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제11장 만토바, 베로나 사절시기. 세 번째 프랑스 사절 시기(1/2)
피사 전쟁의 불꽃이 조용히 사그라들고 있는 동안, 이탈리아에서는 다른 더 큰 화염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캉브레에서 프랑스 왕과 막시밀리안 사이에 반베네치아 동맹이 맺어졌고, 여기에 주리오 2세와 아라곤 왕이 마지못해 가세하였다. 그리하여 바로 이해 1509년 봄이 되면서 레오네 디 산 마르코(마르코 성인의 사자, 즉 베네치아를 가리킴 - 옮긴이)가 이들 모두의 공격을 받는 상태가 되었다. 롬바르디아 지역의 경우, 베네치아 5월 14일 아다의 자갈밭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곧 베르가모와 브레쉬아르를 잃었다. 로마냐에서는 24일 파엔차가 함락되고 연이어 라벤나도 넘어갔으며, 교황의 2개국 연합군에 밀려 싸워보지도 못하고 리미니와 체르비아를 포기해 버렸다. 파죽지세로 승리를 거듭하는 프랑스 군의 기세에 암도되어 베로나, 비첸차, 파도바까지도 적의수중에 떨어졌으며, 황제는 캉브레 조약 덕분에 스스로의 힘과는 관계 없이 그 지역들을 차지할 수가 있었다.
일이 이쯤 진척되자, 황제는 프랑스 왕과 교황의 부담으로 결집된 대 군세를 거느리고 산맥을 넘어 내려왔다. 하지만 그의 진군은, 느려터지고 우왕자왕하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그 모습도 모습이지만, 다른 군대가 빼앗아놓는 족족 잃기만 하는 것엔 아무런 결과도 낳지 못했다. 왜냐하면, 파도바는 곧 베네치아로 넘어갔으며, 막시밀리안이 대군세에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포대로 그곳을 포위했지만, 으레 그렇듯이 치욕만 안고 물러서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우선 베로나로 후퇴하여 그곳에서 프랑스 원군을 허망하게 기다리다가, 마치 패자가 승자를 인정하지 않는 격인 휴전을 베네치아에 제의하고는 더 안전한 것으로 물러서 버렸다.
그러나, 그는 베로나를 떠나기에 앞서 피렌체와 그 유명한 조공 액수에 합의했는데, 40,000두카토를 네 번에 갈라서 지불하는 조건이었다. 이 정도는 전 같으면 베토리에게서 얻어낼 수도 있었던 금액보다 적은 돈이었으나, 당시의 상황에서는 프랑스의 전례가 없었더라면 아무도 그에게 이만한 액수를 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여튼 이거라도 그가 이탈리아로 와서 얻어낸 몇 안되는 것들 중 하나였음에랴! 첫 회 할부금이 10월에 즉시 전해지자, 그는 (이 세상에서 돈 없이 살수 있는 사람은 없지)라는 말로 사절들을 환영하였다고 한다. 11월 중순 만토바에서 전달키로 약속된 두 번째 할부금을 처리하기 위해 그들은 마키아벨리를 파견하였다. 11월 10일, 그는 두 명의 마부와 함께 10,000피오니노 금화를 가지고 길을 떠났다. 그가 15일 만토바에 도착하자마자 거의 같은 시각에 비첸차가 반란을 일으켜 황제의 수비대를 축출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그에게는 금화라는 짐 외에도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살피는 책무가 떨어졌다. 그리하여 그는 돈 문제를 해결한 뒤, 21일에 베로나로 향했는데, 그곳의 공기 속에는 이미 폭풍의 냄새가 묻어나고 있었다. 만일 그가 하루만 더 지체했더라면 길이 끊기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그곳이 전쟁이 진행되는 길목이라 짐작하고, 거기서 황제를 기다리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첫 번째 편지에서, 귀족들과는 달리 평시민들은 모두가 산 마르코 공화국 편인 도시의 상황을 이야기하며 다음과 같이 말을 맺었다. (베로나 사람들은 비첸차인들을 닮고 싶어하지만, 가까이 있는 성채들과 프랑스 군의 존재가 그들의 욕구를 저지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듯합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때때로 결과가 어떻든 간에 그들의 생각대로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또 5밀리오의 거리를 두고 대치하고 있는 제국 군과 베네치아 군의 상태를 이야기하고, 그 도시의 위치와 성벽에 관해서도 기술하였다. 그는 앞서 보오나코르시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지금 자신이 뛰어들고 있는 함정에 대해 다소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긴 했으나, 그래도 곧 다가올 충돌의 위험 속에서 비교적 여유 있는 모습을 견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는데도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베네치아 군을 베로나를 떠났고, 황제는 궁지에 몰려 하릴없이 프랑스 왕의 도움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왕은 그에게 해줄 만큼 해주었다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말이다. 산 마르코의 사자는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 다시 힘을 얻은 셈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쓰고 있다. (만일 이 왕들이 서로를 경계하면서 짧지만 격렬한 이 전쟁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무언가 지금까지 빼앗은 영토를 더 빠른 속도로 다시 되돌려주어야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12월 1일자 편지에서는 또 이렇게 썼다. (이 두왕들 중에서, 하나는 싸울 능력은 있지만 싸우고 싶어하지 않고, 다른 하나는 싸우고는 싶지만 능력이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후자는 물론 막시밀리안이었다.
그러므로 마키아벨리가 베로나에서 할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무언가 일을 한다는 것으 보여주기 위하여) 그는 (10인위원회에도 설교 조의 말들을 써갈겨) 보냈다. 그는 또 (칸타파볼라 cantafavola) (시 형식을 빌린 이야기를 가리킴 - 옮기이)라 부를 만한 작품을 써서 뤼지 귀차르디니에게 보냈는데, 당시 만토바에 있었던 그는 마키아벨리에게 글을 한번 써보라고 재촉한 바 있었다. 이 작품이 바로 두 번째 (십년기)란 설이 있다. 왜냐하면 두 번째 (십년기)의내용 역시 묘하게도 1509년에서 끝나고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에 따르면, 그럴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는 쪽은 종료 시점이 일치하는 사실 외에도 두 번째 (십년기)의 몇몇 구절이 이 시기에 씌어진 편지 속의 표현들과 비슷한 데가 있다는 점을 든다. 하지만 반대 의견도 만만찮다. 예컨데, 그는 칭송받던 시민이었던 자코미니에게 바친 송덕문에서 그를 가리켜 (시력으 앗긴 노인)이라는 말을 썼는데, 1509년 당시 자코미니의 나이는 경우 53세였을 뿐 아니라 아직 눈이 먼 것도 아니었다. 또 다른 증거들은 놔두더라도,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두 번째 (십년기)가 1514년 이후에 씌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저자가 1505-1514년 사이 십 년의 역사를 쓰겠다고 작정한 때가 바로 이 해이거나 그 다음 해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마키아벨리가 송덕문에서 자코미니를 노인아라 부르면서, 자신이 (모든 것을 잃은 뒤) 그의 죽음으로 (어찌할 바 모를 깊은 슬픔에 잠겼다.)고 한 말을 정상적인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그가 당혹해했건 슬픔에 잠겼던 간에 그는 여가를 얻었고, 이는 다시 그에게 글쓸 마음을 불어넣어주었다. 그의 글 중에는 바로 앞에서 언급한 뤼지 귀차르디니에게 보낸 제기발랄한 편지 한 통이 있다. 뤼지는 언제나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넘치는 사람으로, 마키아벨리에게 자신의 즐거운 경험을 이야기하거나 어떤 여인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편지를 써보내곤 하였다. 마키아벨리 역시 이에 응답할 마음이 생기게 되었는데, 이를테면 뒤에 또 하나의 별난 피렌체인이 벰보의 유명한 소네트를 패러디한 것과 비슷한 경우였다. 그래서 그는 친구에게 자신이 (부부 생활을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한 포주 할머니와 어둠에 속은 사건이었다.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여기서 세세히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 단지 어떻게 (그녀로부터 도망쳤는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순식간에 그 절절하던 욕구를 채운 뒤, 그는 불빛으로 자신의 욕구를 채워준 여자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오 이런 일이라니! 글쎄 그 여자라는 게 추악한 모습의 늙어빠진 할망구였던 것이다. 이런 유의 묘사에서는 이전의 그 어떤 문인도 마키아벨리를 당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그 소름끼치는 모습을 그리면서도(...입은 로렌초 데 메디치같이 생겼는데, 한쪽으로 비뚤어진 그 입에서는 허연 침이 뚝뚝 떨어지고 있지 뭔가...) 하는 식으로 특유의 재치를 발휘하고 있다. 그러한 괴물을 보고 속이 뒤집히기는 그 자신뿐만 아니라 독자도 마찬가지일 정도이다. 이 이야기의 골격 자체는 아마도 진짜였을 법하다. 하지만 이야기가 모두가 진짜라기엔 그 세부 묘사가 너무 아귀가 딱딱 맞고 너무 리얼하다(나에게는 단순한 농담 이상으로 보일 만큼).
그러나, 피렌체의 서기장은 3주 동안 장난기 어린 글들을 끄적이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실컷 즐긴 후, 다시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왔다. 12월 1일 그는 10인위원회에다 (만약 황제가 트렌토에 머물게 되면, 저도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라고 썼다. 그 후, 황제가 인스브루크로 갔으며, 제국 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그곳에서 다시 아우크스브루크로 갈 것이라는 소식을 듣자, 그는 11일 만토바로 되돌아와서 이제 귀향하게 해달라는 편지를 썼다. 그 이유는 이러했다. (의회의 진행 상황을 보기 위해 아우크스부르크로 간다는 것이 별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게다가 그곳의 다른 군주들이 외국의 사절들과 접촉하는 것을 황제가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17일에 귀국 명령이 떨어졌고, 이 소식은 21일이나 22일이 되어서야 그에게 전해졌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는 크리스마스가 지나서야 길을 떠났고, 피렌체에 도착한 대가 1월 2일이었던 사실로 보아 여행은 급할 것이 없었던 듯하다.
그가 이렇게 늦었던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혹시 베르나에서 미처 채우지 못한 욕구를 만토바나 볼로냐에서 벌충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향에서느 유감스럽게도 예기치 못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오는 도중에 부오나코르시로부터 그가 어디에 있든 간에 그에게 전하라는 12월 28일자 편지 한 통을 받았다.(원문에는 27일로 되어 있으나, 이는 28일을 잘못 쓴 것이다 - 옮긴이). 그는 매우 흥분하고 성난 어조로 전하기를, (투라토 un turato), 즉 얼굴을 가린 작자 하나가 증인이랍시고 다른 두 녀석을 대동하고 와서는, 법령 등기소의 공증인에게 마키아벨리란 사람은(어쩌고저쩌고 한 위인을 애비로 두었기 때문에) 지금의 직분을 도저히 수행할 수 없다는 내용의 진정서를 접수시켰다는 것이다. 보오나코르시는 계속해서, 비록 법률상으로는 친구가 유리하기는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이 일에 입방아를 찧고 여기저기 소문을 퍼뜨리고 있으며, 심지어는 만일 무슨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두고 보자는 식으로 위협까지 하고 있는 터라, 일이 좋지 않은 상황에 있으므로 무언가 강력한 도움을 받아서 일을 조심스럽게 처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편지는 시종일관 이런 식으로 사태는 위험하게 되어가고 적대적인 사람의 숫자 및 정도는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도와주는 사람은 없다는 점을 한껏 부풀려 전하고 있다.
아버지와 관련하여 그 무엇이 니콜로로 하여금 이처럼 관직츨 수행 할 수 없다는 말까지 듣게 했는지 우리는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나, 톰마시니는 (어쩌고저쩌고)란 말에 자극을 받아 아버지 베르나르도가 틀림없이 사생아였을 것이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톰마시니에게는 부오나코르시의 표현이 (분별 있게 제대로 한) 것으로 보였을지 모른지만, 원래 그 친구의 편지라는 것이 분별 있게 제대로 된 것과는 거리가 먼 (어쩌고저쩌고)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하지만 베르나르도가 (엔체 채무자 명부(중세와 르네상스기 이탈리아 코무네에서 상환 불능 연제 채무자의 이름을 기록해 놓은 명부. 스페키오specchio'로 불림-옮긴이)에 등재되어) 있었다는 것, 즉 코무네의 상환 불능 연체 채무자였다는 것은 확실하며, 이 사실은 다른 곳에서도 확인된다. 아들까지 관직에서 밀려나게 말든 뻔했던 것은 아버지가 사생아른 엉뚱한 사실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경제적 상황이었다. 톰마시는 다른 동료들 몇몇도 마키아벨리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는 말이 같은 편지에 나온다는 점을 감안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당시 연체 채무자 명부에 이름이 등재된 시민드은 수천 명에 달했던 반면, 서기국이 온통 사생아 아버지를 가진 자식들로 가득 차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전무했다는 점도 당연히 생각했어야만 했다.
부오나코르시는 대책이 강구되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으나, 그래도 도착을 며칠 늦추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기 때문에, 반드시 그렇게 하라고 간곡히 얘기하였다. 볼로냐의 이쪽 어딘가에서 그 편지가 마키아벨리에게 전해진 때는 틀림없이 12월 28일 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친구의 간청에 따라 발걸음을 늦추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하루 이틀 이상은 아니었다. 단지 더 새로운 소식이 없을까 기다렸을 만한 시간 정도였다. 그 서기본의 우려는 조금 지나쳤던 것으로 부인다. 그는 원래 소심한 데다 흥분을 잘하며, 평소 그런 유의 이야기로 마키아벨리를 성가시게 하곤 하였다. 그는 마키아벨리에게 적도 많지만 동시에 곤팔로니에레처럼 힘 있는 친구도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설사 적이라 해서 곤팔로니에레가 자신의 (심복)이 잘못되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리라고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사건은 그리 높은 직급에 있지도 않은 서기장을 겨냥했다기보다는 단지 곤팔로니에레를 괴롭히려는 계획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마키아벨리에게는 골치 아픈 일이 또 하나 있었는데, 자신에게는 이쪽이 더 심각할 수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의 사적인 편지를 통해 당시 로마에서 그와 관련된 한 거의 소송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단지 추측만 한다는 것은 불확실하고 소용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것이 어떤 식으로 그와 동생 토토 간의 계약 관계와 관련된 교회 성직록 문제에 일어난 재판이 아닐까 추측해서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설사 이 추측이 잘못되었다 해도 그리 큰문제는 아니다). 토토는 바로 그때인 1510년 1월 5일 수련의 과정을 벗어나 사제에 서품된 상태였다. 프란체스코 넬리와 피에로 델 네로의 중재로 마련된 이 계약에 의해, 토토는 형인 니콜로에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자신의 몫을 양도 한 바 있었다. 그 주요 내역은 피렌체의 집과 페르쿠씨나의 산탄드레아에 있던 땅 약간이었다.
로마에서의 소송이 어떻게 끝났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피렌체에서의 투서 사건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이후 그에게 일어난 일들로 미루어 알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10인위원회와 9인관제위원회 서기장에다가 정무위원회 서기장까지 맡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10인 위원회의 명으로 3월 12일에서 23일 사이 몬테 산 사비노로 가서 피렌체령 가르곤차의 주민들과 시에나령 아르마이올로 주민들 사이에서 일어난 분쟁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였다. 5월25일에서 6월 3일 사이에는 9인관제위원회의 일로 산 미니아토와 발디니에볼레의관구들에 파견되어 모병 작업을 돌보았다. 그리고는 피렌체로 돌아와 며칠 쉰 뒤, 세 번째로 프랑스에 파견되었다.
줄리오 2세는 이제 누구와도 부딪힐 일이 없었다. 베네치아와는 묵은 것이든 새것이든 모든 문제를 청산한 상태였고, 따라서 더 이상이 영광스런 공화국을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처리해야할 문제는 많은데 해결은 난망인 막시밀리안에게 이러한 상황은 썩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프랑스 왕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는 교황이 베네치아를 보존하고 싶어하는 것만큼이나 그 나라를 쳐야 하는 많은 이유가 있었다. 프랑스는 이탈리아에서의 위치를 확고히하기 위해서 산 마르코의 사자를 길들이 필요가 있었고, 반면 교황은 프랑스인들을 내쪼츠는 데에 베네치아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줄리오 2세는 프랑스에 대항하여 다른 세력들을 끌어모으는 한편, 페라라가 프랑스 보호 아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위스 용병을 고용하여 그 도시를 공격할 채비르 갖추었다. 서로 경멸하고 불신하는 가운데 교황의 증오와 왕의 분노는 나날이 커져 갔으며, 이제 최악의 상황만이 남지 않았는가 생각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특히 교속의 두 군주 사이에서 언제나 조정 역할을 담당했던 루앙 추기경이 지난 5월 세상을 뜸으로써 사태는 더욱 악화일로로 치닫게 되었다.
피렌첸는 이러한 상황을 심각하게 보고 있었다. 그들은 프랑스와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줄리오를 적으로 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소데리니의 말처럼, (교황은 우방으론 시원찮지만 적으로 돌아서면 골치 아픈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프랑스 궁정에 상주할 대사를 파견하면서 자신들이 그 불 같은 교황과의 협상을 최대한 신중하게 처리하려 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마키아벨리를 동행시켰다. 그는 공적인 임무 외에 곤팔로니에레가 사적으로 부탁한 일까지 맡고 있었다. 곤판로니에레는 10인위원회의 훈령이라는 천 위에 자신의 이름 첫 그르자를 아로새기는 것(공문서에 자신이 서명한 것을 비유한 말 - 옮긴이)말고도, 그러한 중대 국면속에서도 자신과 그의 동생인 추기경은 개인적으로 여전히 프랑스 왕에게 충성하고 있음을 확신시키고 싶어하였던 것이다. 추기경은 마키아벨리의 출발 소식을 듣자, 곤팔로니에레가 그랬던 것처럼 곧 로마로부터 교황과 왕이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을 편지를 뒤딸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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