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차사
고려 말엽 왜구를 물리치고 토지 개혁을 단행하여 국민의 신망을 함빡 한 몸에 받게 된 이성계는 드디어 고려 사직을 들러 엎고 이씨 조선을 세워 그 시조가 되었는데, 외부로 그처럼 화려한 반면에 가정사에 들어서는 매우 순탄하지 못하였다.
젊은 왕비 강씨의 책동으로 막내아들 방석으로 세자를 책봉하고 개국공신 정도전이 뒷배를 보게 되자, 실지 이조 개국에 가장 공이 컸던 다섯째 방원은 비상수단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도전과 배다른 동생 방번과 세자마저도 죽여 버리어 자신의 지반을 굳히었다.
태조는 세상에 뜻이 없어 임금자리를 둘째 방과에게 물려 주고 상왕의 자리에 있으면서 정떨어지는 새 서울 한양을 떠나 송도 옛 서울로 가 있었는데, 이어 방원이 왕위에 오르게되매 단연 소매를 떨치고 자신의 발신한 곳인 함흥으로 내려가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새 임금 태종은 체통으로 보나 또하나 정치적인 불안감도 있어, 자주 돌아오십사고 사신을 보냈는데, 그 보내진 사신들을 그때마다 극도로 노여움에 차 있는 태조에 의하여 차례로 목숨을 잃었다. 물론 늙마에 고적감에 젖은 태조는 여러 사람의 권고로 오랜만에 한양 서울로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그 사이 계속 보냈던 사신들은 가기만 하였을 뿐 하나도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래서 가고는 돌아오지 않는 것을 흔히 함흥차사라고 하게까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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