그로티우스와 '바다의 자유'
네덜란드 사람인 그로티우스(Hugo Grotius)는 근대 자연법의 창시자이자 국제법의 아버지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1609년에 <자유로운 바다: Mare liberum>라는 글을 통해 바다의 자유를 주장했고 1625년의 <전쟁과 평화의 법>이라는 책을 통해 국제법의 원리를 만들었으며 그것을 자연법 위에 세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사상은 보통 평화롭고 공정한 국제관계의 형성을 염두에 둔 것으로 오해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바다의 자유를 주장한 것은 공정한 국제법을 위해서가 아니다. 17세기 초는 네덜란드가 동인도회사를 만드는 등 아시아 무역을 위해 매우 애쓰던 시기이다. 따라서 이때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내세우며 이 수역의 독점권을 주장하고 있던 포르투갈의 논리를 분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의 노력은 네덜란드의 상업적 나아가 식민주의적 이해관계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는 인간은 신으로부터 이성과 자유의지를 물려받았으므로 기본적으로 이성적인 존재이며 도덕적인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자신들의 편익을 위해 자연법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기독교적인 고려는 상당히 약화되어 있다.
그가 자연법을 구축하기 위해 인간의 사회적 본능으로부터 끌어낸 것은 다섯 개의 기본적인 원리이다. 그것은 1) 다른 사람의 재산에 대한 존중 2) 부당하게 뺏은 재산을 돌려줄 의무 3)잘한 일을 명예롭게 해 주기 4)손해에 대해 배상해줄 의무 5) 자연법을 공격하는 행위에 대한 처벌이다.
이 원리들을 보면 그의 사상에서 재산권이 중심적인 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분명하다. 따라서 그가 '자유로운 바다'에 대한 주장을 기본적으로 재산권 위에 구축한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그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다. 비토리아와 함께 역시 살라만카 학파에 속하는 바스케스(Ferdinando Vasquez)의 강한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글에서 두 사람을 수십 번씩 언급하고 있다.
특히 비토리아의 영향은 절대적이다. 논리의 큰 틀이 같으며 아에네아스를 포함한 고대의 터무니없는 글들에서 자기 논리의 근거를 끌어내는 방식도 똑같다. 다만 두 사람의 논리를 더 정교하게 만들고 그것을 네덜란드의 식민주의적 이익을 위해 재구축했을 뿐이다.
그는 재산을 동산과 부동산으로 구분했는데 동산은 그것을 직접 신체적으로 취함으로써 소유할 수 있다. 몸을 움직여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동산은 그렇게 할 수 없으므로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의 울타리치기가 필요하다. 울타리치기를 통한 점유와 시효(時效)에 의해서만 재산권의 주장이 가능하다. 점유만 해서는 안 되고 상당기간 그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땅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바다는 깊어서 울타리를 칠 수 없다. 당연히 바다를 개인적으로 점유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공유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누구나 바다를 자유롭게 항해하고 다른 나라와 교역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통해 그가 <자유로운 바다>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는 네 가지이다.
1) 동인도에 대한 접근은 모든 나라에게 열려있다.
2) 이교도들은 그들이 단지 이교도라는 이유만으로 공유나 사적인 재산권을 박탈당할 수는 없다.
3) 바다 자체나 항해의 자유는 점령이나 교황의 수여, 시효나 관습 등에 의해 어느 일방의 배타적인 권리가 될 수 없다.
4) 다른 국가와 교역을 하는 권리는 어떤 이유에서건 특정한 한 쪽의 배타적인 권리가 될 수 없다.
이런 이야기는 식민지에 대한 정복자로서의 권리나, 교황의 수여에 의한 권리를 주장하는 포르투갈의 배타적 권리를 부인하는 것이다. 또 신은 자급자족이 가져오는 해로운 결과를 원하지 않으므로 상업을 통한 교환과 그것을 진작시키기 위한 수단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포르투갈이 이런 자연법적 원리를 침해할 때 네덜란드가 포르투갈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일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고 그의 이러한 주장이 일관된 것은 아니다. 나중에 잉글랜드가 네덜란드의 상업적 이익에 도전했을 때에는 이와는 달리 '폐쇄된 바다'를 주장했다. 자격 없는 자들이 제멋대로 무역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의 주장은 객관적인 원리에 의존하기보다는 네덜란드의 이익과 밀착되어 있다.
그로티우스와 식민주의적 열망
그는 또 아메리카에서의 식민지 확보를 위해서도 같은 원리를 내세웠다. 토지는 신이 인간에게 공유로 수여한 것인데 그것을 어떤 사람이 자신의 개인적 소유로 하려면 울타리를 칠 뿐 아니라 그것을 경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땅에 대한 재산권은 직접 경작을 하는 개인에게만 가능했다.
이런 논리로 그는 경작을 하지 않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땅을 침탈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반면 유럽에도 많이 산재하고 있는 빈 땅에 대해서는 그런 주장을 하지 않았다. 유럽의 땅은 모두 누군가의 재산권 하에 있다는 것이다.
또 그는 어떤 땅의 재산권은 그것을 경작하는 개인에게만 속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땅을 직접 경작할 개인들에게 분배될 경우에는 국가가 어떤 토지에 대해 권리를 갖는 것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 주장은 다른 유럽국가가 이미 확보한 식민지를 빼앗기 위한 논리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로티우스의 자연법사상에서 식민주의에 대한 고려는 본질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바다의 자유라는 원리로 인도양이나 신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자유를 주장함으로써 기득권을 가진 다른 나라들의 권리 주장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재산권 이론으로 식민지 토지의 침탈을 정당화한 것이다.
그의 자연법 이론은 이렇게 철저하게 식민주의적 열망에 봉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귀족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네덜란드 공화국의 열렬한 지지자로서 포르투갈이나 잉글랜드와의 교섭에서 네덜란드의 상업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애쓴 외교관으로서의 경력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자연법이나 국제법에 대한 이론적 구성은 그 결과물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주장하는 평등하고 공정한 국제법은 유럽 내에서 네덜란드의 이익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아메리카 원주민을 포함한 비유럽인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매우 제한된 정의를 보여주는 것이다.
푸펜도르프의 자연법
그로티우스의 제자로 자연법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 자무엘 푸펜도르프(Samuel Puffendorf)이다. 그는 독일 태생으로 독일의 룬트 대학 등에서 교수를 하다가 나중에는 스웨덴에서 활동했다. 그가 1672년에 쓴 자연법(De Jure Naturae)은 로크가 '이 종류의 가장 훌륭한 책'이라고 평가한 책이다. 이 책을 통해 푸펜도로프는 로크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자연법을 논할 때 그로티우스나 로크와는 좀 다른 태도를 갖고 있다. 독일이나 스웨덴은 스페인, 네덜란드, 잉글랜드와 달리 당시 식민지 문제에 직접 관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과 달리 이교도와 기독교인들에게 다 같이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자연법을 만들기를 바랐다. 그가 자연법을 재산권이 아니라 도덕적인 맥락에서 검토한 이유이다.
그는 자연상태를 원시 시대에나 있었던 것으로 생각했으므로 아메리카나 다른 식민세계를 원시상태로 보지는 않았다. 또 아메리카 원주민을 원자화한 자연인으로 보지도 않았다. 아메리카인들도 종족이나 국가를 구성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그들도 유럽 국가들의 구성원이나 마찬가지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그는 자연상태를 전쟁상태로 본 토마스 홉스와는 달리 평화상태로 보았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보편적이고 영구적인 자연법에 의해 다른 사람들과 사교를 하며 인간의 본성과 목적에 맞추어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재산권에 있어서도 그는 신이 인간에게 공동으로 이 세계를 주었다고 믿었으나 그것을 소유권이라는 적극적인 형태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것을 소극적으로 해석했다. 따라서 그것은 모든 사람이 공동으로 소유하는 것도, 또 어느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신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존 로크가 나중에 개인적인 점유를 뜻하는 전유(專有, appropriation)를 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과 달리, 사용(使用)이 전유에 앞선다고 주장한다. 사용권이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라는 것이다.
또 그는 아메리카에서의 스페인인의 여행과 무역의 자유를 정당화하는 비토리아의 논리를 공격하는 가운데 식민주의의 침략성을 고발하고 있다. 유럽인이 원주민의 땅에서 여행할 자유를 갖는 것은 단지 폭풍에 밀려 왔을 때나 순수하게 손님으로 해안에 도착했을 때뿐이라는 것이다. 이 경우는 환대를 받아야 하나 물론 필요한 단기간만 머물러야 했다. 장기간 머물 때는 그들의 동기를 살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교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유럽인들은 아메리카에서 원하는 누구나와, 또 무엇이든지 교역할 자유를 주장하나 그때도 동기를 살필 필요가 있다. 그들이 정의와 관용을 가지고 그렇게 하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당시의 다른 사람들과 완전히 동떨어진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그도 국가로부터 특허권을 수여받은 동인도회사 같은 특허회사들의 교역 독점권을 자연법에 속하는 것으로 믿었다. 또 필요한 경우 식민지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유럽의 굶주리고 쓸모없고 반역적인 사람들을 추방하기 위해서는 식민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생각이 그로티우스나 로크와 매우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가 식민주의적인 고려를 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대에 로크와 같은 사람의 영향력이 훨씬 더 컸으므로 그의 상대적으로 온건하고 합리적인 주장은 잊혀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