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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서[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12> 부르크하르트와 르네상스 ③
4. 인간의 존엄성과 르네상스 미술의 근대성
인간의 존엄성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 시대에 인간의 존엄성이 강조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인문주의를 인간중심적인 철학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을 찬미하는 태도는 르네상스의 새로운 발견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인들도 이미 예술의 창조자로서의 인간을 찬양하고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인간의 정신을 육체적 세계와, 순수한 형태의 초월적 세계의 중간에 놓았다. 이런 생각은 나중의 신플라톤주의자나 많은 중세 사상가들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헬레니즘적 시대의 초기 스토아 학파도 우주를 신과 인간의 공동체로 보았으며 이런 생각은 로마 시대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다른 피조물에 대해 인간이 우월하다는 생각은 구약성서의 창세기 등 여러 곳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초기 기독교 사상에서도 분명히 말하지는 않으나 역시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중세 기독교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받아들여진 것은 인간이 신의 이미지를 본 따서 만들어졌으며 또 구원될 수 있다고 믿어졌기 때문이지 자연적 존재로서 인간이 가치를 가졌다고 믿었기 때문은 아니다.
르네상스 시기에 와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주장은 지속적으로 보다 체계적으로 나타난다. 페트라르카(F. Petrarca)나 브루니(L. Bruni), 알베르티(L. Alberti), 마네티(G. Manetti) 같은 많은 사람들이 인간과 그 존엄성에 대한 관심을 표시했다. 그러나 이들은 대체로 인간이 현세에서 이룬 뛰어난 업적들을 그 존엄성의 증거로 내세웠다. 철학적 깊이가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반면 피치노(M. Ficino), 피코(G. Pico)의 두 사람은 그런 이야기를 우주에 대한 철학적 체계 속에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피치노는 15세기에 플라톤의 모든 책들을 번역한 피렌체 사람이다. 그는 플라톤의 생각을 받아들여 이 우주의 가장 높은 곳에는 순수한 정신적인 존재인 신이 위치해 있고, 그 밑에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정신적인 것으로부터 물질적인 것까지 차례로 배열되어 있다고 믿었다.
인간은 정신과 육체를 다 갖고 있으므로 이 계층 질서에서 정신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를 연결하는 접점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두 세계 모두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노력 여하에 따라 어느 쪽에도 다다를 수가 있다. 그래서 그는 이 질서 안에서의 인간의 이런 중심성과 보편성이 바로 인간 존엄성의 주된 근거가 된다고 믿었다.
피코는 1496년의 <인간 존엄성에 대한 연설>이라는 글에서 피치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신이 완전한 우주를 만들기 위해 모든 정신적, 물질적 존재를 창조했으나 인간은 맨 마지막에 창조되었으므로 인간은 이미 완성된 질서 안에 어떤 정해진 자리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인간은 다른 어떤 피조물의 성질도 가질 수 있는 자유를 가졌으므로 그가 무엇을 발전시키느냐에 따라 식물, 동물, 천체, 천사, 나아가 신과도 일체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정신적인 존재가 되는 것도, 본능을 추구하여 짐승 같은 존재가 되는 것도 마음먹기에 따른다는 것이다.
피코의 이 주장은 신이 인간에게 무제한한 자유를 준 것으로, 따라서 신의 은총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기독교적 원리를 부정하는 예로 자주 인용된다. 부르크하르트도 이 점에서 피코를 매우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피코는 결코 기독교적 원리를 부정한 적은 없다.
이들은 다른 르네상스인들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이 우주에는 초월적 힘이 존재하고 천상계와 지상계의 존재 사이에는 신비한 감응관계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점성술이나 다른 비학(秘學)을 믿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현대인들과 같이 인간을 그야말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또 피치노나 피코의 영향력은 별로 크지 않았다. 피치노의 영향은 그가 속한 좁은 집단에만 한한 것이었다. 피코의 글은 다른 사람들이 보았는지 조차 의심스러운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러니 서양철학사에서 논리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만 보아 이들을 크게 부각시키는 것은 이런 역사적인 현실을 도외시하는 것이다.
르네상스 미술과 진보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문화적 성취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미술인 것은 틀림없다. 이 시기에 수많은 화가, 조각가, 건축가가 등장하여 풍요한 결실을 이루기 때문이다. 부르크하르트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에서는 미술을 다루지 않았으나 다른 많은 글에서 르네상스 미술을 다루고 있으므로 그의 견해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미술이 뛰어나다는 주장을 처음 한 것은 16세기에 <미술가 열전>을 쓴 바사리이다. 이 책은 르네상스 시대 많은 미술가들의 전기인데 이 책에서 그는 미술에 있어서의 3단계 진보론을 주장했다. 그는 이전의 미술인 비잔틴 미술과 중세 고딕 미술을 비잔틴 양식, 게르만 양식이라는 말로 경멸했다. 또 르네상스 미술에서도 16세기에 비해 14, 15세기 미술은 낮추어 보았다. 미술사를 진보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뒤의 사람들이 바사리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서양미술사에서도 진보라는 관점이 정착되었다. 이는 19세기에 들어와 더욱 강화되었는데 부르크하르트도 기본적으로 그런 관점을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이 진보는 르네상스 미술이 '과학적'이라고 보는 주장과 결부되어 있는데 그것은 르네상스 시대에 원근법이 발전되었고 그것이 기하학적 원리를 채용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명암법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곰브리치 등 많은 현대 서양 미술사가들은 원근법에 기초한 사실주의와, 세속주의 · 개인주의가 르네상스 미술을 중세와 단절시키고 근대의 문을 열었다고 생각한다. 즉 르네상스 미술의 근대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원근법이 사용되고 명암법이 널리 사용되어 3차원적인 묘사가 어느 정도 가능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자연과 인간에 대한 세세한 묘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근대적인 자연적 사실주의가 발전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상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렸다고 근대적이라는 할 수는 없다. 자연 사물에 대한 세세한 묘사는 어느 시대에도 존재했고 그것이 미술을 더 완전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 르네상스인들은 상상력을 사용하는 종교화나 역사화에 비해 대상을 직접 모사하는데 의존하는 정물화, 풍경화, 초상화는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사실적으로 그렸다고 근대적이라는 주장은 근대인의 편견일 수도 있다.
르네상스 미술가나 미술 이론가들이 그림을 그릴 때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오르나토(ornato)와 릴리에보(rilievo)라는 두 가지 요소이다. 오르나토는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아름답게 꾸며 그리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미술가들은 이를 계속 강조했다.
릴리에보는 그림의 주된 대상을 부조와 같이 도드라지게,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효과를 말한다. 선 원근법이나 대기 원근법, 명암법은 릴리에보를 나타내기 위한 수단들이다. 앞에 있는 대상을 크고 뚜렷하게, 뒤에 멀리 있는 대상을 작고 흐릿하게 그림으로써 앞에 있는 대상을 부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빛이나 색깔의 명암도 대상을 뚜렷하게 표현하는데 동원된다.
그러니까 원근법이나 명암법은 그것이 주된 표현수단인 것이 아니라 오르나토와 릴리에보를 나타내는 보조수단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르네상스 시대에 불완전하게 사용되었다. 17세기 화가들이 공간 자체에 관심을 가졌던 것과는 태도가 다르다.
세속주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세속적 주제를 가진 그림은 1420년대에는 전체 그림의 약 5%정도였으나 1520년대에 가면 20% 정도로 증가할 뿐이다. 따라서 후기에 가서 세속주의가 보다 강해지는 것은 사실이나 그 비율은 그렇게 높은 것이 아니다.
개인주의도 마찬가지이다. 미술사가들은 르네상스의 예술작품이 중세와 달리 개인적 스타일에 따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또 그림에 화가가 서명하기 시작했으므로 그것을 개인의 예술 작품으로 보려고 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중세 그림들에도 개인적 스타일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또 르네상스 시대 미술가들의 그림은 거의 권력자나 부자들의 주문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지 개인의 예술작품으로 그린 것이 아니다. 게다가 중국 회화에서는 이미 당(唐)나라나 육조(六朝)시대부터 이미 낙관이 일부 사용되었고, 14세기인 원(元)대에 와서 일반화되었다. 따라서 이런 것을 갖고 르네상스 미술의 근대성, 개인주의적인 특성을 너무 강조할 수는 없을 것이다.
5) 르네상스의 새로운 인식
르네상스 문화의 절충성
르네상스 문화는 전체적으로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미술 부분의 업적은 뛰어나다. 회화, 조각, 건축에서 모두 대단한 성과를 이루었다. 새 양식, 새 기술, 새 장르가 등장했다. 그러나 그리스, 로마적인 것을 모방하려는 경향도 강하게 나타났다.
이탈리아어 문학의 경우는 단테나 페트라르카 이후 시(詩)없는 한 세기가 왔고 그 후 폴리치아노, 아리오스토 등이 등장한다. 이탈리아 산문도 14, 16세기는 뛰어나나 15세기는 비어 있다. 여기에서도 로마의 테렌스, 플라우투스, 세네카, 베르길리우스가 모범이 되었다.
사상의 영역에는 브루노, 피치노, 마키아벨리 같은 유명한 인물들과 인문주의라는 주된 운동이 있다. 그러나 인문주의의 등장이 중세 스콜라 철학을 밀어낸 것은 아니다.
또 당대인들은 자신들이 고대의 전통을 이어 받았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고대와 중세 양쪽 전통에서 불완전하게 빌려왔다. 새로운 진보적 변화가 있었다 해도 그것은 반동적 요소와도 결합했다. 그런 의미에서 르네상스 문화는 절충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것으로 근대적인 문화라고 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부르크하르트가 주장하는 여러 근대적 변화들은 모두 몇 세기 후의 일들이다. 개인의 발견이나 신분제의 해체는 모두 18세기 말 이후 19세기의 일이다. 자연과학의 근대적인 발전은 17세기 이후의 일이다. 인문주의는 중요하나 그것이 새로운 형태로 서양 근대문화 속에 녹아드는 것도 19세기 이후이다. 근대국가도 18세기에 절대주의 국가들이 만들어지며 본격화한다. 세속문화의 발전도 18세기 계몽사상 시대 이후의 일이다.
이렇게 근세의 명백한 특징들이 17, 18세기 이후에야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이런 변화들을 몇 세기나 앞당겨 르네상스의 시대적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정당화되기 힘들다.
게다가 르네상스 문화는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도 아니다. 13세기 후반부터 비잔틴 제국에서 나타난 사실주의적인 그림 양식이나 고대 그리스 문학, 철학, 과학에 대한 집약적 연구가 큰 영향을 주었다. 이것이 이미 14세기 후반부터 비잔틴 학자들의 초빙을 통해, 또 비잔틴 제국이 망한 1476년 이후에는 많은 망명 학자들에 의해 전달되는 것이다.
따라서 르네상스 문화의 독창성을 너무 강조하는 태도에는 문제가 있다.
르네상스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서
사실 부르크하르트의 여러 주장들은 그가 처음 생각해낸 것도 아니다. 계몽사상 이후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체계적으로 종합하여 하나의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주장으로 묶어 낸 것이다. 말하자면 그가 완성시킨 르네상스의 모습은 18, 19세기의 세속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유럽 지식인들이 만들어낸 역사적 신화라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는 이렇게 서양 학자들의 이데올로기적 태도에 의해 오랫동안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아 왔다. 또 그 과정에서 역사가 끊임없이 일직선적으로 발전한다고 믿는, 18세기 이후 서양인들이 만들어낸 진보사관과 굳게 결합하였다. 그리하여 르네상스가 서양 역사의 발전에서 뺄 수 없는, 본질적으로 중요한 한 단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았듯이 부르크하르트를 포함해 서양인들의 이런 주장은 이제 더 이상 그대로 받아들여지기가 어렵다. 그런 주장들의 많은 부분이 사실의 검증을 이겨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사이 서양의 일부 역사학자들은 '전체 서양 전통 안에서 르네상스의 위치에 대한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역사적 가정들이 고쳐질 때가 되었으며 점점 많은 역사가들이 이를 의식하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고 더 극단적인 역사가들은 아예 르네상스의 존재 가치까지도 부정한다.
더욱이 다른 문화권과의 비교작업은 부르크하르트적 해석의 타당성을 더욱 의심하게 한다. 서양인들은 세속주의나 인간중심주의를 르네상스 이후 서양문화의 산물로 이야기하나 실제로 동아시아 유교 문화권은 일찍부터 세속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우주관, 인간관을 발전시킨 곳이다.
종교적인 요소가 크지 않으며 이는 서양의 기독교 사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다. 서양인들의 전통적인 견해를 받아들인 우리는 무심코 오늘날 동아시아의 세속주의나 인간중심주의마저도 서양의 산물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는 근본적으로 다시 검토해 보아야 할 일이다.
이렇게 '서양 근대문명의 흥기'라는 큰 논의 틀의 일부로 연구되어온 르네상스 연구는 이제 심각한 저항에 직면해 있다. 따라서 시대를 규정하는 이름만으로는 당분간 르네상스를 받아들인다 해도 부르크하르트가 강조하는 '근대성'이나 '진보'라는 관점에서 르네상스를 규정하는 일은 더 이상 받아들이기 어렵다. 르네상스에 대한 전적으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르네상스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서[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12> 부르크하르트와 르네상스 ③
4. 인간의 존엄성과 르네상스 미술의 근대성
인간의 존엄성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 시대에 인간의 존엄성이 강조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인문주의를 인간중심적인 철학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을 찬미하는 태도는 르네상스의 새로운 발견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인들도 이미 예술의 창조자로서의 인간을 찬양하고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인간의 정신을 육체적 세계와, 순수한 형태의 초월적 세계의 중간에 놓았다. 이런 생각은 나중의 신플라톤주의자나 많은 중세 사상가들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헬레니즘적 시대의 초기 스토아 학파도 우주를 신과 인간의 공동체로 보았으며 이런 생각은 로마 시대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다른 피조물에 대해 인간이 우월하다는 생각은 구약성서의 창세기 등 여러 곳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초기 기독교 사상에서도 분명히 말하지는 않으나 역시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중세 기독교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받아들여진 것은 인간이 신의 이미지를 본 따서 만들어졌으며 또 구원될 수 있다고 믿어졌기 때문이지 자연적 존재로서 인간이 가치를 가졌다고 믿었기 때문은 아니다.
르네상스 시기에 와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주장은 지속적으로 보다 체계적으로 나타난다. 페트라르카(F. Petrarca)나 브루니(L. Bruni), 알베르티(L. Alberti), 마네티(G. Manetti) 같은 많은 사람들이 인간과 그 존엄성에 대한 관심을 표시했다. 그러나 이들은 대체로 인간이 현세에서 이룬 뛰어난 업적들을 그 존엄성의 증거로 내세웠다. 철학적 깊이가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반면 피치노(M. Ficino), 피코(G. Pico)의 두 사람은 그런 이야기를 우주에 대한 철학적 체계 속에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피치노는 15세기에 플라톤의 모든 책들을 번역한 피렌체 사람이다. 그는 플라톤의 생각을 받아들여 이 우주의 가장 높은 곳에는 순수한 정신적인 존재인 신이 위치해 있고, 그 밑에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정신적인 것으로부터 물질적인 것까지 차례로 배열되어 있다고 믿었다.
인간은 정신과 육체를 다 갖고 있으므로 이 계층 질서에서 정신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를 연결하는 접점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두 세계 모두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노력 여하에 따라 어느 쪽에도 다다를 수가 있다. 그래서 그는 이 질서 안에서의 인간의 이런 중심성과 보편성이 바로 인간 존엄성의 주된 근거가 된다고 믿었다.
피코는 1496년의 <인간 존엄성에 대한 연설>이라는 글에서 피치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신이 완전한 우주를 만들기 위해 모든 정신적, 물질적 존재를 창조했으나 인간은 맨 마지막에 창조되었으므로 인간은 이미 완성된 질서 안에 어떤 정해진 자리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인간은 다른 어떤 피조물의 성질도 가질 수 있는 자유를 가졌으므로 그가 무엇을 발전시키느냐에 따라 식물, 동물, 천체, 천사, 나아가 신과도 일체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정신적인 존재가 되는 것도, 본능을 추구하여 짐승 같은 존재가 되는 것도 마음먹기에 따른다는 것이다.
피코의 이 주장은 신이 인간에게 무제한한 자유를 준 것으로, 따라서 신의 은총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기독교적 원리를 부정하는 예로 자주 인용된다. 부르크하르트도 이 점에서 피코를 매우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피코는 결코 기독교적 원리를 부정한 적은 없다.
이들은 다른 르네상스인들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이 우주에는 초월적 힘이 존재하고 천상계와 지상계의 존재 사이에는 신비한 감응관계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점성술이나 다른 비학(秘學)을 믿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현대인들과 같이 인간을 그야말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또 피치노나 피코의 영향력은 별로 크지 않았다. 피치노의 영향은 그가 속한 좁은 집단에만 한한 것이었다. 피코의 글은 다른 사람들이 보았는지 조차 의심스러운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러니 서양철학사에서 논리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만 보아 이들을 크게 부각시키는 것은 이런 역사적인 현실을 도외시하는 것이다.
르네상스 미술과 진보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문화적 성취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미술인 것은 틀림없다. 이 시기에 수많은 화가, 조각가, 건축가가 등장하여 풍요한 결실을 이루기 때문이다. 부르크하르트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에서는 미술을 다루지 않았으나 다른 많은 글에서 르네상스 미술을 다루고 있으므로 그의 견해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미술이 뛰어나다는 주장을 처음 한 것은 16세기에 <미술가 열전>을 쓴 바사리이다. 이 책은 르네상스 시대 많은 미술가들의 전기인데 이 책에서 그는 미술에 있어서의 3단계 진보론을 주장했다. 그는 이전의 미술인 비잔틴 미술과 중세 고딕 미술을 비잔틴 양식, 게르만 양식이라는 말로 경멸했다. 또 르네상스 미술에서도 16세기에 비해 14, 15세기 미술은 낮추어 보았다. 미술사를 진보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뒤의 사람들이 바사리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서양미술사에서도 진보라는 관점이 정착되었다. 이는 19세기에 들어와 더욱 강화되었는데 부르크하르트도 기본적으로 그런 관점을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이 진보는 르네상스 미술이 '과학적'이라고 보는 주장과 결부되어 있는데 그것은 르네상스 시대에 원근법이 발전되었고 그것이 기하학적 원리를 채용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명암법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곰브리치 등 많은 현대 서양 미술사가들은 원근법에 기초한 사실주의와, 세속주의 · 개인주의가 르네상스 미술을 중세와 단절시키고 근대의 문을 열었다고 생각한다. 즉 르네상스 미술의 근대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원근법이 사용되고 명암법이 널리 사용되어 3차원적인 묘사가 어느 정도 가능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자연과 인간에 대한 세세한 묘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근대적인 자연적 사실주의가 발전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상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렸다고 근대적이라는 할 수는 없다. 자연 사물에 대한 세세한 묘사는 어느 시대에도 존재했고 그것이 미술을 더 완전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 르네상스인들은 상상력을 사용하는 종교화나 역사화에 비해 대상을 직접 모사하는데 의존하는 정물화, 풍경화, 초상화는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사실적으로 그렸다고 근대적이라는 주장은 근대인의 편견일 수도 있다.
르네상스 미술가나 미술 이론가들이 그림을 그릴 때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오르나토(ornato)와 릴리에보(rilievo)라는 두 가지 요소이다. 오르나토는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아름답게 꾸며 그리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미술가들은 이를 계속 강조했다.
릴리에보는 그림의 주된 대상을 부조와 같이 도드라지게,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효과를 말한다. 선 원근법이나 대기 원근법, 명암법은 릴리에보를 나타내기 위한 수단들이다. 앞에 있는 대상을 크고 뚜렷하게, 뒤에 멀리 있는 대상을 작고 흐릿하게 그림으로써 앞에 있는 대상을 부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빛이나 색깔의 명암도 대상을 뚜렷하게 표현하는데 동원된다.
그러니까 원근법이나 명암법은 그것이 주된 표현수단인 것이 아니라 오르나토와 릴리에보를 나타내는 보조수단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르네상스 시대에 불완전하게 사용되었다. 17세기 화가들이 공간 자체에 관심을 가졌던 것과는 태도가 다르다.
세속주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세속적 주제를 가진 그림은 1420년대에는 전체 그림의 약 5%정도였으나 1520년대에 가면 20% 정도로 증가할 뿐이다. 따라서 후기에 가서 세속주의가 보다 강해지는 것은 사실이나 그 비율은 그렇게 높은 것이 아니다.
개인주의도 마찬가지이다. 미술사가들은 르네상스의 예술작품이 중세와 달리 개인적 스타일에 따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또 그림에 화가가 서명하기 시작했으므로 그것을 개인의 예술 작품으로 보려고 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중세 그림들에도 개인적 스타일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또 르네상스 시대 미술가들의 그림은 거의 권력자나 부자들의 주문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지 개인의 예술작품으로 그린 것이 아니다. 게다가 중국 회화에서는 이미 당(唐)나라나 육조(六朝)시대부터 이미 낙관이 일부 사용되었고, 14세기인 원(元)대에 와서 일반화되었다. 따라서 이런 것을 갖고 르네상스 미술의 근대성, 개인주의적인 특성을 너무 강조할 수는 없을 것이다.
5) 르네상스의 새로운 인식
르네상스 문화의 절충성
르네상스 문화는 전체적으로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미술 부분의 업적은 뛰어나다. 회화, 조각, 건축에서 모두 대단한 성과를 이루었다. 새 양식, 새 기술, 새 장르가 등장했다. 그러나 그리스, 로마적인 것을 모방하려는 경향도 강하게 나타났다.
이탈리아어 문학의 경우는 단테나 페트라르카 이후 시(詩)없는 한 세기가 왔고 그 후 폴리치아노, 아리오스토 등이 등장한다. 이탈리아 산문도 14, 16세기는 뛰어나나 15세기는 비어 있다. 여기에서도 로마의 테렌스, 플라우투스, 세네카, 베르길리우스가 모범이 되었다.
사상의 영역에는 브루노, 피치노, 마키아벨리 같은 유명한 인물들과 인문주의라는 주된 운동이 있다. 그러나 인문주의의 등장이 중세 스콜라 철학을 밀어낸 것은 아니다.
또 당대인들은 자신들이 고대의 전통을 이어 받았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고대와 중세 양쪽 전통에서 불완전하게 빌려왔다. 새로운 진보적 변화가 있었다 해도 그것은 반동적 요소와도 결합했다. 그런 의미에서 르네상스 문화는 절충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것으로 근대적인 문화라고 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부르크하르트가 주장하는 여러 근대적 변화들은 모두 몇 세기 후의 일들이다. 개인의 발견이나 신분제의 해체는 모두 18세기 말 이후 19세기의 일이다. 자연과학의 근대적인 발전은 17세기 이후의 일이다. 인문주의는 중요하나 그것이 새로운 형태로 서양 근대문화 속에 녹아드는 것도 19세기 이후이다. 근대국가도 18세기에 절대주의 국가들이 만들어지며 본격화한다. 세속문화의 발전도 18세기 계몽사상 시대 이후의 일이다.
이렇게 근세의 명백한 특징들이 17, 18세기 이후에야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이런 변화들을 몇 세기나 앞당겨 르네상스의 시대적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정당화되기 힘들다.
게다가 르네상스 문화는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도 아니다. 13세기 후반부터 비잔틴 제국에서 나타난 사실주의적인 그림 양식이나 고대 그리스 문학, 철학, 과학에 대한 집약적 연구가 큰 영향을 주었다. 이것이 이미 14세기 후반부터 비잔틴 학자들의 초빙을 통해, 또 비잔틴 제국이 망한 1476년 이후에는 많은 망명 학자들에 의해 전달되는 것이다.
따라서 르네상스 문화의 독창성을 너무 강조하는 태도에는 문제가 있다.
르네상스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서
사실 부르크하르트의 여러 주장들은 그가 처음 생각해낸 것도 아니다. 계몽사상 이후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체계적으로 종합하여 하나의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주장으로 묶어 낸 것이다. 말하자면 그가 완성시킨 르네상스의 모습은 18, 19세기의 세속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유럽 지식인들이 만들어낸 역사적 신화라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는 이렇게 서양 학자들의 이데올로기적 태도에 의해 오랫동안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아 왔다. 또 그 과정에서 역사가 끊임없이 일직선적으로 발전한다고 믿는, 18세기 이후 서양인들이 만들어낸 진보사관과 굳게 결합하였다. 그리하여 르네상스가 서양 역사의 발전에서 뺄 수 없는, 본질적으로 중요한 한 단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았듯이 부르크하르트를 포함해 서양인들의 이런 주장은 이제 더 이상 그대로 받아들여지기가 어렵다. 그런 주장들의 많은 부분이 사실의 검증을 이겨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사이 서양의 일부 역사학자들은 '전체 서양 전통 안에서 르네상스의 위치에 대한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역사적 가정들이 고쳐질 때가 되었으며 점점 많은 역사가들이 이를 의식하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고 더 극단적인 역사가들은 아예 르네상스의 존재 가치까지도 부정한다.
더욱이 다른 문화권과의 비교작업은 부르크하르트적 해석의 타당성을 더욱 의심하게 한다. 서양인들은 세속주의나 인간중심주의를 르네상스 이후 서양문화의 산물로 이야기하나 실제로 동아시아 유교 문화권은 일찍부터 세속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우주관, 인간관을 발전시킨 곳이다.
종교적인 요소가 크지 않으며 이는 서양의 기독교 사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다. 서양인들의 전통적인 견해를 받아들인 우리는 무심코 오늘날 동아시아의 세속주의나 인간중심주의마저도 서양의 산물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는 근본적으로 다시 검토해 보아야 할 일이다.
이렇게 '서양 근대문명의 흥기'라는 큰 논의 틀의 일부로 연구되어온 르네상스 연구는 이제 심각한 저항에 직면해 있다. 따라서 시대를 규정하는 이름만으로는 당분간 르네상스를 받아들인다 해도 부르크하르트가 강조하는 '근대성'이나 '진보'라는 관점에서 르네상스를 규정하는 일은 더 이상 받아들이기 어렵다. 르네상스에 대한 전적으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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