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마카아벨리 평전 - 제17장 (카스트루초 전)과 (전술론). 1/2
보잘것없는 돈에도 불구하고 역사 쓰기를 택하다
로렌초 데 메디치의 죽음은 그의 아버지인 피에로가 죽었을 때와 꼭 마찬가지로, 피렌체에서 메디치 정권의 입장을 오히려 호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오르시니 가와의 새로운 혈연 관계, 새로운 혈연 관계, 새로운 공작령의 획득, 프랑스 앙가와의 새 결속 관계, 어머니로부터 받은 나쁜 영향, 조신들의 잘못된 조언. 이 모든 것이 위대했던 대 로렌초의 적출로서는 마지막이었던 인물에게서 피렌체적 (문화 civilta)(이말은 넓게는 문명, 문화, 좁게느 푸뮈, 세련미 등을 가리키며, 르네상스 이탈리아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핵심어이다. 마키아벨 리가 군주론 26장에서 알프스 이북의 사람들을 야만적 barbaro이라 불렀을 때, 그가 그 반대 개념으로서 염두에 두고 있었더 srjt도 바로 이 말이다. 이는 주로 도시적 성격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에, 개념적으로 가장 가까운 말은 도시적 세련성을 가리키는 urbanita가 elf 것이고, 그 반대 개념어느 시골 농촌의 촌스러움을 지칭하는 barbarie 일 것이다-옮긴이)를 빼앗아가 버렸다. 사실 이는 피렌체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유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으로, 그들은 때로 자유는 기꺼이 포기하기도 했으나 이 문화만은 결코 그렇게 하려 하지 않았다. 로렌초는 말년에 마치 군주처럼 소수의 근신들에 둘러싸여 지냈으며, 스스로도 무소불위의 군주인양 생각했다. 그래서 대 로렌초의 뒤를 이은 진정한 계승자로, 로렌초의 행동을 내심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교황 레오네 외에는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교황 레오네 10세는 대로렌초(149-1492)의 차남이며, 여기서의 로렌초는 교황의 형인 피에로의 외아들이자 레오네의 조카이다-옮긴이).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야코포 살비아티와 란프레디니 등과 같이 한때는 메디치파이자 동시에 공화국에 충실했던 시민들에게 그가 얼마나 무례하게 대했는지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숙부인 줄리오 추기경조차도 그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로렌초느 금방 땅에 묻히지 않았다. 그 전에 추기경이 피렌체로 급히 와서 도시를 손아귀에 틀어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곧바로 시정을 장악하였다. 그는 적어도 고위관리들의 복종을 받아낼 만큼은 다시 권력을 확보하였다. 그는 좀더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였다. 혹은 적어도 그렇게 하는 체는 하였다. 그는 행동에서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도록 노력했고, 남의 말을 끈기있게 들엊는 모습도 보였다. 관직은 그것을 찾는 사람들의 집요한 공세가 아니라 그 사람의 공적에 따라 나눠주었다. 그는 공금을 자신의 개인 재산만큼이나 잘 관리했기 때문에, 언제나 이 as제에 민감한 피렌체인들은 이에 깊이 감사하였다. 비록 그의 개인적 이재방식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했지만 말이다. 교황 레오네와는 달리 그는 잡담이나 도박, 또는 익살 같은 것을 싫어하였다. (근느 사람들의 품성을 관찰하는데 남다른 호기심을 보였기 때문에, (...) 한가할 때면 어떤 직업을 가졌든 그 방면에 학식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였다.)
이처럼 피렌체 국정의 상황이 바뀐 데다 이런 유의 인물이 교황을 대신하여 시정을 관장하고 있었으므로, 마키아벨리와 같은 인재가 머리가 텅 빈 로렌초 시대에서처럼 마냥 잊혀지고 내팽개쳐진 상태로 남아 있지는 않을 터였다. 앞서 이미 말했듯이, 레오네가 서기장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소데리니와 가깝다거나 자유 공호국에 봉직했다는 점 이상으로, 그가 로마나 프랑스의 궁정에서 자신이나 동생인 줄리아노와 맞닥끄렸을 때, 물론공직자롯의 책무에서 그랬던 것이지만, 그들에게 보인 냉랭한 태도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생아인 줄리오는 메디치 가라는 나무에 푸릇푸릇한 새순이 가득했을 동안에는 뒷전의 그늘로 밀려나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경우 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로마 시절 마키아벨리에 대해 그가 보인 태도는 사실 레오네의 노한 기분을 대신 표출한 것이었다. 줄리아노가 그를 임용하려는 데 대해 레오네가 반대한 일은 앞에서 살핀 대로이다(이 책 15장 261쪽을 볼 것-옮긴이). 하지만 줄리오가 피렌체의 국정을 책임지게 되자, 적어도 사소한 사안에 관해서는 자신의 생각대로 해도 괜찮을 만한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마키아벨리가 줄리오를 만난 것은 1520년 3월 10일께인데, 이는 베토리보다는 더 친절했던 로렌초스트로치를 비롯한 원회의 여러 친구들이 주선해 준 덕분이었다. 줄리오는 그를 친절히 맞아주었다. 필로포 스트로치는 이 모임에 대해 듣고는 자신의 형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형이 마키아벨리르 메디치 가에 소개해 주었다니 매우 기쁘군요. 그가 만약 주인의 신임만 얻을 수 있다면 그의 출세는 보장받은 것이나 다름없겠지요.)
마키아벨리의 재능에 관해서는 조금이라도 머리가 있다면 그 누구도 입댈 사람이 없었지만, 스트로치의 이 말은 그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그가 지금까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던 것은, 물론 진중함이 부족하고 의견을 냄에 있어 다소 허풍을 떠는 면이 있으며 시를 폄하하는 등 스스로의 이름을 깍아내리는 어떤 성품에도 이유가 일부 있기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지배자의 미움을 샀다는 데에 기인하고 있었다. 이제 마침내 얼음은 깨어졌고, 그들은 아마도 그가 할 만한 무언가를 주게 될 것이었다. 우리는 그와 추기경 사이에 어떤 말이 오고 갔는지 모른다. 그러나 약간 뒤에 기록된 문서와 사태 발전의 추이를 통해 판단할 때, 짐작건대 추기경은 그에게 (일터에서 여전히 두들겨 만들고 있는) 일은 무엇인지, 또 자신이 그를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에 관하여 물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그날로 구체적 방법까지 거론되어, 서기장이 첫 (십년기) 이래 역사 서술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왔다는 오래된 이야기로 옮아간 듯하다.
그러나, 마키아벨 리가 당시 쓰고 있었던 저작은 7권으로 구성된 (전술론 Arte della Guerra) (전술론이란 제목이 뜻하는 바는 물론 전술, 전략이라는 현대적 용어의 협소한 것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의 군사론 전체를 포괄한다. 우너래 마키아벨 리가 붙였던 (De re militari)란 이름도 바로 이러하였다. 그래서 이 원래의 제목을 살리 수도 있겠지만, 이 저작이 저자의 승인 아래 그 생전에 간행된 것이라는 사실 이 저작은 마키아벨리의 주요 작품들 중 그가 살아 있을 때 출간(1521)된 유일한 것이다-옮긴이) 이었다. 이는 로렌초 스트로치가 최근 자신에게 베풀어준 호의에 감사하는 뜻에서 그에게 헌정된 것으로, 속어로 된 책에다 라틴어 제목을 붙이느 swj자의 습관ㅇ 따라 애초에는 (군사론 De re militari)으로 명명되었다. 그에게 군사학이란 단지 정치학의 일부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시민 생활에서 군사적 측면을 떼어낸 것이야말로 이탈리아 병의 시작이었다는 점을 굳게 확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새로운 저작은 (군주론) 및 (리비우스 논고)와 필연적으로 보완 관계에 있으며, 그 사상과 정서에서 놀랄 만큼 일관성을 보이고 있다. 이는 1516년 파브리치오 콜론나의 원회에서 이루어진 가상적인대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콜론나와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은 뤼지 알라만니, 자노비 부온델몬티, 바티스타 ef라 팔라, 그리고 누구보다도 코지모 루첼라이 등의 인물들이다. 특히 코지모의 경우에 대해서는 깊은 애정에서 우러나오는 저자의 애석함이 곳곳에서 잘 표출되어 있다.
여기서 가장 부각되어야 할 점을 든다면, 그것은 마키아벨 리가 (전술론)에서도 역시 고전 작가들에 대한 (끊임없는 독서)와 현대의 사건들에 대한 자신의 (오랜 경험)을 결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피사 전쟁기 동안, 그리고 발렌티노와 줄리오 2세와 프랑스와 스위스와 독일에 사절로 나가 있는 동안, 언제나 자신을 이끌었던 군사 문제를 주의 깊게 지켜보면서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을 그것에 쏟아부었다. 그의 관찰은 민병대 제도의 도입에 도움을 주었고, 이는 다시 군사 문제에 대한 그의 경험을 더욱 풍부하게 해주었다. 이 문필가는 군인들에게 그들 자신의 기예를 가르치려 들면서도 감히 다음과 같은 주장을 내놓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말을 귀담아 들었어야 했던 군주들도 적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친 자만 속에서 행동으로만 나타내 보이려고 했던 역할을 말로 한다고 해서 잘못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란 인물은 어떤 생각을 하건 간에 항상 놀랄 만큼의 참신성과 예견력을 보여주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도 사람인 이상 편견이나 정념으로 인해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지만 말이다. 고대로부터 비친 빛줄기가 때로는 그를 밝게 해주기보다는 오히려 눈을 부시게 만들어서, 그로 하여금 장차 무기의 발전 양상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이 될지를 미처 내다보지 못하도록 할 수도 있었다. 이 책이 씌어지던 당시 그는 그러한 무기의 효과에 대해 잘 알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것을 목격할 만한 경우라고는 그때로서는 가장 최근에 일어났던 마리냐도 전투 정도를 들 수 있겠는데, 그는 이에 대해 상세한 보고서를 접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군사학의 불변적 측면에 관한 한, (당시로서도 놀라운 저술이었을 뿐만 아니라 언제까지나 그러할) 정도로 계속 변함없는 인정을 받았다. 마키아벨리는 근대적 전술의 기초를 다진 최초의 인물이었으며, (그는 정치학의 기초를 놓았던 때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감연한 지성으로써 그 일을 헤쳐나갔다)는 빌라리의 정평 있는 평가는 지금도 여전히 귀기울일 만하다. 더웅ㄱ이 앞서 말한 대로, 그는 직관력을 발휘하여 이 책에서 전쟁과 정치 사이에 존재하는 강한 결속 관계를 꿰뚫어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군사론을 다룬 이 책에서 (리비우스 논고) 및 (군주론)과, 그리고 지난날 자신의 경험과도 가장 긴밀히 연관되고 있을 뿐 아니라, 전기 작가로 하여금 그의 날카로운 통찰력과 깊은 열정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국가란 반드시 스스로의 군대로 무장해야만 하며, 병사들은 폭력과 약탈과 기만을 일삼는 용병이 아니라 결코 상스럽지 않고 (신을 두려워 할 줄 알며) 조국을 위해서는 죽음도 마다 않는 훌륭한 시민이어야 한다는 그의 기본 개념들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저자가 파브리치오 콜론나의 입을 빌러(실제의 그는 아마 정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었으리라!) 피렌체 민병대를, 바로 그들만의 민병대를 칭송하고 나아가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것을 듣게 된다. 그는 (그 결과가 언제나 좋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현인들이 항상 반대했다)는 비판에 대해서, (문제는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곱색보라)고 응답한다. 이 문구는 1권 거의 첫머리에 나오는데, 책의 말미에서도 말이 거의 바뀜이 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 끝부분은 (군주론)의 마지막 장과 비교해서도 그 열정과 설득력이 결코 뒤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노 콜론나는 이야기를 듣는 젊은이들에게 이탈리아인의 가슴속에 잠들어 있는 고대의 용맹심을 되살려내라고 외친다. (시와 그림과 조각에서 목격했듯이, 이 땅이야말로 죽은 것을 부활시키기 위해 탄생한 곳이 아니던가?)
마키아벨리가 이 저작을 다듬어가고 있을 때, 새로운 메디치 가의 호의 덕분으로 그의 미래도 밝아오고 있었다. 4월 26일 친구이자 원회에서 가까운 사이였던 바티스타 델라 팔라가 로마에서 좋은 소식을 한 보따리 보내왔다. 그는 오랫동안 메딫 가에 봉사해 온 이력에다 굉장히 값나가는 흑담비 모피를 선물한 덕분으로 교황궁과 매우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지적인 모임을 좋아하는 교황에게 자신들의 원회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들 모두가 마키아벨리의 재능을 높이 사고 있다는 말을 전한 적이 있었다. 또 그는 (만드라골라)에 관해서도 후한 평을 했는데, 이는 당시 이미 교황청에서 상연될 예정으로 있었다. 레오네란 인물은 (군주론)보다는 봄 질척거리는 희극 같은 것에 더 쉽사리 넘어가는 그런 유의 사람이었다. 그는 아마도 농담은 즐기고 쓴 말은 뱉어가며 연극을 보았으리라. 그 교활한 조신은 먼저 교황의 기분을 맞춘 다음, (저술이나 또는 다른 일에 대한 보수)로, 마키아벨리에 대한 자신의 후의를 표시한다는 말을 그로 하여금 메디치 추기경에 서 전하도록 해주십사고 청하였다. 이 편지가 마키아벨리에게 보낸 좋은 소식은 이것으로다가 아니었다. 마키아벨리는 언젠가 비삐에나 추기경의 칼란드로에게 메쎄르 니차의 찬사를 전한 적이 있었는데(칼란드로와 니차는 각각 비삐에나의 희극 (라 칼란드리아 La Calandria)와 마키아벨리의 (만드라골라)의 주요 등장 인물. 결국 마키아벨리가 비빠에나의 작품에 대해 후한 평을 보냈다는 뜻. 두 사람의 작품은 플라우투스나 테렌티우스 같은 고전 작가를 모방한 르네상스기의 이른바 (commedia eurdita)에 속하는 대표적인 보기이다-옮긴이), 이제 그에 대한 (정중한 답례)를 받게 되었다. 더불어 살비아티 추기경도 호의의 말을 전해 왔다. 그리고 RMx으로, 그럴싸한 말뿐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도나토 델 코르노는 그토록 애를 먹이던 500두카토를 되돌려받게 되었고, 그 일부는 돈을 떼이지 않도록 애써준 친구에게로 갈것이었다.
물론, 글 쓰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저술에 대한 보수)를 받아 그 덕분으로 조용히 공부에 파묻히든지 아니면 유유자적하게 살아가는 것을 바라마지 않겠지만, 피렌체의 서기장이 그보다 더 바랐던 것은 오히려 자신이 한때 봉직했던 자리와 그 때문에 겪었던 온갖 수고로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그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메디치가로서는 저술을 맡기는 쪽이 관직 임명의 문제를 비켜가느 swhg은 구실이 되었으리라. 바티스타 델라 팔라의 편지에 암시적으로 나타나는 언급으로 미루어보아, 앞서 얘기했듯이 이미 추기경과의 첫 만남에서 마키아벨리에게 저술을 맡기는 방법이 제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그 전에 (그늘 친구들) (원회 단골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말을 빌리자면) 사이에서 논의되었던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당분간 그 가엾은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가야만 했다. 그 성격상 토마토 익는 가을이나 되어서야 나올 보수를 기다리면서, 그는 미켈레 귀니지의 대파산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루카로 가서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다. 이 사건에서 피렌체 상인들이 여럿 관련되어 큰 손해를 입었는데, 그 중에는 교황의 혈족인 살비아티도 끼어 있었다. 그는 이 채권자들을 대변하여 상거래로 인한 부채가 노름빚보다 우선되어야 함을 주장하고, 파산의 규모 등 관련 사항들을 조사하는 임무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이전에 제노바에서 비슷한 일을 한 적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마키아벨리에게 법률가나 회계사의 역할을 맡겼던 것이다.
그는 7월 9일 길을 떠났다. 당시 그는 사인들의 사사로운 이익을 대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채권의 규모와 그 채권자들의 면면이 공화국이라 하더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정도였기 때문에, 추기경 스스로가 그 파견 문제를 결정한 뒤, 루카의 정무위원회에 직접 추천서를 써서 그 위상을 높여주려 할 정도였다. 7일, 정무위원회는 이 편지를 미리 보냈다. 서기장이 이 문제로 동분서주하고 있는 동안, 루카와 관련하여 새로운 문제가 불거졌다. 첫째는 조페소 문제였고, 두 번째는 그곳에 피신하고 있으면서 말썽을 일으키던 피사 대학 학생들 문제였다. 이 사소하고도 귀찮은 문제들에 대한 계획과 편지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우리에게는 추기경이 학생 문제로 마키아벨리에게 보낸 편지가 한 통 남아 있는데, 그 표현은 친절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의례적인 것으로 보인다. 피렌체의 정무위원회가 루카의 정무위원회 앞으로 쓴 편지도 한 통 남아 있는데, 여기에는 (우리 시민과 상인들은(...) 두 달 전 니콜로 마키아벨리라는 사람을 그곳으로 보낸 바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첫머리에 실려 있다. 정무위원호는 그가 공직에 있었을 당시 같았으면 (고귀하고 지체 높은 nobile e spettabile)이란 말로 지칭될 서기장이었다는 사실을 유념하지 않고 있다. 그는 이제 단지 산타 지타의 정무관들과 파산한 상인의 처리 문제를 협의하고 있을 따름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성품상 RmsrlfhTJ 모든 일에 잘 적응하여, 어디에서건 자신의 재능에 값하는 일을 찾아낼 사람이었다. 정치 이론가이자 관찰자 외엔 다른 사람일 수 없었던 그의 품성이, 루카 공화국에 머물면서 그곳 정부를 연구하고 그에 관한 보고서를 쓰는 데 도움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었고, 그는 그 일을 해냈다. 하지만 밀고 당기는 중에 몇 달이 흘러갔고, 그는 그 일을 해냈다. 하지만 밀고 당기는 중에 몇 달이 흘러갔고, 그는 루카에서의 긴 시간적 여유 속에서 또한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 전)을 쓰기에 이르렀다. 이 작품은 그것을 역사서로 생각하고자 한 후세의 현학자들간에는 하나의 커다란 스캔들이 되었다. 그들은 차라리 정치 저술이거나 나아가 문학 작품으로 보아야 할 그 책에서 역사적 오류 또는 오히려 허구라고 불러야 좋을 사실들을 지적해 내기에 바빴던 것이다! 결국에는 그 작품의 본질을 인식해 냈던 명민한 현대의 비평가들조차도 그것이 어떻게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지를 알지 못했다.
이제는 마키아벨 리가 피렌체 공화국의 역사가 후보에 오르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힘차고도 아름다운 산문은 그의 후원자들에 대해서는 견본인 셈이고 스스로에 대해서는 역사 서술의 문체를 시험하는 것이었으리라. 이는 결코 단순한 추측이 아니며 문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친구들에게 그것을 (역사서의 모험)으로 생각하며 보냈고, 친구들 역시 그것을 그렇게 생각하였다. 시험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견본은 나름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다. 그는 니콜로 테그리미의 (카스트루치 안텔미넬리 전 Castruccii Antelminelli vita)을 15세기 판 혹은 필사본으로 읽으면서, 이로부터 (이 이야기 저 이야기 colloqui) (당시 루카에서의 (colloqui)란 말은 피렌체에서는 (pratiche)에 해당된다)를 골라내고는 그것에다 디오도루스 시쿨루스 Diodorus Siculus(기원전 60년경에 활동하다가 30년에 죽은 그리스 역사가. 신화 시대로부터 키케로 시대까지의 40권짜리 지중해 세계의 역사를 씀. 비판적 면모는 보이지 않으나, 그가 사용한 사료들은 귀중한 가치가 있음-옮긴이)와 디오게네스 라이르티우스 Diogenes Laertius(기원후 3세기초에 살았던 그리스 문필가. 철학자들의 사상을 학파에 의거하여 쓴(철학자들의 생애 Vitae Philosopforum)가 있음. 뚜렷한 역사관의 소유자는 아니었으며, 주로 철학자들의 일화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쉽게 풀어쓴 대중적 저술이 특징임-옮긴이)를 전범으로 하여 고전 고대의 풍미를 가하였다. 일은 이렇게 된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러한 고전적 특에 갇혀서 자신이 애호하는 정치, 군사 개념들을 사용하여 다시 한번 이상적인 군주상을 새롭게 만들어내지 못했다면 그는 마키아벨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정치와 시를 역사에 부가하므로써 이 소품은 더 큰 (역사 Istorie)를 위한 (조그만 모형)이 될 것이었다.
(카스트루초 전)은 8월이 가기 전에 완성되었다. 29일, 그는 자신이 책을 헌정한 자노비 부온델몬티와 뤼지 알라만니에게 그 작품을 보냈다. 자노비는 9월 6일자 답장에다 그 책에 대한 자신과 다른 (그늘 친구들)의 평을 담아 보냈다. 그를 비롯하여 뤼지, 디아체티노, 귀데티, 안톤프란체스코 델리 알비치 등이 다함께 그 책을 읽고 검토한 결과, 그것이 (훌륭히 잘씌워진 글)이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들은 다만 약간의 사소한 부분들을 지적하면서 (그냥 두어도 나쁘지 않겠지만 조금 손보면 더 나아질 여지가 있을 것 같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말미의 경구들이 그 보기인데, 그것은 수가 너무 많은 듯이 보이기 때문에 efms 책에서 따온 것들의(그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일부는 차라리 빼버려도 좋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다른 이야기는 주로 언어와 문체에 관한 세부적인 문제들에 집중되었다. 야코포 나르디,바티스타 델라 팔라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 역시 이 책을 읽고는 모두가 좋아하며 칭찬의 말을 해주었다.
자노비가 같은 편지에서 그렇게 불렀듯이, 마키아벨리가 이 (역사서의 모형)으로 호평을 받자, 친구들 사이에서는 이제는 그가 견본적인 습작에서 진짜 역사서로 옮아갈 때가 되었다는 의견이 늘어났다. 자노비의 말이다. (우리 모두는 자네가 하루바삐 이 역사서를 쓰는 일에 착수해야 한다고 믿네.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자네가 그렇게 햊었으면 하네.) 따라서 근 마키아벨리에게 빨리 돌아오도록 재촉하였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그들은 그가 보고 싶었고, 게다가 특히 그에게 (자네도 알 만한 우리의 계획을) 말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계획이라는 게 바로 피렌체사의 서술을 그에게 맡기는 일이었으리라.
추기경의 마음이 이미 우호적ㅇ로 돌아선 데다가 그 주변 사람들 모두가 애써준 덕분으로, 일은 이제 거의 다 된 것이나 진배없었다. 마키아벨리는 이 같은 호의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9월 8일에서 10일 사이 어느 때쯤에 피렌체로 돌아왔다. 루카에서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나, 방향은 좋은 결과를 얻는 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는 도착하자 곧 피렌체 대학이 자신을 고용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것이다. 당시 그 대학의 장은 다름아닌 메디치 추기경 자신이었고 실무 쪽은 마키아벨리의 처남인 프란체스코 델 네로가 맡고 있었다. 세세한 계약 조건은 아직 미정이었으므로, 이 미래의 역사가는 델 네로에게 손수 이렇게 써주었다. 계약 조건은 다음과 같다. 그는 연봉 얼마얼마를 지급받는 조건으로 얼마 얼마의 햇수 동안 고용된다. 그의 의무는 피렌체 국과 그 도시에 의해 행해진 일들의 연대기 또는 것이다. 그 시기는 그가 가장 알맞다고 생각하는 때로 하고, 사용 언어도 라틴어로 할 것인지 토스카나어로 할 것인지 그에게 맡긴다.
그러나 대학 당국의 11월 8일자 결정에 따른 실제의 계약 내용은 이와 달랐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11월 1일을 시작으로 향후 2년 간 대학에 고용되었다. 그 첫해의 계약은 확정된 상태였지만 두번째 해의 경우에는 재계약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그들은 (피렌체의 연대기나 역사, 또는 그 외 다른 일 중에서) 자신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바를 택할 수 있도록 했으며, 그 보수는 스투디오화 fiorini di studio(대학 당국이 지급하는 피오리노 금화-옮긴이)로 100피오리노였다. 이 화폐는 (촉진이 불가능한) 재래식 피오리노화로, 당시 통용되던 피오리노 봉인금화처럼 평가 절하된 화폐 종류였다. 따라서 고용에 대한 보수는 사실상 57피오리노 정도에 불과했는데, 이는 그가 정무위원회 서기장으로서 한창 명성을 날릴 때쯤에 받던 액수의 반을 약간 넘는 금액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대로 소용 닿는 데가 있었다. 그는 마침내 가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일에는 명예가 따라오고 있었다. 과거에 피렌체 공화국의 역사가를 역임한 면면들 속에는 레오나르도 아레티노(레오나르도 브루니를 말함. 그가 아레초 출신인 데서 나온 이름-옮긴이), 포초, 스칼라가 들어 있었는데, 이 모두가 위대한 인물들로 정무위원회의 제1서기장을 지낸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가 서기장직으로 거의 돌아간 듯한, 혹은 그곳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낸 듯한 기분이었다. 마침내 한 가닥 서광이 비쳤고, 그것을 통해 무언가가 눈앞에 나타났다. 추기경이 몸소 그 일을 맡겼다는 사실이 희망을 더 밝게 해주는 듯이 보였다. 추기경은 그를 고용하자, (그 외 다른 일)도 맡길 수 있다는 계약 조건에 따라 교황에게 보일 글 하나를 주문했는데, 이것이 바로 (로렌초 사후의 피렌체 국정에 대한 논고 Discorso delle cose fiorentine dopo la morte di Lorenzo) (이하 (피렌체 논고)로 줄여 씀)이다. 당시 교황은 적법한 후계자 없이 자신과 추기경이라는 두 명의 성직자 손에 놓여 있던 피렌체의 국정을 안정시키는 방책을 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황 레오네가 추기경의 입과 베토리의 글을 통해 그의 자문을 구했던 지난날의 기억이 마키아벨리에게 결코 좋은 것이 될 수는 없었으리라. 하지만 이번의 경우는 공화국의 봉급을 받는 입장에서 자신에 대한 요청에 직접 응대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그 요청이란 게 스스로도 그토록 다시 쓰고 싶어했던 피렌체 국정에 관한 것이 아닌가 말이다. 피렌체가 문제였기 때문에, 그는 (피렌체 논고)에서 교황에게 그럴 듯한 말보다는 자신의 나라에 유익한 이야기를 하려 하였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그의 견해는 당시의 여론과는 너무 차이가 있었다. 그의 얘기는, 예컨대 종신 또는 장기간의 임기를 보장받을 필요가 있는 곤팔로니에레를 제외하고는 옛부터 내려오던 통치 방식을 모두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과장된 태도로 말미암아 그의 제안은 아주 나쁜 정도는 아닐지라도 어쩐지 현실성이 없고 좋지 않은 것으로 비칠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이 (피렌체 논고)에는 보기에 따라 좋은 듯도 하고 나쁜 듯도 한 내용도 끼어 있었는데, 그것은 교황과 추기경이 목숨을 다한 뒤에는 피렌체를 다시 자유롭게 해달라는 말이었다. 이는 사실 넓은 견지에서 나온 조언으로, 레오네에게는 그리 기분 나쁜 말도 아니었다. 어차피 자신의 가문 안에서 적법한 계승자를 찾을 수 없는 마당에 그로서는 한번 관대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최적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반면 교황의 인척과 그의 충실한 추종자들에게는 이러한 조언이 매우 듣기 싫은 것이었으리라.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들의 명예와 이익이 깡그리 훼손될 것이고, 나아가 평시민의 정권의 복수에 몸을 내맡길 수밖에 없음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한 학식 있는 문학사가는, 그같이 고귀한 생각을 접할 때 (우리는 (군주론)의 저자를 새삼 우러러보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나는 대신 이렇게 말하겠다. 그러한 생각은 그의 드높은 이상을 일관되게 말해 줄 따름이라고. 우리는 (군주론)에 담긴 고결한 생각들뿐만 아니라 그 시적 장중함을 (피렌체 논고) 마무리 부분의 다음과 같은 말 속에서 다시 음미하게 된다.
믿건대, 인간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명예는 그의 조국이 자연스럽게 내려주는 것이며,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이자 동시에 신까지도 기쁘게 하는 일은 자신의 조국을 위해 애쓰는 것입니다. 나아가 공화국과 왕국을 법과 제도로써 혁신하는 사람만큼 그 행동에서 더 칭송받을 만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들이야말로 거의 신성을 지녔던 인물들 다음으로 찬사를 받아야 마땅한 이들입니다. (...) 그러므로 하늘은 그 누구에게도 이들보다 더 나은 재능을 내리지 않았고, 더 영광된 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신이 성하의 가문과 성하께 내리신 그 넘치는 행운들 중에서도, 바로 이것이야말로 성하의 고명을 스스로 영원케 하고 성하의 조상들이 오랫동안 누려온 영광까지도 뛰어넘게 만들 힘과 기회를 부여하는 최고의 행운인 것입니다... (피렌체 논고)는 로마로 보내졌으나, 당시 추기경은 그곳에 없었다. 그는 1520년인 그 해 11월 6일 피렌체를 떠난 상태였다. 반면 이탈리아 문제에 대한 레오네의 모호한 게획은 점점 가닥이 잡혀가고 있었다. 막시밀리안의 죽음으로 공백 상태에 있었던 제국이 결국 에스파냐의 칼에게로 넘어갔고, 이는 여태까지의 세력 균형을 무너뜨렸다. 그 사이 마키아벨리의 명성은 이 (피렌체 논고)보다는 최근의 다른 저술들과 장차 나올 역사서 덕분으로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출세를 보장받은 사람)으로 비쳤다. 또 다른 미래의 역사가이자 그의 친구인 필리포 데 네를리는 평소의 시금털털한 농담 없이 그에게서는 보기 드문 진지함을 가지고 자신이 (카스트루초 전)과 (전술론)을 애타게 고대하고 있다는 편지를 11월 17일자로 로마에서 써 보냈다. (전술론)은 메디치 추기경도 기다리는 바였고, 그래서 네를리는 그에게 그것을 주기로 약속했던 자노비 부온델몬티의 말만 참고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만약 그가 책을 보내지 않는다면 난 전하께 꼼짝없이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네. 그러니 제발 자네 둘 사이에 끼어 나 죽는 꼴 보지 않도록 해주게나.)
마치 이 정도로는 충분치 않다는 듯이 마키아벨리에 대한 재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당시 루크레치아 살비아티는 궁정 내의 문인들 중 하나로부터 (알렉산드로 대왕 전) 한 부를 증정 받았는데, 네를 리가 그녀에게 읽어준 바 있던 퀸투스 루푸스의 같은 인물에 대한 전기보다 못하다는 생각에 이를 마키아벨리에게 맡겨 새로 고쳐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이 묘하게 꼬인 것이다! 물론 마키아벨리는 네를리의 공모에 가담하지 않았고, 비난은 그 혼자 뒤집어 썼다. 15일에는 콘테시나 리돌피가, 19일에는 마딸레나 치보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이제 마돈나 루크레치아만이 교황의 여동생들 중 유일한 혈육으로 남게 되었다(레오네 10세의 아버지인 대 로렌초에게는 세 명의 딸이 있었는데, 이중 첫째딸 루크레치아 메디치는 야코포 살비아티와 결혼했고, 콘테시나 메디치는 피에로 리돌피와, 마딸레나 메디치는 프란체스케토 치보와 결혼했다. 치보는 교황 인노첸초 8세의 사생아였다-옮긴이). 레오네가 교황위에 올랐을 때만 해도 그토록 환희와 드높은 희망이 넘치던 그 가문이 불과 4년만에 혈족들의 잇따른 죽음으로 황폐화되어 가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마키아벨리는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조그만 행운에 만족하면서, 장차의 더 나은 삶에 희망을 걸었다. 생질은 베르나치에게 보낸 편지의 분위기도 마침내 환하게 바뀌었다. 피에로 소데리니가 그에게 보낸 1521년 4월 13일자 편지가 그가 새로이 되찾은 마음의 평화를 흔들어놓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전에 소대리니는 그에게 아드리아해 연안의 소국 라구사 공화국의 서기장 자리를 제의했던 적이 있었고 그는 이를 거절했는데, 이번에는 또 다른 제의를 해왔다. 전임 곤팔로니에레는 당시 서기장을 물색하고 있던 프로스페로 콜론나에게 피렌체 공화국의 전임 서기장을 천거한 것이다. 로마의 대귀족이자 용병 대장이었던 그는 (전술론)에서 자신의 사촌 파브리치오의 명예를 드높인 저자의 명성에 이끌려 그 제의를 매우 환영하면서 그 일의 성사 여부를 소데리니에게 일임하였다. 그에 대한 보수는 금화 200두카토에다 비용을 따로 얹어주는 것으로, 실로 대단한 액수였다. 피에로 소데리니는 귀띔하기를, 만일 조건이 마음에 들면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즉시 말에 올라 피렌체에서 그가 길을 떠났다는 것을 알기 전에 곧바로 콜론나에게로 가라고 하였다. 그는 마키아벨리에게 이 제의가 (그곳에 남아 보잘 것 없는 돈으로 역사책을 쓰고 있느니보다 휠씬 낫다)고 하면서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귄유하였다.
금화 200두카토에다 비용은 따로라니! 공화국의 제1서기장 마르첼로 비르질리오의 봉급도 그만큼은 되지 못했다. 마키아벨 리가 역사를 쓰는 대가로 받는 액수도 겨우 그 사분의 일이나 오분의 일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그러한 제의를 한순간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을 확신할 수 있다. 그것을 수락한다는 것이 그에게는 명예로운 공직을 버리고 외국 군주의 궁정에서 봉직함을 뜻하는 것이었으리라. 그로서는 궁정의 조신으로 5피오리노를 받는 쪽보다는 피렌체에서 자유를 누리며 단 1피오리노를 받는 쪽이 나았을 법하다. 그가 콜론나에게로 간다면, 이는 곧 대학 당국이나 원회 친구들과의 약속을 깨뜨리는 것이며, 자신에 대한 친구들의 믿음을 저버리는 것이고, 조국 피렌체는 물론 스스로와 애증을 함께 해온 알베르가초에 안녕을 고하는 것이며, 마침내 그가 (출세가도)로 접어들 무렵, 그리고 계약상의 (그외 다른 일)이라는 문구가 말해 주는 바처럼 공화국으로부터 무언가 일 부스러기를 (아마도 사절의 직이리라!) 맡은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이제 막 가지려는 참에, 그 (메디치 군주들)과 간계를 끊어버리는 셈이 되는 것이다. 콜론나의 제의는 정말 탐나는 것이었지만, 마키아벨리는 단 한시도 그것을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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