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마카아벨리 평전 - 제16장 (무료함) 속의 글쓰기 - 당나귀, 만드라골라, 벨파고르
정치에서 물러나 지난 몇 년 동안의 고통과 최근 몇 달 간의 각성을 경험하고, 교황의 원한과 우르비노 공의 어리석은 무관심으로 인생 행로에 거의 결정적인 낙인이 찍히자, 마키아벨리는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심기를 다독거리고 스스로의 재능을 분출해 내고자 하였다. 그의 글들과 마찬가지로 무료한 삶 역시, 반드시 그가 처한 역경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우리가 문학이라 부르는 그러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우리는 이 사람의 내밀한 불안감이 그의 한숨만큼이나 그가 짓는 냉소를 통해 측정될 수 있음을 이미 터득한 바 있다. 그는 이제 갑자기 그 냉소와 한숨으로 글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글은 다름아닌 (당나귀 L'Asino) 이다. 이 작품이 보통 (황금 당나귀)로 불리는 것은 뒤에 변조된 것으로 옳지 않다. 테르차 미라 terza rima (11음절구 3행 시절-옮긴이)의 형식으로 씌어진 이 단시는 단테 풍을 따르되 그것에 풍자적인 향취를 더한 것이다. 이 작품은 여태까지 커다란 오해 속에 다만 무시되어 온 측면이 있지만, 사실은 그런 상태로 방치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짐승으로 변장하여 진짜 짐승 같은 사람들을 깨문다는 작자의 생각은 기발하다. 이 위대한 산문 작가의 시들이 중중 그러하듯이, 이 시의 많은 부분이 산문 조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떤 구절들은 매우 훌륭하다. 하지만 여기서 더욱 관심을 끄는 것은 그 내용의 자전적 성격으로, 이는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측면이다. 이 단시는 그 때문에 작자가 명예로워지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작자 덕분으로 작품이 명예를 얻는 그러한 것이다. 그의 독설적인 어조는 첫 행에서부터 확연히 드러난다. 그는 도움을 바라기 위해 페보 Fobo/Phoebus(아폴론을 말함. 마키아벨리는 바로 앞에서 자신의 시를 빛내기 위해 그의 활과 화살통과 하프를 내리도록 빌지는 않겠다고 읊는다-옮긴이)를 귀찮게 하고 싶지는 않다고 분명히 밝힌다.
그런 호의가 부탁한다고 얻어지지는 않기 때문이지.
이제는 안 돼. 그리고 난 잘 알고 있네.
당나귀 툴툴거리는 소리에 하프는 필요치 않다는 것을.
그는 곧 자신이 (군주론을 통해 얻으려 했던 것처럼!) 그런 (대가와 보상과 또는 공적)을 찾지 않을 것이며, 설사 (공공연한 것이든 은밀한 것이든 어떤 중상모략으로 인해) (군주론 때문에 일어났던 것처럼!) 그가 상처를 받더라도 개의치 않겠다고 천명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인다.
물리든 맞든 난 개의치 않네.
언제나 그런걸. 난 그걸 닮았다네.
내가 노래하는 그 녀석(당나귀)의 모습을.
그는 마치 당나귀처럼 물리고 채이는 것에 별반 마음 쓰지 않을 것이다. 과거 남을 그와 같이 대했던 그는 많은 날들을 (매우 조용히, 그리고 친절하고 참을서 있게) 지내왔다. 오랫동안 사람들을 살펴보면서 세상 여기저기를 주유했던 그는 이제 입장을 바꾸어 자신의 행동이 평가받는 것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
그래서 우리의 당나귀야, 그토록 많은 계단들을
우리들의 이 세상에서, 오르락내리락 했었지
이 모든 인생사를 살피기 위해.
(...)
하늘이라도 너의 울음소리를 막을 수는 없을거야.
유감스럽게도 첫 장에서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시는 변신을 앞둔 최적의 시점에서 끝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에 니콜로는 자신의 쓰라린 운명을 다시 한탄한다.
옛 사람이든 지금 사람이든
(...) 아직 그 누구도 맛보지 못했으리.
더 깊은 배반감을, 더 큰 고통을.
아울러 그는 (리비우스 논고)의 한 장에서처럼 국가와 그것의 쇠퇴를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필치로 그려낸다. 하지만 우아하고 힘찬 맛은 떨어진다.
단테를 모방한 시에 당연히 베아트리체가 빠질 수는 없는 법이다. 설사 그 베아트리체가 힘이 약하고 고귀함이 덜한 짐승들까지도 포함해서 모든 야생 동물들의 보호자일 뿐이며, 자신의 시인과 잠자리를 같이하는, 덜 정숙한 그런 베아트리체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가 그녀를 통해 당시 자신이 사랑하던 여인의 모습을 그리려 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그녀야말로 어두운 불운의 골짜기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그를 받아들여 위로하고 다시 활력을 불어넣어주지 않았던가. 물론 그가 짧은 시간만이라도 스스로를 위하여 당나귀로 변신하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지만. 이 연애 사건에 대해서 우리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우선 그것이 얼마나 계속 되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사건이 그가 작가로서 새로운 힘을 얻는 데 얼마나 영향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만일 그녀에게 그만한 영향력이 있었다면, 그녀는 분명코 한번 정도는 그를 변신케 했으리라.
마키아벨리는 무미건조하고 활기 없는 장을 몇 개 쓴 뒤에 (당나귀)를 중도에서 끝내 버렸다. 아마도 당시 그는 시가 자신을 정치로부터 물러서게 만든 그런 잔인함을 이겨내도록 해주고 어떤 내밀한 기쁨으로 그를 위로해 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는 우리 역시 그랬듯이 시작의 시작을 즐겼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마무리를 위해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 그 생각들을 좋아하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이야기했고, 그 일부는 아마 친구들에게 일게 했던 듯싶다.
이 시기의 친구 관계나 독서 경향 역시 좀더 문학 쪽으로 기울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1517년 12월 17일, 로마에 있던 시인 뤼지 알라만니에게 편지를 쓴다. 그는 여기서 또다시 도나토 델 코르노의 그 이를 부탁하고 있는데, 델 코르노는 아직도 신사들 사이에 앉아보는 희망을 이루지 못한 상태였을 뿐 아니라 1512년에 줄리아노 데 메디치에게 빌려준 돈 500피오리노도 되돌려받지 못한 처지였다. 그런데 그는 이 일에 관해 얘기하다가 갑자기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아리오스토의 (광란의 오를란도 Orlande Furioso)를 읽어보았네. 시의 짜임새가 전체적으로 매우 훌륭하고 저알 찬탄을 금할 수 없는 곳도 많이 있더군. 그런데 만일 그가 그곳에 자네와 함께 있거든 내 이야기를 하고 이 말을 전해 주게나. 오직 한 가지, 내가 애석해하는 일은 그가 그토록 많은 시인들에 대해 얘기하면서도 정작 나만은 쏙 빼놓았다는 것이며, 나의 시 (당나귀)에서라면 그가 (광란의 오를란도)에서 나를 대접한 그런 방식으로 그를 대접하지는 않으리라는 것 말일세.)
이처럼 서로간에 엄청난 차이를 가진 두 시를 한데 모아보노라면 얼굴 가득히 퍼져나가는 미소를 어찌할 수 없다. 아리오스토가 그토록 많은 그렇고 그런 시인들을 언급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쏙 빼놓았다는 서기장의 유감 어린 말은 생각보다는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한 기품 있는 비평가는 이에 대해 마키아벨 리가 스스로 지닌 능력과 스스로 그러리라 생각한 능력을 혼동하고 있다고 퉁명스럽게 말한 바 있다. 나는 그보다는 차라리 그가 스스로 마음으로 느꼈고 (군주론)의 산문 속에서 쏟아냈던 시적 감흥을 자신이 운문 형식으로 표현했던 실제의 다소 저급한 시와 혼동했다고 말하겠다. 마키아벨리의 것으로서 아리오스토가 알고 있었을 법한 시라고 해봐야 첫 (십년기) 정도였을 것이고, 혹시 필사본 상태로 회람되고 있었던 (당나귀)의 몇 장쯤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문학적인 마키아벨리. 더욱이 학구적인 모습의 마키아벨리. 이는 사실 (당나귀)에서 노래한 경우와 비교할 때 훨씬 더 놀라운 변신이 아닌가! (물론 이러한 비교로 문학자들을 폄하하려는 뜻은 조금도 없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그는 루첼라이 원 Orti Oricellarei에서 열린 학인들의 노임에 단골 손님으로서 드나들고 있었다. 이 모임에 관해서는 앞서 언급한 바 있지만, 나로서는 그것이 어떻게 해서 하나의 학당으로, 더욱이 플라톤 학당의 연장이라고까지 이야기될 수 있는지 그 정당한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당시 모임의 주최자인 코지모 루첼라이는 몸이 불편한 상태였는데, 이것이 오히려 앎에 대한 그의 호기심을 키워놓았다. 그래서 피렌체의 영민한 청년들이 그의 야외 침상 주위로 모여들었고, 이 덕분에 문인, 군인, 법조인 등 다방면의 재능 있는 사람들이 피렌체에 들러가게 되었다. 이 모임에 가장 열성적인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뤼지 알라만니, 두 명의 흐란체스코 다 디아체토, 디아체티노, 야코포 나르디, 필리포 데 네를리, 바티스타 델라 팔라, 안톤프란체스코 델리 알비치 등이 있었다. 그리고 자노비 부온델몬티도 언제나 그곳에 있었는데, 피렌체의 서기장은 교황 줄리오 2세의 재워 초기 로마 교황청에서뿐 아니라 바로 그의 집에서 아리오스토와 만나 면식을 텄음에 틀림없다. 둘 사이에 이미 친분이 있다는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마키아벨 리가 알라만니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같은 편지에서 그 단골 손님들이 루첼라이의 정원에서 그랬듯이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본다. 당시는 커다란 나무들이 이루는 시원한 그늘 밑에 기분 좋게 앉아 있을 그런 게절은 전혀 아니었다. 그리고 모임의 주도권은 로마의 알라만니와 네를리에게로 넘어가 있었으므로, 마키아벨리는 그들이 뒤에 남겨놓고 간 (가엾고 불행하고 추위로 죽어가는) 사람들도 생각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즉 (살아 있는 흉내라도 내기 위해서) 자노비 부온델몬티, 바티스타 델라 팔라, 그리고 그는 수시로 만나서 그들이 게획중이던 플랑드르로의 여행에 대해 의논하곤 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길을 가고 있다고 꿈꿀 정도로 이 여행 계획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에, 정작 실제의 여행에서 느낄 즐거움을 벌써 반은 소진해 버린 상태였다. 그들은 또 여행중에 베네치아로 가서 사육제를 보는 (짤막한 일정)도 잡아 놓았다. 하지만 길을 떠난 뒤 친구들을 모으기 위해 일단 로마에 (들를) 것인지, 또는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뒤 합류하여 (곧장 떠날) 것인지는 아직 미정이었다.
아마도 이는 단지 그냥 계획에 불과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한 가지 실현된 것도 있었다. 니콜로는 몇몇 피렌체 대상인의 의뢰로 사순절 기간 동안 제노바에 다녀왔던 것이다. 그의 소임은 투자처의 파산에 대비하여 최대한 손실을 줄이는 일이었다. 1518년 3월 3일 그는 출발 직전에 있었고, 26일에는 그를 보낸 사람들에게 제노바에서 편지를 썼다. 4월 8일, 그들은 그에게 이 지겨운 일의 처리 방법을 자세히 일러 보냈고, 14일에는 그에게 다시 편지를 써서 협상에 진전이 없으면 돌아오라는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20일까지도 여전히 피렌체에서 그에게 부치는 편지가 전해지고 있었다. 우리의 전임 서기장이 다시 길을 나서게 된 것은 단지 멏 푼 안 되는 돈을 벌기 위해서라기보다 그저 몸을 움직여 스스로 (살아 있는 흉내라도 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는 피렌체 공화국이나 그 외의 다른 공화국들, 혹은 제후들의 사절 직은 아니지만 이러저러한 상인들의 대리인 역할도 마다 않았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지금 그가 이야기할 것은 온통 줄 돈과 받을 돈, 그리고 염료와 옷감에 대한 것뿐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가 메디치의 군주들, 그 중에서도 특히 점점 더 오만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로렌초의 애정과 호의를 기대하기는 틀린 상태였다. 베토리는 프랑스에 가 있었고, 이후 로렌초와 함께 귀국할 예정으로 있었다. 로렌초가 단순한 시민의 모습을 벗어던진 것처럼, 그 역시 더욱 궁정의 조신처럼 변해서 말이다. 마키아벨리는 최근의 상처를 여전히 아파하면서도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인다. 군주들이 자신을 알아주고 호의를 베풀 것이라는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에서, 그는 루첼라이, 부온델몬티, 로렌초 스트로치 등 사사로운 위치에 있는 인물들의 평가와 관대함에 몸을 기대었다. 우리로서는 그러한 관대함이란 게 어떤 것이었는지를 모르며, 추측이란 것도 무언가 실마리가 없을 때는 별 소용이 없는 법이다. 단지 마키아벨리 자신이 그것을 인정하고 있고, 원회에 단골로 오는 한 사람에 의하면 그가 (약간의 수입)을 얻었다는 점이 알려져 있는 정도이다. 짐작건대, 그가 지고 있던 자그마한 액수의 빚을 탕감해 주었거나, 또는 문학에 대한 스트로치의 욕심이나 다른 사람들의 장사 잇속에 어떤 도움을 준 데 대한 보답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들은 이러한 도움과 함께 그를 친절하고 인간적으로 대해 주었으며 그의 재능을 알아주었는데, 그에게는 사실 이러한 것들이 돈보다도 더 귀중한 것이었으리라. 그리하여, 그는 이렇게 자신을 (따뜻이 감싸주고 친절로써 도와주는) 훌륭한 친구들 사이에서 마침내 그의 가치를 인정해 주고 (그의 모든 저술들을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들을 찾아내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보여준 이러한 호의가 그를 기쁘게 했다면, 루첼라이 원회에서의 격조 높은 이야기들은 그의 마음을 고양시키고 자극하였다. 그는 당시 이미 그곳에서 커다란 호응 속에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사 첫 10권에 대한 논고)를 읽고 있었을 가능성이 짙다. 이 저술은 깊은 뿌리를 가지고 움츠려 있다가 산탄드레아 시절 초기에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이후 그가 이 책에 손을 댄 것은 아마 사랑의 격정이 식고 난 후인 1515년 전반기쯤이거나, 더 확실하게는 1516년이었고, 1517년에도 재차 그 작업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옛 저술로 되돌아갔다는 것이 곧 문학에서 정치로 복귀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 공화주의적 담론들은 그것이 메디치 군주들의 전성기에 문인 모임에서 읽혀졌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정치적이기보다는 문학적인 냄새를 풍긴다는 해석이 좀 더 그럴싸하게 들린다. 당시는 아직 정치가 이론을 벗어나 논의되던 때가 아니었고, 레오네 시대의 그곳 단골들은 지금까지의 어떤 잘못된 주장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메디치파였다. 오히려 마키아벨리야말로 그들 중에서 메디치 가와 가장 거리가 먼 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시원한 그늘 아래서 그 똑똑한 청년들에게 (리비우스 논고)를 읽어주었다. 그들은 자신의 저술을 적어도 (사냥개)보다는 더 중히 생각해 주는 사람들이었다(로렌초가 (군주론)을 헌정하는 마키아벨리보다 사냥개를 바친 사람에게 더 친절히 대했다는 일화를 뱃댄 말. 이 책 15장 265쪽을 볼 것-옮긴이). 그들 중 하나였던 필리포 테네를 리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이들의 요청으로 이 때 읽은 것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 이를 자신에게 가장 잘 대해 준 코지모 루첼라이와 자노비 부온델몬티에게 헌정하였다. 책머리의 헌정사는 아마 이 당시 그의 심정을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일 것인데, 놀라운 것은 지금까지 어떤 전기 작가도 그것이 뜻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헌정사의 의도는 그토록 오랫동안 그의 재능을 업신 여기고 (군주론)마저도 무시해 버린 사람들에 대한 분노의 질책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저자가 자신의 이 새로운 책을 군주가 아니라 (수많은 미덕으로 그보다 훨씬 더 나은) 사사로운 위치의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지위와 명예와 부를 내릴 수도 있었을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사람에게, 국가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통치자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바치고 싶다고 언명하는 대목의 행각에서 다름아닌 로렌초의 이름을 읽어낼 수 있다. 이러한 헌정사를 읽노라면, 책보다 (사냥)개를 더 반겼다는 일화가 더욱 그럴 듯하게 보인다.
만일 그의 대작들이 빛나고 있지 않았더라면, 이 시기는 이른바 (모든 것을 잃은 뒤) 마키아벨리의 생애에서 가장 어두운 때가 되었을 것이다. 전지 작가와 문학사가들이 지금까지 생각지 못한 새로운 점들을 감안해 볼 때, 나는 처음엔 (메쎄르 니차 Messer Nicia) 또는 (칼리마코와 루크레치아의 희극 Commedia di Callimace e di Lucrezia)으로 불리다가 뒤에 가서는 (만드라골라)로 더 잘 알려진 희극 작품의 저술 시기가 1518년 사육제 기간이라는 사실을 확신한다. 이는 문서보관소의 관련 문서들만큼이나 쓸모 있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문서 자료의 부족을 한탄하는 전기 작가들에게도 위안을 줄 만한 사료이다. 이 희극 작품의 우아한 프롤로그 속에는 (리비우스 논고)의 헌정사에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쓰라린 심정이 담겨 있다.
설사 이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너무 가벼운 내용이라
자신은 현명하고도 무게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분들에게 말이죠.
하지만 너그러이 생각해 주세요.
이 헛된 생각을요.
다만 그의 쓸쓸한 마음을 달래려는 것뿐
다른 어떤 곳에서도
달리 할 일이 없으니까요.
나에겐 모든 것이 막혀 있죠.
다른 것으로 능력을 보여줄 길이.
흘린 땀에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한 채.
그는 이보다 조금 앞선 (당나귀)에서,
땀 흘린 아무런 대가도 없이
라고 읇은 바 있는데, 이제 여기서 다시금 (또 다른 목소리와 또 다른 모습으로) 자신의 위로받지 못하는 슬픔의 감정으로 되돌아간다. (당나귀)에서 그는 사람을 물어뜯는 옛 기술로 되돌아가리라고 위협한바 있는데, 이제 (만드라골라)에서도 역시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다. 그는 군주들, 그리고 지위와 고귀한 신분과 부에서 자신의 위에 있는 사람들 면전에다 경멸투로 자존의 말들을 던진다.
만일 누군가가 험담을 퍼부으며
그의 머리채를 잡아 흔들고
그에게 겁을 주거나 그의 마음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나는 경고하리라 그리고 이렇게 말하리라.
그 또한 욕설을 퍼부을 줄 알며
이것이 그의 첫번째 기술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세상 어디서든
우리말이 들리는 곳이라면
그는 아무에게도 굽히지 않으리
비록 겉으로는 아래에 있어도
자신보다 더 좋은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이미 우리에게 이 작품이 걸작이리라는 확신을 느끼게 하는 이 프롤로그는 그의 전기적 측면, 즉 자전적 측면을 보여주는 주요한 사료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실 마키아벨리는 그의 희극 작품들 어디서나 나타나서, 나라와 신앙의 결점과 달리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신의 불행을 웃어넘기고 있다. 한 위대한 근대 시인의 산문 속에서 이야기된 것처럼, 그러한 웃음의 힘은 무시무시할 정도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마키아벨 리가 가장 애호하는 무기인 것이다. 이미(당나귀)에서 그랬듯이, 그는 자신의 방어를 위하여, 눈물의 부끄러움으로부터 스스로를 구하기 위하여 웃음을 사용한다.
하지만 남자에게 눈물이란 언제나 보기 흉한 법이므로,
운명과 마주할 때면
눈물 없는 얼굴로 다가설지니.
감히 말하건대, 마키아벨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오랫동안 겪어 왔고 또한 (군주론)에 대한 잔혹할 정도의 실망감에서 절정을 이루었던 고통과 Tm라림도 (만드라골라)에서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스며 나오는 냉소 없이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점을 알고 있을 것이다. 바로 여기 이러한 분위기에서 그가 홀로 되씹었던 짤막한 시구들이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웃네. 하지만 웃어도 마음은 허망하기만 하네.
나는 태우네. 하지만 불꽃은 밖으로 피어나지가 않네.
이 놀라운 희극 작품에서 명확지는 않지만 어떤 도덕적, 사회적 목적을 찾아내려 한 사람들도 있었고, 그것이 그냥 웃음을 주는 외의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 당신이 웃지 않는다면
약속하지요. 당신 술값은 내가 내기로.
나는 마키아벨 리가 이 작품을 쓰면서 어릿광대극이나 풍자극을 생각하기보다는 그저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때로는 웃고 때로는 우는 그러한 억누를 수 없는 시심에 따랐으리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굳이 어떤 목적을 찾는다고 할 때, 이처럼 사람을 생각도록 하는 작품이 단지 웃음을 주기 위해서 씌워졌을 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작품에서 풍겨오는 시적이고 인간적인 감흥만큼이나 그것이 유발하는 생각들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리비우스논고)의 저자보다는 (군주론)의 저자를 더 쉽게 만날 수 있다. 물론 어떤 면에서 냉소적 주장과 (건달 같은 얼굴)을 한 티모테오 신부를 (리비우스 논고) 1권 12장(신앙심을 유지케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로마가톨릭 교회가 신앙심의 유지에 실패함으로써 이탈리아가 어떻게 쇠퇴해 왔던가에 대하여)에서 이론화된 개념들의 예술적 재현이라고 볼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작품에서는 희미하기는 하지만 어떤 비극의 냄세가 난다. 이 피렌체인의 몇몇 편지들이 그렇고 또 그이 일상생활이 그렇듯이, 그것은 미소 혹은 조소가 쫓아와 한숨을 흩날려버릴 때까지 희극적 광대극의 유쾌한 웃음을 바짝 얼어붙게 만드는 것이다. 바보스런 니차의 입을 빌린 재치 있는 기지도 보이고, (이곳에서 우리같이 권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개도 짖지 않는다)는 말처럼 거의 자전적 성격의 대사들도 있다. 전기 작가라면 이처럼 희미해져 버린 자신의 경계를 감히 넘어서려고 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지금 이야기한 것처럼, 마키아벨리는 (만드라골라)에다 스스로의 모습을 너무나 짙게 채색해 놓았기 때문에, 바로 앞의 대사에서 보듯이 그러한 모습이 표면에 나타나지 않을 때조차도 그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인 것이다.
나로서는 그가 이 작품을 쓸 당시 느꼈던 희열, 그가 이 작품을 언제나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꼽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그의 희열이 글의 전편에서 발산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이상은 하지 않겠다. 그러한 감정은 (군주론) 속에서 느껴지는 것과 같은 것으로, 걸작품의 창조와 함께 하는 즐거움인 것이다. 이로써 모든 것이 설명된다. 고전적 전법으로부터 거의 완전히 독립되어 있는 형식상의 새로움, 등장 인물들의 현대성과 인간미, 그들 중에서도 특히 플라우투스 Titus Maccius Plautus(대략 기원전 254년에서 184년에 걸쳐 살았던 로마의 희극 시인.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이 음모를 꾸미는 자이다-옮긴이)에게서 봄직한 식객 역할의 리구리오(그는 시장에서 만난 한 평범한 피렌체 사람을 꼭 닮았다). 이 새로운 요소들 모두가 그처럼 앞의 시대와 깊이 연결되어 있는 인물에게서 나왔다. 이 모든 연결고리를 깨뜨리고 이 작품을 만들어낸 것은 다름 아닌 천재성과 결합된 시 바로 그것이었다.
(만드라골라)는 무대에 오르기 전에 루첼라이 원회에서 먼저 읽혀졌을 법하다. 사람들은 아마 로렌초가 프랑스인 신부를 데리고 돌아왔을 때(1518년 9월 7일) 열렸던 대규모 축하연 기간중에 공연이 있었으리라 믿고 싶어할 것이다. 혹은 그 혼약을 기리는 축제 기간이 더 가능성이 높을지도 모르겠다. 이는 물론 그 당시 작품이 이미 완성되었고 아울러 배우들도 자신의 역할을 숙지한 상태였다는 가정 하에서 가능한 일이지만 말이다. 만일 이러한 조건이 성립만 한다면, 마키아벨리가 메디치 가에 대해 품었던 불신과 분노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추측은 매우 그럴 듯하게 돌 것이다. 한편, 1519년의 사육제 기간 동안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피렌체에서 열린 축제는 거의 없었다. 로렌초가 중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5월 4일, 그는 결국 27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그의 행동거지는 시민들 사이에 반감을 불러왔고, 그 역시 자신의 방식대로 다스릴 수 없었던 도시를 싫어하였다. 말년에 들어 그가 신임한 인물은 필리포 스트로치아 프란체스코 베토리뿐이었지만, 그들은 이러한 위치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를 위해 아무런 힘도 되어주지 않았다. 로렌초는 소인베들을 가까이했고, 수다쟁이에다 대식가 였다. 그래서 (교황은 그가 잘 먹고 잘 떠들 수 있도록 매년 200스쿠도의 연금을 내렸다). 하지만 교황이든 그 조카든 정작 먹고 떠드는 것 외에 다른 것도 잘할 줄 알았던 마키아벨리에게 내려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 모두가 로렌초의 이러한 죽음에 실망했다 하더라도, 메쎄르 니콜로만은 슬퍼하지 않았을 것임이 확실하다. 그러나 같은 해에 있었던 또 한 사람, 즉 코지모 루첼라이의 죽음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이후로도 원회가 계속되기는 했다. 그가 정원을 삼촌들인 팔라와 조반니에게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팔라는 그야말로 이름뿐인 문인이었으나 조반니는 진짜였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원회에 대해서나 니콜로에 대해서나 커다란 손실이었다. 원회로서는 그것을 이끌어오던 정신을 상실한 셈이고, 니콜로로서는 격려와 찬사 이상을 주던(물론 이러한 것이 그가 가장 바라던 도움이었다) 너그러운 후원자를 잃은 셈이었다.
마키아벨리의 문학 작품들 중, 저작 시기의 이유 때문에 여기서 이미 언급했던 것들 외에, 비슷한 주제를 가지고 있고 그 저술 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그래도 대략 이 시기로 비정되는 다른 작품들도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여기서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름다운 장시(세레나타 Serenata)처럼, 일찍이 포스콜로가 전편을 외우고 있다고 자랑한 바 있고 시간적으로도 연애 사건 당시에 씌어진 것이라 여기서 빠질 이유가 없는, 드문드문 나타나는 그의 시구들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우리 말 논고 Dialogo intorno alla nostra lingua)와, 원래는 (파볼라 Favola) 또는 (아내를 차지한 악마 Il demonio che presenogle)였다가 지금은 (벨파고르 이야기 Novella di Belfagor)로 불리는 설화적 작품들이다.(노벨라 novella)란 현대 이전의 설화체 문학이나 현대의 소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를테면 보카치오, 뤼지 피란델로의 작품연대가 불분명하고, 특히 (우리 말 논고)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지만, 마키아벨리의 전기에서 이러한 작품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 말 논고)가 과연 마키아베리의 저술인가에 대해 지금의 비평가들과 문학사가들은 그렇다는 데 합의를 보고 있지만, 사실 뚜렷한 증거는 없는 상태이다. 그의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문체는 제쳐두고라도, 당시 그처럼 낡은 논쟁에 대해 그토록 새로운 점들을 이야기할 만한 사람은 그 외엔 생각할 수가 없다. 이를테면, (한 도시에 새로운 교설이나 새로운 기술이 들어올 때면 언제나) 어떤 말이든 신어를 필요로 한다는 주장 같은 것이 그 좋은 보기이다. (무릇 언어란 어느 한 나라의 것이라고 얘기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나라들에서 가져온 어휘들을 스스로의 용법 속에서 변용할 뿐만 아니라, 차용된 어휘들로 인해 원래의 나랏말이 바뀌기보다는 오히려 그 빌려온 어휘들을 바꿀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이 바로 마키아벨리이다.
그리하여 그는 언어에 대해 글을 쓴 다른 저술가들에게서는 보기 힘든 독창성과 날카로움을 가지고, 특히 (속어 웅변론 De vulgari eloquentia)의 재발견 이후 당시 크게 유행했던 논제,즉 (고전 로마의 ) 언어와 피렌체의 언어에 관한 문제를 자세히 고찰하고 있다. 그는 단테 같은 인물과의 논쟁도 불사하고 있으며, 논쟁 당사자이자 동시에 판관이라는 유리한 위치를 십분 활용하여 어렵지 않게 승리를 거두고 있다. 모두가 알다시피, 논쟁중에 던진 (비난은 그 결말과 무관하기) 때문에, 나는 그가 단테에 대하여 비난조의 말들을 던졌다고 해서 그것이 이 책을 피렌체 서기장의 저술이 아닌 것으로 볼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단테야말로 마키아벨리가 산탄드레아의 숲에서 몸에 지니고 다녔던 책들을 쓴 당사자였고, 그가 (십년기)와 (당나귀)에서 그의 글을 모방하였으며, 자신의 사적인 편지들 속에서 종종 기억을 통해 당시 어떤 사람보다도 더 자주 인용하곤 했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고서도 그러하다는 말이다.
(멜파고르 이야기)는 마키아벨리 자신이 지어내어 저녁 식사 자리나 술자리에서 재미있게 들려주었던 많은 이야기들 중 유일하게 글로 옮겨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몇몇 편지들과 함께 마치 그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 이 문학 장르에서 그가 과연 어느 정도로까지 뛰어날 수 있었던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 만일 (만드라골라)가 한 비평가에게 한 편의 극화된 설화같이 보였다면, 다른 비평가에게 (벨파고르 이야기)는 시나리오 줄거리를 따온 것처럼 비쳤다. 아마 둘 다 옳은 말일 것이다. 이 문제는 여기에서 지면만 허용된다면 더 논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지적해야겠다. 그것은 최상급의 이탈리아 작가들 중에서도 하나 이상의 문학 장르에서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는 사실이다. 마키아벨리야말로 그의 천재성이 발휘된 거의 모든 곳에서 최상의 위치에 섰거나 후세에 깊이 족적을 남겼던 인물이었다. 그는 정치와 역사 저술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고, 설화 문학에서는 단 한 작품만을 남겼을 뿐이지만 그 수준 역시 탁월하였다. 그는 희곡에서도 역시 한 작품만을 썼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자발적인 영감 덕택이지, 친구들의 권유에 못 이겨서도 또는 어떤 행사를 기념할 목적에서 상투적인 라틴적 전범에 의거하여 제작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러한 영감은 그로 하여금 이탈리아 희곡 전체를 통틀어 최상급의 희극 작품을 생산해 내게 하였다. 이에 비하면 아리오스토조차도 평범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것은 당시까지 근대의 어떤 작가가 쓴 작품보다 뛰어나며, 아마 시대를 뛰어넘어 최고의 작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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