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마카아벨리 평전 - 제12장 12시 정오 (2/2)
피렌체 사람들은 그들에게 닥쳐올 위험을 알고 있었으나, 모두가 고통 속에 있었떤 것은 아니었고, 더군다나 도시를 적극적으로 방어하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곤팔로니에레의 정적이었던 유력 시민들은 비록 그들 모두가 메디치 가의 추종자들의 예외 없이 곤팔로니에레의 적이었으므로 물론 확호작약하였다. 심지어는 메디치 가의 친구도 곤팔로니에레의 정적도 아닌 사람들까지도 재정을 축내는 것을 극히 못마땅해했고, 귀차르디니의 관측과 같이 중립은 오직 강한 자를 위한 것임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냥 중립으로 남고 싶어했다.
마키아벨리는 프랑스에 사절로 가 있는 동안 이러한 사태와 이러한 분위기가 점점 더 무르익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나, 그 병이 어떤 것인지를 예측할 수 없었다. 그는 피사에서 돌아와, 자신이 출발한 후 이틀째 밤에 정무궁 첨탑에 떨어진 벼락이 서기국 사무실을 통과하여 문 위에 새겨진 세 송이의 황금 백합을 찢어놓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는 곧장 프랑스 왕과 피렌체 정부 양쪽 모두에게 불길한 징조로 해석되었다. 마키아벨리 역시 당시의 여느 위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늘의 전조를 믿었으며 그리하여 예감 같은 것을 느꼈다. 11월 22일, 그는 서기국 동료들이 보는 앞에서 첫 번째 유언을 남겼다. 얼마 후 곤팔로니에레도 그 뒤를 따랐다. 피렌체인들은 내분과 탐욕과 시간 벌기의 정책에 막혀서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 그들은 1512년초 아라곤의 왕에게 도시의 비범한 청년 한 명을 보냈다. 그의 이름은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였다. 그것은 어쩌면 그들 스스로를 살리는 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으레 그렇듯이 피렌체인들은 (그에게 동맹국들의 불쾌한 감정을 조금이나마 풀어줄 수 있을 만한 훈령을 내리지 않았다.) 훈령을 써서 그에게 넘겨준 인물은 바로 서기장이었고, 따라서 이 위대한 정치가 두 사라믐은 당시 서로 대면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 냉요을 구술한 것은 소데리니와 그의 정파였다. 그로 인해, 이 임무는 (프랑스 왕을 매우 불쾌하게 만들었을) 뿐, 동맹국을 달래는 데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였다. 피렌체는 점점 더 신에게서나 적에게서나 미움을 사게 되었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화국을 위해서난 그 자신의 재능에 비추어서나 그에게 주어진 권한은 너무나 미미했다. 피사에서 돌아온 뒤인 1511년 12월 2일, 그는 모병을 위한 피렌체령 로마냐로 떠났다. 이듬해 2월 19일, 그는 정무궁 광장에서 300명의 기별대로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3월 30일, 그동안 애쓴 결과로 드디어 그가 계획해 온 기병 민병대 안이 통과되었다. 5월말경엔 그는 내성의 수배대를 다시 짜기 위해 피사로 떠났다. 하지만 시에나로 가 판돌포 페트루치의 죽음에 조의를 표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당시까지도, 그는 여전히 하류 족 발다르노에서 모병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는 결국 시에나를 거쳐 6월 6일 피사에 도착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기병대 일을 보며 이럭저럭 보내다가 같은 달 15일 이후에야 피렌체로 돌아왔다.
그 사이 사태는 급격히 악화되고 있었다. 공화국이 전쟁을 아직 먼 후의 일로 보고 그에 맞추어 대비 태세를 해나가고 있는 동안, 줄리오 2세는 그들의 코앞에서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용맹무쌍한 전사였던 가스통 드 푸와를 저 세사으로 떠나보낸 라벤나 대전투의 다음날, 프랑스는 전날 전투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황제 군으로부터 이탈한 스위스 군대의 압박에 밀려 삽시간에 전쟁에서 패배하고 롬바르디아마저 잃고 말았다. 이러허게 전세가 역전된 가운데, 피아렌차, 파르마, 로마냐의 모든 지역, 그리고 볼로냐까지 교회의 손에 넘어갔다. 줄리오 2세는 승리했고, 피렌체는 그 무시무시한 노인 앞에 홀로 남겨져 있었다.
교황은 로렌초 푸치를 보내 피렌체가 반프랑스 동맹에 들 것과 전쟁 비용을 부담할 것을 요구해 왔다. 피렌체인들은 얼마간 돈을 내겠지만 동맹에 합류하는 것은 좀더 두고 보자고 응답하였다. 이는 어떤 제의를 거절하는 상투적인 방식이었다. 그 직후, 만토바에서 희동한 교황 동맹은 피렌체를 공격하여 정부를 교체해 버리기로 생각을 모았다. 그리하여 나폴리 총독인 라이몬드 다 카르도나가 지휘하는 에스파냐 군의 토스카나로 집입해 들어왔다. 메디치 추기경이 교황 사절로서 그들과 동행하였다. 그는 최근까지 프랑스에 의해 라벤나에 투옥되어 있다가 풀려났는데, 지금은 교황의 총신이 되었을 뿐 아니라 운세도 그의 쪽으로 풀려나가고 있었다.
피렌체인들은 겨우 정신을 차렸으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나라 구석 구석에서 병사들을 급조하느라 야단법석이었다. 아직 미비한 민병대를 보강하기 위해서였다. 피렌체는 군대라곤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고 능력 있는 장군도 없었다. 적에 대처하기 위해 마키아벨 리가 파견되었다. 그는 이미 6월 내내 교황군의 동향을 살피느라 바뻤다. 그들내에 반정부 세력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피렌체 정부는 통로를 열어달라는 교황을 요구를 감히 거부할 수 없었다. 그리고 7월이 되자 그는 이미 전쟁의 냄새과 풍기는 무젤로에서 병사들을 모집하였다. 그는 보병 천 명을 모아 피렌추올라에서 적군과 맞 설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 작업을 진행시키고 있을 때, 급히 돌아오라는 내용으로 10인위원회가 8월 24일에 보낸 편지 한 통이 도착하였다. 로 스탈레를 경유하여 진군하고 있던 에스파냐 군이 지금 바르베르노에 주둔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피렌체 군 지휘곤들은 군대의 주력을 도시 성벽 가까이에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제 12시 정오에 다다른 지금, 마키아벨 리가 있어야 할 장소는 바로 그곳이 아니겠는가! 그곳에서 그는 보오나코르시의 편지를 받았다. 여기서 그는 에스파냐 군이 캄피에까지 들어왔음을 전하면서, 곤팔로니에레를 위해 (뭔가 좀 조치를 취해 보라고) 얘기하였다. 그는 적이 그렇게 코앞에까지 다가온 데 대해 (놀라서 마음이 영 편치 않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도대체 그들이 연습 삼아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왔다고 생각했던가? 이 가엾은 위인은 지금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단지 그의 서기장이 그 다재다능함으로 무슨 기적이라도 일으켜주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총독이 그가 관직에서 물러날 것과 메디치 가 사람들이 사인(사인)으로서 피렌체로 되돌아오게 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자, 그는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 수 있는 사람은 그것을 자신에게 맡긴 시민들뿐이라고 용기 있게 응대하였다. 또한 시민들 역시 마찬가지의 용기로 그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총독은 프라토로 진군해 들어왔다. 그곳에서 3,000명의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첫 공격이 격퇴되고 적이 보급 부족과 허기에 시달리게 되었을 때, 곤팔로니에레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천 소마(1soma는 70-71kg임 - 옮긴이) 정도의 빵으로 좀도 유리한 입장에서 협상할 여지가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말로는, (현자들 i Savi) (평소 그의 문투로 보건데 바로 자기 자신)이 이러한 방안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곤팔로니에레는 소십한 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갑자기 지나치게 대담해져서 이를 묵살해 버렸다. 두 번째 공격 앞에는 프라토의 성벽도 민병대의 기세도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이전에 한번도 적군이라는 존재와 대면한 적이 없는데다가, 그 적이란 것이 라벤나에서의 패배 이후 거의 승승장구해 오다시피한 공포의 에스파냐 군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결국 프라토는 무자비하게 약탈당했다. 바로 교황 사절이 보는 앞에서 살인과 성물 파괴와 강간이 수도 없이 자행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피렌체인들은 모두가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곤팔로니에레와 같이 있었던 마키아벨리의 말에 따르면 그는 여전히 (스스로의 허망한 판단에) 집착하고 있었다. 31일, 네명의 귀족 청년이 그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 왔다. 그 중에는 프란체스코 베토리의 동생인 파올로도 끼어있었다. 그는 마키아벨리를 보내 프란체스코를 데레오게 했다고 말했다. 이제 (홀로 두려움에 떨게 된) 곤팔로니에레는 만일 안전을 약속해 준다면 즉시 정무궁을 떠나리라 작정하였다. 프란체스코는 그를 자기 집으로 데레갔고, 밤을 도와 시에나로 향하는 그와 동행하였다. 이는 실각이라기보다는 도망에 가까웠다. 도시와 곤팔로니에레의 운명이 아직 완전히 희망을 잃은 것은 아니었지만, 바로 이때 이미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냉소적 행로에 첫발을 내디디고 있었던 것이다.
소데리니의 실각으로 협상을 쉽게 마무리되었다. 메디치 가는 사인(사인)으로서 피렌체로 돌아왔고 정부가 개편되었다. 새 곤팔로니에레는 종신제에서 14개월의 임기제로 바뀌고 대평의회에서 선출하게 되었다. 이에 조밤바티스타 리돌피가 뽑혔는데, 그에게는 (유력 시민들의 수장이자, 지혜와 용기를 겸비하고, 고귀한 태생에다 위엄 있는 풍모를 갖추었으며, 그 격랑 속의 바다에서 기우뚱거리는 배를 바로 이끌어줄 훌륭한 키잡이)라는 수사가 뒤따랐다.
그러나, 바다가 거칠건 배가 기우뚱거리건, 또는 알려진 대로 메디치 간와의 친족 관계가 그를 현혹시키고 부패하게 만들었건 간에, 리돌피는 자신의 통치 초기에 보여준 단호함과 엄격함을 지속하지 못했다. 메디치 가의 문 안에서는 추기경에 의한 모의가 계획되고 있었다. 9월 16일 줄리아노를 비롯한 음모 가담자들은 무기를 숨기고 정무궁 안으로 들어갔고, 신호에 따라 광장이 병사와 사람들로 가득 차자 그들은 곧 정무궁을 장악하였다. 팔레 palle! 팔레(단수형 (palla)는 공 모양의 메디치 가 문장(문장)을 가리킴. 즉 메디치 가를 지지한다는 뜻 - 옮긴이) 간단히 말해서, 폭력과 공포 속에서 전체시민회의 parlamento((arengo)라고도 불리며, 사제를 제외한 성년 남성 시민으로 구성되는 전체 회의를 가리킴-옮긴이)를 세우는 상투적인 방시긍로 자유는 끝장나고 말았던 것이다. 일찍이 한 사제(사보나롤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됨-옮긴이)가 피렌체 사람들에게 남긴 다음과 같은 경고는 대평의회장의 대리석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단지 모래 위에 씌어졌을 뿐이었던가?
난 아네. 전체시민회의를 열자는 것은 정권을 빼앗아가겠다는 말이란 것을
월권적이긴 하지만 예부터 내려오던 관습에 따라 광장의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메디치 가를 지지하는 폭도들에 의해 선출된 비상개혁위원회는 행정 조직과 시민의 자유를 야금야금 먹어들어갔다. 9월 18일, 우선 민병대를 총괄하던 9인관제위원회가 해산되었고, 마키아벨리가 만든 민병대 조식이 와해되었다. 소데리니는 추방되고 대평의회는 폐지되었다. 곤팔로니에레로 뽑힌 리돌피는 그 자리를 (두 달이 못 가 그만두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의 사임은 사실상 등을 떠밀리다시피 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도시는 로펜초와 피에로의 시대로 되돌아간 것 같았고, 모든 일이 메디치 추기경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이 같은 소란 속에서도 마키아벨리에게 관심을 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의 글에서조차 그는 잊혀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우리는 그가 리돌피 정권 아래서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공사를 막론하고 어떤 기록들에서도 이 문제는 다루어지고 있지 않으며, 전기 작가들도 기록상의 공백을 메꿀 만한 어떤 그럴 듯한 추정을 해보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옛 읍도파의 일원이자 소데리니의 첨예한 경쟁자이며 유력 시민 계급의 수장으로서 비중 있는 위치에 있던 인물이 평시민 출신에다가 실각한 곤팔로니에레의 행신 나쁜 (아첨꾼)정도롤 생각했든 그를 결코 좋게 볼 수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아마 당시 서기장은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잊혀져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처지에 있음을 알고, 어디 서기국 한 구석에서 의기소침해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는 그곳에서 (끝없이 따라오는 스스로의 불운)을 곱씹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얼마 안 되는 일거리를 후딱후딱 해치우고 있었을 법하다. 그들 둘러싼 모든 것이 변했고, 그가 보는 얼굴들도 함께 바뀌었다. 한때 그는 정무궁에서 자신의 직위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의 그는 단지 미관말직에 있는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꿈을 좋아하는 시인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고, 때로는 스스로의 삶 그자체이자 소명이기도 했던 그 관직을 계속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까지도 품고 있었을 것 같다. 비록 정권은 바뀌었으나, 그는 자신의 펜과 자신의 재능으로 권력에 봉사하는 문필가인 것이다. 이는 예술가, 군인, 시인과 같은 경우였다. 그는 파당이 아니라 국가의 충복이었다. 그는 평시민 정부 아래서 공화국에 충실히 봉사해 왔으며, 이는 메디치 정부 아래서라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러므로, 그가 새로운 권력에 아첨하고 비위를 맞추려는 사람들 속에도 끼지 않고 얼마 후 자신의 글 속에서 말하고 있듯이 (스스로를 사람들과 메디치 가에 팔아넘기는)그런 유에도 속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지배자를 단지 경멸의 눈으로만 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친 메디치적이라는 것만 확인되는 한 이름 모를 (귀부인)에게 당시의 사건드을 설명하는 글에서 그들에게 복종의 염을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느느 자신이 (메디치 가에 올리는 글 Ricordo ai palleschi)에서, 권력작에게 알랑거리기 우햬 미주알고주알 소데리니의 잘못을 파헤쳐 비난하려는 것은 아무 소용 없는 짓이라고 솔직하게 말하였다. 그리고 9월 29일, 1494년 메디치 가가 쫓겨날 때 몰수된 재산을 점검하여 되돌려 주기 위해 5명의 관리가 선임되었을 때, 그는 좀더 솔직하고 자유로운 입장에서 추기경에게 현명하고도 관대한 정치력을 발휘해 주십사 진언하였다. 아마 대(대) 로렌초 정도의 인물이었다면 러한 진언에 대해 적어도 말로나마 고마움을 표했을 법하다.
그러나 추기경은 말로든 행동으로든 아무런 고마움도 표시하지 않았다. 서기장이 아직도 환상에 빠져 재치와 우아함이 넘치는 자신의 글재주로 찬사와 호의를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면, 그는 머지않아 그러한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었다. 메디치 가는 중립노선을 취했던 마르첼로 비르질리오에게 제1서기장을 직을 그대로 수행하도록 했지만, 소데리니의 (아첨꾼)으로 행동에서나 글에서나 그토록 반 메디치적이었던 인물을 용서할 리가 없었다. 또한 물론 마키아벨리로서는 그럴 수 밖에 없었겠지만 로마나 프랑스 궁정에서 메디치 망명객들에게 그가 보인 쌀쌀맞은 태도도 그냥 잊혀질 리 만무하였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뭔가 상을 주어야할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하여 11월 7일, 정무위원회의 결저응로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제2서기국의 서기장 직과 10인 위원회의 서기장 직에서 (해임되어 그 일에서 완전히 격리되었다). 그의 친구이자 서기보였던 비아조 부오나코르시도 같은 운명이었다. 서기장 한 사람이 물러나는 정도는 별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적지 않았던 연대기 작가나 일기 작가들 중 어느누구도 이 일에 관하여 말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마키아벨리의 불행이 자유 피렌체의 몰락보다도 더 중요한 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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