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제7장 첫 로마 사절 시기
마키아벨리가 내내 로마냐 사절의 임무에 매달리다가 돌아온 이후에도, 발렌티노와의 협상은 여전히 서기장으로서 그의 주요 업무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의 후임자 역시 그가 실패한 지점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협상이 순조로울 수 없었던 데에는, 피렌체인의 차가운 기질뿐 아니라 교황과 프랑스 왕 사이의 복잡다단한 정치 게임과 나폴리 왕국 내에서 에스퍄냐의 프랑스 간에 벌어지고 있던 전쟁의 불확실한 행로 등의 이유가 있었다. 교황은 왕과의 동맹으로 별 이익을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야망이 와에 의해 여러번 좌절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던 참에 프랑스 군의 위세가 하락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자, 바로 지금이 자신의 군세와 계획을 에스파냐 쪽으로 몰아줄 때라고 판단하였다. 또 왕은 왕대로 이러저러한 점들을 예상하면서 벤티볼리오와 피렌체 공화국, 루카와 시에나를 움직여 교황과 그의 똑똑한 아들의 힘을 견제할 새로운 동맹을 내심 구상하고 있었다. 그는 우선 보르자 가의 분노와 치욕감은 아랑곳없이 시에나에다 앞서 축출되었던 페티루치 가를 북귀시켰다.
그 시간, 피렌체는 발렌티노로부터 여전히 위협을 느낀 데다 피사전쟁을 재개할 욕심을 군대를 소집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먼저 돈 문제를 고려치 않을 수 없었다.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려 해도, 바로 그 세금을 낼 사람들이 투표할 대평의회에서 그렇게 하기란언제나 곤란한 일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일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곤랄로니에레가 내홍는 법단들은 많았지난, 이에 대한 불만의 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하자 모두 부결되고 말았다. 결국 통과된 것이라고는, 만일 교황이 허락한다면 성직자들에게도 데치마 decima(10분의 1세 - 옮긴이)를 부과한다는 안뿐이었다. 마키아벨리가 (재정 조달을 위한 연설 Parole sopua la provvissione del denaio)을 쓴 (말하지 않고 (글 제목 제목 속의 (parole)는 글이 아니라 말을 뜻하기 때문에 이를 장난조로 슬쩍 건드린 것 - 옮긴이)것도 바로 이때였다. 이 글의 목적은 법안에 유리한 쪽으로 말할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데 있었다. 그것은 피렌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자유를 방어어하고 스스로의 군대로 무장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짤막하면서도 힘 있는 문체로 씌어진 연설이었다. (항상 다름 사람의 칼에 의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적이 침입해 올 때 언제나 허리에 찰 수 잇도록 칼은 몸 가까이 두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초기 작품들로부터 그의 날갯짓이 더욱 힘차게 되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4월 중순, 교회 재산에 부과하는 데치마 문제도 그렇고 다른 문제도 잇어서 교황과의 협약 건이 다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즈음 복권된 판돌포 페트루치에게 의심의 여지를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해 1503년 4얼 25일 마키아벨리는 협약 체결을 둘러싼 상황을 그에게 설명해 준다는 목적을 가지고 시에나로 파견되었다. 이는 매우 짧고도 간단한 임무였다. 하지만 그 협약은 지켜지지도 않았을 분 아니라 피렌체가 그것을 완전히 파기해 버렸기 때문에, 그의 임무는 사실 아무 소용도 없었던 셈이다. 피렌체가 얻은 것이라고는 소데리니 주교의 추기경 모자뿐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주어진 이유도, 그의 형인 곤팔로니에레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었는지, 주교가 대사로 가 잇던 프랑스에서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한 것이었는지, 또는 각각 1다카토 금화의 가치 정도는 나가는 수많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는지 알쏭달쏭한 상황이었다.
피렌체와 교황간의 협상이 깨어진 주요한 이유는 교황이 협약 문구에서 프랑스 왕에 유리한 듯한 부분을 빼자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군이 나폴리 왕국에서 패배와 퇴각을 거듭할수록, 노회한 교황은 승승장구하는 에스파냐에 더욱 가까이 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는 것은 단지 그의 교활한 머리 때문이었는데, 그는 좀더 확실한 결과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평화 협상은 처음에 두 왕들 사이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콘살보 Consalvo(Gonzalo Fernandez de cordoba를 가리킴. 이탈리아 전쟁 당시 에스파냐의 장군. (대장군 el Gran Capitan)이란 별명으로 불렸음 - 옮긴이)가 평화냐 아니냐를 택일하라며 프아스 군을 풀리아와 칼라브리아에서 다시 무찌르자, 교황은 그들을 구하러ㅡ올 프랑스 원군의 존재로 인해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프랑스와, 그리고 발렌티노는 에스파냐와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당시 로마에서는, 둘 중 아들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결코 입에 담는 법이 없고, 아버지는 자신이 말한 바를 그대로 행한 적이 없었다는 속담 비슷한 말이 한창 떠돌고 있을 정도였다. 그들의 야망은 이 원대하고도 은밀한 게획에서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1503년 8월 18일, 삼일열을 3일간 앓고 난 뒤, 교황은 세상을 뜨고 말았다. 더불어 건강 면에서 교황과 비슷한 상태였던 발렌티노 역시 같은 날 같은 병으로 자리에 눕는 처지가 되었다. 이리하여 보르자 가계의 별은 그 무덥던 로마의 저녁에 갑자기 스러져가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발렌티노는 그가 후에 마키아벨리에게 말했듯이, 오랫동안 아버지 사후를 준비하고 있엇다. 그는 모든 것을 생각하고, 모든 경우를 예상하였지만, 정작 자기 자신이 같은 순간에 삶보다 죽음에 가까운 상태에 있게 될 줄을 알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그의 국가들은 마치 종이 성처럼 갑작스럽게 무너져내렸고, 페루자, 치타 디 카스텔로, 우르비노, 카메리노, 시네갈리에서는 옛 통치자들이 속속 복권된 반면, 자신의 군세는 본인 주변의 군대로 축소되엇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콜론나 가와 화해함으로써 그들이 자신에 반대하는 오르시니 가와 연합하지 못하게 만들고, 그에게로 향한 증오와 재난과 불운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려고 하였다. 줄어든 입지에도 불구하고 교황 선출회의 때문에 프랑스와 에스파냐 모두로부터 꼬드김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멀리 떨어진 에스파냐보다는 또다시 프랑스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사실 프랑스 군은 그 당시 교황 선출에 압력을 행사할 요량으로 나폴리 왕국으로 진군하는 기에 로마 성벽 부군에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마음만 먹으면 그 위압적인 군세로 훨씬 더 쉽게 그를 방어해 줄 수도 있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루앙 추기경과 협약을 체결함으로써 다시 한번 왕의 보호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
루앙은 이 협약을 맺으면서 이제 발렌티노 휘하의 추기경들이 가진 표를 모으면 자신이 교황으로 선출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무력으로 자신이 원하는 인물을 교황으로 앉히려는 애초의 희망이 무산되자, 발렌티노는 투표를 통한 방법 역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파와 에스파냐파의 두 적대적인 무리로 나뉘어 서로를 제압하려고 필사적이었던 추기경들은 결국 피콜로미니를 선출하는 것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이는 그의 노령과 유약함을 감안할 때, 양파간의 휴전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피오 3세는 겨우 26일 후 운명하였다. 상황은 다시 한번 원점으로 되돌아간 셈이었다. 그 소식이 피렌체에 전해진 것은 10월 20일이엇다. 그리고21일, (새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마치마벨래를 로마에 파견해 두기로 결정되었다. 사실 8월 28일 안렉산드로 6세가 죽었를 때 이미 같은 결정이 내려진 바 잇었다. 그때는 니콜로가 대규모의 프랑스 군을 거느리고 피비차노로부터 시에나 쪽으로 오고 있던 상드리쿠르를 접견한 다음, 뒤이어 교황 선출 회의에 참가하기 위하여 볼테라로부터 로마로 향하던 소데리니 추기경을 만나 꽤 오래 동행하면서 한여름 태양의 이글걸리는 열리 속으로 허덕허덕 막 돌아왔을 무렵이었다. 당시에는 서기장의 출발이 연기되다가 결국 취소되어 버렸지난, 이 새 교황까지도 운명한 이번에는 진짜였다. 그는 10월 24일 아침 길을 떠났다.
마키아벨리는 공화국에 우호적인 유력 추기경들에게 줄 신임장을 가지고 갔다. 그는 그들에게 새 교황은 그리스도교권과 이탈리아 모두의 요구에[ 부합되는 인물이어야 한다는 말을 전하게 될 것이었다. 이러한 일반적인 지시외에도 그는 공화국의 이름을 빌려 프랑스 왕이 내린 잠파올로 발리오니의 용병 계약 건을 지정된 조건으로 체결하는 특수한 임무도 하달받고 있었다. 이 건은 비롯한 다른 모든 문제에서 사절은 누구보다도 먼저 소데리니 추기경과 의논하게 되어 있었다. 당시 로마에는 또 하나의 피렌체인 추기경 조반니 데 메디치가 와 있었으나, 마키아벨리는 그를 만나지 않은 것으로 보이도록 암묵적으로 양해되어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27일 로마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이 인물과 그 유서 깊은 도시의 유적들이 조우하는 모습에 대해서는 그다지 할 말이 없다. 그의 글 속에는 이에 대해 슬쩍 언급하거나 생각 해 본 듯한 날조차도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그가 리비우스의 책을 뒤지고 다녔던 것과는 달리(마키아벨리가 (리비우스 논고)를 쓴 사실을 비유한 말 - 옮긴이), 로마의 유적들을 찾아다니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정도 외에는 달리 생각할 수가 없다. 설사 그가 그렇게 했다 해도, 그것이 적어도 사절로 막 왔을 무렵은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한듯하다. 무장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잇던 당시의 로마를 어슬렁거리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도 안전한 행동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곳은 병사보다는 시골 농부들과 좀도둑들, 그리고 새로 힘을 얻은 로마 소제후들의 졸개들로 들끓고 있었다. 프라티 가문과 보르기 가문은 발렌티노의 사람들에 의해 장악되고 있었다. 도시 전체가 소요와 의심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바로 이러한 것이 마키아벨리가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본 광경이었으며, 또 첫 사절 보고서에서 정무위원회에 알린 모습이었다. 그는 소데니리 추기경과 읜논 한 후, 잠파올로 발리오니와의 계약 건에 대해 편지를 올렸으며, 아울러 교황 선출 회의의 추이를 예상하는 편지도 썼다. 우리는 여기서 발렌티노의 그림자가 여전히 그에게 드리워져 있는 것을 본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발렌티노는 성 안아 앉아 그 어느때보다 더 위대한 일을 이루려는 희망에 부풀어 있다.) 하지만 그는 곧 발렌티노의 희망이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에 달려 잇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타인에게는 해를 입히는 것 외에 아무 일도 해준 적이 없었던 그가 말이다.(발렌티노 공이 교황이 되고자하는 사람들로부터 큰 환대를 받고 있습니다. 그가 가장 선호하는 에스파냐의 추기경들은 물론이고, 그 외의 많은 추기경들이 매일 성으로 몰려와서 그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잇는 상황입니다. 그리하여 생각건대, 누가 교황이 되든지 그에게 빚을 지는 셈이어서, 그는 새 교황이 자신에게 우호적일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새로운 교황으로 산 피에트로 인 빈쿨라, 즉 추기경 줄리아노 델라로베레가 유력하다는 소문이 날이 갈수록 커져 갔다. 그에 대한 이러한 선호도는 누가 교황이 될 것인가에 대한 과정에서 잘 드러났다. 마키아벨리가 두 번째 보고서를 올렸던 10월 28이, 은행들은 줄리아노가 교황이 되는 데에 32퍼센트의 배당금을 걸었으며, 30일에는 그 비율이 60퍼센트로 올랐다. 추기경들이 교황 선출 회의에 들어가기 직전인 31일, 그의 뒤에는 발렌티노뿐 아니라, 자신 스스로의 교황 선출이 무산된 루앙이 잇다는 소문이 돌자, 그의 주가는 즉시 90퍼센트까지 치솟았다. 발렌티노 같은 인물이 단지 약속만을 믿고서, 10년동안 보르자의 이름을 증오하며 망명 생활을 해온 사람에게 자신의 표를 몰아주려고 했다면, 그의 머리는 병마와 불운으로 인해 어떻게 된 것이 분명하다. 하기야 사태가 궁해지면 어떠한 쪽으로 흐를지 모르는 것이 인간사인 법이니, 우리의 사절께서 썼듯이 추기경들은 더 부자가 되고 싶었고 발렌티노는 회생을 원하는 바가 아니었던가. 이렇게 하여, 시스토 4세의 그 성마른 조카는 이미 교황이 다 된 채 교황 선출 회의에 들어갔다. 그리고 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바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당시 떠돌던 소문 덕분에, 마키아벨리는 그날 밤 피렌체로 보낸 편지에서 교황 선출의 결과가 공표되기도 전에 새 교황의 이름뿐 아니라 줄리오 2세라는 교황명까지도 거명할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그는 그가 그러리라고는 별로 기대하지 못할 만큼 매우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이제는 확실해진 이 엄숙한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오는 아침 산 피에트로 인 빈쿨라 추기경이 새로운 교황위에 오르게 되었음을 감히 신의 이름으로 위원님들게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부디 신께서 그를 그리스도교권 전체에 유익한 목자로 만드시기를.) 그뿐이었다. 하지만 피렌체의 서기장은 자신의 편지에 날개를 달아야 할 중요한 시점 시점에서 그다지 운이 좋지 않았다. 돈에 인색한 공화국은 그가 특별 전령을 보낼 수 잇도록 해주지 않음으로써 그의 날개를 잘라버린 셈이었다. 세니갈리아 사건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새 교황의 출건 역시 사절이 보낸 편지가 도착하기 며칠 전에 이미 다른 경로들을 통해 피렌체에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물론 마키아벨리가 그 소식을 제일 먼저 안 사람들 중 하니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스도의 대리자 앞에서 잠시 사라졌던 마키아벨리의 야심에 찬 미소는 같은 날인 11월 초하루, 그가 10인위원회에 보낸 네 통의 편지 중 마지막 편지에서 다시 나타난다. 그는 여기서 교황 선출의 신성함보다는 인간적이고도 극히 세속적인 세세한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그와 약속을 한 사람들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기 때문에, 과연 그들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제 교황이므로, 그가 누구와 진실된 약속을 했는지는 곧 밝혀질 것입니다.) 3일 후, 마키아벨리는 줄리오2세가 (놀랍도록 많은 지지)를 받았던 이유를 자세히 서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가 이러한 지지를 받은 이유는 자신이 요청받은 사항이 무엇이든 다 들어주겠다고 약속한 데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약속들을 지키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됩니다만) 알려지기로 그가 발렌티노에게 한 약속 중에는 로마냐 전체를 그에게 되돌려주겠다는 말도 들어 있었다. 당시 그곳은 옛 통치자들과 베네치아의 야욕 사이에서 분열된 상태에 놓여 있었으나, 그래도 한때는 다른 누구보다도 그에게 충성했던 지역이었다. 이와 더불어 교황은 발렌티노에게 그의 개인적 안전을 위하여 오스티아 같은 조그만 선심과 함께 교회의 곤팔로니에레 직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교황이 자신의 묵은 원한과 쓰라린 망명 시절을 잊었을 리 없다는 사실을 예민하게 간파한 이 피렌체인은 조소 띤 어조로 다음과 같이 결론 지었다. (발렌티노 공은 스스로의 기백 있는 자신감 때문에 오히려 제 무덤을 파고 있는 셈입니다. 그는 자신의 말보다는 다른 사람의 말을 더 신뢰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새로운 교황은 즉위가 공표된 직후, 우리의 사절은 이번 선출이 피렌체에는 매우 잘된 것이라는 점을 10인위원회에 서둘러 주지시켰다. 그 이유는 당시 피렌체가 그 어느 때보다도 로마냐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발렌티노의 몰락 이후 오히려 더 달갑지 않고 더 위험스러운 세력들과 이웃하게 되었던 것이다. 공작의 힘에 희망을 걸 수 없게 되자 로마냐는 분열되어 한쪽은 교회에 충성하는 편으로 복귀하고 다른 쪽은 이전의 통치자들을 다시 불러들이는 상태가 되었다. 예컨데, 오르델라피 가는 피렌체의 도움으로 포를리에 다시 입성하였다. 파엔차 역시 피렌체인들과의 묵계 아래 결국 만프레디 가의 한 사생아를 청해 왔는데, 이곳은 원래 다른 어떤 도시들보다도 더 오래 발렌티노에 복속되어 있었던 지역이었다. 하지만 이미 리미니를 점령했고 때로는 힘으로 때로는 힘을 앞세워 협상으로 수많은 성을 빼앗았던 베네치아는 마침내 파엔차마저도 공격 끝에 함락시켜 버렸다. 발렌티노는 한 단명한 교황의 그늘에서 마치 독 버섯처럼 돋아나온 한 명의 신군주에 지나지 않았지만, 베네치아는 그곳의 석호만큼이나 유서 깊은 강력하고도 부유한 공화국으로서, 피렌체와 능히 맞설 만한 적국이었다. 이 두 도시국가 간의 관계는 항상 질시와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야말로 서로가 화의 근원이었던 것이다. 10인위원회는 줄리오 2세의 등극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마키아벨리로 하여금 교황에게 베네치아의 이러한 침탈 행위를 항의토록 하라는 편지를 홍수처럼 내려보냈다.
11월 5일, 마키아벨리는 관례적인 예를 치르기 위해 새로운 신임장을 가지고 교황의 발치에 섰다. 그리고 다음날 그는 다시 교황을 찾아 그들의 항의 사항을 고하였다. 그는 유력 추기경들에겍도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 (기억하셔야 할 것은 이 무제가 토스카나의 자유가 아니라 바로 교회의 자유에 관한 일이라는 점입니다. 만일 베네치아인들의 세력이 더 커진다면 교황은 한 낱 그들의 예배당 신부에 지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권리가 존중되는 것만큼 그들의 이러한 행위에 대한 제재도 당연히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또 발렌티노의 마음을 들쑤셔놓으려 했으나, 발렌티노는 피렌체인들이 언제나 자신의 적이었다고 말하면서 심한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확실히 그것은 사실이었다. 발렌티노는 스스로 베네치아와 손을 잡음으로써 이에 복수할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그리고는 악의와 격분에 찬 말을 하며 계속 이 문제에 관하여 길게 붙잡고 늘어졌다. 우리의 사절은 똑같은 어조로 그의 말을 뒤받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스스로를 자제하면서 그의 기분을 누그러뜨릴 몇 마디 말을 한 뒤, 정말 일각이 여삼추 같았던 그와의 이야기를 서둘러 끝내 버렸다. 로마냐 사절의 시간은 이렇게 지나갔고, 더불어 마키아벨리와 발렌티노 사이의 마키아벨리주의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근사했던 대화들도 함께 흘러갔다.
그러나 5일 뒤, 발렌티노는 사람을 보내 마키아벨리를 불렀는데, 이번에는 훨씬 더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정화하게 늘어놓으면서, 교황이 그들 돕고 있으며 피렌체도 마찬가지로 이에 동참하여 공동의 적인 베네치아에 대항해야 한다고 말했다. 간단히 말해서, 이제 다른 방도가 없는 그로서는 말로써나마 초지일관 스스로의 뜻을 옹호하고 있는 셈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참을성 있게 그의 말을 경청하였다. 그가 발렌티노 자신의 입으로 우리가 앞서 말한 바 있던 그의 몰각에 대한 연유를 들게 된 것도 아마 바로 그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마법의 힘은 사라진 다음이었다. 마키아벨리는 그를 이제까지와는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마치 주검을 관찰하는 해부학자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제 주구도 그를 되살려낼 수는 없었다. 마키아벨리는 교황이 발렌티노와의 약속을 지키려 하지 않고 있으며 또 그러한 심중을 너무 일찍 그에게 알리지 않으려고 사태를 관망중임을 간파하고는, 발렌티노의 많은 헛된 희망을 내심 조소하였다. 공작은 여전히 교회의 곤팔로니에레가 될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 왕을 믿었고, 그를 주변에서 쫓아버리기 위해 그에게 로마냐로 가라고 닦달하는 교황을 믿었다. 하지만그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 한 약속을 저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물론 이점에서는 누구도 그보다 더한 사람은 없었지만, 그는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딛고 있는 발 밑의 땅이 서서히 꺼져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망연자실했으나 어떻게 해야 하지를 모르고 있었다.
발렌티노는 피렌체인들이 자신에 대한 안전 통행권을 보장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그들은 그것을 거절하였다. 그들이 지금 베네치아로부터 받는 위협보다는 그에 대한오 랜 원한의 감정이 더 컸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집스럽게 자신의 악명 높은 부하 돈 미켈레에게 군대를 주어 토스카나로 보낸 뒤, 스스로는 배를 타기 위해 오스티아로 갔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는 마키아벨리를 불러 피렌체가 안전 통행의 보장을 거절한 데 대해 격렬히 비난하면서, 자신이 피사 및 베네치아와 연합하여 피렌체를 공격하겠다고 협박하였다. 하지만 마키아벨레에게 그의 위협은 그저 공허하게만 느껴졌으므로 별로 동요되지 않았다. 예전에는 단 한번도 자신이 어떻게 하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던 그가 지금은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을 하겠다고 말하고 잇는 것이 아닌가 피렌체의 서기장은 사태를 능란한 솜씨로 처리하였고, 약간의 고무적인 말도 해주었다. 어차피 그와 그의 군대의 운명은 내리막길로 치닫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뒤 그는 10인위원회에 편지를 써서, 군대가 토스카나 쪽으로 가고 있으며, 그들을 저지하든 통과시키든 그것은 그들의 권한 안에 있음을 설명하였다. 얼마 후 그는 (돈 미켈레와 그의 군대가 그곳을 향하고 잇긴 하지만, 일이 잘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이는 적중하였다.
하지만 마티아벨리와 공작 간의 이러한 토론과 함께, 그가 편지에서 이를 중시 한데 대해 피렌체에 있는 누군가가 못마땅하게 생각한 듯이 보인다. 저어도 소심한 보오나코르시가 편지로 전한 바에 의하면 그러하다. 이는 사실 매우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만일 피렌체가 발렌티노를 싫어한다고 할 때, 그를 지켜보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것이 더없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있다면, 사절로서는 그가 나눈 대화들을 얘기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말이다. 더욱이 그가 이러한 일에 관하여 (신바람나게) 썼다는 것은 사실이 아 다. 왜냐하면 바로 그 문제의 편지들엑서 마키아벨리는 공작의 행로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만 그의 운명이 (계속해서 내리막길로 치닫고 있다)고 말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사실 바로 그 순간 이후, 발렌티노는 급전직하의 상태에 있었다. 오스티아에서 그는 교황이 보낸 두 사람의 추기경과 만나게 되었는데,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발렌티노에게 충성하는 로마냐의 성채들을 교황에게 넘기라고 요구하였다. 베네치아의 위협에서 안전하게 되면 되돌려준다는 것이었다. 그가 이를 거절하자, 교황은 그를 체포하여 로마의 감옥에다 가두어버렸다. 이와 거의 같은 시간, 아무런 안전 보장책도 없이 토스카나에 들어갔던 그의 군대 역시 피렌체령에 이르러 습격을 받고는 가진 것을 약탈당했다. 보르자휘하의 장군이자 그의 교살로 악명 높은 돈 미켈레 또한 피렌체인들의 손아귀에 잡히고 말았다.
앞서 피렌체가 보르자의 안전 통행을 거부했다는 소식에 만족감을 표시했던 교황은 이제 그의 마지막 남은 군세가 분쇄된 데 대해 마키아벨리의 면전에서 매우 흡족해하면서, 그 악한 돈 미켈레를 자신에게 넘기라는 교서를 피렌체에 보냈다. (그가 체포된 이때야 말로 지난 11년 동안 로마에서 자행된 온갖 불경하고도 반인륜적인 행위들, 즉 강도, 살인, 신성모모독, 그리고 여타 끝없는 범죄들을 들추어 밝히 좋은 기회)라는 것이다. 보르자는 이런 식으로 매일 매일 계단을 한 걸음씩 내려가고 있엇다. 일찍이 그의 배반으로 모든 것을 잃었던 그 우르비노 공 (보르자는 1502년 - 1503년 우르비노를 침탈했는데, 이때의 군주는 귀도발도였으며, 보르자의 죽음 1년후인 1503년 교황 줄리오 2세의 아들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가 그를 이어 우루니노 공이 되었다. - 옮긴이)의 발 밑에 무릎을 꿇고 비참하게도 스스로를 변명하며 부친이 영혼을 저주하는 바로 그날, 그는 마지막 계단을 내려서는 셈이 될 것 이었다. 아마 자신의 아들이 내뱉는 이 저주야말로 알레싼드로 6세의 영혼을 향한 유일무이한 기원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그를 위해 기도한 사람은 없었다. 혹시 있다면, 바로 그 자신에 의해 화형주에 달린 한 도미니쿠스 수도사(1498년 알레싼드로 6세의 명으로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한 질로라모 사보나롤로를 일컬음 - 옮긴이)정도 일까.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영웅이 파멸해 가는 마지막 순간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우리는 이 교황이 자신의 빚을 정말 멋있게 같아나가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그는 잉크병을 솜으로 닦아내고 있지만, 정작 그의 손은 모두로부터 축복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가.) 이틀 후 그는 다시 발렌티노를 가리켜 (우리는 그의 죄악이 조금씩 조금씩 그를 참회의 순간으로 데려가고 있음을 본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해서 공작은 점점 더 무덤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다)고 썼다. 아멘.
피렌체의 서기장이 몰락하는 영웅을 이렇듯 냉혹한 어조로 그리고 있는 데 대해 분노하면서 그를 비난한 사람들이 있다. 하잔 그들은 그를 오해하고 있었다. 그는 발렌티노의 항해가 수조로울 때, 군주로서의 그의 어떤 측면들을 찬양했을 뿐이었다. 그와 같은 악한은 이단 파멸하게 되면 누구의 동정도 얻지 못하는 법이다. 더욱이 그처럼 마지막 순간에 일말의 영민함도 꿋꿋함도 보이지 못하는 경우에는 더 말해 무엇하랴. 마키아벨리는 뒤에 자신의 (리비우스 논고 Discorsi)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떠한 행위에서건 영광의 획득은 가능하다. 보통의 경우, 그것은 승리를 통해 얻어지지만, 패배했을 때라 할지라도(...) 그것을 덮을 만한 용기 있는 행동을 즉각 취한다면 영광은 획득 될 수 잇는 것이다.) 하지만 발렌티노는 로마에서의 그 마지막 나날 동안 우유부단하고도 비참한 행동거지 외에 아무런 용기도 보여주지 목하고 다만,
남들에게서만 찾으려고 했었지
자신도 생전 몰랐던 동정심을.
이러한 말들은 마키아벨리의 첫 (십년기(십년기, Decennale)를 비롯한 다른 유사한 시구들에 나타나는 것으로, 그가 비록 정치학의 저술가로서는 보르자의 그 비열한 도덕적 품성들에 반대하지 않았지만, 한 인간으로서는 그러한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잇다. 사실 그는 정치학 저술가로서 이 비참한 인물의 슬픈 최후로부터 무언가를 배웠을 것임에 틀림없다. 것은 자신이 배반하고 해를 입힌 사람들은 결코 믿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만이 아니었다. 마키아벨리 같은 사람에게 발렌티노의 그 같은 모습은 틀림없이 그가 저지른 다른 모든 범죄만큼이나 용서 받을 수 없는 잘못으로 보였을 것이다.
로마냐 공이 무대에서 사라지고 있던 그 즈음에도, 그곳에서 일어나는 당시의 사건들은 여전히 마카아벨리의 주요 관심사가 되고 있었다. 그는 냉담한 교황의 마음의 베네치아에 대한 공격의 열기로 바꾸어 놓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말로는 호의를 보이면서도 행동에서는 더디고 마치 북풍처럼 오싹한 그를 보면서, 이러한 태도가 원래의 성품 때문은 아닌 듯하다고 느낀 마키아벨리는 혹시 그가 자신의 교황 선출에 도움이 된다면 누구에게나 무언가를 약속했던 그 당시, 베네치아 쪽에서도 무슨 약조를 했던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다. 만일 그 같은 경우라면, 그가 베네치아에도 앞서 발렌티노에게 했던 대로만 해주기를 바랄 도리밖에 없었다. 하지만, 교황의 말과 행동을 면밀히 검토한 끝에 그가 비교적 솔직한 인물임을 안 마키아벨리는 다음과 같은 판단을 내렸다. 즉 그가 온건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자신이 새 교황으로서 아직 군대로 재정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가 (확고한 권력을 얻을 )때까지 사태를 관망하면서 행동거지에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 특유의 날카로움으로 이렇게 결론지었다. (그에서 확실한 것은 딱 한가지가 있습니다. 이는 명에를 추구하면서도 성마른 그의 성격입니다.) 그리고 4일 후, 그는 베네치아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상하였다. (교황의 성격은 그들에게 전 이탈리아를 내어주는 문이 되든가, 아니면 거꾸로 그들을 몰락의 길로 인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중 두 번째 예상은 진짜 예언자로 만들어버렸다.
11월도 다 지나가 버렸다. 마키아벨리가 로마에 체류한 지도 벌써 한달이 넘었다. 이번의 경우, 언제나 쉴 틈이 없는 그에게 이례적인 일은 그가 휴가를 청하는 말도 불평의 말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직 딱 한번, 비용이 많이 들어 돈이 더 필요하니 봉급을 올려달라는 편지를 정부에다 보냈을 뿐이다. 만일 봉급 인상이 불가능하다면, 전령에 드는 비용이라도 대신 지급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는 이처럼 힘든 상황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항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끝 맺었다. (제가 어떻게 해보겠지만, 요즘 사람이란 게 한 발짝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려고 일하지 뒤로 물러나려고 일하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의 서기장이라고 험한 말을 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한번은 비교적 낮은 신분 출신의 한 정무위원이 교황의 로마냐 정책에 대해 자신에게 개인적을 좀 알려달라고 요구하고는 소식을 빨리 전해 주지 않느냐고 안달을 하자, 마키아벨리는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되받아쳤다. (제가 그랬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만약 알아먹기 어려운 말로 보고서를 썼다면 이제부터는 쉽게 쓰도록 하지요.) 그는 또 언젠가 보고에 태만하다는 지적을 받자, 역시 강경하게 응답하였다. 위원님들이 주는 봉급이나 제가 지닌 수단으로는 도저히 충당할 수 없는 비용을 감수하면서, 큰 불편과 위험을 무릅쓰고 열심히 일한 대가가 태만하다는 비난이라니 유감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짜증스런 이러한 일들을 제쳐놓는다면, 당시 유행하던 역병에도 불구하고 미키아벨리에게는 로마에서의 생활이 괜찮은 것이었음을 확실하다. 상상은 좋지만 톰마시니가 이 시기 그의 로마 체류를 (아무 재미도 없었을) 뿐더러 (유쾌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말한 데는 찬성하기 어렵다. 거꾸로 그는 그곳에서 매우 만족스럽게 지냈다. 그래서 12월 중순 10인위원회가 이제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리자, 그는 못 들은 척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다른 때에는 빨리 돌아가게 해다라고 요청할 때난 써먹던 몸이 불편하든 변명을 이 당시엔 귀국을 늦추려고 이용하고 있었다. 즉 그는 이미 한 차례 병으로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전달에 겪었다는 기분 나쁜 병상의 불안간에 대해서 별다른 기억을 남기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가 귀국을 원할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로마에서는 역별이 돌고 있었고, 피렌체에는 장녀를 본 이후 두 번째 아기를 막 낳기 직전에 떠나온 젊은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좀 방탕한 편이었던 그가 아내든 역별이든 그리 개의치 않았을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이 제 막 태어난 두 번째 아기를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것도 아들임에랴! 아이는 11월 9일 세례를 받고 할아버지 이름을 따서 베르나르도로 부르게 되었다. 아이의 대부들 중에는 공화국 제1서기장인 마르첼로 비르질리오와 마키아벨리의 친구 보오나코르시가 들어 있었다. 부오나코르시는 편지 속에서, 정무위원 한 사람이 변덕스럽다는 두, 왜 그렇게 친구에게 냉담하냐 둥 하면서, 마르첼로가 (바삐 뛰어다니고 있는) 서기국의 자질구레한 소식들을 전한 후 마키아벨리의 아기 이야기도 빼먹지 않고 있다. (우리는 이 아기가 잘 컸다는 칭찬을 듣도록 힘을 쏟고 있네. 그건 열며 말게, 그런데 이해는 마치 까마귀 새끼 같아. 너무 새까맣거든.) 그의 아내 역시 몸을 추스르자마자 애정 어린 편지 속에서 이 남자아이 이야기를 써 보냈다. (얘는 당신을 닮았나봐요. 피부는 눈처럼 흰데 머리는 검정 벨벳 같아요. 당신처럼 몸에 털이 많고요 그리고 당신을 닮아 그런지 내게는 아주 미남으로 보여요(...) 태어나자마자 눈을 뜨고는 온 집이 떠나가라고 울어댔지요.)
그러나, 이 모든 것과 10인위원회의 명령까지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마키아벨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종종 소데리니 추기경의 집으로 가서 그와의 오랜 친분 관계를 다지곤 했으며, 자기 나라에 유리한 큰 계획을 그에게 들려주면서 자신의 존재를 기억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 당시, 그는 10인위원회에다 추기경의 칭찬을 하기 바빴고, 추기경은 또 그대로 피렌체에다 마키아벨리의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는 좀 심해서 정무궁 내에서는 두 사람간의 이러한 친분 관계를 좋지 않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생겨날 정도였다. 이에 대해 가장 못마땅해하는 쪽은 아마도 곤팔로니에레의 정적들일 것인데, 그들의 수와 세력은 나날이 커지고 있는 형편이었다. 추기경 역시 마키아벨리의 아들에게 기꺼이 대부가 되어주었으며, 10인위원회의 첫 소환명령을 따르지 말도록 부추긴 것도 바로 그였다. 결국 마키아벨리가 소환에 따르기로 작정하자, 추기경은 10인위원회에다 그를 빼앗아가는 데 대해 유감을 표시하면서, 그는 매우 총명하고 성실한 인물이니 잘 봐주라고 부탁하는 편지까지 써주었다.
12월 18일, 우리의 사절은 원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체류를 끝내고 추기경의 편지를 마실 물 삼아 길을 떠났다. 그의 전기 작가 한 사람은 로마에서의 이 체류 시기가 마키아벨리에게는 (아무 재미도 없었던) 것처럼 생각했지만, 차라리 좀더 상상력을 발휘하여 마키아벨리가 유적들이나 대사들로 붐비는 교황청 접견실, 맛있는 음식을 내놓는 식당들, 그리고 로마의 멋진 여성들을 열심히 찾아다니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더라면 더 낫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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