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왜? - 여성 억압의 어제와 오늘 : 서진영
제1부 : 하늘에서 땅으로
제3장 고대와 중세 사회의 여성
2. 중세 사회 1) 지배 계급의 여성 (1) 노동, 경쟁적인 숙녀들 중세 시대의 여성의 지위에 관한 고전적 저술을 남긴 아이린 파워는 법률이나 이데올로기만으로는 실제 여성의 지위를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증거로 그녀는 중세의 독립적인 여성들에 대한 많은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중세 시대를 통하여 생활의 사회적 물질적 조건, 끊임없는 전쟁 그리고 무엇보다도 느린 교통으로 인해 여성들이 부재중인 그들의 남편을 대신하여 엄청난 책임을 맡아야 했다. 중세에는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 가정의 영역이 아주 넓었다. 그녀의 주인이 군사적 원정이나 순례, 혹은 궁정에 가거나 사업으로 집을 비우는 동안 자연적으로 영지의 지도자는 그녀였으며 장원을 경영하는 것도 그녀였다. 유럽은 하루 종일 매사냥이나 잡담, 물레잣기, 장기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영지를 경영하고 소송에서 싸우고 심지어 부재중인 주인 대신 포위 공격을 견뎌내는 경쟁적인 숙녀들로 가득찼다. 유럽의 귀족들이 십자군 원정을 갔을 때 고국에서 농사를 감독하고 소작인을 방문하고 다음 공격을 위해 돈을 저축하면서 그들의 사업을 경영한 것은 아내들이었다. 그러나 숙녀가 그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게 되는 것은 단지 남편이 없을 때 같은 예외적인 경우만은 아니었다. 중세 시대에 있어서, 그리고 산업 혁명 이전의 모든 시대에 있어서 가사는 오늘날보다 훨씬 더 복잡한 일이었다. 가족 규모가 크고 손님이 잦고 오늘날 공장에서 만들어져 가게에서 살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집에서 준비해야 했던 시대에는 가족을 먹이고 입히는 것만도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다. 버터와 치즈, 맥주, 양초, 겨울에 먹을 고기, 린넨 등을 마련해야 했다. 그들은 이 모든 일을 감독하고 시장이나 가까운 마을에서 필요한 포도주나 식료품 등 장원 안에서 만들 수 없는 것들을 구입해야 했다.
주부는 또 가족의 건강과 질병을 돌보아야 했다. 중세에는 생활이 아직 전문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의사를 찾기가 어려웠고 따라서 비상시에 장원에서 응급 처치를 할 수 있어야 했다. 이 역할을 맡은 것은 여성들이었다. 그러나 여성이 직업적인 의사가 되는 데에는 제한이 있었다. 여자들은 직업적인 훈련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여기저기에 의사로서 상당한 명성을 얻은 여성들이 있었다. 요컨대 부인들은 단순히 주부일 뿐 아니라 남편의 부재시에 아마추어 군인이자 집안의 남자가 되어야 했으며 숙련된 의사가 없을 때 아마추어 의사가 되어야 했다. 그녀는 또한 아마추어 농부 이상이 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농장 주부의 복잡한 의무들로 인해 그녀가 장원 경제의 모든 측면과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틴 드 피상의 훌륭한 부인은 노동자들을 선발할 줄 알아야 하고 상이한 작물의 재배 시기와 상이한 토양에 적합한 곡물, 가축 돌보기, 농장 생산물의 가장 좋은 시장을 알아야 했다. 튼튼한 옷을 입고 그녀는 옥수수 밭과 목장, 숲을 감독하기 위해 밭이랑과 어린 잡목숲을 쿵쾅거리며 오르내렸다. 그리하여 아이린 파워는 중세의 기사도라는 귀족적 이상과 교회의 여성적인 순종의 이상은 실로 이상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일상적 삶 속의 보통의 중세 여성들은 남자 위에 서있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그들 아래 엎드려 복종하지도 않는 "결혼한 친구"로 대접받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사실 우리는 요즘도 여성들이 법이나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열등한 존재로 규정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남편보다 유능하거나 혹은 대등한 동료로서 가정을 이끌어 가는 모습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또 중세의 가정이 현재의 가정보다 훨씬 더 영역이 넓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으리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가정과 직업 세계의 분리는 오히려 최근의 자본주의적 현상이며,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분리도 그렇다는 주장이 많이 나오고 있다.
시골 가정에서는 남편과 아내가 가정을 공동의 영역으로 돌보고 있었다. 그러나 남성 중심의 직업이 남자를 가정에서 빼내기 시작했을 때, 가정은 여성 전유물이 되었다. 그 결과, 가정은 빅토리아 시대에는 점차 가혹한 상업 문명에 있어서 도덕적 가치의 최후의 보루로, 심할 정도로 감상화되어 이상적인 것으로 되었다. 남편을 가정에서 분리시킨 것은 이 시대의 특징이 되고 있는 남녀 역할의 분극화를 촉진시켰고, 또 동시에 성별의 정형화(남성은 강하고 능동적이며, 여성은 약하고 수동적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를 초래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세익스피어, 디포, 필딩을 읽어 보면 알 수 있듯이, 그 이전에는 성별을 결정하는 것으로 이러한 관계에 박힌 정형화된 인물들이 없었다. 실제로 세익스피어의 소설들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정형화하지도 않고, 여자를 비하하는 일도 없다. 이는 특히 여자가 남장을 하거나 남자가 여장을 했을 때 각자 그 역할을 아주 훌륭히 하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남장을 한 여자들은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포오샤처럼 흔히 남자보다도 더 분별이 있고, 명석하며 기지가 있다. 바람둥이 남자 귀족을 혼내주는 쾌활하고 기지에 찬 '윈저의 명랑한 아낙네들'과 같은 여성들도 등장한다. 이런 것은 여성들이 활달하고 남자와 큰 격의가 없던 시대의 산물이다. 이런 여성들 가운데에서 엘레아노어와 같은 여걸이 탄생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이 중세에 진정으로 여성들이 남자의 대등한 친구였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남자들이 아무리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았다 하더라도 여자들은 봉건 경제의 부차적인 담당자였다. 그녀는 그를 '대신해서' 관리감독을 하는 것이지 그녀 자신이 주 담당자인 경우는 드물었다. 그녀가 자기 땅과 재산을 가지고 있더라도 결혼한 동안 이는 남편의 관리하에 있었다. 게다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일을 이것저것 많이 한다는 거소가 지위가 높다는 것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그 사회의 보다 중요하고 핵심적인 역할, 혹은 권력의 기반과의 관계이다. 봉건 사회의 권력의 기반은 주로 군사적 능력에 있었다. 또 지배 계급은 특히 정신 노동을 독점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여성들은 남자들보다 교육을 적게 받았고 공직에 종사할 기회가 없었다. 중세에 가정이라는 영역이 아무리 넓었다 하더라도 역시 여성들이 공적인 영역에서 배제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여성들은 정치에서는 거의 소외되었다.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통된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남편이 공무에 바쁘거나 수 년 간 과거 공부만 하거나, 선비로서 체통을 지키고 책만 보고 있는 동안 머슴과 소작인을 부리고 때로는 직접 길쌈과 농사 일을 하면서 가산을 관리하고 가정을 돌본 많은 양반 여성들이 있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이들이 실제적인 의미에서 보다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존중되는 이유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이 억압받고 있다는 표시였다. 교육은 공직과 권력에 접근하는 주요 통로였지만, 이들은 그에 필요한 교육을 거의 전혀 받지 못했다. 여자가 받을 수 있는 교육은 복종의 도를 가르치는 "내훈", "여자 소학", "여계서"가 고작이었으며, "여자는 무식한 것이 오히려 덕"이고 "여자에게 글을 가르치면 피해가 무궁하리라"했다. (그건 사실이다. 그들이 더 이상 복종하려 하지 않을 것이므로). 재산권의 제약, 공적 영역에서의 소외, 교육 기회의 제한 그리고 당시의 정신 생활을 크게 지배했던 기독교, 유교, 이슬람교 등의 영향으로 여성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억압을 받고 불평등한 처지에 놓였다.
(2) 가족, 사오촌과도 친친마라 앞에서도 말했지만 지배 계급의 결혼과 가족이란 화려한 껍데기에 싸인 빈약한 알맹일 뿐인 경우가 많았다. 귀족층 사이에서의 결혼은 흔히 재산과 재산끼리의 결혼, 위신과 위신끼리의 결혼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결혼 생활이 아무리 애정이 없고 불행한 것일지라도 러시아인들의 민사 문제를 관장하고 있던 러시아 정교회의 요지부동의 규정 때문에 이혼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이혼 불가의 숭고한 원칙의 이면에는 매춘이 있었고 귀족 남성들이 마음대로 건드릴 수 있는 여성 농노들이 있었다. 남성들에게는 온갖 성적 방종이 허용되더라도 여성들은 결혼 생활의 온갖 위선과 허위를 감수한 채 살아야 하는 이중적 성 도덕이 판을 칠 수밖에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모순은 허위에 찬 결혼 생활을 거부하고 사랑을 찾아 나섰다가 결국은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하고 마는 귀족 여성, 안나 까레니나의 비극 속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애정이 결혼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동기가 아닐 경우, 애정은 흔히 결혼 밖으로 흘러 나간다. 유럽에서는 이것이 궁정식 사랑, 기사와 귀부인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애송되고, 간통이 공공연히 행해졌지만, 다른 곳에서는 이를 막기 위해 실로 온갖 수단 방법이 다 강구되었다.
우리나라 조선 시대 양반 여성들의 경우에는 매우 엄격히 가정에 격리되었으며 정절을 목숨보다 더 소중히 하도록 강요당했다. 양반가에는 안채와 사랑채가 구분되어 여자들은 깊숙한 안채에 머물러 바깥 출입이 극히 제한되었다. 다만 피치 못할 경우에 한하여 외출시에는 반드시 하인과 동행하고, 밤이면 불을 밝히고, 얼굴을 가려야 했다. 이런 규제가 얼마나 엄격했는지는 집에 불이 났는데도 하인이 없어서 그 자리에서 타 죽은 여자가 열녀전에 올랐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또 여성이 정절을 잃을 일체의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엄격한 내외법이 발달했다. 사오촌이라도 10세 후에는 한 자리에 친친말고, 남매간이라도 잡되히 회화마라 의복도 밖의 사람이 보게 말고. 아해 손(어린 아이 손님)이라도 (남자와는) 한자리에 앉지 말고, 아는 사람을 보아도 너무 익히 보지 말고, 손을 엿보지 말며 등등. 조선 중기 이후에는 양반집 과부의 재가마저 금지되었다. 즉 성종 때 "재가한 부녀의 자손과 첩의 자식은 문과, 생원, 진사과 시험에 과거 응시를 할 수 없다"는 '재가녀 자손 금고법'이 제정되었다. 이는 과부의 재가를 통한 혈통 관계의 문란을 막으려는 데서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정절을 잃은 부녀와 간통한 남자를 모두 교수형에 처하는 법, 재가한 여자의 가장에 대한 처벌, 재가한 여자의 아버지에 대한 파직 조치, 재가한 여자를 아내로 삼은 자에 대한 징계 등이 행해졌다. 이에 따라 선조 때는 과부인 어머니가 종과 간음했다고 하여 가문을 위해 어머니를 살해한 자식이 있었으며, 과부가 음행했다는 풍문을 듣고 그 친형을 비롯한 친척들이 합세하여 그녀를 포박, 돌을 안겨 강물에 던지는 일까지 벌어졌다. 정절은 자기의 아들을 낳아 혈통을 보존하여 재산과 지위를 상속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므로 아들을 낳을 때만 그 도구로서 할 일을 다한 것이었다. 아들을 낳지 못할 경우에는 그나마 아내로서의 지위마저 박탈당하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아들을 낳지 못하면 소박을 맞거나, 첩이나 씨받이를 들이거나, 씨내림을 당해야 했다. 씨받이는 본부인이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경우를 위해 아들을 낳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여성을 말한다. 그들은 대개 천한 신분이거나 가난한 과부였으며, 목숨을 잇기 위해 아이를 대신 낳아 주는 일을 했다. 그나마도 딸을 낳으면 거의 대가도 받을 수 없었다. 반대로 남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경우에도 여성은 수난을 당했다. 일제 시대의 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함양의 가문 높은 김씨 종가에 시집 온 박소사란 여인이 시집온 지 15년만에 아들을 낳고 첫 이레가 지난 날 목을 매어 죽었다. 그 곡절인즉 남편이 아이를 낳을 수 없음을 알고 있던 시부모와 남편이 가계를 잇기 위해 음모를 꾸며 "가계를 잇는다는 것은 부도의 대강이므로 욕된 일이라도 참아야 하느니라"라는 타이름과 함께 떠돌이 옹기 장수를 박소사의 규방에 들여보냈다. 이 종가의 며느리는 위조된 종손을 낳아주고 자살하였던 것이다.
유교 문화권에서 특히 심했던 여성에 대한 이런 야만적인 박해로 인해 지배 계급의 여성들조차도 한 맺힌 삶을 살아야 했다. 봉건 사회는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여자들에게 깊은 한을 안겨 주었다.
2) 피지배 계급의 여성 (1) 노동, 예속적인 파트너 봉건제의 특징은 자급 자족적이라는 데 있다. 장원 혹은 촌락은 그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자급 자족적인 세계였다. 농노는 가족 단위로 토지를 보유하고, 경작하고, 생활하였다. 봉건 경제의 자급 자족적인 성격은 가족 단위에서도 나타난다. 농민 가족은 자기 가족이 필요로 하는 대부분의 것들을 생산했다. 식량과 의복, 신발, 비누와 양초 등등, 소금이나 철 정도만이 다른 곳에서부터 들어 왔고, 물레방아나 대장간 정도가 가정과 분리되어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이 주로 교환을 위해 행해지고, 교환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만이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이에 비해 봉건 사회에서는 생산의 주된 목적이 자급 자족, 가족의 생활 유지에 있었다. 따라서 농업 노동과 요리, 빨래 등의 노동은 둘다 사용 가치를 위한 노동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사회적 노동과 가사 노동과 같은 차이를 낳지 않는다. 또한 가정이 생산의 단위였다는 사실은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이 통합되어 있음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남편의 부재나 사망시에 그의 아내나 미망인은 남편의 대리자가 되는 경우가 흔했다. 때로는 남편이 있을 때에도 남편의 권리를 함께 누리는 경우도 있었다. 다음은 1459 년 펜전스의 어부인 존 깁스와 존 고프 사이에 작성된 도제살이 계약서이다.
고프는 자신의 마스터이자 상전인 깁스와 그의 부인 아그네스에 대하여 충실하게 잘 봉사하며 깁스와 그의 부인 아그네스는 그들의 도제 존 고프가 그들이 알고 있는 고기잡이 기술을 최상의 방법으로 습득할 수 있도록 그를 가르치고, 훈육하고 전수하고 일깨워야 한다. 앞서 말한 수업 기간이 끝나면 어떤 사취가 없는 한, 존 고프는 존 깁스와 아그네스로부터 20실링의 화폐를 받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가 가장 절박한 것이었을 정도로 먹고 살기조차 힘드는 상황에서 농노가 잉여 생산물을 가지기는 어려웠다. 이는 가족 내의 노동 분업이 재산 소유에 의한 지배 복종으로까지 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가족 단위에서 본다면 남편과 아내는 생활을 위해 함께 일하여 가까스로 살아가는 협력자였다. 14세기의 시 '쟁기꾼 피어스'는 농민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나는 한 가난한 사내가 쟁기에 기대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외투는 개어리라는 천으로 만든 것이었어요. 두건은 해져 구멍 뚫려 있었고 그 사이로 머리털이 솟아 나왔습니다. 땅을 밟을 때는 두꺼운 밑창 단 낡은 구두의 벌어진 틈새로 발가락이 삐져 나왔고 양말을 신었지만 복사뼈까지 드러났더군요. 쟁기를 뒤따를 때에 온몸은 진흙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긴 막대를 쥐고 옆에 따라 걷고 있었지요. 비바람을 막기 위해 키질하는 널판을 두르고 있더군요. 그녀는 맨발로 얼음 섞인 땅 위를 걸었는데 피가 흘렀습니다. 이랑 끝에는 작은 빵 그릇과 그 옆에 누더기를 걸친 소년이 있었고, 건너 편에 두 살쯤 먹은 갓난아이 둘이 누워 있었어요. 그애들은 다같이 노래를 불렀는데, 들을수록 애처로웠답니다.
다시 말해서 농민 여성과 남성은 다같이 영주에 예속되어 있고, 영주와 가족을 위해 함께 고된 노동을 해야 했다. 그러나 농노들 사이에서도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되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토지의 보유권이 남성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봉건 시대 농노는 노^36^예들과 달리 생산 수단에 대한 일정 정도의 권리가 있었다. 농노는 토지의 점유권, 경작권이 있었다. 토지의 경작권은 경작의 기본 단위인 가족에게 주어졌지만, 주로 농업 노동의 주요 담당자인 남성 농노들이 가족을 대표하였다. 대부분의 경우에 토지의 보유권, 경작권은 아들에게 상속되었다. 아들이 없을 경우에 한해서 딸들도 상속을 받았지만, 나중에는 딸보다는 오히려 양자가 상속을 받게 되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봉건 시대에 있어서도 여성들은 주로 가내 노동을, 남성들은 농업 노동을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농노 가족 내에서 남편, 아버지의 가부장적 권리의 토대가 되었다. 물론 여성들도 농업 노동을 하였다. 그러나 이는 성별 분업이 행해진 위에서의 추가적인 노동이었으며, 농업 노동의 주된 담당자가 남성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쟁기질이야말로 봉건 농민의 기본적이고 가장 널리 요구되는 기술이었고, 쟁기꾼은 중세 전시대를 통하여 거의 노동자의 원형으로 여겨졌다. 쟁기잡이란 오랜 세대 동안 영국인들에게는 어른, 즉 성년 남자의 일거리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봉건 시대 중국 여성에 대해 엘리자베스 크롤은 다음과 같이 전했다.
남쪽 지방에서는 농촌 여인들이 바쁜 철에 들에 나와 노동을 했다. 그러나 결코 그들은 농사짓는 전체 과정에서 큰 부분을 차지할 수 없었다. 20세기 초에 조사를 했던 버크는 전농업 노동에서 여성은 16.4%만을 공급했음을 알아냈다.
또한 강남식씨가 우리나라의 60대 여성 농업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를 보면 "내가 시집오기 전에는 여자들이 밭일이나 했지 논 근처나 나갔남", "왜정 말부터 여자들도 모내기했다"고 하여 자본주의화가 되기 전에는 여성들이 농업 노동에서 부차적인 역할을 했음을 전해준다. 당시는 생산력의 발전 수준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여성들은 요리와 빨래, 육아 등에만도 많은 시간을 바쳐야 했다. "5리 물을 길어다가 십리 방아찧어다가" 밥을 하고, 시냇가에서 잿물로 빨래를 해야 했으며, 피임술이 발달되지 않아 일생의 많은 시간을 임신과 출산, 수유, 양육에 바쳐야 했다. 여성들은 베짜기 등의 방직, 방적 노동을 했으며, 직기를 소유했다. 그러나 이는 농민 가족 내의 부업적인 수공업이었다. 독립된 수공업자의 경우 가족 단위로 일했다. 이들 가족의 여성들 역시 수공업 노동을 했다. 당시의 수공업이 가내 수공업이고, 가정과 작업장이 동일하며, 가족이 생산의 단위였다는 사정에서 볼 때 이는 당연했다. 가정과 작업장은 동일하였다. 가족은 남편과 아내, 자식들, 도제, 직인, 하녀들로 이루어진 일종의 확대 가족이었다. 직포공이 베틀 앞에 앉아서 일하는 동안 아내와 자식들은 양털을 소모하고 실을 뽑았다. 실잣기란 특히 소녀들이 도맡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은 처녀는 실잣는 여자(spinster)라고 알려질 정도였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남편이 주로 수공업 노동을 하고, 여성들은 육아와 요리를 비롯한 가내 노동에 덧붙여 남편의 보조자로서 일했다. 남편은 장인, 즉 고용주이자 사업주였고, 가족원들은 그 옆에서 예비 작업, 보조 작업, 마무리 작업을 하여 그를 돕는 보조자들이었다. 이 가부장적 가족이 '중세 노동 세계의 중심'이었고 아내는 남편의 '예속적인 파트너'였다. 도시의 경우에도 여성들에게는 많은 제약이 있었다. 길드는 여성에게 직업 선택의 자유를 제한했다. 어떤 길드는 여성을 거부했으며, 조합원들이 여성 임금 노동을 고용하는 것을 금지한 길드도 있었다. 여성들은 도제를 훈련시키거나 도제로서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데서도 규제를 받았다. 도시의 자치권과 경제적 권리들이 주로 길드를 통해 행사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런 제한은 여성의 지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 따라서 가내 노동, 직조를 담당하고 때로 농업 노동이나 수공업 노동의 일부분까지 해야 하는 여성들의 노동 시간이 남성보다 더 길고 더 혹사당하는 경우가 흔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열등한 위치에 놓였으며, 가족 내에서 남성들에게 종속되었다.
(2) 가족, 나 하나는 썩는 새요. 노예들은 가족을 갖지 못했다. 따라서 가부장적 억압도 없었음에 반해 농노는 가족과 아울러 가부장적 관계도 가지게 되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리는 광범위한 피지배 민중들 사이에서 가부장적 억압을 찾아볼 수 있다. 가족 내의 여성의 지위에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요소는 부계제와 부거제였다. 토지의 보유권, 경작권이 남자들에게 주어지고, 남자들을 중심으로 상속됨에 따라 피지배 계급 사이에서도 부계제와 부거제가 일반화되었다. 지배 계급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자들이 남자의 집으로 '시집가게'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남자를 중심으로 한 경작권과 부거제가 일반 백성들 사이에 완전히 확립된 것은 조선 시대 중기에 이르러서였다. 그것은 지방의 모든 백성들의 생활을 통제할 정도의 권력의 중앙 집중화가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에 와서 국가가 양반 관리들에게 토지의 수조권을 부여하는 형태로 권력이 집중화됨에 따라 전국의 토지 대장이 만들어지고, 남자를 중심으로 전국의 가구 대장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남자가 여자 집에 장가가는 것이 천도에 어긋난다며 국가가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초기에는 잘 시행이 안되었으며, 토지 제도를 비롯한 국가의 제도가 정비되고 양반 사회가 정착한 중기 이후에야 비로소 일반에 시행되었다. 중종5년에는 성균관 생원 이경 등은 남자가 여자 집으로 장가드는 것의 부당함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며 이를 폐지할 것을 건의하고 있다.
남자가 여자의 집에 들어가 사니 면목이 서지 않고 남편이 아내에게 기대어 사니 고용인과 비슷하여 아내의 집에서 호구를 한 즉 아내가 시부모 섬기는 것을 알지 못하고 심성이 오만해져 남편이 집안을 다스리지 못하고 부부의 도가 무너진다.
우리나라에서 여자가 시집가는 것이 일반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밖에 되지 않는다. 이와 함께 여성들의 지위는 크게 하락하였다. 농업 노동에서의 중심적인 위치에 토대한 남성의 경작권과 부거제는 농노 남성들의 가부장적 권리와 농노 여성들의 무권리의 기반이었다. 그리하여 지구상의 대부분의 곳에서 봉건 시대 여성들은 중노동과 시집살이, 삼종지도의 한맺힌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자기 집을 떠나 시집을 간 여성들은 가부장적 가족에서 최하위에 놓였다. 뿐만 아니라 결혼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신분에 따라 부모의 의사대로 이루어졌으므로 결혼이 여성에게 의미하는 것은 거의 전적으로 핍박과 고통일 뿐인 경우가 많았다.
산도 설고 물도 선 곳에 누를 보고 내 여기 왔나 기와집이 열다섯 길인들 구경하러 내 왔더냐
새벽서리 찬바람에 울고가는 외기러기 동남갓을 향해가나 동서산을 향해가나 우리집골 가거들랑 이내말을 전해주소 우리어미 묻거들랑 옷을벗고 우드라소 우리아베 묻거들랑 신을 벗고 우드라소
(전략)
아홉쪽 반베치마 눈물받아 다썩었네 외나무다리 어렵다해도 시아버지 더어렵더라 시아버지 호령새요 시어머니 꾸중새요 시아재는 뾰죽새요 시누하나는 할미새요 남편하나 미련새요 자식하나 우는새요 나하나는 썩는새요
시집가서 사흘만에 불같이도 더운날에 사래길고 장친밭에 지질이도 지슨밭에 질걸이도 굳은밭을 한골매고 돌아보고 두골매고 돌아봐도 아무네도 아니와서 삼세골을 매다보니 점심참이 늦어가서 집이라고 찾아가니 대문곁에 눕던재가 요쥔네야 요쥔네야 그걸사 일이라고 점심참 대어오나 마당곁에 들어서니 큰머슴이 내다보고 그걸사 일이라고 점심참 대어오나 정지라고 들어가니 여수같은 시누이가 이성님아 저성님아 그걸사 일이라고 점심참 대어오나
이내방에 들어가서 행글행글 행농안에 쓰던 자루 석자내고 모시석자 끈을 달고 자루석자 바랑집고 임아임아 나는 간다.
간다간다 나는 간다 중이 되어 나는 간다.
중노동에 시달리면서 밥먹는 것조차 눈치가 보이고, 하다못해 개까지도 시집붙이라고 곱게 보지 않는 시집살이에 정붙일 곳이라곤 없어 차라리 중이라도 되고 싶었던 여성들의 심정이 나타나 있다.
(3) 저항, 여인 군대 이런 억압에 대한 분노와 저항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봉건 시대의 농민 봉기에 여성들이 광범위하게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 특히 중국의 태평천국의 난에서 보이는 여성들의 맹활약과 남녀평등의 요구는 이를 잘 보여준다. 여성들은 태평천국의 전투 능력에 실질적으로 기여했다. 그들은 여성만의 독립된 군대로 조직되어 상제 홍수전의 누이인 홍성교의 지휘를 받았다. 그들이 나타나기만 하면 그들과 대항하는 제국 군대의 사기는 꺼져 버리고 말았다 한다. 남경을 수도로 정할 때까지 각각 2,500 명의 병사를 가진 40여 개의 여인 군대가 있었다. 여성들의 용맹과 활약은 최근까지 민중들 사이에 민요로 전해온다.
배과부는 젊었네 마을에서 멀리 떠났지 태평천국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 처음에는 보통 병사들의 막사에 있었지만 창과 총을 너무도 잘 써서 천공자 그분께 칭찬을 받았지 그녀는 태평 여자 사령관까지 올라갔네 눈이 좋기로 유명해서 3리밖까지 밝히 볼 수 있었고 적이 숨어들어올 땐 언제나 기다렸다가 총을 쏘았지 아, 배과부 배과부는 한 번 쏠 때마다 하나씩 쓰러뜨렸지
이런 여성들의 맹활약은 태평천국의 남녀 평등의 강령에 반영되었다. 태평천국은 토지 재분배, 재산 공유와 함께 성의 평등을 강령으로 삼았다. 매매혼을 금지하고 자유 결혼, 일방적 정조관의 폐지, 개가 허용, 창기 금지 등을 실시했고, 여성들에게도 과거에 응시할 권리를 주어 여승상도 있었으며, 상제의 조정에서 참모장과 대신에 이르는 모든 공직을 맡도록 허용하였다. 태평천국은 실패로 끝났고, 그나마도 태평천국의 지도자들 자체가 봉건적 관념을 극복하지 못했었지만 태평천국의 난으로 타오른 여성들의 해방의 의지와 열망은 봉건적 여성 억압을 타파하는 힘으로 살아 이어졌다.
3) 여성 억압의 이데올로기 여성 억압의 이데올로기는 여성이 억압받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 이데올로기는 억압적인 현실을 합리화하여 자발적으로 이에 따르게 함으로써 억압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억압이 심화될수록 여성 억압의 이데올로기도 정교해지고 고도화되었다. 여성 억압의 이데올로기는 한편으로는 일상 생활의 모든 분야에 걸쳐 지극히 세세한 일들까지를 성차별적으로 규정하여 남녀 차별적 의식을 고정관념으로 만들고 남녀 차별을 생활화, 습관화하는 역할을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남녀 차별 원리를 철학, 종교와 결부하여 우주의 근본 법칙으로까지 발전시켰다. 물론 이런 이데올로기가 실제로 얼마나 받아들여졌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현실 생활의 많은 부분들은 이데올로기와 맞지 않았다. 그러나 남녀 차별 이데올로기는 핵심적인 지배 이데올로기의 하나로 크게 강조되었고, 오랫동안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는 주요한 관념으로 되었다. 일상 생활을 규제하는 남녀 차별적 이데올로기는 한마디로 '남녀 유별'의 이데올로기이다. 이는 첫째, 남자의 지배와 여자의 복종, 남자의 우월성과 여자의 열등성에 대한 규정, 둘째 성별 분업의 이데올로기, 셋째 여성과 남성의 성격과 기질에 대한 규정, 넷째 여성에 국한된 정절 이데올로기 등이다. 첫째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로 대표된다. 집안의 주도권은 남자에게 있어야 하며 여자는 어떤 경우에도 남자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여성이 주도권을 가지거나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면 가부장적 가족은 망한다. 이 이데올로기는 가부장적 가족이 망하는 것을 가족 일반이 망하는 것으로 간주하며, 그리하여 남성의 이익, 아니 가부장의 이익을 모든 가족원의 이익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 가부장적 가족 안에서 암탉은 울지도 못해야 했다.
시부모와 지아비가 혹 그릇 알으시고 꾸중하시거든 잔말하여 어지러히 발명말고 여자가 비록 총명한 지혜가 있다 할지라도 먼저 설치지 말고 남편을 보좌함이 가하다.
사나이란 것은 어진 이도 있으며 슬기로운 이도 있으며 미련한 이도 있으며 착한 이도 있으며 병든 이도 있으며 횡악한 이도 있나니 여자의 일신이 사람을 만난 즉 일생이 괴롭고 서름이 무궁하더라도 배필이 된 후는 죽도록 지성으로 도울지어다.
어른 앞에서 발벗지 말고, 말은 온화히 하고, 눈들어 살피지 말고, 기지개 켜지 말고, 트림 말고, 하품 말고, 재채기 말고, 가려운 데 긁지 말고.
둘째로 성별 분업의 이데올로기는 "남자는 안의 일을 말하지 않고 여자는 바깥일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라는 말로 축약될 수 있다. 이런 이데올로기는 현실의 성별 분업을 반영한 것이면서, 성별 분업이 단순히 노동상의 분업이 아니라 남녀의 의식 세계와 전생활상의 분업으로까지 굳어지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무능한 남자는 아홉 주를 돌아다닐 수 있지만 유능한 여자는 부뚜막 근처에 머물 뿐이다.
문에 기대 서있는 소년들이여 하늘에서 내려온 신드로가 같이 가슴에는 4 대양을 품고 수만리 풍진을 품고.
그녀는 자라자 자기 방에 숨겨졌네 행여 면전에서 남자를 볼까 두려워서
세 번째 남녀의 기질과 성격에 관한 이데올로기는 "남성은 강하고 여성은 약하다"는 것이다.
음양이 성이 다르고 남녀가 행적이 다르니 양은 굳셈으로써 덕을 삼고 음은 부드러움으로써 용을 삼으며 남자는 굳셈으로써 귀함을 삼고 계집은 약함으로써 아름다움을 삼나니 그러므로 남자는 가죽띠를 띠고 여자는 실띠를 띠고 멘다.
아들은 이리 같아도 오히려 약할까 걱정하며 딸은 쥐 같아도 오히려 범같을까 저어한다.
이런 이데올로기는 약자로서의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반영하며, 노동과 활동 영역의 차이가 요구하고, 또 거기서 생겨나는 성격과 기질의 차이를 반영한다. 그러나 이 이데올로기는 역으로 남녀의 타고난 성격과 기질상의 차이로부터 역할과 지위의 차이가 생겼다는 생각을 불어 넣어 여성의 종속적인 지위와 남성의 독재를 합리화했다. 남녀의 엄격한 성별 분업과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봉건 시대의 여성과 남성이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언제나 남자거나 여자로서만 존재할 수 있게 했다. 공적인 영역은 그 담당자들에게 지혜와 용기, 지도력과 강인함, 냉철한 이성을 요구했으며, 사적인 영역은 세심한 배려, 헌신성과 희생성, 인내와 풍부한 감성을 요구했다. 남자와 여자의 엄격한 성별 분업은 남자와 여자가 이러한 성품 중 어느 한 쪽만을 가지도록 강요했다. 여자가 활달하고 지혜와 용기를 갖추는 것은 미덕이 아니라 '여자답지 못한' 결함이 되었으며, 남자가 부드러운 감성과 세심한 배려, 헌신적인 성품을 갖는 것 역시 '사내답지 못한' 것으로 금기시되었다. 이렇듯 인간의 전체적인 본성에서 서로 분리된 덕성은 그 자체로서 완전한 덕성일 수 없다. 즉 남성의 강함은 약자를 억압하는 강자, 지배자의 이기심, 권위주의, 자기 중심성, 타인의 고통에 대한 불감증, 냉혹성을 이면으로 할 수밖에 없었으며, 여성의 헌신성과 부드러움은 복종과 의존의 노^36^예 근성을 다른 한편으로 할 수밖에 없다. 남성과 여성의 덕성, 강함과 부드러움, 지도력과 타인에 대한 헌신성, 이성과 감성이 전체로서 통일될 때만, 이 덕성의 다른 한면, 부정적인 측면들이 극복될 수 있다. 이는 남성과 여성이 지배와 복종의 관계에서 해방될 것을 필요로 한다. 넷째로 정절 이데올로기는 봉건 사회에 전형적인 여성 억압 이데올로기다. 앞에서 말했듯이 정절은 신분이 세습되는 봉건 사회에 필수적인 요소였다. 신분은 기본적으로 혈통에 의해 구분되고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분적 질서가 엄격해지고 위계가 다양해질수록 정절에 대한 요구는 한층 더 강화되었으며, 지배 계급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에게까지 확산되었다. 특히 양반의 수가 늘어나 양반들 사이에 토지와 권력을 둘러싼 투쟁이 격화된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양반의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고, 양반들 사이에 서열을 매기는 수단으로 여자의 정절이 이용되었다. 이에 따라 정절에 대한 강조도 도를 넘어서게 되었다.
개가하는 것은 정절을 잃는 것을 뜻하니 이는 인지상정에 앞서 인간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가난하여 의지할 데가 없는 여자라 해도 개가를 해서는 안된다. 굶어 죽는 것은 지극히 작은 일이지만 정절을 잃는 것은 지극히 큰 일이다.
이렇듯 정절 이데올로기가 강화되고 점점 확산되어 여성들의 의식을 지배하였으며, 이는 다시 거꾸로 여성들의 행동을 규정했다. 심지어 임진왜란 때 피난가던 부녀가 나루터에서 사공이 배에 오르도록 손을 잡아주자 외간 남자의 손에 손목을 잡힌 것은 곧 정절을 잃은 것이라 하여 강물에 투신자살했다는 기록까지 전해온다. 남녀 차별의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행동 규범에 그치지 않고 봉건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종교 속에서 우주의 법칙으로까지 승화되어 이론적으로 체계화되었다. 예를 들어 유태교에서는 인간이 원죄를 짓게 만든 것은 여자이며, 이로인해 여자는 평생 동안 남편의 종이 되어야 하고 출산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기독교 역시 기본적으로 이러한 교리를 계승하였다. 사도 바울은 남녀 차별의 논리를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에 비추어 설파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듯이 남편은 아내의 주인입니다.
남자는 신의 형상이고 신의 영광입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영광입니다.
여자는 조용히 복종하는 가운데 배워야 합니다. 나는 여자가 남을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여자들은 교회 집회에서 말할 권리가 없으니 말하지 마십시오. 율법에도 있듯이 여자들은 남자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에 돌아가서 남편들에게 물어보도록 하십시오. 여자가 교회 집회에서 말하는 것은 자기에게 수치가 됩니다.
서양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중세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말했다. "개인적인 본성에 관한 한, 여자는 결함이 있는 사생아이다. 왜냐하면 남자의 종자에 있는 활동적인 힘은 남성을 따라 완전히 유사하게 생성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여성은 활동적인 힘의 결함, 혹은 어떤 물질적인 배열의 잘못, 혹은 심지어는 습기찬 남풍과 같은 어떤 외부적인 영향에 의해 생겨난다. 다른 한편 일반적인 인간의 본성에 관한 한, 여자는 사생아가 아니라 세대를 잇는 일을 하도록 지시된 자연의 의도에 포함된 것이다. 자연의 일반적 의도는 자연의 일반적인 창조자인 신에게 달려 있다. 그러므로 자연을 창조함에 있어서 신은 남자뿐 아니라 여자를 만들었다. 복종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노예의 복종으로 이를 통해 우월자가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해 피지배자를 이용한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복종은 죄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른 종류의 복종은 경제적, 혹은 시민적 복종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에 의해 우월자는 복종하는 자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의 복종자들을 이용한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복종은 죄 이전부터 존재했다. 왜냐하면 인간의 가족에서 어떤 사람들이 그들보다 현명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지배받지 않는다면 질서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복종에 의해 여자는 자연적으로 남자에게 복종한다. 왜냐하면 남자에게 있어서 이성의 분별력이 우세하기 때문이다."
인도의 '마누 법전'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불명예의 근원은 여자이다. 불화의 근원은 여자이다. 때문에 여자를 피해야 한다. 여자는 선천적으로 늘 남자를 유혹하려는 경향을 갖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친족의 여자라도 사람이 없는 장소에서 동석하지 말아야 한다."
중국과 우리나라를 비롯, 동양의 여러 나라들에서 수백 년에서 수천 년에 이르는 동안 지배 이데올로기로 군림한 유교에서도 나타난다. 유교는 남존여비의 원리를 우주의 법칙이라 가르치고 있으며, 유교 자체의 핵심적인 원리로 삼았다. 남존 여비의 원리는 계급 지배의 이데올로기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하늘은 양이다. 지극히 건전해서 그 위치가 위에 있으므로 아버지의 도리에 해당한다. 땅은 음이다. 지극히 순해서 그 위치가 아래에 처하므로 어머니의 도리에 해당한다.
남편은 하늘이다. 하늘은 도망할 수 없으며 남편은 위배할 수 없다. 행동이 신에 위배되면 하늘은 벌을 내린다. 예의에 잘못이 있으면 남편은 박대한다. 때문에 남편 섬기기를 하늘 섬기듯, 아들이 아버지를 섬기듯 충신이 임금을 섬기듯 해야 한다.
남자가 아내를 맞이하여 여자보다 먼저 행동하는 것은 강한 것이 유순한 것보다 먼저 움직이는 도리이니 이는 하늘이 땅보다 먼저 움직이며 임금이 창도하여 신하가 거기에 따르는 것과 같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 남편을 맞지 아니한다.
아내가 남편을 따름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의리로써 해야 하나니, 임금이 비록 포악하고 우매하여도 신하로서의 의로 행하고 충성을 극진히 하고 죽음으로써 그 의리를 지켜야 하듯이, 남편이 비록 험악하고 어리석으며 망녕된 행동을 할지라도 아내는 더욱 그 공경을 다하고 그 정절을 지켜야 한다.
여성이 남성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것은 임금에게 충성해야 하는 것과 같고 이를 어기는 것은 인륜에 위배되며 나아가 음이 양을 따르는 우주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이다. 이는 음양의 법칙처럼 영원 불변하는 것이다. 여성들이 자신들의 처지에 항의한다면 이는 인간의 도리를 벗어난 것이고 우주의 법칙을 깬 것이 된다. 노예의 지위를 받아들이고 순순히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는 자만이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고 우주―사실은 봉건 사회―와 신의 섭리에 합당한 존재가 될 수 있다. 비인간만이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고 인간이 되려는 자는 비인간으로 단죄된다. 여성은 스스로를 부정함으로써만 그 존재를 인정받았다. 귀먹고 눈멀고 말 못하는 세월을 보냄으로써만, 자아를 완전히 부정함으로써만 여성들은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를 어기면 소박이라는 형벌을 당했으며 이는 곧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는다는 것, 존재가 부정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봉건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남녀가 평등한 시절을 알지 못하였으며 태어난 순간부터 남녀 차별적인 사회 구조와 이데올로기 속에서 자라났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남녀는 왕과 신하, 양반과 상민이 그러하듯이 남녀는 처음부터 불평등하게 태어났다고 생각했으며, 이것이 영원 불변하는 우주의 법칙이라고 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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