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마카아벨리 평전 - 제21장 (역사가이자 희극 작가이며 비극 작가) 니콜로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는 그가 역사 집필로 다시 돌아갈 당시 입에 올린 것 외에는 비극 작품을 쓴 적도 없고 또 그렇게 하려고 작정한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슴속은 자신이 (군주론) 마지막 장에서 기원한 일에 귀기울이려 하지 않았던 군주들을 마치 극 속에서처럼 준엄하게 꾸짖기에 모자람이 없을 만큼 비극적 생각들로 가득하였다. 그는 이미, 대 로렌초의 죽음에 뒤따른 (외세의 침략)에서 출발하여 미켈란젤로식의 단축법으로 묘사된 기만과 오류의 미로를 거쳐, 앞에서 말한 최근의 편지에서 스스로 예언한 그 치명적인 결말에 이르는 과정을 힘찬 필치로 그려내고 있었다.
(모로네는 포로로 잡혔고, 밀라노 공국은 빼앗기고 말았지.) 그에게는 자신이 그리고 있던 비극 작품의 마지막 막 마지막 장처럼 보였던 이 사건은 사실 파비아 전투 이후 이탈리아의 지배자들이 재개했던 그 비열한 정치 게임을 종격함과 동시에 그 성격을 요약하는 것이었다. 교황 클레멘테는 그 스스로 황제의 수중에 떨어지고 있음을 보면서도, 또다시 에스파냐를 이탈리아에서, 특히 밀라노 국에서 축출하기 위한 동맹(1526년의 코냑 동맹-옮긴이)을 결성하고자 작정하였다. 밀라노에서는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유명한 용병 대장이었다가 1450년에 밀라노 공이 된 프란체스코가 아니라, 그의 손자이자 흑안공 로도비코의 아들인 프란체스코 마리아, 즉 프란체스코 2세를 가리킨다-옮긴이)가 조약의 결과에 따라 (황제의 그늘 아래) 사실상 허수아비로 전락해 있었다. 일을 좀더 쉽게 진행시키기 위하여, 교황은 당시의 정치 관습에 따라 가장 비틸리고도 어려운 길을 택하였다. 즉 징병은 자기 편에서 한 뒤 통합군에 대한 지휘권은 페스카라 후작에게 맡긴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출생이기는 했지만 출신 가문상으로 에스파냐계에다 이탈리아적 대의에 반하는 인물로, 더욱이 당시 교황이 싸우고자 하는 바로 그 에스파냐 군의 지휘관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음모를 생각해 낸 자는 밀라노 공의 비서로 바람의 방향을 기막히게 알아냈던 지롤라모 모로네였다.
페스카라는 이러한 제의를 별다른 항변 없이 그냥 듣기만 하다가, 즉시 황제에게 알였다. 이는 필요시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배반할 여지를 두면서도 현재의 위치를 지킬 수 있도록 하는 능란한 방책이었다. 물론 그가 이 경우만 그리고 그만이 이렇게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모로네와 황제 사이에서도 그런 방법을 썼던 적이 있었다. 스포르차는 황제와 프랑스 왕 사이에서 그렇게 행동했고, 교황 역시 이쪽저쪽 자신의 강적들 틈바구니에서 그렇게 했다. 클레멘테는 한편으로 황제의 장국을 꼬드기면서 동시에 황제에게는 장국을 조심하라는 편지를 썼다. 그들 모두가 이중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동안 페스카라와 모로네가 변절자라는 말이 나돌았던 적도 있지만(즉 모로네는 친구들을, 페스카라는 적에 대한 서약을 배반했다는 것), 결국 모로네는 옥에 갇히고 공국 전체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한 에스파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탈리아를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당시 클레멘테는 더울 취약해진 위치에다 황제의 의혹은 날로 커져 가고 있는 상황에서, 프랑스와 힘을 합쳤으면 하고 생각했지만, 왕이 풀려나기 전에는 그쪽으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바랄 수 없는 처지였다. 그리고 왕이 풀려나는 문제 또한 칼의 요구가 너무 지나쳐서 큰 난관에 봉착해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거의 절망에 빠져 있다가, 페스카라 후작이 죽었다는 소식에 약간의 위안을 얻었다. 적군의 주요 지휘관이 죽었다는 것이 그에게는 커다란 이점으로 느껴졌다. 그는 이처럼 쓸데없는 희망 속에서 세월을 흘려 보내고 있었다. 그런 사람은 베르니처럼, 당신은 할 수 있느뇨, 파파 키멘티여,
그렇게 무기력하고 그렇게 우둔한데도,
하늘로 하여금 스스로를 눈멀게 귀멀게 하고
더불어 모든 감각까지도 다 빼앗아가 버리도록?
이라고 적나라하게 모욕하는 것에보다는 비극시에 더 잘 어울리는, 영원한 불확실성을 지닌 극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교황의 그러한 무기력증을 비꼰 마키아벨리의 말도 없지는 않다. (그는 시간이 있다 싶으면, 그것을 적에게 넘겨준다.) 어쨌든 당시와 같이 급박한 시점에 같은 피렌체인들의 정신과 태도를 숙고하기에 이른 그는, 자기 편이든 혹은 이탈리아의 다른 나라든 간에 (죽든 살든 무언가 대의로 삼을 만큼 명예롭고 용감한 일)이라고는 해온 적이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는 이를 귀차르디니에게 보낸 1525년 12월 19일자 편지에다 썼다. 이 내용을 제외하면 이 편지는 자신이 파엔차 체류 이후에 이미 말했던 것처럼, 교황에게 그의 세 딸을 위해 후한 지참금을 마련해 주십사 청할 것을 다시금 권하는 등, (신변잡기)로 일관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다시 단테에 의지하여 친구에게 로메오의 전례를 인용한다.
그에게는 딸이 넷 있었고, 그 각각이 모두 여왕이었지... 하지만 귀차르디니는 마키아벨리와는 달리 시인도, 시를 즐겨 읽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이 19일자 편지에대한 26일자의 답장에서, (로메오의 동화인지 설화인지 그 이야기를 찾아보려고 로마냐에 있는 단테의 책들을 모조리 훑었고) 결국에는 주석 없이 본문만 있는 것만을 겨우 입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속직히 고백하였다. 그리고는 이 제기발랄한 친구에 대해 반은 칭찬으로, 반은 미덥지 못하다는 투로 이렇게 말을 끝맺었다. (내 생각으로는 그것이 평소 자네가 가지고 있던 그 끝없는 저장고 속에서 나온 것임에 틀림없어.) 로메오, 그는 누구였단 말인가? (여기서 로메오란 바르셀로나 백이자 프로방스 후작이었던 레이몽 베랑귀에 4세(1131-1162)의 프로방스 궁 집사였던 로미외 드 빌레뇌브를 가리킨다. 마키아벨 리가 그를 언급하고 있는 1525년 12월 19일자 편지에 의하면, 로메오는 딸이 넷이었던 프로방스 공에게 첫딸이 출가를 잘 해야 나머지도 혼인이 순조로울 것이라 조언하였다. 그리하여 공은 첫딸에게 후한 지참금을 주어 프랑스 왕(성왕 루이 9세)에게 시집보냈으며, 이어 나머지 딸들도 모두 유럽 왕가들에서 왕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키아벨 리가 로메오의 일화를 인용한 것은 귀차르디니 역시 교황에게 청을 넣어 딸에게 후한 지참금을 내리도록 해서 좋은 혼사를 마련하라는 뜻에서이다-옮긴이) 총독은 심지어 공적인 일에서조차 방향을 잃고, 모든 사람이 반대하는 그 대담한 선택에 자신은 싫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인 양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만을 남길 뿐이었다. (나는 태풍이 불어오는데도 몸을 피할 생각도 않고, 우리처럼 길 가운데에서 아무런 방비도 없이 서 있는 사람은 들은 적이 없네. 그러므로, (...) 우리는 스스로 나라를 빼앗겼다고 하기보다는 불명예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을 손에서 내팽개쳐버렸다'고 말할 수 있겠지.)
사정이 이러하므로, 다른 것보다 (만드라골라)의 상연 문제에 관해 생각해 보는 편이 더 나았다. 사실 귀차르디니는 편지에서, (적어도 이 일만큼은 우리 권한 안에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으로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으며, 더욱이 이렇게 뒤숭숭한 때일수록 오락은 더 요긴한 법)이라며 만사 제쳐두고 이 분제부터 챙겼다. 배우들은 모두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나, 정작 (아르구멘토 argumento), 즉 그예리하면서도 통렬한 색조의 아름다운 프롤로그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식으로 고쳐 썼으면 하였다. 그러나 귀차르디니는 자신의 친구에게 부탁하여 청중들의 수즌에 맞추어 다른 대사를 쓰도록 하는 게 어떠냐고 제의하였다. 어차피 연극은 저자 자신이 아니라 청중들의 자화상이 될 터였다. 그는 그 해의 경우 2월 13일에 끝나는 사육제 마지막 날들 중 어느 하루를 잡아 무대를 꾸미고 싶어했고, 작가는 어떻게든 그곳에 참석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그래서 그는 마키아벨리에게 정월 그믐께쯤 와서 사순절까지 머물다 가라고 권유하였다. 그때쯤이면 (귀인을 모실 방들)도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이는 바르베라를 염두에 둔 마로, 그녀는 연극의 서두에 노래하게 되어 있었다. 귀차르디니는 (이 문제가 그냥 무시하고 넘겨버릴 일이 아니라면서) 그가 어떻게 하기로 작정했는지를 (심각한 어조로) 묻고는 편지를 끝맺었다. 그 자신이 이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은, 모든 점에서 볼 때 스스로가 사용하려고 단골 인쇄업자 지롤라모 손치노에게 부탁하여 만든 것으로 보이는 작지만 훌륭한 연극 대본에서 잘 나타난다. 평소 그는 총독이 오락과는 거리가 먼 포고문 등속의 무거운 글들을 인쇄하기 위해 이용하곤 했던 사람인데, 이번에야말로 그도 맡은 일에 틀림없이 신나했을 것이다.
이 편지에는 희극과 비극이 시종일관 묘하게 뒤섞여 사람을 그는 특이한 매력이 있는데, 마키아벨리의 1월 3일자 담장 역시 그러한 분위기를 담고 있다. 희극 문제에서 그는 과연 바르베라가 올 수 있을 것인지 확답하지 못하는 처지였다. (왜냐하면, 그녀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할 만한 애인들이 있기 때문이네. 하지만 어떻게든 일이 되도록 할 수 있을걸세.) 오, 가엾은 니콜로여! 하지만 그나 그의 연인이나 모두가 오고 싶어했고, 바로 이때를 위하여 막간곡으로 새로이 곡을 붙인 5곡의 노래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 노랫말은 그의 편지 속에 적혀 있다. 비극의 측면을 보자. 만약 황제가 권력의 우위에 서고자 한다면 결코 왕을 풀어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붙잡혀 있을 동안이라야 황제는 프랑스와든 교황과든 조약을 완전히 깨뜨리거나 혹은 거꾸로 체결해 버리지 않고 다만 조약의 가능성만을 남겨놓은 채, 그들을 가지고 놀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탈리아인들이 프랑스와 연합하려는 낌새가 보일 때면, 그는 또다시 프랑스와 협상에 나서 이탈리아와의 조약을 불발로 끝나게 함으로써 스스로가 승리하게 되는 것이네.)
며칠 전, 교황, 베네치아, 프랑스가 한편에 선 이탈리아 동맹에 관한 소식이 전해졌다. 듣기로, 상황은 매우 괜찮은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새로운 소식이 들어왔다. 왕과 황제가 드디어 협상을 끝냈는데, 그 내용은 왕이 자신을 풀어주는 대가로 부르고뉴를 양도하고, 거액의 몸값을 지불하며, 이탈리아를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의 황제권을 인정하고, 게다가 두 아들을 인질로 준다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대가로 프랑스 왕이 받는 것은, 그것을 대가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승리자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는다는 것뿐이었다. 마키아벨리의 판단으로는, 칼이 그렇게 협상을 끝냈다면 그 이면으로 프랑스가 교황과의 동맹을 파기했을 것이 틀림없고, 사태가 이렇다면 그가 프랑스와 했던 약속 역시 파기될 것이었다.
교황과의 동맹이나 황제와의 협상에 관한 이처럼 삐걱거리는 소문들은 몇 주 후 약간 다른 점은 있었지만 거의 사실로 드러났다. 그러나 동맹에 대한 정보를 더 직접적으로 접하고 있던 귀차르디니는 친구가 선술집 잡담식으로 그것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읽고는 틀림없이 웃었을 것이다. 그가 심중에 감춘 큰 비밀을 생각할 때, 그의 미소는 자신이 종종 마키아벨리의 입가에 번지는 것을 불안스레 바라보던 그의 조소와 그리 다르지 않았으리라. 그 비밀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1월 중순경, 교황은 어떤 중요한 일로 그를 로마에 불러들였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슬쩍 전해 왔다. 프란체스코는 이리저리 숙고를 거둡하고 일에 대한 보수와 같은 (세부 조건)에서도 적지 않게 밀고 당기고 한 끝에 결국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12월 4일까지도 그는 과연 교황이 자신에게 무슨 일을 맡기려 하는지 듣지 못한 상태에 있었고, 그 이후로도 여전히 추축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클레멘테가 프랑스와 연합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에게 맡기려는 임무가 바로 먼저 그 문제를 담판짓고 이어서 전쟁을 치르게 하려는 것이었음을 알게 되자, 그는 평소에는 차가운 자신의 성품에도 불구하고 즉시 몸 전체가 확 달아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가 듣기로, 이제 문제의 핵심을 충분히 이해하게 된 그는 (세부 조건)을 두고 그토록 밀고 당긴 자신의 태도를 후회했다고 전해진다. (왜냐하면 내가 이 임무로부터 얻을 수 있는 최대의 만족은 성하께서 가만히 앉아 굴종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이를 비밀로 하였다. 하지만 그가 사육제 동안의 연극 상연 건으로 마키아벨리에게 편지를 하고 그와 바르베라를 초청한 것이 자신의 심중을 감추자고 한 행동만은 아니었다. 홰냐하면, 그는 자신이 언제 일을 맡게 될는지도 잘 몰랐고, 더욱이 황제의 정책이 오락가락하는 데다 교황 역시 우유부단해서 과연 그 계획이 실행될 것인지조차도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다음 해인 1526년 1월 3일가지도 모든 것이 답보 상태였으므로, 귀차르디니는 계획이 거의 무산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6일, 움직이라는 지시를 받은 그는 20일 피렌체를 향해 길을 떠났고, 그곳에 도착하여 나흘을 머물렀다. 그는 자신이 온 이유를 비밀로 해야만 했기 때문에, 틀림없이 그곳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비밀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했다. 즉 (만드라골라)의 파엔차 공연은 실행되지 못했으리라는 것, 설사 이루어졌다 해도 그 자리에 귀차르디니는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마키아벨리도 참석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에게는 위안 거리가 있었다. 바로 그 사육제 기간 동안 베네치아에서 자신의 작품이 전례없는 호평 속에 상연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곳 피렌체 사회의 요청으로 무대에 올려진 것인데, 같은 날 저녁 일단의 베네치아 신사들은 이에 대항하는 의미에서 플라우투스의 (메니이크미 Menaecmi)를 번역하여 상연하였다. 이 연극은 최고의 배우들을 기용하고 무대와 의상에도 막대한 액수의 돈을 쏟아부었지만, 피렌체 희극과 비교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은 무대였다는 평을 받았다). 이렇게 (만드라골라)가 대성공을 거두었다는 소문을 들은 바로 그 베네치아 신사들과 배우들은 자신들의 연극을 상연했던 바로 그 저택에서 다시 한번 그 작품으로 무대를 꾸며 줄 것을 피렌체 사람들에게 간절히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이 공연을 본 관객들은 커다란 만족감을 표시했고 작가와 배우에게 열렬한 찬사의 말을 보냈다. (만드라골라)가 베네치아에서 성공을 거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사누도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1522년 사육제에 그것에 상연되었을 때, 엄청난 수의 관객이 쇄도하는 바람에 공연을 끝낼 수가 없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고대인이라면 자동적으로 훌륭하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던 시대에 고대 작가와 겨류어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은 희극에 대한 마키아베리의 예술적 재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하나의 좋은 예라 하겠다.
하지만 희극 작가이자 역사가이며 비극 작가인 그가 당시 관심을 쏟고 있었던 것은 희극 작품이 아니라 역사였다. 귀차르디니와 나눈 편지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는 비극과 희극 사이에서 결코 비극을 쓰고자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고 때로는 (그 일에 깊이 빠져 있기도) 했으나, 어쨌든 다시 역사 쓰기를 시작하였다. 이제 그는 (모든 것이 끝나기 전 ante res perditas) (앞서 나왔던 (post res perditas)를 저자가 바꾸어 표현한 것-옮긴이) 피렌체 서기장들의 역사 찬술 전통을 이어받겠다는 작정으로 집무중에 수집, 발췌해 왔던 편지들을 간추리고 요약하는 작업으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벌서 20년이나 묵어버린 이 서류들 속에는 부분적이긴 하지만 이미 역사 드라마의 윤곽이 드러나 있었다. 몇몇 인물들의 모습도 경쾌하게 스케치되고 있다. 알레싼드로 6세의 경우는 이렇다. (사악한 교황. 머리에는 밀라노와 피렌체를 협잡하려는 간계가 가득하다. 하지만 시간은 그의 편이다.) 흑안공에 대한 묘사는 또 이러하다. (로도비코 스포르차. 가벼운 성격. 이것저것 수시로 바라고 두려워하고 집착하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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