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지자도 불가무라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 농성 중의 일이다. 끝까지 버티어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의 뜻은 장하나 그만한 실력은 없고 그렇다고 화의를 받아 들이자니 전고에 없던 일이라 결정을 못 내리는 중에 시일만 천연하여 이젠 무릎 꿇고 항복할 수 밖에 없는 극단의 지경에 도달하고 말았다. 그래 항서를 써 놓고 장차 청진에 가려 하는데 예조판서 김상헌이 들어와 이것을 찢어 던지며 통곡하였다.
본시 화의를 이끌어 오던 이조판서 최명길은 "이미 적을 당할 순 없고 척화하는 것을 청의라 하겠지만 나는 혼자 더러운 이름을 받을지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하고 이것을 차근차근 줏어 맞추었다. 그래 그때의 사람들이 "찢는 사람도 없어서는 안되겠고 줍는 사람도 없어서는 안되겠다"고 하였다 한다.
화의가 성립되자 김상헌은 목을 베어 자결하려다 이루지 못하고 후에 삼학사와 함께 심양까지 끌려가 여러 해 고초를 겪은 뒤에서야 놓여 나왔다. 함께 잡혀 갔었는데 진중에서의 꿋꿋한 태도를 보고 김상헌도 오해를 풀어 서로 화목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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