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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자연법의 형성과 식민주의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21>
1. 근대 자연법, 어떻게 볼 것인가
근대 자연법의 형성
고대 그리스 철학과 로마의 스토아학파에서 발원한 자연법은 중세 시대에는 신학적 원리에 의해 지배되었다. 중세 사람들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 자연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모든 법의 원천이 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중세적 자연법은 16, 17세기의 변화된 상황에 맞추어 스스로를 변화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16세기의 종교개혁과 그 후 1세기 넘어 계속된 종교전쟁, 또 유럽인이 아메리카나 아시아로 진출하며 부딪치게 된 많은 문제들이 자연법의 변화를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7세기의 자연법 학자들은 신적인 원리보다 스토아 학파가 설파하고 있는 인간 이성의 자율성을 강조했다. 인간 이성이 자율적이고 독립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원리가 근대 자연법 사상의 기초가 되었다.
그들은 자연법을 성경에서 나타나는 신의 절대적인 의지와 같은 초월적인 원리가 아니라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인간의 '이성'에 근거시켰다. 자연법의 존재를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꼭 필요한 것으로 보이는 사회성이나 편익과 관련시켜 설명한 것이다. 그런 것을 위해 자연법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비토리아에서 불완전한 형태로 시작되어 그로티우스, 푸펜도르프, 로크에게로 이어지고 나중에 계몽사상가들에 의해 받아들여지며 17, 18세기 유럽 사회, 정치사상의 근본 모티브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나타나는 국제법, 사유재산권, 자연상태, 자연권, 사회계약론, 인민주권설 등의 이론들은 모두 자연법에서 비롯되었다. 자연법이 계몽사상의 핵심일 뿐 아니라 근대 서양 사상의 본질적인 부분이 된 것이다.
그것은 또 당대 미국의 독립전쟁이나 프랑스 혁명에도 큰 영향을 미침으로써 근대사의 진행과정에도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자연법의 바른 이해는 유럽 근대사상의 성격을 바로 이해하기 위한 선결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법의 이해와 유럽중심주의
서양학자들은 지금까지 자연법을 대체로 인간의 보편적인 이성에 근거한 합리적인 사상체계로 이해해 왔다. 근대인들을 맹목적이고 기독교적인 중세적 도덕률에서 해방시켜 이성에 근거한 합리적인 도덕철학 위에 서게 했다고 믿은 것이다. 따라서 그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이고 찬미하는 태도를 보인다.
물론 서양 사람들의 이런 태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이 자연법을 유럽의 사상사적 전통과 근대 초 유럽 내부의 정치, 사회, 경제와의 관련에만 중점을 두고 접근하기 때문이다. 즉 유럽적 관련에서만 자연법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자연법은 유럽인들의 탁월한 문화적 성취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근대 자연법의 형성과정에는 그렇게 볼 수 없는 다른 중요한 측면이 있다. 자연법의 발전이 근대 초 유럽인들의 식민주의적 열망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 자연법의 발전이 애초에 식민주의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이론적 작업으로부터 많은 자극을 받은 것이다.
그럼에도 서양학자들은 이런 면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것이 자연법 형성에서 본질적인 부분이 아니고 단지 사소하고 부수적인 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근대 자연법에 미친 식민주의의 막중한 영향을 생각한다면 이런 태도는 상당 부분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서양학자들의 유럽중심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식민주의와의 관련성을 차단함으로써 그들이 찬양하는 자연법의 보편적인 의미를 훼손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자연법을 바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장에서는 근대 자연법의 형성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비토리아, 그로티우스, 푸펜도르프, 로크의 자연법사상과 식민주의와의 관련을 검토함으로써 근대 자연법에 대한 기존의 해석을 넘어서서 보다 객관적인 이해에 접근하려 한다.
2.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과 비토리아
아메리카 정복의 정당성 문제
15세기 말에 시작된 스페인인의 아메리카 정복과 식민화는 매우 쉬운 과정이었다. 토착 제국들과 정치체들이 급속히 붕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메리카의 정복과 지배는 당시 스페인 사람들에게 큰 지적인 문제를 만들어냈다. 즉 아메리카에 대한 스페인왕의 지배권(imperium)과 재산권(dominium)을 어떻게 정당화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16세기 초에는 교황 알렉산더 6세의 칙서가 그 근거가 되었다. 1493년에 교황이 이사벨라와 페르디난드 공동왕에게 대서양에서 새로 발견되는 땅에 대해(그것이 어느 기독교 군주에 의해 점유되어 있지 않은 한) 지배권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황의 이런 행위는 교황이 기독교인과 이교도들 모두에 대해 세속적인 권위를 갖고 있다는 가정 위에 서 있었다. 그러나 이런 가정은 중세 자연법에 기초를 갖고 있지 않았으므로 신학자들이나 법률가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504년에 페르디난드왕이 한 회의를 소집했다. 여기에 모인 법학자, 신학자, 교회법학자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오가 왕에게 속하며 그것은 인간의 법이나 신의 법에 합치된다는 결론을 내림으로써 왕의 지배권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1511년에 새로운 상황이 벌어졌다. 서인도의 이스파뇰라 섬에서 선교를 하던 도미니쿠스 파의 몬테시노 신부가 원주민에 대한 스페인 식민자들의 잔인하고 부당한 행위들을 설교를 통해 공격했기 때문이다. 그는 식민자들이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그들은 무어인이나 튀르크인과 마찬가지로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고 강경하게 성토했다.
이 사건이 서인도제도 뿐 아니라 본국에까지 파장을 일으키며 국왕의 지배권 문제에 대한 논의를 다시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그 해에 부르고스에서 열린 회의에서는 다시 한 번 스페인왕이 아메리카에 대한 지배권과 재산권을 갖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 결론을 내린 논거는 무엇일까.
이 회의는 로마법에 근거하여 원주민들의 재산권을 부정했다. 원주민들이 적법한 사회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로마 법학자들에 의하면 사회란 재산에 기초해 있는 것이고 재산관계가 진정한 시민 사이의 모든 교환의 기초였다. 따라서 그런 관계를 갖고 있지 않은 사회는, 즉 시민공동체를 갖고 있지 않은 사회는, 그들의 땅을 빼앗으려는 침략자에 대해 재산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땅은 그들의 땅이 아니라 그들이 우연히 살게 된 열린 공간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서인도 제도 같이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곳에는 적용할 수 있었으나 아스텍이나 잉카 지역에는 불가능했다. 이들 나라가 정치 공동체를 갖고 있고 그 땅을 지배하고 잘 관리하고 있다는 것은 유럽인들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530년대에 정복의 정당성 문제가 다시 대학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가장 유명하고 강력한 논리를 제공한 사람이 살라만카 대학의 신학부 교수인 프란시스코 드 비토리아(Francisco de Vitoria)이다.
정복의 정당성과 신법
비토리아는 도미니쿠스파 신부로서 1511-23년 사이에 파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인물이다. 학문적으로 매우 유능한 인물로 파리 대학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을 편집하는 일에 참여했고 귀국해서도 제자들에게 주로 신학대전을 교과서로 하여 가르쳤다. 말하자면 전형적인 스콜라 철학자로서 16세기 스페인의 유명한 살라만카 학파의 창시자이다.
스콜라철학자들은 재산권이란 그것이 사회를 구성하건 아니건 모든 사람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재산의 권리가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에게만 배타적으로 주어진다고 하는 부르고스 회의의 결론은 비토리아에게는 불충분해 보였다. 아메리카의 정복은 원주민들이 이 자연권을 그 자신들의 행위에 의해 상실했다는 것을 증명해야 정당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스페인인들이 아메리카의 토지를 원주민들로부터 빼앗는 근거를 파고 들어갔다. 그런데 이 야만인들은 인간적인 법(유럽적인 법)이나 그 지배자 밑에 있지 않았다. 따라서 유럽의 실정법에 의해 판단할 수는 없었고 신법(神法)에 의해 판단되어야 했다.
그들은 기독교적 입장에서는 많은 죄를 짓고 있고 이단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주권이나 재산권을 부인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기독교적 사회만이 아니라 자연상태에 사는 사람들도 이에 대한 자연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또 이들이 이성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복되어도 좋다는 생각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들도 교육을 잘 받지 못해서 그렇지 그 나름으로 이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도시의 건설이나 결혼, 관리(官吏), 통치자, 법, 수공업, 상업 등 '이성의 사용'을 필요로 하는 행위들을 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비토리아에게 문제가 된 것은 토착민들이 기독교 선교를 거부할 때 그것이 정복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는 이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어떤 유럽의 군주나 교황도 지구 전체에 대한 세속적인 지배권을 주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원주민들이 그들이 싫어하는 것을 거부했다고 해서 공격을 받을 수는 없었다.
또 그들이 온갖 종류의 성적인 일탈이나 인육을 먹는 카니발리즘을 통해 중세 자연법을 위반했다 해서 그들을 강제할 근거도 없었다. 따라서 비토리아는 유감스럽지만 스페인인은 그들이 아메리카에서 하는 일에 대한 도덕적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신법의 입장에서 볼 때 스페인인들은 식민지 정복의 아무런 권리도 주장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만민법과 교통의 자유
이렇게 신법으로는 아메리카 정복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없었으므로 비토리아는 다른 방법을 취했다. 로마 시대의 만민법(ius gentium)을 끌어 들인 것이다. 만민법은 로마 시대에 그 영토 안에 있는 수많은 종족들 사이의 관계를 규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그는 모든 국가 사이에는 만민법이 작용한다고 믿은 것이다. 그는 만민법을 자연법이거나 또는 자연법에서 비롯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만민법의 개념을 바탕으로 신화와 허구를 포함해 고대의 많은 글들을 인용하며 '사회와 자연적 교통의 권리'라는 원리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것이 유럽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을 포괄할 수 있는 기독교보다 더 보편적인 원리라고 주장했다.
이에 의하면 바다, 해안, 항구는 시민으로서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이며 모든 사람에게 공동으로 속하는 것으로 사유 재산에서는 벗어나 있다. 따라서 그는 어떤 해안이 누구에게 속하든 상관없이 거기에 들어가는 것은 법의 객관적 권리라고 주장했다. 그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로마의 전설적 시조인 아에네아스가 자신의 정박을 거부한 라티움 왕을 야만인이라고 부른 이유라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고사(故事)로부터 선례를 만들어 가며 여행과 방문, 정착, 교역, 광산 채굴의 보편적인 권리를 끌어냈다. 그리고 이런 권리가 정중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부인될 때는 전쟁을 할 수도 있었다. 어떤 사람의 권리를 지키는 것은 전쟁의 정당한 사유가 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교역을 막아서는 안 되었다. 그것이 유무상통을 통해 서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원주민들이 내지 여행을 막고 복음을 전하는 것을 금한다면(그들이 그것을 믿건 말건) 스페인인들은 그들을 정복할 권리를 갖는다. 또 인간을 희생시키는 제사나 카니발리즘을 강제로 막는 것도 합법적이다. 또 원주민들의 전쟁에도 요청을 받을 경우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인디언의 낮은 지성을 고려하면 폭력은 최소화해야 했다.
이렇게 비토리아는 기독교가 정당화할 수 없는 정복행위를 자연법이 할 수 있게 만들었다. 로마법에 근원을 갖고, 선례를 신화에서 찾고, 비토리아에 의해 주의 깊게 제한된 상황에서이기는 하나 후대에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 보편적인 원리가 원주민들에 대한 정복과 착취를 정당화한 것이다.
1539년부터 본격화된 이 논리는 곧 지배적인 이론으로 받아들여지며 이후 스페인 식민주의의 중요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이는 다른 식민국가들에게도 유용한 이론이었다. 네덜란드나 잉글랜드를 포함하여 많은 나라 사람들이 이 이론을 열렬히 환영한 이유이다.
그러나 인간의 자연적 사회성과 동료애라는 가정 위에 선 이 원리가 아메리카에 적용된 상황은 참 역설적이다. 그 명목 하에 아스텍 여인들이 개의 먹이로 던져졌고 아메리카의 전체 문화가 파괴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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