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놋사의 굴욕
유럽에서는 중세 봉건사회의 확립과 함께 기독교가 서구일대를 교화하여 로마 카톨릭교회의 권위는 정신적인 것에서부터 세속적인 것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그와 함께 교회는 차츰 부패하고 속되게 되었으며 교황의 권위를 위협하게 되었다. 특히 962년 독일황제 '오토' 1세가 이탈리아을 병합하여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오른 후로는 교회의 임명권까지 갖기에 이르렀다. 이와 함께 교회내부에서도 개혁운동이 차츰 적극성을 띠게 되었는데 1073 년 '그레고리' 7세가 교황의 위에 오르자 속인, 즉 황제에 의한 사교임명을 금한다는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그로 말미암아 당시의 로마황제 '하인리히' 4세와 정면 충돌을 하게 되었다. '하인리히' 4세는 자기의 힘만 믿고 교황의 폐위를 선언하자 교황은 이에 맞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해 버리고 말았다. 이 파문 조치의 효과는 놀라운 것이어서 교회는 물론 제후와 신하들까지도 황제를 등지고 교황에게 섰다. 당황한 '하인리히'는 굴복을 자인하고 '카놋사' 에 있는 교황을 찾아갔다. 때마침 몰아치는 눈보라를 무릅쓰고 교황의 성 앞에 몇 시간 동안이나 서서 용서를 빈 끝에 간신히 뜻을 이루었다. 이 사건이 사상 유명한 '카놋사의 굴욕'으로 교회의 권위가 세속의 최고 권위까지 굴복시켰음을 보여주는 특정적인 보고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