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제5장 속국의 반란과 발렌티노의 행적
피사는 요새라는 무력을 통해 막고 피스토이아는 파양을 이용해서 지킨다는 것이 피렌체의 오랜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피사를 지킬 만한 히도 없고 피스코이아를 붙잡고 잇을 만큼 파당도 튼튼지 않은 상태로 보였다. 마키아벨리가 프랑스에 사절로 강 있었던 1500년 8월, 피렌체 정부가 약하고 분열된 모습을 보이자 도시를 가르고 있던 파당간의 묵은 원한이 때를 맞추어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무리를 들고 일어난 법치파 i Cancellieri는 방화와 약탈과 살인을 자행하며 만복콕파(만복파,i Panciatici)를 내몰았다. ((법치파)란 평시민 정부를 지향하는 반메디치파이다. (cancelliere)란 법정의 수호자라는 뜻의 라틴어 (cancellarius)에서 유래하였다. 반면 (만복파)란 말은 배가 부르다는 뜻의 (Panciata)에서 나왔으며 유복한 친메데치파를 기리킨다 - 옮긴이). 콘타도 condado(도시의 통제권 아래에 놓인 주변 농촌 지역을 가리킨다 - 옮긴이) 역시 같은 처지로, (외부의 원조를 받고 싸우는 정규전과 거의 흡사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국경 바깥에서 탐욕스러운 보르자가 이를 갈고 있는 상황에서, 그 같은 무질서는 공화국에 불명예일 뿐만 아니라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당시 도시는 이미 내부적으로 전쟁에 지친 데다 불신이 만연하고 재정까지 고갈되어, 사람들의 마음은 갈가리 찢긴 상태였다. 이는 곧 피스토이아인들의 마음까지도 분열시켰고, 그 영향은 다시 피렌체인들에게로 되돌아왔다. 만목파가 메디치 가의 주총자엿던 반면 법친파 ㅡ 평시민 정부를 지지했던 것과 같이, 피렌체의 명망 있는 시민들도 공공연하게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기울거나 어는 한편을 지지하였다. 또 피렌체 땅 바깥에서도 볼로냐의 참주인 조반니 벤티볼리오는 법치파 쪽인 반면, 체사레 보르자 휘하에서 종군하던 비텔리 가와 오르시니 가는 만복파의 편을 들고 있었다. 병이란 원래 미리 막아야 하는 것이지만, 병이 낫을 때라도 곧 잡지 못하면 치료가 힘들어지는 법이다. 피스토이아는 물론이고 특히 그 주변 평야의 구릉지대는 공화국의 손에서 거의 벗어나 버렸다. 반란군 무리가 콘타도를 휩쓸었다. 이들 중 한떼는 카르미냐노에까지 진출해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전권 대리인)으로서 사태를 파악하고 어떤 조치가 필요하니즐 알아보라는 지시를 받고 그곳에 파견되었다. 그때가 2월 초이틀로 프랑스에서 돌아온 지 겨우 2주만이었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 말을 타고 가는 데 걸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고, 임지에 머문 시간 역시 그보다 더 소요되지는 않았다. 피스토이아 사태는 4월에 들어 피렌체가 그소문을 다시 통제할 수 있을 만한 군대를 사절과 함께 보냄으로써 일단 진정 기미를 보였다. 바로 이때 보낸 사절들 중에는 우리 서기장의 사촌인 니콜로 디 알레싼드로도 들어 있었다. 그는 우리의 서기장과 같은 이름을 가졌으나, 후세의 사람들은 그를 니콜로 마키아벨리나는 위대한 이름으로 부르려 하지 않았다. 하여간 사절들이 이러한 상처를 돌보고 있는 동안, 공화국은 훨씬 더 큰 위험 앞에서 고통받게 되었다.
봄이 되자, 발렌티노는 다시 파엔차를 공략하기 시작하였다. 그곳 시민들은 작년 겨울 추운 날씨의 도움을 받으면서 격렬히 저항한 바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날씨가 좋아진 데가 그렇게 강력한 침략군을 맞아 도시를 방어할 세력이라고는 오직 시민들뿐이었기 때문에 화평을 맺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 승리 후 아버지로부터 로마냐공이라는 칭호를 하자받은 발렌티노는 이제 볼로냐를 빼앗을 수 있으리라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기수를 그곳으로 돌렸다. 그러나 그는 피렌체인들에게 피옴비노 공략을 위한 길을 열라고 요구하면서,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국경을 넘어 들어왔다. 그는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가는 길이 막혀 있을 때에는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일단 그것을 넘어서자 곧 거칠고 무례하게 행동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원하는 바는 더도 덜도 아니고 피렌체가 자신과 동맹을 맺어야만 한다는 것, 그래서 자신의 군사 행동을 위해 거금의 돈을 지불해야 하며 정권을 자신에게 우호적인 인물에게 넘겨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그는 이러한 요구에 힘을 실어주기 위하여 군대를 성벽 거의 바로 아래의 캄피에 까지 진군시켰다. 피에로 데 메디치는 볼로냐 국경 부근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며, 비텔로초와 오르시니 가 사람들은 발렌티노와 함께 있었다. 그는 마키아벨리가 피스토이아에 가 잇는 사절들에게 정부를 대표하여 쓴 편지에서 말했듯이, (하늘과 운명의 도움 아래) 군세를 몰아 무섭게 다가오고 있었다.
적은 성문 밑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문 안에도 있었다. 도시 내에는 메디치 가의 추종자들과 불만을 가진 유력시민들이 있었고, 이러한 분열로 말미암아 무력해진 피렌체 정부는 동맹을 받아들이고 돈을 지불한다는, 그래도 치욕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협정을 맺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피렌체인들은 문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그것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바로 그때쯤 왕으로부터 피렌체인들을 다치게 하지 말라는 새로운 명령이 내려왔기 때무이다. 결국 보르자는 한 푼의 돈도 거두지 못한 채 5월 176일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대신 그는 기수를 돌려 가는 길마다 닥치는 대로 약탈과 폭력과 파괴를 자행하면서 피옴비노롤 진군하였다. 발랜티노의 침입으로 피스토이아 사태가 이전보다 더 나쁜 상황에 처했기 때문에, 피렌체는 다시 것을 통제하는 방법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7월 23이 마키아벨 리가 재차 그곳으로 파견되었으나, 그의 체류 기간은 2, 3일을 너지 않았다. 이보다 조금 앞서 그는 카쉬나에 가 있었다. 또 얼마 후인 8워 18일에는 시에나로 보내졌는데, 그 임무에 대해서는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분명히 발렌티노의 행로와 관계 있다는 점 외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10월 들어 만복파의 복귀와 함께 불행했던 도시가 잠시나마 평온을 되찾을 무렵, 다시 피스토이아로 돌아왔다. 이처럼 그는 이러한 국외 임무와 서기국의 평상 업무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일했다.
이 당시 마키아벨리의 일이란 이런 것이었다. 우리가 그 내용을 아는 것은 이뿐이지만, 이것이 그의 일의 전부는 아닐엇을거이다. 아직 이야기는 못했지만, 아버지가 운명한 이후 그의 인생 행로는 다른 방향으로 바뀌어 있었다. 프랑스에서 이제는 텅 빈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아내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페이지에 나타나는 시기에도 토토가 여전히 그와 함께 살고 있었는지 어떤지는 알려져 있진 않다. 그러나 만일 그랬다면, 당시 스스로와 동생의 처지를 생각하는 니콜로의 심정은 언젠가 자신의 가장 잘 알려진 희극 작품 속에서 그렇게 쓴 것처럼, (그들은 집에 여자가 없어 짐승처럼 살고 있다네)라고 한말과 흡사했으리라. 그래서 그는 뤼지 코르시니의 딸 마리에타와 혼인하였다. 처가 쪽의 지참금과 가문됨은 그리 많지 않은 재산이나 평시민의 신분과도 그저 어울릴 만한 정도였다. 이 혼인은 앞서 이미 이루어졌거나 아니면 501년 8월에 막 이루어질 단계에 있었던 것 같은데, 우리는 그 뒤의 문제에서야 비로소 이에 대한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혼인이 전기 작가나 그가 쓰는 전기의 주인공 양자 모두에게 큰 변화를 일으킬 만한 사건은 되지 않았다. 물론 니콜로는 장차 자식에게 친근한 아버지이자 양처 마리에타에게도 분명히 조용한 가운데 애정을 키워 나간 남편이 되겠지만, 결코 아내에게 지나치게 매달리는 그런 성향이 아니었을뿐더러, 설사 그가 그렇게 하려고 했어도 바쁜 일 때문에 그럴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 무렵, 체사레 보르자는 피옴비노를 공격하고 있었고, 프랑스인들은 나폴리 왕국을 별로 힘들이지 않고 점령하였다. 그들은 처음 이를 에스파냐와 나누기로 약속했지만, 그것은 거짓이었으므로, 차후 이탈리아를 두고두고 전쟁과 불행에 휩싸이게 할 사악한 씨앗이 뿌려진셈이었다. 1501년 9월 3일 피옴비노가 보르자의 군대에 넘어감에 따라, 피렌체인들은 점점 더 그의 군대와 그의 탐욕사이에서 오갈 데 없는 처지로 내몰리게 되었다. 보르자의 아버지인 교황이 그들의 도시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기미가 농후해지자, 그들의 의심도 더욱 커져갔다. 이미 8월 25일 이후, 이 일 때문에 당시 사절로 로마에 가 있던 베스푸치는 교황청의 방종한 분위기를 질타하는 내용을 담아 마키아벨리에게 보낸 사신(사신)에서, 보르자가 카메리노와 우르비노를 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음을 귀띔하였는데, 이허한 전투들이 어디서 끝날지는 도무지 예측 불능이었다. 이러한 사태에 진면한 피렌체는1502년 4월 16일 프랑스 왕과 새 동맹을 맺게 되었다. 조건은 예상보다 좋은 편이었는데, 왜냐하면 와동 이제는 피렌체가 당시 이탈리아로 진군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던 신성로마 황제 막시밀리안편에 서서 그를 공격하지나 않을까 염려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와의 조약에 기운을 얻은 피렌체인들은 피사 부근을 초토화 시키기로 작정하고 그곳에 포병 부대를 보내려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곧 이 새로운 정복 구상을 포기하고 지금까지 죽 그랫듯이 기존의 것을 지키기 위하여 또다시 애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이유는 56월 4일 밤 아레초가 비텔로초 비텔리와 공모하여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5월초부터 발텐티노 군과 함계 발디키아나외 국경 부근에 가 있었으며, 그래서 그는 반란이 일어나자 많지는 않지만 자기 휘하의 군대를 이끌고 즉시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피렌체 정부는 뒤늦게 피사 부근에 있던 군대를 불러들었다. 이 때문에 피사는 다시 한숨 돌리 수 있게 되었고, 아레초 역시 연일 보르자의 군세가 증대됨으로써 두려움에 떨 필요가 없어졌다. 게다가 피에로 데 메디치는 이미 도시에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피렌체 공화국이 와해 직전까지 몰리게 된 것은 이러한 외부로부터의 공격보다는 내부의 허약성과 평시민 정부의 의심과 무능, 그리고 유력 시민들의 두려움과 불만 때문이었다. 발디키아나의 기름진 땅들이 공격을 기다릴 새도 없이 하나둘 차례로 적의 수중에 넘어갔다. 몬테 아 산 사비노, 코르토나 시, 카스틸리오네, 앙기아리, 보르고산 세폴크로 등도 마찬가지로 적의 포병대가 시야에 나타나기도 전에 버림받고 말았다. 모든 영토가 찢겨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란두치는 특유의 대중적인 문체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리하여 피렌체인드은 비유하자면 흡사 자신드의 창자까지도 모두 내어주고 있는 양상이었다. 부근의 모든 사람들이 피렌체인들을 비웃었다.)
발렌티노는 프랑스 왕의 분노가 점점 더 커가는 데에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분명히 아레초의 반란에 개입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사라인) 베텔로초가 그곳에 간 것은 단지 사적복수를 위해서임을 맹세한 바 있었다(그러나 베텔로초는 아레초 체류 동안 편지에다(교황 군영으로부터)라고 명기하였다). 그가 반란 사건에 관련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 사실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게 피렌체와 전쟁중이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의 행동 하나한가 거미줄처럼 엉킨 간계의 연속이었다. 아레초 공략에 투입된 군대는 외면상 카메리노 공략을 위해 규합한 군세의 일부였다. (그의 사람)이 실질적으로 아레초를 치는 동안, 그는 카메리노를 공격하였다. 그런 후 , 발렌티노는 그쪽 일에 전념하고 있다는 모두가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믿기 어려울 정도의 기동력으로 (먹고 마시지도 않은 채) 우르비노 쪽으로 움직여서 마찬가지로 신속하게 그 소국을 빼앗아버렸다. 그는 이에 앞서 미리 우르비노에 카메리노 공략을 위한 원조를 요청하여 그곳의 포병대와 병상들을 이동하도록 만드는 계략을 썼다. 그는 똑같은 행운으로 카메니노 역시 곧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직전에 앞서, 그리고 프랑스 왕의 명령이 다시 한번 그의 계획을 망쳐놓게 되기 전에, 그는 자신의 그 같은 모든 성공과 피렌체의 그 같은 불운이 과연 더 큰 도박으로 이어질지 어떨지를 시험해 보고 싶어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우르비노를 공략하기 위해 떠나는 바로 그때에 맞추어 피렌체에도 매우 중요한 문제를 의논할 수 있는 사람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썼다.
피렌체인들은 그들의 영토 안에서 그러한 분란을 일으킨 인물, 그리고 그것을 단 한번에 잠재우거나 또는 거꾸로 더 확대 시킬수도 있는인물이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려고 매우 고심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프랑스 원군이 도착할 대까지 그를 지켜보며 그의 행동을 지연시키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서기로서보다는 분별있는 조언자로서 마키아벨리를 딸려 보냈다. 그들은 6월22일 서둘러서 길을 떠났고, 최대로 말을 달려 같은 날 폰티첼리에 도착하여 정무위원회에 편지를 올렸다. 이 편지는 통상 그렇듯이 마키아벨 리가 쓰고 소데리니 단독으로 서명한 것이었다. 그들이 전광석화 같은 우르비노 점령과 그 작전에 이용된 계략에 관해 들은 것은 그곳으로 가는 길인 폰타씨에베에서였다. 편지는 마티아벨리다운 어조로 다음과 같이 끝나고 있다. (여기 정무위원님들께서는 이러한 계략과 기민성이 최고의 호기와 맞아떨어진 상황을 눈여겨 보셔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논쟁과 숙고만을 거듭할 뿐, 정작 결단에서는 미적거리기 일쑤인 피렌체 정부에 대해 던지는 하나의 교훈이었다.
그들은 24일 저녁 우르비노에 도착하여 두 번째 밤을 맞았다. 보르자가 바로 앞서 승리에 대한 사절들의 축하와 약간은 빈정대는 듯한 보르자의 답례가 오고간 뒤, 서로를 비난하고 그에 변명하는 설전이 시작되었다. 비난전의 내용은 발렌티노가 피렌체 성벽 아래까지 왔던 때로 돌아가, 그가 강요해 놓고는 다시 스스로 지키지 않은 협정들과 당시 그에게 보냈던 사절 및 편지들이 언급되었다. 이 자리에 마키아벨리가 같이 있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그 모든 일들을 자신이 직접 처리했거나, 혹은 처리 과정을 지켜보았을 뿐 아니라, 편지를 쓴 것도 내내 자신으로서 사실상 모든 일의 실마리를 한 손에 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렌티노의 결론은 위협적이었다. (나는 당신들의 현정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그들을 신뢰할 수 있다. 당신들은 이 정부를 교체해야 되며, 지금까지 나에게 약속한 것은 모두 지키겠다고 맹세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이런 식으로 그냥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될 것이다. 당신들이 나를 우방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나는 적이 될 것이다.) 그들은 이에 대해 피렌체 현정부를 최상으로 여기고 있으며 또 그에 만족하고 있으므로, 다른 우방들도 역시 그러하다고 응답하였다. 두 시간에 걸친 논쟁 끝에 양쪽은 서로 좀더 전향적인 입장에서 다음날 다시 논의를 재개하기로 하였다. 두 사적이 매우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그 자리를 떠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데, 이들에게는 발렌티노의 일 처리방식이 마치 (병을 앓는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도 전에 부음이 전해졌던) 우르비노 공의 경우처럼,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남의 집에 버티고 않아 잇는 형상)이라고 생각되었다.
다음날, 그들은 오르시나 가의 방문과 환대를 받았다. 이들은 사절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설득시키려고 무진 애를 썼다. 즉 프랑스 왕은 사실 보르자가 피렌체인들을 마음대로 하도록 내락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조건이 붙어 있었는데, 만일 일을 빨리 처리하지 않고 고의로 지연시킬 때는 피렌체에 원군을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사절들은 이러한 일이 발렌티노의 간계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차렸으나, 그래도 일이 어떻게 될지 걱정스러운 마음 떨칠 수가 없었다. 그날 밤 삼경쯤에 그들은 다시 발렌티노를 접견했으나, 그는 전날 밤과 똑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며 4일 안에 대답을 달라고 못받았다. 이렇게 되자 그들의 걱정은 한층 더 커졌다. 그들이 함께 피렌체로 돌아 갈것이라는 작정을 한 적도 없었지만, 형편상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도 일단 말을 더 잘 타는 니콜로 혼자 피렌체로 달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발렌티노가 준 시간을 하루는 더 아낄 수 있을 것이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을 담고 특별 전령 편으로 즉시 우송되었던 바로 그 편지에서 마키아벨리는 보르자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 군주의 용병술은 매우 놀랍고 위엄이 있습니다. 그는 전투에서 매우 용맹하기 때문에 그의 업적에 비하면 다른 모든 것이 오히려 사소하게 보일 정도입니다. 그는 영광과 권력을 얻기 위해 피로도 위험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그가 머물던 곳을 떠났다는 마을 듣기 전에 이미 다른 곳에 가 있곤 합니다. 그는 병사들의 마음을 얻고 있으며, 그래서 그의 병사들을 이탈리아에서도 최정예입니다. 바로 이러한 점들 덕분에 그는 상승의 위업을 이루고 있으며, 변함없는 행운도 손에 쥘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묘사의 글 아래 소데리니 주교의 서명이 적힌 것을 보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무언가 위조나 실수의 결과라고 생각될 것이다.
일은 편지에 쓴 대로 진행되었다. 마키아벨리는 밤새워 보르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 일에 대해 오랜 시간 소데리니와 논의하고는 날이 낡기 전에 긴 편지를 쓴 뒤, 말에 올라 최대한 빠른 속력으로 피렌체를 향해 달렸다. 주교는 곤경을 헤쳐나가기 위해 우르비노에 남았다. 하지만 떠난 사람이나 남은 사람이나 발렌티노의 무시무시한 태도에 심적으로 시달리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하루하루 날은 흘러갔는데, 이 마지막 며칠은 교황의 아들에게는 중요한 시간이었다. 그는 겉으로는 왕의 전령이 전하는 명령이나 그 유명한 프랑스 군이 피렌체를 돕기 위해 아느로 계곡으로 전군해 오고 있는 데 대해 별로 걱정하지 않는 척 했으나. 사실은 자신의 요구를 좀더 온건하고 적절한 수준으로 양보하여 옛 협정을 지키라고 촉구하는 정도에서 만족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이렇게 되자 피렌체인들은 최대한 왕에 대한 그들의 채권은 늘리고 적에 대해서는 줄이려는 욕심으로 조건을 흥정하였다. 결국, 소데리니는 협상을 중단하고 돌아오라는 훈령을 받았고 보르자는 아무것도 얻은게 없는 (불안한 상태로) 남겨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피렌체는 프랑스 왕을 이용하여 그 위험스러운 적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다. 왕은 지금까지 교황인 아버지나 그 아들 모두가 질색이었고, 그래서 결국 마키아벨리가 일찍이 낭트에서 왕의 재상에게 요청했던 것이 실현됨 셈이었다. 왕은 친히 보르자를 벌하기 위해 진군해 오고 있다고 선언하면서, (이는 투르크 토벌만큼이나 경건하고 성스러운 일이라고 공개적으로 쳔명하였엿다.) 왕의 군대와 왕의 분노를 목격한 발렌티노는 어쩔 수 없이 비텔로초에게 퇴각을 명하였다. 당시 앙보 휘하의 프랑스 군은 아래초로 진격하고 아스티로부터 내려온 다른 군세른 파르마에서 트스카나 쪽으르 방향을 막 돌리고 있는 중이었다. 아라초만은 여전히 이전 상태로 있었는데, 그 이유는 협상을 통해 비텔로초로부터 그곳을 탈환한 앙보가 주둔중이었기 때문이다. 아레초는 랑그르의 군주가 그곳을 돌려주라는 왕의 급로를 가지고 왔을 때에야 비로소 되돌려받을 수 있었다. 태풍은 지나갔고, 공화국으로서는 유능한 정부가 키를 잡고 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당시 정무위원회의 명복상 수반은 보잘것없은 인물이었으나, 사실상의 지도자는 알라만노 살비아티였다. 피렌체의 이 일이 좋은 결과로 매듭지어진 데에는 그와 함께 기백 있는 사절 안토니오 자코니미의 힘이 컸다. 이 모든 사건들의 와중에서 아무리 편지 써 보내는 일로 바쁜 때라 해도, 마키아벨 리가 서기국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 있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서기보인 베스푸치가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렇게 말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싶은가)라고 말했을 것인가. 그는 아레초에 세차례 갔다. 첫 방문은 대략 8월 15일에서 19일 사이였는데, 랑그르를 맞아 그를 접대하고 도와주기 위해서였다. 다음 두 번은 역시 랑그르에 대한 여러 가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9월 11일과 17일의 방문이었다. 우리는 9월 13일에도 그가 그곳에 있었던 사실을 알고 있는데, 그가 다음날 떠났다는 아무런 언질이 없는 점으로 보아 두 번째와 세 번째 방문 사이에도 그는 거의 피렌테에 머물 틈이 없었음을 알 수가 있다.
피렌체 영토 내의 다른 임무들이 거의 그렇듯이, 이러한 임무들이 그어게 어던 중요한 계기로서 작용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마키아벨리는 최근의 이러한 공화국 내부 사건들, 즉 피스토이아의 파당 사건과 아레초 반란 사건들을 처리하는데 있어서도 서기국의 이름 나지 않는 일을 통해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잠시 있다 가는 정무위원들과는 달리 그는 그들을 보좌하여 죽 계속해서 같을 일을 했기 때문에, 때로는 신중하게 사건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역할로, 때로는 편지 작성의 역할을 함으로써 상당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전기 작가나 그의 책에 대한 주석가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바로는, 그가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피스토이아와 아레초와 같은 종속 도시들을 엄히 다스려야 한다고 정무위원들을 설득했다는 것이다. 그가 이처럼 엄한 조치를 선호했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비록 입중할 수는 없지만, 그러한 조치를 조언한 인물이 바로 그일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설사 그가 그런 조언을 했다손 치더라도, 일의 진행 과정은 그것이 그렇게 전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마키아벨리의 경험들이 피렌체의 정치에 미친 영향보다는 스스로의 지성의 성숙에 미친 영향에 더 관심을 기울여왔다. 물론 내가 프랑스에서의 임무에 관해 말했던 것처럼 우리의 관심사는 아직 그가 딴 열매보다는 그가 뿌린 씨앗에 잇다. 이 씨앗들은 후일 그가 무력함과 비탄에 빠지게 되엇을 때 싹을 틔우게 되는 것이다. 그가 매일매일 생각했던 피렌체 정부의 구조적 취약성은, 특히 그것의 원인과 결과를 그가 감탄해 마지 않은 발렌티노가 가진 힘의 원인 및 결과와 비교할 때, 그에게는 이미 끊엄없는 교훈의 원천이 되고 있었다. 종속국들의 반란은 그에게 결코 적지 않은 관찰과 연구의 재료가 되었다. 그의 (피스토이아 반란 보고서 De rebus pistoriensibus)는 단지 새로 취임한 정무위원이나 대사에게 정보 차원에서 쓴 많은 공식 보고서 중 하나에 지나지 않으며, 사실 그 중에서도 가장 단조롭고 재미없는 글에 속한다. 하지만 미완성으로 추정되는 (발디키아나 반란민의 처리 방식에 대한 논고 Del modo di trattare I popoli della Valdichiana ribellati)는 또 다른 경우이다. 그 도시를 탈환한 지 한 해 후에 씌어진 이 글은 일반적으로 마키아벨리의 정치저작들 가운데 회고적 성격을 지닌 최초의 경우로 간주되고 있다. 비록 그것이 지난 시기의 처벌 과정에 관한 글이기는 하지만, 나에게는 그렇게 회고적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렌티노라는 외적 위협이 계속되는 한 아레초를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는 점을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글이 당장 서기국이 필요로 하는 문제 때문에 씌어진 것은 아닌 최초의 경우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것은 앞서의 공식 보고서들과는 달리 거의 문학적 풍미를 느끼게까지 해준다는 점에서 처음이며, 피렌체의 서기장이 (과거사에 대한 끊임없는 공부)를 당 시대에 적용한 예로서도 처음이었다. 이러한 적용의 밑바닥에 깔린 명제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에나 지금이나 항상 똑같은 욕망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으로서, 이는 그의 신 과학의 근본 원리들 중 하나가 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짤막한 글을 마키아벨리 저술의 많은 부분을 핵심적으로 예고.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에 담긴 정치적 내용을 넘어 어떤 특별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 핵심이란 우리가 마키아벨리로부터 개대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즉 반란을 일으킨 나라들은 확실히 감싸주든지 아니면 아예 절멸시켜 버려야 하며, 어정쩡하게 중간적 입장에 취했다가는 큰 재난을 입을 것이라는 점이다. 고대의 현인이 말한 중용적 덕성도 적어도 정치에 있어서는 그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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