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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71204145313&Section=04
유럽은 어떻게 아메리카를 착취했나?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15> 유럽의 해외팽창 ③
3) 유럽인들에 의해 아시아와 아메리카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나
유럽인, 아시아의 역내 무역에 참여
15세기 말 당시 유럽인들은 아시아 상황에 대해서 거의 몰랐다. 몽골제국이 망하고 또 오스만 튀르크가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며 동 · 서의 교통이 전보다 불편해진 것이 주된 이유이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마르코 폴로가 살았던 13세기보다 아시아에 대해 더 무지했다. 콜럼버스가 항해를 할 때 가지고 떠난 중국황제에 대한 신임장은 몽골족의 칸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명나라가 생긴 것이나 인도에 무굴 제국이 성립한 것도 몰랐다.
당시 아시아에는 명이나 무굴제국, 페르시아라는 대제국들이 건재하고 있어서 유럽인들은 이에 범접할 수 없었다. 유럽에는 이에 비견할 만한 나라조차 없었다. 또 경제적인 면에서도 유럽은 아시아에 훨씬 뒤떨어져 있었다.
바스코 다가마는 캘리컷에 도착하여 가지고 간 유럽 상품들을 팔려고 했으나 아무 것도 팔 것이 없었다. 인도의 상점들에 가득 차 있는 상품들과는 질에서 비교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그는 그곳에서 스페인어를 하는 튜니지아인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 이미 인도에서는 국제적인 상업망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유럽인들이 그제야 이에 뒤늦게 참여하게 된 것이다.
물론 바스코 다가마가 인도에서 싣고 돌아온 동방물산은 큰 이익을 냈다. 세 척 가운데 한 척 밖에 돌아오지 못했지만 무려 60배의 이익을 냈다고 한다. 중간에서 이익을 붙이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후 지중해 대신 아프리카를 도는 항로가 점차 동방무역에서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인도로 가는 항로가 워낙 멀고 위험이 많아 그 후에도 생각만큼 많은 무역선이 취항하지는 못했다.
이와 함께 포르투갈 상인들이나 나중의 네덜란드, 영국 상인들은 인도양 안의 중개무역에도 종사했다. 당시 인도양의 물동량이 매우 많았으므로 그 편이 유럽과의 무역보다 더 유리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요소요소에 그 지역 왕이나 권력자의 허락을 얻어 무역거점을 만들었다. 아덴이나 말라카해협, 쟈카르타, 마카오 같은 곳들이 그곳이다. 아메리카에서와 같이 식민지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식민주의자의 전형 콜럼버스
그러면 콜럼버스는 서인도제도에서 어떤 일을 했을까? 그는 말년에 자신을 기독교적 사명을 가진 인물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서인도제도에 저지른 일들은 영웅다움이나 도덕성, 창조성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오직 이익만을 탐하는 투기가, 모험가, 착취자의 모습만 보여줄 뿐이다.
그는 항해를 위해 스페인 왕실의 후원을 얻었으나 그것은 말 그대로의 후원은 아니고 일종의 동업계약이다. 항해에 드는 전체 비용의 1/8을 그가 대기로 하고 나머지를 스페인 왕실에서 대기로 했다. 항해를 통해 얻는 수익의 1/8은 역시 콜럼버스의 차지였다. 또 새로이 얻는 영토에 대해서 그는 종신총독 직과 그 직위를 자식에게 세습시킬 권리를 보장받았다.
그러므로 그가 서인도제도에 도착해서 한 가장 중요한 일은 동방물산 같이 이익이 될 만한 산물을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 섬을 돌아 다녀 보아도 어디에도 후추 같은 돈이 될 만한 것들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어느 섬에서 사금이 나는 것을 발견하자 그는 두 번째 원정부터는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섬사람들에게 사금을 바치도록 강요했다.
또 이들 원주민들을 노예화하여 강제노동을 시켰다. 1495년에는 550명의 원주민을 노예로 팔기 위해 스페인으로 데리고 귀환했다. 그 가운데 살아남아 스페인에서 노예생활을 한 사람은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또 사탕수수를 쿠바 섬에 이식함으로써 노예노동에 의존하는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의 기초를 만들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착취적인 식민주의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나중에 아메리카에 들어간 유럽인들은 모두 그의 모범을 충실히 따랐다. 이렇게 보면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원주민, 나아가 비유럽인에게는 영웅도 위대한 인물도 아니다. 아메리카에 재난을 가져온 사악한 인간일 뿐이다.
아메리카의 정복과 식민화
코르테스와 피사로의 뒤를 이어 콩퀴스타도르라고 불린 수많은 스페인 정복자들이 중남미 지역에서 정복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투기적인 모험가들로 그 가운데에는 귀족 뿐 아니라 평민, 흑인 노예 출신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군대를 모아 각지의 원주민 부족들을 정복함으로써 스페인의 식민지를 점차 확대했다. 이런 활동은 오지에서는 19세기까지도 지속되었다.
중남미의 거의 모든 지역을 스페인이 차지했으나 브라질만은 예외로 포르투갈에 속했다. 이는 로마 교황이 중재한 1494년의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의해 두 나라의 세력권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의 모습이 제대로 밝혀지기도 전인 이때 벌써 두 나라가 세력권을 나누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거의 대부분의 중남미 지역에는 스페인 식민자들을 지배자로 하는 새로운 사회체제가 만들어졌다. 사실 원주민들의 기존 사회, 정치체제가 거의 무너지다시피 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아메리카의 정복사업은 국가와 교회의 공동사업으로 생각되었으므로 원주민들의 기독교화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원주민들의 신전을 무너뜨리고 많은 카톨릭 교회가 건설되었으며 토착민들을 강제 개종시키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반항하는 경우 학살 등 온갖 강압수단을 동원했다.
초기의 식민자들 사이에는 여자의 수가 매우 모자랐으므로 스페인 정부는 원주민과의 혼혈을 적극 권장했다. 그래서 중남미 특유의 혼혈인인 메스티조 계급이 생겨났다. 메스티조는 스페인 정부로부터 원주민보다 우대를 받았다.
나중에는 노예로서 아프리카 인이 많이 수입되며 이들과도 여러 형태의 혼혈도 이루어졌으므로 중남미 사회는 인종적으로 매우 복잡한 모습을 갖게 되었다. 물론 백인이 가장 위의 서열에서 군림하게 되었다.
스페인인 정복자들이나 그 후손, 또 새로 스페인에서 들어온 유력한 식민자들은 왕의 허락을 얻어 광대한 토지를 차지하여 대농장인 플랜테이션들을 건설했다. 그리고 원주민에 대한 강제노동을 이용하여 목축을 하거나 사탕수수, 담배 등을 경작했다.
16세기 중반에는 큰 매장량을 가진 은광산들을 개발했다. 여기에도 대량의 노동력이 필요했으므로 많은 원주민 남자들이 징발되어 노예와 같은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그 결과 16, 17세기 내내 스페인의 세비야 항으로는 엄청난 양의 금, 은이 아메리카로부터 쏟아져 들어오게 된다.
아메리카의 이런 엄청난 착취가 스페인을 16, 17세기에 유럽 최대의 부국으로 만든 바탕이다. 영국인과 프랑스인들은 중남미 지역에서도 활동했으나 북아메리카에 대한 침탈은 17세기 이후에야 본격화 했다.
유럽은 어떻게 아메리카를 착취했나?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15> 유럽의 해외팽창 ③
3) 유럽인들에 의해 아시아와 아메리카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나
유럽인, 아시아의 역내 무역에 참여
15세기 말 당시 유럽인들은 아시아 상황에 대해서 거의 몰랐다. 몽골제국이 망하고 또 오스만 튀르크가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며 동 · 서의 교통이 전보다 불편해진 것이 주된 이유이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마르코 폴로가 살았던 13세기보다 아시아에 대해 더 무지했다. 콜럼버스가 항해를 할 때 가지고 떠난 중국황제에 대한 신임장은 몽골족의 칸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명나라가 생긴 것이나 인도에 무굴 제국이 성립한 것도 몰랐다.
당시 아시아에는 명이나 무굴제국, 페르시아라는 대제국들이 건재하고 있어서 유럽인들은 이에 범접할 수 없었다. 유럽에는 이에 비견할 만한 나라조차 없었다. 또 경제적인 면에서도 유럽은 아시아에 훨씬 뒤떨어져 있었다.
바스코 다가마는 캘리컷에 도착하여 가지고 간 유럽 상품들을 팔려고 했으나 아무 것도 팔 것이 없었다. 인도의 상점들에 가득 차 있는 상품들과는 질에서 비교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그는 그곳에서 스페인어를 하는 튜니지아인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 이미 인도에서는 국제적인 상업망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유럽인들이 그제야 이에 뒤늦게 참여하게 된 것이다.
물론 바스코 다가마가 인도에서 싣고 돌아온 동방물산은 큰 이익을 냈다. 세 척 가운데 한 척 밖에 돌아오지 못했지만 무려 60배의 이익을 냈다고 한다. 중간에서 이익을 붙이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후 지중해 대신 아프리카를 도는 항로가 점차 동방무역에서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인도로 가는 항로가 워낙 멀고 위험이 많아 그 후에도 생각만큼 많은 무역선이 취항하지는 못했다.
이와 함께 포르투갈 상인들이나 나중의 네덜란드, 영국 상인들은 인도양 안의 중개무역에도 종사했다. 당시 인도양의 물동량이 매우 많았으므로 그 편이 유럽과의 무역보다 더 유리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요소요소에 그 지역 왕이나 권력자의 허락을 얻어 무역거점을 만들었다. 아덴이나 말라카해협, 쟈카르타, 마카오 같은 곳들이 그곳이다. 아메리카에서와 같이 식민지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식민주의자의 전형 콜럼버스
그러면 콜럼버스는 서인도제도에서 어떤 일을 했을까? 그는 말년에 자신을 기독교적 사명을 가진 인물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서인도제도에 저지른 일들은 영웅다움이나 도덕성, 창조성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오직 이익만을 탐하는 투기가, 모험가, 착취자의 모습만 보여줄 뿐이다.
그는 항해를 위해 스페인 왕실의 후원을 얻었으나 그것은 말 그대로의 후원은 아니고 일종의 동업계약이다. 항해에 드는 전체 비용의 1/8을 그가 대기로 하고 나머지를 스페인 왕실에서 대기로 했다. 항해를 통해 얻는 수익의 1/8은 역시 콜럼버스의 차지였다. 또 새로이 얻는 영토에 대해서 그는 종신총독 직과 그 직위를 자식에게 세습시킬 권리를 보장받았다.
그러므로 그가 서인도제도에 도착해서 한 가장 중요한 일은 동방물산 같이 이익이 될 만한 산물을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 섬을 돌아 다녀 보아도 어디에도 후추 같은 돈이 될 만한 것들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어느 섬에서 사금이 나는 것을 발견하자 그는 두 번째 원정부터는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섬사람들에게 사금을 바치도록 강요했다.
또 이들 원주민들을 노예화하여 강제노동을 시켰다. 1495년에는 550명의 원주민을 노예로 팔기 위해 스페인으로 데리고 귀환했다. 그 가운데 살아남아 스페인에서 노예생활을 한 사람은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또 사탕수수를 쿠바 섬에 이식함으로써 노예노동에 의존하는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의 기초를 만들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착취적인 식민주의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나중에 아메리카에 들어간 유럽인들은 모두 그의 모범을 충실히 따랐다. 이렇게 보면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원주민, 나아가 비유럽인에게는 영웅도 위대한 인물도 아니다. 아메리카에 재난을 가져온 사악한 인간일 뿐이다.
아메리카의 정복과 식민화
코르테스와 피사로의 뒤를 이어 콩퀴스타도르라고 불린 수많은 스페인 정복자들이 중남미 지역에서 정복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투기적인 모험가들로 그 가운데에는 귀족 뿐 아니라 평민, 흑인 노예 출신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군대를 모아 각지의 원주민 부족들을 정복함으로써 스페인의 식민지를 점차 확대했다. 이런 활동은 오지에서는 19세기까지도 지속되었다.
중남미의 거의 모든 지역을 스페인이 차지했으나 브라질만은 예외로 포르투갈에 속했다. 이는 로마 교황이 중재한 1494년의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의해 두 나라의 세력권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의 모습이 제대로 밝혀지기도 전인 이때 벌써 두 나라가 세력권을 나누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거의 대부분의 중남미 지역에는 스페인 식민자들을 지배자로 하는 새로운 사회체제가 만들어졌다. 사실 원주민들의 기존 사회, 정치체제가 거의 무너지다시피 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아메리카의 정복사업은 국가와 교회의 공동사업으로 생각되었으므로 원주민들의 기독교화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원주민들의 신전을 무너뜨리고 많은 카톨릭 교회가 건설되었으며 토착민들을 강제 개종시키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반항하는 경우 학살 등 온갖 강압수단을 동원했다.
초기의 식민자들 사이에는 여자의 수가 매우 모자랐으므로 스페인 정부는 원주민과의 혼혈을 적극 권장했다. 그래서 중남미 특유의 혼혈인인 메스티조 계급이 생겨났다. 메스티조는 스페인 정부로부터 원주민보다 우대를 받았다.
나중에는 노예로서 아프리카 인이 많이 수입되며 이들과도 여러 형태의 혼혈도 이루어졌으므로 중남미 사회는 인종적으로 매우 복잡한 모습을 갖게 되었다. 물론 백인이 가장 위의 서열에서 군림하게 되었다.
스페인인 정복자들이나 그 후손, 또 새로 스페인에서 들어온 유력한 식민자들은 왕의 허락을 얻어 광대한 토지를 차지하여 대농장인 플랜테이션들을 건설했다. 그리고 원주민에 대한 강제노동을 이용하여 목축을 하거나 사탕수수, 담배 등을 경작했다.
16세기 중반에는 큰 매장량을 가진 은광산들을 개발했다. 여기에도 대량의 노동력이 필요했으므로 많은 원주민 남자들이 징발되어 노예와 같은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그 결과 16, 17세기 내내 스페인의 세비야 항으로는 엄청난 양의 금, 은이 아메리카로부터 쏟아져 들어오게 된다.
아메리카의 이런 엄청난 착취가 스페인을 16, 17세기에 유럽 최대의 부국으로 만든 바탕이다. 영국인과 프랑스인들은 중남미 지역에서도 활동했으나 북아메리카에 대한 침탈은 17세기 이후에야 본격화 했다.
공지 | isGranted() && $use_category_update" class="cate">홍보/광고 | 현재 XE 에서 Rhymix 로 업그레이드 중입니다. | 風文 | 2024.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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