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제8장 두 번째 프랑스 사절 시기. 첫 (십년기 ) 민병대 (2/2)
전기 작가로서는 할 수 없는 간략하게 다룰 도리밖에 없지만, 이 첫 (십년기)는 많은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잇다. 첫째 (신곡)에 대한 그의 오랜 연구와 강한 애정이다. 이러한 태도는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데, 그것은 단순히 테르차 리마 Terza Rima(11음절구 3행 시절 - 옮긴이)를 취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단테로부터 여러 가지 표현법이나, 형식, 반구들을 빌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마키아벨리는 시를 쓸 때보다 산문을 쓸 때가 더 시인처럼 보인다는 것, 그리고 시라는 것 자체가 이 경우과 같이 역사와 정치를 논할 때는 적절치 못한 형식일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마키아벨리의 신랄하고도 현실주의적인 문체가 시의 운율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좋은 시행들이 없지 않고, 당시 인기가 높아서 아예 속담처럼 사용되기에 이른 날카로운 격언 조의 말들도 다수 보인다. 바로 이러한 격언들, 다부진 생각들, 그리고 나라에 대한 애정과 같은 것 때문에, 이 조그만 시 작품은 마키아벨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만은 아니다. 그는 여기서 내면의 불꽃과 영원한 냉소를 지닌 생생한 자화상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십년기)에서 정치는 시라는 베일에 감싸여 있지만, 알라만노 살비아티에 대한 그 작품의 헌정사 역시 정치적 의도를 지닌 것이었다. 살비아티는 아레초 반란의 시기 공화국을 구했던 인물이다. 사실 원대한 군사적 개혁을 꿈꾸고 계획하던 마키아벨리로서는, 조밤바티스타 리돌피를 비롯한 여러 유력 시민들과 함께 반소데리니파의 수장격이었던 그를 고려에 넣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계획에는 너무 많은 난관이 따랐기 때문에 10월 말경에는 곤팔로니에레 자신도 가을 바람만큼이나 열성이 식어버렸다. 심지어는 마키아벨리가 로마에서 돌아온지 정확히 아홉 달 만에 태어난 새 아들에게 또다시 대부가 되어준 추기경조차도 모든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자신이 개입된 데 대해 형에게 사과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나 피렌체의 서기장은 용기를 잃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냉담함을 스스로의 열정으로 메우려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기운은 물방울이 떨어지듯 조금씩 빠져나갔네.
그 와중에도 그는 여전히 피렌체인들과, 특히 반대자인 살비아티에게 자신의 군사 계획을 지지해 주도록 애타게 호소하였다.
하지만 길은 쉽고 가까울 수도 있으리니
만일 당신이 마르스의 신전을 다시 열기만 한다면.
이 두 시행은 거의 민간의 별점처럼 그 정치적 예언을 끝내는 (십년기)의 마지막에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예언은 마키아베리가 한것이므로, 그로 하여금 그 감미롭던 이탈리아 땅이 조만간 전쟁의 풍파에 휩싸이리라고 예언케 했던 이유들을 하나한 뒤따라가보는 수고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다.
교황이 바라는 바,
상처받은 교회를 되살려놓는 것.
자식 하나를 가진 황제는
자신이 베드로의 후계자로 보이고 싶어하네.
갈리아는 고통으로 가득한데.
피렌체와 베네치아 또한 각자의 몫을 주장하였다.
두려워하면서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마르코여,
전쟁이냐 평화냐 망설이고 있구나.
그리고 (피렌체여) 피사를 향한 당신의 탐욕 또한 너무 크나니
(상처 받는 교회를 살리려는) 교황의 압박아래 (전쟁이냐 평화냐)의 기로에 선 산 마르코 San Marco(성 마가는 베네치아의 수호 성인 - 옮긴이)는 그와 잠깐 동안 우호 조약을 맺었다. 화친과 전생 사이에서 베네치아는 바르톨로메오 달비아노에게 뒷돈을 대어주었는데, 그는 자신의 나라를 지킨다는 명목 하에 사실은 피렌체를 공격할 목적으로 콘살보의 깃발을 떠나 페트루치, 비텔리 가 미치 잠파올로 발리오니와 동맹한 인물이었다. 피렌체인들은 결국 피사를 향한 바로 그 (너무 큰 탐욕을 )을 앞세우다가, 1505년 3월 27일 폰테 아 카펠레세 근처에서 피사에 대패까지는 아니지만 힘빠지는 패배를 맛보게 되었다. 그 당시 마키아벨리는 서기국이 늘 그렇듯이 연일 편지쓰는 일에 매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많은 양의 이러한 공신 서한들이 아니라 이 시기에 쓴 극소수의 사신(사신)들이다. 그중에는 여전히 교회 성직록을 얻고자 애쓰고 있던 동생 토토의 편지 한 통이 끼어 있다. 또한 니콜로 발로리가 보낸 매우 정감 어린 편지도 남아있다. 그는 마키아벨리와 주고받은 편지들에게서 언제나 그랬듯이 편지를 보내도 도대체 답이 없다고 불평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불평은 좀 지나친 면이 있어서, 마키아벨리의 막내아들에게 대부가 되어주었던 것이 그에게는 우정을 돈독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섭섭한 감정을 가지도록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프랑스 사절의 일에 싫증이 난 발로리는 피에로 소데리니의 마음을 움직여 자신의 귀국을 주선할 말한 사람에게 기대였다. 그는 프랑스 궁정에서는 (머리가 총명하면서도 과묵한 사람)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고는, 친구인 마키아벨리를 바로 자신의 후임자로 삼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프랑스로 가지 않았다. 그는 페루자의 군주 잠파올로 발리오니가 있는 카스틸리오네 델 라고로 파견되었다. 발리오니는 피렌체와 용병 계약을 체결해 놓고도 뒤늦게 자국을 넘어서서 다른 나라의 방어까지 고려할 여력이 없다는 변명과 함께 그것을 포기해 버렸다. 공화국의 입장에서 그와의 용병 계약을 대단히 중요한 일인 데다가 이미 카펠레세의 패배로 힘이 약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갑작스런 변절로 난관에 처하게 되었다. 더욱이 이러한 일이 적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면 더욱 위험한 상황이었다. 어떤 난관에 봉착하여 무언가 확실한 사정을 알고 싶을 때면 늘상 그래왔듯이, 피렌체인들은 마키아벨리로 보냈다. 그가 맡은 임무는 어뗳게든 잠파올로를 구슬러서 계약을 되살리지는 못하더라도 그가 마음을 바꾼 것이 좀더 좋은 조건을 얻어내려는 욕심 때문인지 아니면 더 은밀한 이유가 있는 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길을 떠난 마키아벨리느 4월 11일 카스틸리오네 델 라고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만찬을 전후하여 세 시간 이상 발리오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흡사 고양이를 만남 쥐 같았다.) 마키아벨리가 이 긴 논쟁에서 하도 (그를 이지저리 몰아세우는) 바람에, (그의 안색이 여러 번 바뀔) 정도였다. 한 대목에서 그가 많은 페루자의 법률가들과 의논했다고 말하자, 마키아벨리는 (이 문제는 법률가들이 아니라 군주가 결정할 일이며, 갑옷을 입고 명예를 얻으려 하는 사람들이라면 신의를 잃는 것보다 더 큰 손실이 없을 분 아니라, 그가 볼 때 지금 발리오니가 도박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대답하였다. 모두가 그를 (비틀거리는 망아지)정도로 보리라는 것이었다. 그는 마치 자신에게는 말을 바꿀 힘이 없다는 힘이 없다는 듯이 결심에 변함이 없었지만, 마키아벨리는 그를 넘겨짚기도 하고 찔러보기도 하면서 두 번이나 그의 내심이 드러나는 말들을 하도록 유도했다. 마키아벨리와 10인위원회는 이를 그곳에서 알아낸 정보들과 맞추어본 끝에 발리오니, 오르시니 가, 판돌포, 루카인 들 사이에 모종의 비밀 협정이 체결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잠파올로는 상황이 어떤지를 감지하고 있었고, 그리하여 이미 (두달 동안 노심초사하면서 한번도 스스로 웃음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마키아벨리의 정보원들이 그에게 한 이야기였다. 그는 아마도 마키아벨리로부터 (어느쪽으로 택할 것인지를 잘 생각해야만 하며, 그 결과 페루자 전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는 경고를 들은 이후 더 웃음을 잃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제 피렌체는 군사력의 부족에다 누가 적인지를 소상히 인지한 때문에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더욱 고심하게 되었다. 이것이 다 말을 타고 이리저리 돌아다닌 니콜로 덕분이었다. 피렌체인들은 알비아노를 고용한다는 계획을 포기하였다. 자신들을 공격하지 않을까 우려되는 인물을 이용하여 스스로를 지킨다는 계획은 매우 교활하긴 하지만 그만큼 매우 잘못된 것이었다. 대신 그들은 만토바 후작에게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그와의 협상이 난항에 부딪혔으므로, 5워 4일자 훈령에 의해 마키아벨리가 만코바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그든 누구든 그 협상을 성공시킬 가능성은 없었다. 그가 돌아오자마자, 곤팔로니에레는 그를 나폴리로 보내 콘살보와 협상케 하는 일을 거론하였다. 그른 해로를 통해 피사로 보병을 실어 나르고 있었으므로 이를 적절히 활용하면 알비아노를 저지할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누군가 다른 인물이 그를 대신해서 파견되었다. 마키아벨리가 시에나로 가는 것까지 반대를 받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여정은 400밀리오((miglio)란 영어의 마일과 같다. 그러나 그 길이는 시기와 지역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난다. 보기를 들자면, 고대 로마에서는 약 1,480m였으나, 그뒤로 로마에서는 1,460m, 피에몬테에서는 2,466m 등으로 바뀌었다. 현재 영미 1마일은 1,069m 정도이다 - 옮긴이)가 아니라 40밀리오였고, 그가 이러한 맞바꿈을 흔쾌하게 생각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사태는 이러했다. 판돌포 프트루치로부터 알미아노가 피렡체를 공격하기로 결심하고 이미 움직이고 있다는 경고의 말이 전해졌다. 폭풍우가 그쪽에서, 그것도 곧 닫치리라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이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정작 놀라운 점은 이 모든 음모들을 처음부터 꾸미고 또 그 속에 가담한 당사자인 판돌포가 왜 갑자기 피렌체의 안위에 그토록 신경을 곤두세우는가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절의 임무는 그의 전갈에 감사의 뜻을 전한다는 명목에도 불고하고 이 놀라운 회심의 이유를 캐는 데 그 본위가 있었다.
7월 17일 성문이 채 열리기도 전에 시에나에 도착한 마키아벨리는 (이제 막 잠에서 깬) 판돌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잠파올로 발리오니보다는 더 똑똑한 적수였다. 그의 목적이 당시 위험에 처한 피렌체가 몬테풀차노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도록 만드는 데 있음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원조의 약속과 조언들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지는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마키아벨리는 그가 지금 협상하고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를 그에게 주시시키려고 애쎴다. 그는 10인 위원회에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 역시 자연스럽게든 우연히든 이 계획을 알아차리고 있음은, 제 생각으로는 이 협상이 매우 혼란스러워서 제가 앞으로 가야할지 뒤로 물러서야 할지도 모를 지경임을 그에게 알려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그는 대는 대로 그에게 부딪혀 갔다. 그는 8 동안 이 문제에 관해 무려 7통의 편지를 서기국에 보냈다. 마침내 7월 24일, 인내심도 돈도 한계에 다다른 그는 귀국 허가를 요청하였다. 하지만 바로 그때 이미 그의 친구 보오나코르시는 곤팔로니에레로부터 귀국과 돈을 모두 허락받아 놓고 있었다.
사실 지난 몇 달 동안 알비아노와의 협상과 함께 그에 뒤이은 알비아노의 움직임 때문에 서기국은 끊임없는 일거리와 이야기 거리로 바쁘게 돌아갔다. 비는 왔지만 천둥까지 치지는 않았다. 8워 17일 산 빈첸조 부근에 이른 알비아노는 에르콜레 벤티볼리오가 이끄는 피렌체군을 만났고, 긴 각축전 끝에 패하고 말았다. 그의 군대가 거의 모두 포로로 잡히거나 무기를 빼앗겼고, 수송기구와 군기들을 잃었다. 피렌체인들은 이 승리로 자못 의기양양해졌다. 이로 인해 곤판로니에레는 대담해졌고 벤티볼리오와 계약 중재자인 자코미니는 사기가 올랐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피사 공략이 결정되었다. 콘살보의 원병과 우기에 대비하기 위하여 작전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마키아벨리 역시 전장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이 작전의 행로는 그들이 품었던 희망과는 같지 않았다. 9월 6일 성벽 밑에 진용을 갖춘 군대는 다음날 대포로 성벽에다 큰 구멍을 둘씩이나 뜷었으나, 유감스럽게도 보병들은 돌격을 감행할 만한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피렌체에 아무런 성과도 안지 못하고 그곳에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남긴 것이라고는 이탈리아 군대의 치욕스런 무능의 오명밖에 없었다.
용병대의 이러한 무능함은 마키아벨리로 하여금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용기와 새로운 주장을 펼칠 수 있게 해주었다. 곤팔로니에레와 그의 친구들은 그의 말에 솔깃하였다. 그들이 의심을 버리고 그 실행 방법을 논하게 되자. (그와 같은 이일 이름값을 하면서 지속되려면)이 문제가 대평의회에서 다루어져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특히 소데리니는 쵠그느이 반대와 의혹에 대한 기억이 생생한 데다 몇 몇 유력 시민드이 과연 찬성해 주겠느냐는 의심이 겹쳐, 관례대로 평시민들의 동의를 받아내고 싶어하였다. 하지만, (일이리 새롭고도 이례적인 것이라, 평시민들에게 먼저 시범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것에 찬성하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그는 다른 상의 없이 오직 정무위원회의 권한만으로 무젤로와 카센티노같이 그래도 제일 군대 기질이 두드러진 지역에서 사람들을 징집하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도 이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키는 방법을 생각해야 했는데, 이제 그 일을 총괄하게 된 마키아벨리는 이에 적당한 인물을찾아내었다. 그는 바로 발렌티노의 악명 놓은 부하였던 돈 미켈레였다. 그는 피렌체인들에게 사로잡혀 교황에게 넘겨졌으나 그에게 고분고분하게 군 덕분에 결국 방면된 전력으 가지고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이 (잔인하고도 무시무시하며 공포를 주는 인물) 아래에서 로마냐의 농민들이 군인을 변모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무젤로와 카센티노의 농민들을 병사로 키우는데 필요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인물있다.
수단보다는 목적에 더 관심이 있는 곤팔로니에레를 설득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자의 악명과 발랜티노에 대한 증오심을 간직하고 있는 시민들을 납득시키는 일이었다. 더욱이 선량한 소데리니에게 보르자의 악행을 답습할 인물이라는 의혹이 일도록 만드는 사람들이 현실이 아닌가! 마키아벨 리가 조밤바티스타 리돌피, 피에로 귀차르디니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의향을 슬쩍 떠보았지만 모두가 반대쪽이었으므로, 곤팦ㅍ로니에레는 더 이상의 조언이 없이 그 안건을 80인회의 표결에 부쳐 통과시켰다. 반대자들으 분개했지만 결과를 기다리른 수밖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구성된 민병대가 관연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으 것인가는 여전히 두고 봐야 될 사항이었지만, 마키아벨 리가 자신의 대전투에서 이미 승리했다는 점은 혹실했다. 이제 더 이상 그를 방핼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모병을 위해 무젤로로 갔다. 1506년 새해 초하루, 그는 이 새로운 제도를 빨리 실행에 옮기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였다. 그는 혹독한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1월 2일 그는 10인위원회에다 자신이 전날 뽑은 사람들에 대해 보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익살스러운 말로 끝을 맺고 있다. (저를 이리저리 걸어 돌아다니게 만드는 걸 보니 제가 위원님들과 이 삭풍에게 잘 보였나봅니다.)
10인위원회는 찬사와 격려의 편지로 이에 답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따로 격려가 필요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농민들의 저항을 잘 무마해서 기꺼이 무기를 들게 만들었음을 본다. 하지만 동시에 이 모든 것 아래에는 과세와 관련된 어떤 계산된 계획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마을과 마을, 파벌과 파벌 간의 적대심을 잘 다스리고 있음도 본다. 며칠 만에 피렌체로 돌아온 그는 곧 병사들을 모집하기 위해 다시 물젤로로 간다. 1월 27일이 되면 그는 폰타씨에베에서 그곳 사람들의 모병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는 이어서 디코마노와 산 고덴초로 갔다가, 새로이 구성된 보병대를 시찰하기 위해 다시 폰타씨에베로 되돌아온다.
이 병사들은 (흰 방한 조끼에다 흰색과 붉은색이 섞인 바지를 입고, 흰 군모를 쓰고 군화를 신고 쇠로 만든 가슴가리개르 착용한 채, 일부는 창을 들고, 일부는 총을 가지고)있었다. 마키아벨리는 그들을 (스위스식으로 훈련받도록)하였다. 즉 독일식이라는 뜻이다. 피렌체에서 의 첫 사열식는 1506년 2월 15일 사육제에 맞추어 정무궁 광장에서 거행되었다. 이른바 현인으로 불리는 유력 시민들은 기분이 상한 나머지 (이 행사를 크게 비난하였다). 하지만 평시민들은 환호하였다. 훌륭한 시민이었던 란두치가 그 광경을 회상하면서 자신의 (일기 Diario)에다 써놓은 다음과 같은 말은 그가 이른바 현인들보다 더 현명하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피렌체 시에서 열렸던 어떤 행사보다 더 장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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