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제1장 초년기의 교육과 경험
당시 25세였던 마키아벨리는 이 새로운 정부가 정확히 평시민적이라는 점에서는 만족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의지에서 온 수도사에 의해 성립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국가를 종교, 즉 신에 봉사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그의 생각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마키아벨리는 적어도 자신의 저술들 속에서 종교를 국가, 즉 인간을 위한 수단으로 보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그가 읍도파에 속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고 오히려 그 반대파인 격노파의 일원일 것이라고 생각함직 하지만, 이 파의 열성적 인물들 명단에는 결코 마키아벨리의 이름이 올라 있지 않다. 더욱이 그는 교회의 부패와 로마의 악덕 성직자들 그리고 사악한 사제들에 대항한 사보나롤라의 정치적 업적을 필연코 높이 평가했을 것이며, 설사 그가 자신과 피렌체인들의 기질에 따라 한때 그 몰락한 영웅을 조롱했다고 해도, 좀더 깊고 진지한 생각을 가진 뒤부터는 사보나롤라에 대한 존경심을 숨기지 않았다. 마키아벨리에 관해 확실한 날짜가 기입된 최초의 글이자 그의 생애에 대한 최초의 문서들 중 하나로, 리차르도 베키에게 1498년 3월 9일자로 보낸 편지가 있다. 이 속에서 당시 교황의 (분노에 굴복한) 사보나롤라가 주교좌 대성당의 연단에서 물러나 산 마르코 성당에서 행한 두 편의 설교 내용이 담겨져 있다. 이는 그가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속한 교단의 교회에서 한 첫 설교 두 편이었다. 이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는 이제 교황의 정신적 무기와 가톨릭 연명의 세속적 압박과 함께, 피렌체인의 상인적 교활성과 쉽사리 과거를 망각하는 불안정한 기질 때문에 무너져가고 있었다. 사보나롤라의 선의와 그로 하여금 설교케 하고 종국에는 화형주에 조용히 몸을 맡기게 했던 고결한 이상을 생각할 때, 이 위대한 수도사를 (시류에 영합하고 그럴 듯하게 거짓말을 둘러댔던) 사기꾼이라고 혹평하였던 마키아벨리의 편지는 아마도 오늘날 별로 읽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쯤은 익살로 씌어졌던, 친국에게 보낸 이 편지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는 다만 자신과 친구들 간의 재미를 위하여 피렌체인 특유의 독설적 기질을 선보이고 있었을 뿐이다. 더욱이 당시 그는 29세, 한창 얽매이지 않는 생활을 좋아하고 사보나롤라가 금지시켰다. 화려하고 쾌락적인 생활을 즐기고자 하는 나이였던 것이다. 그와 같은 젊은이에게 교황에 대하여 요구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바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사실 로드리고 보르자는 그로부터 두 달이 채 되지 않아서 피렌체인들의 전폭적인 지지아래, 한때는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다른 무기 없이 오직 설교만으로 로마와 이탈리아의 수복을 꿈꾸었던 인물로 화형주로 보냈던 것이다. 이 화형주는 마키아벨리가 사인(사인)에서 공인(공인)으로 생활을 바꾸기 전에 사림들 사이에서 배운 마지막 교훈이었다.
지금까지 마키아벨리 시대의 사악한 교훈들을 짤막하게 간추려보았다. 비록 자신의 저술에 국한된 이야기지만, 그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이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었다면, 그것은 아마 사람들과 세상사를 날카롭게 관찰하고 도덕적 판단에 얽매이지 않은 채 논리적 엄격성을 유지하면서 결론을 끌어내는 남다른 능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관찰과 논증으로부터 도출해 낸 대체로 과학적인 고찰들이 반드시 그 자신의 감정과 일치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의 이론 속에서는 거의 언제나 이성적인 것이 감정을 압도하였으나, 행동에 있어서도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둘은 항상 결합되어 그것들로 충만된 마음속에서 새로운 갈등을 야기하게 될 것이었다. 사실 피렌체인은 성격상 괴팍한 측면들을 많이 지니고 있었는데, 단테는 이 중 하나를 가리켜 (괴짜bizzarro)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이는 곧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수사적으로 말할 때, 우리는 피렌체인의 이러한 기질을, 변덕스러우면서도 본질적으로는 한결같고 가혹한 듯하면서도 때로는 감미로운 가운데 그것을 발샟메하고 또 성숙시킨 그곳의 토양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피렌체의 땅은 추위와 더위에 의해, 아니 그보다는 인간의 노동을 통하여 길들여져야 하는 단단한 돌덩이들로 되어 있어서 열성적이고도 끊임없는 노력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피렌체인의 기질은 겉으로는 부드럽지만 속으로는 가혹하고 심술궂은 데가 있다. 이는 아마도 도시민의 세련성 아래 가혹함의 불꽃이 번쩍이는 것으로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신랄한 풍자와 그 유명한 조소적 태도는 반드시 유쾌함과 선의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약간 경박함마저 풍기는 이들의 쾌활성을 입증하고 상징하는 말로, 흔히 로렌초 데 메디치의 (바코와 아리안아의 개선 Trionfo 야 baccoe 야 arianna)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후렴구를 싫증날 만큼 되풀이 인용하고 있지만, 정작 이렇듯 유쾌한 삶의 외양 밑에 똑같은 정도로 우울하고 씁쓸한 내면이 존재하고 있음을 스스로 인식하지는 못하는 듯하다.
젊음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것이 아무리 덧없다 해도
하고 싶은 대로 즐기라.
내일이면 아무것도 확실치 않으리니.
피렌체인의 기질을 잘 이해하려면 결코 다음의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즉 여기서 가장 육욕적인 사육제 노래가 동일한 음조와 운율을 가지고 다만 가사만 바뀐 채, 다른 어떤 경우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헌신적으로 만들어진 성가로서 불렸던 것이다. 따라서, 마키아벨리 또한 그 같은 종류의 노래들이나 (만드라골라) 같은 희곡과 함께 (참회 권유 Esortazione alla penitenza)처럼 경건한 내용의 글을 썼다고 해서, 하등 놀랄 일도 장난으로 돌려버릴 일도 아니다. 이 도시에서는 풀치의 가장 피렌체적인 서사시 (모르간테 Morgante)에서도 나타나는바와 같이 불경함과 경건함이 끊임없이 뒤섞이고 있었다. 또한 사보나롤라의 놀라운 개혁과 함께 로렌초의 이교적 시대나 그의 화형 이후 한 행정관이 (신을 찬미하라. 이제 우리는 다시 쾌락을 즐길 수 있으리니)라고 천명했던 바의 격노파와 동무파i Compagnacci(피렌체의 반사보나롤라 졍파를 일컬음 - 옮긴이)의 비행들이 번갈아서 일어났던 것이다. 피렌체의 정치 생활 역시 치열하고 변화 무쌍한 대립상에 의해 지배되는 그 같은 성향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모든 구가들 중에서 최악의 정치 체제를 가지고 있었고 법률보다는 정치 지도자들이 오히려 나았던 이 도시에서 16세기의 위대한 정치 저술가 세 명(마키아벨리, 귀차르디니, 도나토 잔노티를 일컬음 - 옮긴이)(그 중 마키아벨리가 으뜸이지만)이 모두 나왔다는 것은 얼핏 이상스러운 우연인 듯도 하겠지만 사실 논리적으로는 당연한 결과이다. 왜냐하면, 원래 옛 자치 도시의 자유로부터 기원하였으나 단지 의심이 많고 시기심이 강하며 조급하고 변덕스러운 일상적 기질에 의존함으로써 이후 괴상한 모습으로 바뀌고 변화해 온 결함투성이의 정치 체제 이면에는, 극히 어려운 상황 아래서 남을 통치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통치하는 법을 익히도록 해준 정치적 교훈의 유익한 경험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위정자는 악법으로 인해 장애를 받았으며, 관리는 법률만큼이나 자주 바뀌었고, 외교 사절은 모호하고도 제한된 권한 외에는 아무런 권위도 부여받지 못하였다. 심지어 (참주 I tiranni)조차도, 앞서 살필 바와 같이, 도시의 기질에 맞추어서 끊임없는 노력으로 구정을 유지하고 매일매일 그것을 확인하며 단순히 기술이 아니라 간계로써 통치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피렌체의 한 유서 깊은 가문에서 표방했던 (살피고 준비하라,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신조는 파에솔레와 아느로 강 사이에서 생겨난 모든 것들이 그렇듯이, 15세기 피렌체의 국정술(국정술) 학파에도 놀랄 만큼 꼭 맞는 말이었다. 니콜로 마카아벨리가 자라난 곳은 다름 아닌 바로 이 학파에서였다.
이 장을 끝내면서 나는 30대의 문턱에 들어선 마키아벨리의 초상을 간략히 그려보려고 한다. 그러나, 예술가들이 형상화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해 왔던 바로 그 모습만큼이나 이해하고 표현하기 어려운 한 뛰어난 인물을 과연 자 묘사할 수 있을 것인가 우려가 앞선다. 그야말로 사람들이 무려 450년간이나 이해해 보려고 애써왔으나 여전히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인물이 아니던가! 그는 종종 냉소주의 때문에 비난받아 왔으나, 이는 실상(스스로의 논리를 진지하게 믿는 사람의 신념)에 다름 아니었다. 만일 누군가가 이 위대한 이상주의자의 냉횩한 현실주의와 이 낙관주의자의 비관주의를 염두에 두고 그를 이원론적 입장에서 분석한다고 해도 하등 놀랄 일이 못 된다. 그는 (반인 반수의 존재)인 켄타우로스의 모습으로 간주되는 그 자신의 정치와 같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먼저 지노 카포니가 그에 대해 쓴 그을 인용하면서 시작해 보자. 그의 말은 진실이므로 풀어쓸 수도 있겠지만, 글의 묘미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하여 그대로 옮겨보겠다. (그의 지성은 우아하고 풍요로웠으며 품행은 거침이 없었다. 이해력은 놀랄 만큼 뛰어났으나 반드시 세상사가 그의 생각과 일치하지는 않았다. (...) 그는 정치를 아탈리아가 느끼는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그의 목표는 높았고 이상은 원대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힘은 헛되이 소진되고 위대성은 부패하여 수단의 부재와 전망 속에서 마치 패배 후 진흙탕에 처박힌 로마군의 독수리 깃발처럼 다만 엎드려 있을 따름이었다. 그는 오히려 종교를 고귀한 것으로서 존중하였으며 이탈리아적인 것으로서 그것을 사랑하였다. 그는 종교를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든 잘못된 정치 제도에 분노하였으며, 그리하여 그것을 조소하고 공격하였고 악덕으로 규정하여 자신의 마음에서 축출해 버렸다. 마키아벨리는 바로 이와 같았고 또한 이탈리아 역시 그러하였던 것이다.) 이탈리아는 그와 같았으나 아탈리아 전체가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사실상 다른 어느 곳보다 피렌체의 표현이자 상징이었다. 즉 그는 미덕과 악덕의 측면들이 불가피하게 더 부각되어 보이는 그러한 확대된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특기할 만한 악습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물론 여자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을 결점으로 지적할 수 있는데, 그는 이를 통해 과도한 활력과 애정을 분출하고자 하였다. 그는 비록 가난했지만 남에게는 매우 관대했고 자녀들에게는 자애로웠으며 무엇보다 정직했고 조국과 자유를 사랑하였다. 그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누구보다도 더 저열한 인물로 비쳤을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그 스스로가 위대함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이 다 숨기려 하는 것을 결코 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좋은 점은 감추고 덜 좋은 점은 내보이는 편이었다. 사실 그는 스스로가 실제보다 더 낮아 보였으며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동류의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주고 많은 사람들을 자신과 동등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만일 사람들이 선하기만 하다면 자신의 몇몇 사악한 권고들이 (더 이상 소용없게 될 것) 임을 씁쓸한 어조로 말한 바 있다. 인간의 저열함을 속속들이 맛보고 언제나 선인이 악인에게 굴복당하는 것을 보면서, 그는 이를 자신의 재능으로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법칙으로 재구성해 내었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를 악인의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고 싶어하였다. 하지만 그는 차라리 선인 쪽에 끼일 인물이었다.
카포니는 마키아벨리가 종교를 애호하였으며 높은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마키아벨리의 글 거의 어디에서나 비록 냉소적이기는 하지만 예민하고도 열정적인 시인의 정신을 엿볼 수가 있는데, 무릇 시가 있는 곳에 진정코 사악한 것은 없는 법인 것이다. 그러나 선은 사라져가고 악인 만연함을 보면서 그의 정신은 반란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그렇게 쓰디쓴 격언들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거나 또는 쓴웃음을 통하여 그것을 표출하였다. 그는 스스로의 웃음 뒤에 숨어 있었다. 그는 선하고 고귀한 것을 따르고 믿는 자신의 감정을 비웃었다. 또한 좀더 일찍 그렇게 하지 못한 자산을 조소하였다. 그의 성격이 보여주는 이러한 특징들은 다음의 8행시에 그려진 작화상 속에서도 잘 나타난다. 씌어진 시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우리는 여기서 그의 심정을 느낄 수가 있다.
나는 바라네. 하지만 바람은 나를 더욱 괴롭게만 하네.
나는 우네. 하지만 울어도 가슴은 그저 쓸쓸하기만 하네.
나는 웃네. 하지만 웃어도 마음은 허망하기만 하네.
나는 태우네. 하지만 불꽃은 밖으로 피어나지가 않네.
나는 내가 보고 내가 느끼는 것들이 두렵기만 하네.
모든 것들이 나에게 새로운 고통을 주네.
그래도 바라면서, 나는 울고 웃고 태우며,
또 내가 듣고 보는 것들을 두려워하네.
휴머니즘의 아들이지만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 방탕한 자식 같은 존재였던 그는, 자신의 학문에서보다 더욱 정신면에서 휴머니스트들과 다른 점들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음악을 무척 좋아하여 (류트)를 배우고 (책)을 읽으며 교양을 쌓았다. 반면 당시 놀라울 만큼 발전되었던 시작예술에 대한 언급은 그의 글을 통해 단 한번 나타날 뿐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이다. (이 지방(......) 앞서 발한 바처럼 한때 사멸했던 시와 그림과 조작들을 되살려내기 위해 태어난 것 같다.) 그야말로 다름 아닌 고전 고대의 용맹성과 질서가 되살아나기를 바랐던 인물이 아니던가? 그는 균형이 잘 잡히고 중키의 호리호리한 풍모에 당차고 대담하든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머리카락은 검었고 안색은 희었지만 약간 창백하였다. 머리는 동그랗고 작았으며 이마가 높은 편이었다. 그의 두 눈은 빛났으며 굳게 다문 얇은 입술에는 언제나 약간 조소 어린 웃음이 머금어져 있었다. 우리에게는 그를 그린 몇 종류의 훌륭한 초상화가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마키아벨리가 한창이었던 시절에 만났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만이 그 희미하면서도 뜻 모를 미소의 의미를 충실히 그려낼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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