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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71112173024&Section=04
유럽 중세도시의 실상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8> 유럽 중세도시는 자유로웠나? ②
3. 유럽의 중세도시들
도시의 형성과 규모
중세시대에 유럽에서 도시가 가장 발달한 지역은 이탈리아 북부 지방과 함께 지금의 프랑스 북부 해안지역과 벨기에가 포함되는 플랑드르 지역이다. 이 지역이 중세 시대에 유럽에서 상공업이 가장 발전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반면 다른 지역에서는 도시들이 별로 발달하지 못했다.
당시 이탈리아 북부는 특이한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신성로마제국의 판도 안에 들어 있었으나 황제가 독일 지역에 거주했으므로 관리가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지역의 도시들은 거의 독립적인 존재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것은 한 편에서 이탈리아 중부의 교황령에 자리 잡고 있던 로마교황이 황제를 견제하기 위해 도시들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11세기에 100여개였던 도시들은 14세기가 되면 점차 병합되어 30여개로 줄며 주변의 넓은 농촌지역까지 포함하는 상당히 큰 규모의 도시국가들로 발전했다. 그리하여 알프스 이북지역에서는 봉건영주들에 의한 봉건체제가 유지된 반면 이탈리아 북부에서는 귀족이 그 중심이 되는 도시국가 체제가 만들어졌다. 도시들이 거의 독립국가나 마찬가지의 성격을 갖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당시 피렌체나 베네치아, 밀라노, 제노바 같은 도시들은 주변 농촌 지역을 빼고도 인구가 10만 명 수준으로 당시 유럽에서는 가장 큰 도시들이다. 그 외에도 수만 명의 인구를 가진 도시들이 많다. 따라서 이탈리아의 도시는 다른 지역의 도시와는 크게 다르다.
플랑드르 지방의 헨트의 인구수는 13세기 중반에 8만, 브뤼헤는 4만 정도로 비교적 큰 편이다. 이 지역에서는 중세시기에 모직물 산업이 발전했고 또, 상업도시로서도 발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지역도 다른 곳에 비하면 특이한 예에 속한다.
알프스 이북에 있는 그 외의 다른 도시들의 규모는 비교적 작다. 프랑스의 경우, 가장 큰 도시인 파리가 14세기에 10만 정도였다. 그 외에 큰 도시로는 1300년에 몽펠리에의 인구가 4만, 리용이 3만, 나르본, 툴루즈, 스트라스부르, 오를레앙이 각각 2만 5천 정도로 추산된다.
영국의 도시는 1377년의 기록에 의하면 가장 큰 런던의 인구가 4만5천-5만 명 수준이었다. 그 외에 인구 8천-1.5만 명이 4개, 5천-8천 명이 8개, 2천-5천 명이 27개이고 5백 명-2천 명 정도의 도시가 500개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도시는 인구 1천5백 명 이하의 작은 도시들이다. 특히 이렇게 작은 도시들은 시장이 열리는 시골 마을들로서 도시라고 하기도 어려운 수준이다.
독일에서 가장 큰 도시는 쾰른, 프라하였으나 이들 도시의 인구도 14세기에 4만 정도에 불과했다. 15세기 초에 인구 2만 5천 이상이 되는 도시는 네 개밖에 되지 않았다. 평균 인구가 4백 명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것을 보면 중세 시대에 유럽 도시들의 규모가 매우 작은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수십만에 이르는 많은 인구를 가진 아시아 지역의 대도시들과는 크게 비교된다.
도시의 구조와 상업적 성격
그러면 이 도시들은 서양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상업적인 것인가. 상공업이 특히 발전한 북이탈리아와 플랑드르 도시들의 경우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이 지역에서는 모직물 산업이 발전했고 그 외에 상업이나 금융업 등이 발전했다. 그러나 다른 지역들은 별로 그렇지 않다.
행정도시, 주교도시, 군사도시로서 발전한 곳도 많으며 상업이나 수공업이 발전한 곳도 도시내부와 주변 지역의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큰 의미는 없다.
예외가 있다면 북프랑스 상파뉴 지방의 정기시(定期市) 도시들이다. 트루아, 프로뱅, 바르-쉬르-오브, 라니의 네 도시인데 이 도시들은 11세기부터 시작하여 12-3세기에 전성기를 맞았다. 이 도시들에서는 매년 두 달씩 돌아가며 한, 두 차례 정기시장이 열렸고 여기에는 프랑스, 이탈리아 상인뿐 아니라 잉글랜드, 스칸디나비아, 이베리아 반도의 상인들까지 모여들어 국제적인 중개무역 도시로 발전했다.
그러나 도시의 규모는 가장 큰 트루아의 인구가 1만5천 정도로 크지 않다. 상파뉴 정기시들은 13세기말에 가면 쇠퇴하는데 그것은 상파뉴 백작이 다스리던 이 지역이 프랑스국왕의 왕령지에 병합되며 독립성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도시의 운명이 경제가 아니라 정치정세에 의해 결정된 셈이다.
도시 내의 상업이나 수공업은 길드 제도의 의해 묶여 있었다. 런던 시의 경우를 보면 금세공인, 재봉사, 비단상인, 포목상, 생선장수, 모피상, 소금상인, 잡화상인, 채소상인, 가구업 등 70개의 길드가 있었다. 작은 도시의 경우에는 길드가 없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여하튼 길드는 도시 내에서 어느 업종의 독과점을 위한 기구였다. 따라서 작업시간이나 작업의 종류, 상품의 질 등이 세세하게 규정되었다. 길드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물건을 만들지도 팔지도 못했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본주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따라서 중세도시를 자본주의와 관련시켜 말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다. 자본주의는 18세기에 길드 제도가 점차 해체되며 발전할 수 있었다.
법적 관할권과 도시의 자유
또 도시에 따라 다르기는 하나 도시민들은 주변 영주들의 지배를 받는 경우도 많았다. 농노와 같지는 않으나 영주들에게 여러 가지 부담을 져야 했던 것이다. 왕이나 영주들에 대한 예속은 법적 관할권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법적 관할권은 법을 통해 도시민을 직접 지배할 수 있고 또 재산의 몰수나 벌금, 수수료를 통해 많은 수입을 얻게 해주는 수단이었으므로 왕이나 주요 봉건영주들 사이에서 치열한 다툼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한 도시가 한 사람의 왕이나 봉건영주에 의해 다스려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도시 안에 여러 봉건적 관할권들이 겹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의 노위치(Norwich)시는 그 좋은 예이다. 이 도시는 1377년의 기록에 의하면 잉글랜드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고 여섯 번째의 부자 도시였다.
도시 한 가운데 서 있는 성은 형식적으로는 왕의 소유물이었으나 실제로는 베네딕트수도원의 소유로 도시 안에서 가장 큰 관할권을 갖고 있었고 캐로우 수도원, 웬스링 수도원, 성 베네딕트 히름 수도원도 상당한 관할권을 갖고 있었다.
노위치 대성당과 캐로우 수도원은 정기시장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통행세와 점포세를 통해 상당한 수입이 들어왔다. 또 도시 안에 있는 두 시장에 대한 권리는 다른 작은 수도원들이 갖고 있었다. 그 외 여러 세속영주들도 여러 관할권을 나누어 갖고 있었다.
도시민들은 1158년에 왕으로부터 시민권 특허장을 받았고 1194년에는 도시 내에서 왕을 대리하여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 받았다. 그러면서 조금씩 자율적인 행정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주교, 수도원장 등의 교회영주나 세속영주와 끊임없이 갈등을 벌였다. 왕은 교회와 도시민과의 다툼에서는 도시민의 편을 든 것이 아니라 교회의 편을 들었다. 따라서 도시의 자율성은 매우 좁은 한계 안에 있었고 그것도 끊임없이 위협을 받는 상태에 있었다.
프랑스의 리용 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전체 도시의 영주는 대주교였으나 도시의 관할권은 대주교좌 성당 참사회와 나누어 가졌다. 14세기 초에 도시 안팎에는 다른 수도원 아홉 개와 여러 개의 기독교법 학교들이 있었다. 그 밖에 성당기사단, 병원기사단 외에 5개의 탁발승 교단, 또 여러 개의 작은 교단들이 있었다. 이 기구들이 모두 나름의 법적인 관할권을 갖고 있었고 지대, 벌금, 시장으로부터 얻는 이익, 주조권, 십일조를 받는 권리 등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취했다.
시민들의 저항이 커지며 대주교는 제한된 것이나 도시민들에게 특허장을 수여했다. 이에 의해 도시민들은 어느 정도의 자율적인 행정을 보장받았다. 그래도 재판권은 제외되었다. 14, 15세기에 오면 대주교의 힘이 약화되어 15세기 중반에는 다른 대부분의 프랑스 도시들과 같이 왕의 관할 아래에 들어가고 그 행정은 관리들에게 인수되었다.
중세의 전 시기를 통해 리용의 도시민들은 부유했고 또 교회가 지배하는 행정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전체 도시를 지배한 적은 없다. 리용에서는 노위치보다 봉건적-교회적 성격이 훨씬 강했고 이는 왕에게 병합한 후에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이렇게 하나의 도시가 여러 영주권에 의해 분할되는 것은 다른 도시들도 마찬가지이다.
도시민의 자격과 계급적 구분
서양 학자들 가운데에는 지금도 중세도시들이 매우 자유로운 곳이었던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어떤 외부 사람이 도시로 들어온 지 1년 1일이 지나면 자유롭게 되었다고 말한다. 시민권을 얻어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도시의 공기가 자유를 만든다'(Stadtluft macht frei)는 것은 그래서 하는 소리이다.
아마 그런 때가 있었을 수는 있다. 14세기에 흑사병으로 많은 인구가 죽었을 때는 어디에서나 노동력이 필요했으니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특수한 예이지 일반적인 예라고 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도시생활은 엄격하게 통제되었으며 결코 자유로운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선 아무나 도시에 들어오면 시민권을 얻어 자유롭게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잉글랜드의 엑시터(Exeter)시에는 중세말의 자료가 남아 있는데 14세기 말의 인구는 약 3천 명 정도이다. 그런데 이 도시에서 시민권을 가진 자유인은 1377년의 경우 전체 가장(家長)의 19%로서 전체 인구의 3%에 불과했다. 가장의 1/5 정도만이 자유로운 신분을 가졌던 셈이다.
이것은 다른 도시도 거의 마찬가지이다. 14세기 초 런던의 자유인은 4만 인구 가운데 2천명에 불과했다. 5% 정도인 것이다. 피렌체 시의 경우 1494년에 인구 9만 명 가운데 자유인은 3%가 조금 넘는 정도인 3천명에 불과했다.
베네치아도 2천-2천5백 명 정도만이 시민권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중세도시에서 시민권을 갖는 자유인은 일반적으로 인구의 고작 2-3%에 불과했다. 그러니 도시를 자유로운 공동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특권이 지배하는 사회였고 소수의 귀족적인 지배층이 다스리는 사회였다.
또 자유인들은 대개 그 신분을 자식들에게 대물림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새로 시민권을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도시에 들어와 상당히 오랜 기간을 경과해야 했다. 그것이 몇 대를 지날 수도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상당한 규모의 재산을 모아야 했고 도시 내 유력자들의 후원을 얻어야 했다. 아무나 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제멋대로 도시로 들어 온 사람은 처벌을 받고 추방당했다. 그러니 농노라도 도시로 도망쳐 오면 자유를 얻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또 도시민은 여러 계급으로 구분되어 차별 대우를 받았다. 계급에 따라 사는 지역도 달랐다. 도시민이기는 하나 시민권이 없는 경우에는 성안에 살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또 계급에 따라 입는 옷, 심지어 착용하는 장신구까지 세세히 규정되어 있었다. 근대초인 1621년에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시는 도시민을 다섯 계급으로 나누는 법을 만들어 일상생활을 엄격하게 규제했다. 도시는 결코 평등한 곳이 아니었다.
유럽 중세도시의 실상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8> 유럽 중세도시는 자유로웠나? ②
3. 유럽의 중세도시들
도시의 형성과 규모
중세시대에 유럽에서 도시가 가장 발달한 지역은 이탈리아 북부 지방과 함께 지금의 프랑스 북부 해안지역과 벨기에가 포함되는 플랑드르 지역이다. 이 지역이 중세 시대에 유럽에서 상공업이 가장 발전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반면 다른 지역에서는 도시들이 별로 발달하지 못했다.
당시 이탈리아 북부는 특이한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신성로마제국의 판도 안에 들어 있었으나 황제가 독일 지역에 거주했으므로 관리가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지역의 도시들은 거의 독립적인 존재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것은 한 편에서 이탈리아 중부의 교황령에 자리 잡고 있던 로마교황이 황제를 견제하기 위해 도시들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11세기에 100여개였던 도시들은 14세기가 되면 점차 병합되어 30여개로 줄며 주변의 넓은 농촌지역까지 포함하는 상당히 큰 규모의 도시국가들로 발전했다. 그리하여 알프스 이북지역에서는 봉건영주들에 의한 봉건체제가 유지된 반면 이탈리아 북부에서는 귀족이 그 중심이 되는 도시국가 체제가 만들어졌다. 도시들이 거의 독립국가나 마찬가지의 성격을 갖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당시 피렌체나 베네치아, 밀라노, 제노바 같은 도시들은 주변 농촌 지역을 빼고도 인구가 10만 명 수준으로 당시 유럽에서는 가장 큰 도시들이다. 그 외에도 수만 명의 인구를 가진 도시들이 많다. 따라서 이탈리아의 도시는 다른 지역의 도시와는 크게 다르다.
플랑드르 지방의 헨트의 인구수는 13세기 중반에 8만, 브뤼헤는 4만 정도로 비교적 큰 편이다. 이 지역에서는 중세시기에 모직물 산업이 발전했고 또, 상업도시로서도 발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지역도 다른 곳에 비하면 특이한 예에 속한다.
알프스 이북에 있는 그 외의 다른 도시들의 규모는 비교적 작다. 프랑스의 경우, 가장 큰 도시인 파리가 14세기에 10만 정도였다. 그 외에 큰 도시로는 1300년에 몽펠리에의 인구가 4만, 리용이 3만, 나르본, 툴루즈, 스트라스부르, 오를레앙이 각각 2만 5천 정도로 추산된다.
영국의 도시는 1377년의 기록에 의하면 가장 큰 런던의 인구가 4만5천-5만 명 수준이었다. 그 외에 인구 8천-1.5만 명이 4개, 5천-8천 명이 8개, 2천-5천 명이 27개이고 5백 명-2천 명 정도의 도시가 500개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도시는 인구 1천5백 명 이하의 작은 도시들이다. 특히 이렇게 작은 도시들은 시장이 열리는 시골 마을들로서 도시라고 하기도 어려운 수준이다.
독일에서 가장 큰 도시는 쾰른, 프라하였으나 이들 도시의 인구도 14세기에 4만 정도에 불과했다. 15세기 초에 인구 2만 5천 이상이 되는 도시는 네 개밖에 되지 않았다. 평균 인구가 4백 명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것을 보면 중세 시대에 유럽 도시들의 규모가 매우 작은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수십만에 이르는 많은 인구를 가진 아시아 지역의 대도시들과는 크게 비교된다.
도시의 구조와 상업적 성격
그러면 이 도시들은 서양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상업적인 것인가. 상공업이 특히 발전한 북이탈리아와 플랑드르 도시들의 경우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이 지역에서는 모직물 산업이 발전했고 그 외에 상업이나 금융업 등이 발전했다. 그러나 다른 지역들은 별로 그렇지 않다.
행정도시, 주교도시, 군사도시로서 발전한 곳도 많으며 상업이나 수공업이 발전한 곳도 도시내부와 주변 지역의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큰 의미는 없다.
예외가 있다면 북프랑스 상파뉴 지방의 정기시(定期市) 도시들이다. 트루아, 프로뱅, 바르-쉬르-오브, 라니의 네 도시인데 이 도시들은 11세기부터 시작하여 12-3세기에 전성기를 맞았다. 이 도시들에서는 매년 두 달씩 돌아가며 한, 두 차례 정기시장이 열렸고 여기에는 프랑스, 이탈리아 상인뿐 아니라 잉글랜드, 스칸디나비아, 이베리아 반도의 상인들까지 모여들어 국제적인 중개무역 도시로 발전했다.
그러나 도시의 규모는 가장 큰 트루아의 인구가 1만5천 정도로 크지 않다. 상파뉴 정기시들은 13세기말에 가면 쇠퇴하는데 그것은 상파뉴 백작이 다스리던 이 지역이 프랑스국왕의 왕령지에 병합되며 독립성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도시의 운명이 경제가 아니라 정치정세에 의해 결정된 셈이다.
도시 내의 상업이나 수공업은 길드 제도의 의해 묶여 있었다. 런던 시의 경우를 보면 금세공인, 재봉사, 비단상인, 포목상, 생선장수, 모피상, 소금상인, 잡화상인, 채소상인, 가구업 등 70개의 길드가 있었다. 작은 도시의 경우에는 길드가 없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여하튼 길드는 도시 내에서 어느 업종의 독과점을 위한 기구였다. 따라서 작업시간이나 작업의 종류, 상품의 질 등이 세세하게 규정되었다. 길드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물건을 만들지도 팔지도 못했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본주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따라서 중세도시를 자본주의와 관련시켜 말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다. 자본주의는 18세기에 길드 제도가 점차 해체되며 발전할 수 있었다.
법적 관할권과 도시의 자유
또 도시에 따라 다르기는 하나 도시민들은 주변 영주들의 지배를 받는 경우도 많았다. 농노와 같지는 않으나 영주들에게 여러 가지 부담을 져야 했던 것이다. 왕이나 영주들에 대한 예속은 법적 관할권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법적 관할권은 법을 통해 도시민을 직접 지배할 수 있고 또 재산의 몰수나 벌금, 수수료를 통해 많은 수입을 얻게 해주는 수단이었으므로 왕이나 주요 봉건영주들 사이에서 치열한 다툼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한 도시가 한 사람의 왕이나 봉건영주에 의해 다스려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도시 안에 여러 봉건적 관할권들이 겹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의 노위치(Norwich)시는 그 좋은 예이다. 이 도시는 1377년의 기록에 의하면 잉글랜드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고 여섯 번째의 부자 도시였다.
도시 한 가운데 서 있는 성은 형식적으로는 왕의 소유물이었으나 실제로는 베네딕트수도원의 소유로 도시 안에서 가장 큰 관할권을 갖고 있었고 캐로우 수도원, 웬스링 수도원, 성 베네딕트 히름 수도원도 상당한 관할권을 갖고 있었다.
노위치 대성당과 캐로우 수도원은 정기시장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통행세와 점포세를 통해 상당한 수입이 들어왔다. 또 도시 안에 있는 두 시장에 대한 권리는 다른 작은 수도원들이 갖고 있었다. 그 외 여러 세속영주들도 여러 관할권을 나누어 갖고 있었다.
도시민들은 1158년에 왕으로부터 시민권 특허장을 받았고 1194년에는 도시 내에서 왕을 대리하여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 받았다. 그러면서 조금씩 자율적인 행정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주교, 수도원장 등의 교회영주나 세속영주와 끊임없이 갈등을 벌였다. 왕은 교회와 도시민과의 다툼에서는 도시민의 편을 든 것이 아니라 교회의 편을 들었다. 따라서 도시의 자율성은 매우 좁은 한계 안에 있었고 그것도 끊임없이 위협을 받는 상태에 있었다.
프랑스의 리용 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전체 도시의 영주는 대주교였으나 도시의 관할권은 대주교좌 성당 참사회와 나누어 가졌다. 14세기 초에 도시 안팎에는 다른 수도원 아홉 개와 여러 개의 기독교법 학교들이 있었다. 그 밖에 성당기사단, 병원기사단 외에 5개의 탁발승 교단, 또 여러 개의 작은 교단들이 있었다. 이 기구들이 모두 나름의 법적인 관할권을 갖고 있었고 지대, 벌금, 시장으로부터 얻는 이익, 주조권, 십일조를 받는 권리 등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취했다.
시민들의 저항이 커지며 대주교는 제한된 것이나 도시민들에게 특허장을 수여했다. 이에 의해 도시민들은 어느 정도의 자율적인 행정을 보장받았다. 그래도 재판권은 제외되었다. 14, 15세기에 오면 대주교의 힘이 약화되어 15세기 중반에는 다른 대부분의 프랑스 도시들과 같이 왕의 관할 아래에 들어가고 그 행정은 관리들에게 인수되었다.
중세의 전 시기를 통해 리용의 도시민들은 부유했고 또 교회가 지배하는 행정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전체 도시를 지배한 적은 없다. 리용에서는 노위치보다 봉건적-교회적 성격이 훨씬 강했고 이는 왕에게 병합한 후에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이렇게 하나의 도시가 여러 영주권에 의해 분할되는 것은 다른 도시들도 마찬가지이다.
도시민의 자격과 계급적 구분
서양 학자들 가운데에는 지금도 중세도시들이 매우 자유로운 곳이었던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어떤 외부 사람이 도시로 들어온 지 1년 1일이 지나면 자유롭게 되었다고 말한다. 시민권을 얻어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도시의 공기가 자유를 만든다'(Stadtluft macht frei)는 것은 그래서 하는 소리이다.
아마 그런 때가 있었을 수는 있다. 14세기에 흑사병으로 많은 인구가 죽었을 때는 어디에서나 노동력이 필요했으니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특수한 예이지 일반적인 예라고 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도시생활은 엄격하게 통제되었으며 결코 자유로운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선 아무나 도시에 들어오면 시민권을 얻어 자유롭게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잉글랜드의 엑시터(Exeter)시에는 중세말의 자료가 남아 있는데 14세기 말의 인구는 약 3천 명 정도이다. 그런데 이 도시에서 시민권을 가진 자유인은 1377년의 경우 전체 가장(家長)의 19%로서 전체 인구의 3%에 불과했다. 가장의 1/5 정도만이 자유로운 신분을 가졌던 셈이다.
이것은 다른 도시도 거의 마찬가지이다. 14세기 초 런던의 자유인은 4만 인구 가운데 2천명에 불과했다. 5% 정도인 것이다. 피렌체 시의 경우 1494년에 인구 9만 명 가운데 자유인은 3%가 조금 넘는 정도인 3천명에 불과했다.
베네치아도 2천-2천5백 명 정도만이 시민권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중세도시에서 시민권을 갖는 자유인은 일반적으로 인구의 고작 2-3%에 불과했다. 그러니 도시를 자유로운 공동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특권이 지배하는 사회였고 소수의 귀족적인 지배층이 다스리는 사회였다.
또 자유인들은 대개 그 신분을 자식들에게 대물림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새로 시민권을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도시에 들어와 상당히 오랜 기간을 경과해야 했다. 그것이 몇 대를 지날 수도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상당한 규모의 재산을 모아야 했고 도시 내 유력자들의 후원을 얻어야 했다. 아무나 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제멋대로 도시로 들어 온 사람은 처벌을 받고 추방당했다. 그러니 농노라도 도시로 도망쳐 오면 자유를 얻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또 도시민은 여러 계급으로 구분되어 차별 대우를 받았다. 계급에 따라 사는 지역도 달랐다. 도시민이기는 하나 시민권이 없는 경우에는 성안에 살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또 계급에 따라 입는 옷, 심지어 착용하는 장신구까지 세세히 규정되어 있었다. 근대초인 1621년에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시는 도시민을 다섯 계급으로 나누는 법을 만들어 일상생활을 엄격하게 규제했다. 도시는 결코 평등한 곳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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