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왜? - 여성 억압의 어제와 오늘 : 서진영
제1부 : 하늘에서 땅으로
제3장 고대와 중세 사회의 여성
"여성의 지위가 생산 양식과 노동에서의 여성의 역할에 달려 있다는 것은 원시 시대 이후의 역사적 과정에서도 드러난다."
1. 고대 사회
같은 고대 사회라 하더라도 여성의 지위는 지역과 사회, 계급, 계층에 따라 다르며, 같은 사회도 시기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다. 또 같은 고대 그리스 로마 사회만 하더라도 결코 정체된 동일한 사회가 아니었다. 로마 시대의 초기에는 강력한 가부장제가 있었지만, 후의 제정 로마 시대 전성기에 이르자 가부장권이 현저히 약화되었다. 그러므로 고대 여성의 지위에 대해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고대 사회의 여성의 지위에 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들이 많다. 역사 책들은 여성의 생활, 특히 하층 여성들의 생활에 대해서는 전해 주는 바가 아주 적다. 여기서의 목적은 여성의 지위 변화를 역사 발전의 전형적인 발전 단계 속에서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 노예제의 전형인 고전 고대, 즉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황금기(BC450-350)와 고대 로마 제국 전성기(50-150)의 여성들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하자.
1) 지배 계급의 여성 지배 계급은 그 전 시대에 대해 진보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이를 수행하는 한에서만 한 시대의 지배 계급이 될 수 있다. 이를테면 고대 노예제 사회의 노예주들 역시(그들의 착취가 아무리 비인간적인 것이었다 하더라도)원시 사회에 대해서 부와 생산력의 증대를 대표한다. 근대의 부르주아 계급 역시 중세 신분제 사회를 타파하고 자유와 평등이라는 새로운 사회 질서를 확립하는 진보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므로 지배 계급에게는 이러한 자신들의 역사적 소명에 적합한 지배 계급의 자질과 덕목이 있다. 이러한 덕목은 그 지배 계급의 성장 초기에 특히 두드러진다. 노예제 사회의 지배 계급인 자유민과 귀족은 사유 재산의 발전과 이에 기초한 생산력의 발전을 대표하고 있었다. 그들은 재산 소유에 기초하여 권리를 행사했고, 사회를 통치했으며 법, 국가 체제, 행정을 발달시켰다. 고대 아테네의 황금기는 민주주의의 시대였다. 아테네의 민주 정치가 꽃 피었던 페리클레스 시대(BC443-429)에 18세 이상의 남자 시민은 모두 입법, 행정, 사법의 모든 일에 참여할 수 있었고, 장군과 같은 특별한 지위를 제외한 모든 공무원은 지망자 중에서 추첨하여 임명했으며 무산 자유민의 취임을 가능케 하기 위해 일당을 지급했다. 극을 보려는 사람에게는 국가가 입장료를 주었다. 그들은 광장에 모여 국가의 모든 일에 대하여 직접 토론하고 결정했다. 그리스 로마의 자유민에 대해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유인으로서의 그리스, 로마인은 스스로 제정한 법을 따랐고 스스로 임명한 공직자에게 복종했으며, 스스로 결정한 전쟁을 치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재산과 정열, 목숨을 바쳤다. 개인적 가정적 생활은 물론 공공 생활에 있어서 각자는 스스로의 법칙에 따라 사는 자유인이었다. 조국이란 관념은 각자가 추구해 마지 않던 보이지 않는 고도의 실체였는데 이것에 의해 각자는 고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위와 무기력의 계기 속에서만 그들은 순수하게 자기 중심적 욕구가 자라는 것을 느꼈다. 이런 공화주의적 정치 문화야말로 각 개인에게 대단한 독립성을 부여하고 어느 누구도 한 개인에게 송두리채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 없게 만드는 민주주의의 정신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고대 그리스의 자유인은 사유 재산의 발달이 가져온 개인의 발달과 인격과 개성, 자율의 신장을 체현한다. 인격의 성장은 그의 경제적 자립에 기초하여 이루어졌다. 이러한 경제적 자립은 사회에 대한 그의 책임과 권한을 동시에 내포하는 것이었다. 지배 계급의 덕성은 그것이 다른 인간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다른 한면으로 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를 가졌다. 이 한계는 지배 계급의 기생성과 부패가 증대하고, 사회와 역사 속에서 그들의 역할이 반동적인 것이 될 때 확실히 드러난다. 이에 반해 역사는 피지배 계급들 사이에서 새로운 덕성을 발전시키는데, 그것은 그들이 생산자이며, 노동을 담당한다는 사실에서, 그리하여 결국은 새로운 생산력의 담당자가 된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을 착취하지 않는다는 데서 온다. 그러나 지배 계급의 여성들은 이 모든 것에서 제외되었다. 크세노폰은 이렇게 쓰고 있다.
이소마쿠스의 신부는 가능한 한 적게 보고 가능한 한 적게 듣고 가능한 한 적게 알게하기 위해 엄격한 감시를 받았다. 그녀는 모직 옷을 짜는 일밖에 몰랐으며 이는 노예에게 기대되는 바와 같았다.
아테네의 소녀들 중에는 읽고 쓰기를 배우는 소녀들은 많았지만 소년들처럼 더 높은 교육을 받는 경우는 드물었다. 크세노폰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아내보다도 더 당신이 함께 토론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는 아내들이 교육을 적게 받는 것을 그들이 너무 어릴 때 결혼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통계는 없지만 그들은 대개 법적으로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 연령인 14세 가량에 결혼해야 했을 것이다. 반면 남자들은 30세 가량에 결혼했다. 이렇게 여자들은 일찍 결혼하게 한 것은 그들의 정조를 확실히 보장하기 위한 조처였다. 아테네 여자들은 거의 유폐된 생활을 했다. 소녀들은 실잣기, 옷감짜기, 바느질을 배우며, 기껏해야 읽고 쓰는 것을 조금 배울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마치 감금당한 것처럼 오직 여자들 하고만 교제를 할 수 있었다. 규방은 2층이나 집 뒤쪽의 격리된 곳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남자, 특히 낯선 남자는 그곳에 쉽게 갈 수 없었다. 여자들은 남자가 집을 방문하면 규방으로 가 있어야 했다. 여성들은 여자 노예를 데리고서만 외출할 수 있었으며, 집안에서는 따로 정해진 보초에 의해 감시를 받았다. 아리스토파네스는 간통자를 위협하기 위해 개를 기르고 있노라고 말했으며 유리피데스는 아내를 '오이쿠레마', 즉 가정을 돌보는 하나의 물건이라고 불렀다. 여성은 아이를 낳는 일을 제외하면 식모의 우두머리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남자는 체육 경기와 공적인 업무를 갖고 있었으나 여성은 이로부터 배제되었다. 아테네 여성들의 처지는 다른 고대 사회의 여성들보다 더 가혹했다. 이는 아테네가 전사 공동체였다는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대한 투키디데스의 서술을 보면 이 당시 역사 책에서 여성들이 왜 그다지도 중요하지 못한 역할만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투키디데스는 어머니, 아내, 딸, 여자 친구에 대해 최소한만을 할애하고 있다. 여성에 대한 언급의 대부분은 패배자의 아내가 노예로 팔렸다는 것이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과부는 싸우고 있는 공동체의 불건강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당시의 많은 위대한 극은 전쟁에서 죽은 남자의 아내가 노예가 되는 얘기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해 한 공동체, 가족, 개인의 운명은 그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와의 전쟁에서 이기느냐 지느냐에 달려 있다. 이기면 새로운 땅과 노예를 얻지만 지면 노예가 되는 것이다. 또 당시 아테네는 물질적으로 그다지 여유가 없었다. 생존의 조건이 극한적이고 전쟁이 잦은 사회의 여성의 지위는 생존 조건이 보다 좋고 평화적인 사회의 여성의 지위보다 낮다. 이런 사회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고 전쟁 영웅의 역사며, 남성의 역사인 것이다.
사면이 사막과 바다와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외적의 위협이 거의 없는 비옥한 나일강 유역에 자리잡은 고대 이집트의 여성들은 좀더 자유로왔다. 그들은 집안에 갖혀 있지 않았고 결혼할 때 지참금을 가져가고 이혼할 때 자신의 생계 보장을 요구할 수 있다. 또 남편이 전재산을 저당잡힐 경우 부인의 동의를 얻지 않았다면 그 부인은 채권자에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남편들은 항상 부인에게 먼저 동의를 구해야 했다. 또 여성들이 그리스에서보다 많은 자유를 누린 것으로 흔히 비교되는 제정 로마 시대는 전쟁이 뜸해지고 물자가 풍부하며 지배층이 사치와 타락에 물들어 사회 전반에서 이미 해체의 조짐이 나타나던 시기이다. 가부장의 해체는 이러한 사회 질서의 전반적인 해체의 한 현상이었다. 칼코피노의 연구에 따르면 헤드리안 시대의 로마의 기혼 여성들은 후견인이 필요 없었고, 아버지는 딸의 의사에 반해서 결혼을 강요할 수 없었다. 그들은 체육 경기를 보러 갈 수 있었고 파티에 참석했다. 로마의 기혼 여성들은 자신의 지참금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남편은 이태리 안에서 그녀의 동의 없이 이를 관리할 수 없었으며 그녀가 묵인했더라도 그것을 저당집힐 수 없었다. 칼코피노는 제정 로마 시대 여성들이 당시의(1940 년 프랑스)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한 것보다 더 낫지는 못하더라도 그와 동등한 자립을 누렸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시몬느 드 보봐르는 "단지 부정적인 방식으로만 해방되어 있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그녀들은 그들의 힘을 사용할 어떤 구체적인 기회도 제공받지 못했고 이들의 경제적 자유는 어떤 정치적 힘도 낳지 못했으므로 추상적인 것일 뿐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로마 여성들의 처지가 아테네 여성들과 근본적으로 달랐던 것은 아니다. 종속과 억압의 정도와 방식은 다양하지만, 고대 노예제 사회의 지배 계급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해 부차적인 위치에 있었던 것은 공통된 사실이다. 그 가장 핵심적인 원인은 직업적 활동과 정치에서 배제되었다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정치와 행정, 수공업에서 남성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리스의 자유민들에게 있어서는 남편이 아내가 밖에 일하러 나가지 않아도 되도록 하는 것이 전형적인 미덕으로 간주되었다. 가난한 여자들은 일하러 나가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이런 태도는 공통된 것이었다. 여자들의 직업은 아주 제한된 것이었다. 일터와 작업장에는 거의 남자들뿐이었다. 로마 제국 시대의 수천 개의 비문 중에서 돈을 번 여성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1 명의 서기, 3 명의 사무원, 1 명의 속기사 그리고 18 명의 남자 교사에 비해 2 명의 여자 교사, 51 명의 남자 의사에 비해 4 명의 여자 의사가 있었을 뿐이다. 물론, 노예제의 초기에는 남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여자들도 노동을 했다. 특히 자급자족적인 성격이 강했던 아테네에서 길쌈과 바느질, 수놓기 등의 일은 오랫동안 여성의 일이었다. 그러나 재산 소유와 전쟁 수행 능력, 정신 노동에 기초한 지배 계급 내에서 여성의 노동이 갖는 의미는 미미했으며, 많은 경우 여성을 가정에 가두어 놓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노예제의 후기, 특히 제정 로마 시대에는 귀족 남자들이 그러했듯이 여자들도 노동에서 면제되었다. 이들은 스포츠에 몰두하듯이 시간을 보내는 방법으로 음악, 문학, 과학, 법률, 철학에 쏟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직업으로서는 아니었다. 그들은 직업을 갖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 일로 생각했다. 공적인 임무조차 없는 여성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었다. 이들은 몸치장과 상점 출입, 운동 경기의 관람, 연회에의 참석 등 놀고 먹고 마시는 일에 많은 시간을 바쳤다. 지배 계급의 여성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재산의 소유자가 아니었고, 따라서 공적인 모든 업무와 권리는 물론, 의무도 가질 수 없었다. 그들은 지배 계급의 일원이었지만 노예와 같았으며, 그러면서도 노예와 달리 노동을 할 의무조차 갖지 않았다. 그들은 자식을 낳는다는 것을 제외하면 완전히 기생적이고 비생산적일 것을 강요당했다. 지배 계급 여성들은 자유민에게 주어진 자율과 자치권을 갖지 못한 노예였으며, 근로를 알지 못하는 지배 계급이었다. 그들이 사회에 대해 수행하는 역할은 적자를 낳는 것뿐이고, 그들에게 요구되는 최고의 덕성은 정숙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사실, 그들이 달리 해야 할 의무가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정숙의 가장 큰 적이었으며, 그러므로 결국 정숙조차도 그들의 미덕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2) 피지배 계급의 여성 노예 여성들이 자유민이나 귀족 여성들과 판이한 삶을 살았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노예 남성들과도 다른 위치에 있었다. 로마 제국 시대의 경우를 보면 여성 노예들의 직업의 종류는 남성 노예보다 제한되어 있었다. 그리스의 남자 포로들 중에는 학자, 역사가, 시인 그리고 가치있는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황제나 중요한 로마 가문의 남자 노예들은 특권과 경제적으로 안정된 지위를 누렸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그 가문의 묘지에 묻혔는데, 당시 어떤 묘지에 묻히는가는 모든 로마인들의 관심사였다. 그러므로 황제의 노예와 결혼하는 자유민 여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지위를 개선하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여성들에게는 교육이 제한되어 있었으므로 포로가 된 여성들의 대부분은 산파, 배우, 창녀였다. 대개의 여성들은 전통적인 가사 기능 외의 다른 기술을 갖지 못했다. 그들은 자유민일 때와 마찬가지로 노예가 되어서도 방적, 방직, 의복 제조, 수선을 했으며 유모, 보모, 부엌 조수 그리고 가사 대부분을 맡았다. 부유한 로마 가정의 여자 노예들은 옷 정리하는 노예, 미용사, 머리 손질하는 노예, 거울 들고 있는 노예, 맛사지사, 책 읽는 노예, 오락 노예, 산파, 병원 조수로 일했다. 부유한 로마 가정에서 태어난 노예는 약간의 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었다. 여자들은 그들의 가사 책임 외에 언제든지 성적인 목적에 이용될 수 있었다. 주인은 그의 모든 여자 노예에게 접근했다. 여자 노예는 또한 집안에 있는 남자 노예와 주인의 허락 아래 성 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 카토는 이들의 성 관계를 허락해 주고 남자 노예로부터 고정된 수수료를 받았다. 또 여자 노예의 주인들은 성 매매에 가담함으로써 엄청난 이익을 올릴 수 있었다. 여자 노예들은 매음굴, 여관, 공중 목욕탕에서 창녀로 일했다. 버려진 여아나 부모에 의해 팔린 딸들이 이런 거래를 위해 길러졌다. 고대 로마의 노예들은 자기의 저축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자신의 몸값을 치르고 해방될 수 있었다. 여자 노예들은 주로 가사 일에 고용되었으므로(주인이 아끼는 침실 시중을 드는 노예는 선물을 받기도 하고, 여주인의 하녀는 그녀의 정부들로부터 팁을 받기는 했지만)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는 남자 노예들보다 팁을 모을 기회가 적었다. 그러나 한편 여자 노예는 나이를 먹고 매력이 줄어듦에 따라 가치가 점점 줄어드는 데 반해 높은 교육을 받은 남자 노의 값은 해가 갈수록 점점 더 높아졌다. 그래서 남자 노예는 자기 몸값을 치루기가 점점 더 힘들어 지는데 비해 여자 노예는 점점 쉬워져 남자 노예보다 자유를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았다. 어쨌든 이 역시 여자 노예의 지위가 높았다는 증거라기보다는 낮았다는 하나의 증거이다. 노예들 사이에서도 여자 노예는 영향력이 없고 천하고 가난했다.
3) 결혼과 가족 고대의 가족과 결혼은 계급적 위치에 따라 아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생산 관계의 변화가 인간의 가장 자연적인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이 시기 로마 귀족들 사이에서는 이혼율이 매우 높았다. 이전에는 이혼이 불명예스러운 일이었으나 이제는 유행병처럼 되었다. 57세의 키케로는 30 년의 결혼 생활 끝에 아무 부끄럼없이 그의 아이들의 어머니를 버렸다. 젊고 부유한 퍼블리리아를 아내로 삼아 자신의 금고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의 아내 테렌시아는 이 불행을 딛고 다시 두 번이나 결혼했다. 그리고 100세에 죽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혼을 막아보려는 의도에서 이혼시 남편이 아내의 지참금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이는 로마인들 사이에서 가족적 감정의 붕괴를 촉진했다. 지참금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계산에서 남편은 그 아내에게 집착했지만, 이렇게 천박한 계산으로부터는 어떠한 고귀한 것도 생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법은 결혼의 존엄성을 점점 더 훼손하면서 단지 아내에게 싫증난 남편이 더 많은 지참금을 가진 다른 여자를 사로잡았다고 확신하기 전까지는 결혼을 유지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을 뿐이다. 이혼을 제기한 것은 남자만이 아니었다. 여자들도 "남편을 버렸으며 그들을 쇠회초리로 지배한 뒤 아무 망설임없이 남편을 버렸다." "그녀는 자기 남편을 지배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녀는 그녀의 왕국을 비우고 신부의 베일이 닳도록 이 집에서 다른 집으로 날아다녔다. 이리하여 그녀의 남편의 숫자는 늘어갔다. 다섯 번의 가을을 맞는 동안 8 명의 남편이 있었다. 이는 그녀의 무덤에 기념할 만한 것이었다!"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여자도 결혼을 깨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가장 유명한 숙녀들이 연도를 집정관의 이름에 따라서가 아니라 자기 남편들의 이름에 따라서 계산하는 습관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재혼하기 위해 이혼하며 이혼하기 위해 재혼한다." 게다가 이 시기 로마 귀족 중에는 아이가 없는 가정이 많았다. 부패와 타락과 몰락의 징표가 가족에서도 여실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이에 비해 노예는 로마에서 공식적인 결혼을 할 자격이 없었다. 단지 두 명의 노예가 동거(컨투버니움)로 알려진 비공식적인 결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자 노예의 수가 여자 노예의 수보다 압도적으로 많았고, 여자 노예의 많은 수가 귀족 남자들의 노리개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남자 노예들이 결혼할 수 있는 기회는 상당히 적었다. 로마 가정은 여자 노예보다 훨씬 더 많은 남자 노예를 부렸다. 로마 제국의 노예와 자유민의 아이들 중에서 그 비율은 60% 이상이 남성이며, 성인 중에서 남자의 비율은 훨씬 더 높았다. 리비아와 볼루시의 노예와 자유민에 대한 수잔 트레기어리의 연구는 이 비율이 대개 여자 1명 당 남자3명 꼴이며, 여주인 소유의 가정에서 남자 주인의 경우보다 여자 노예의 비율이 약간 높은 정도임을 보여준다. 로마 후기 대부분의 라티푼디움에서는 노예 출신의 노예 관리인 1명과 그의 부인이 나머지 남자 노예들(중간 규모의 농장의 경우 약 12~13 명)과 함께 하나의 생활 단위를 이루었다 한다. 남자 아기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해방되거나 죽으면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 그대로 갖고 있었지만 남아도는 여자 아이들은 여러 방식으로 처분되었다. 일부는 작은 가정에 가정부로 팔려가고, 많은 수는 매음굴에 팔려갔다. 다른 일부는 아마도 죽게 버려지거나 노예 상인이 주워갔다. 또 일부는 주인이 자기 소유가 될 아이가 태어날 것을 기대하고 남자 노예에게 결혼 파트너로 주었다. 그 중 일부는 남자 노예가 자기 돈으로 샀다. 남자 노예가 그의 아내를 사면 그녀는 그 남편의 개인 노예가 되며, 엄격히 말하면 그의 다른 모든 소유물처럼 그의 주인에게 속하지만, 다른 집에 팔려가는 재앙이 일어날 가능성은 좀더 적었다.
노예들의 결혼은 법적 효력이 없었다. 이들의 아이는 사생아로 간주되었으며 여자들은 간통죄로 고소될 수 없었다. 그러나 노예 자신들에게 이 결혼은 강고했으며 비문에는 부부가 각각을 아내와 남편으로 적어 놓고 있다. 주인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 노예들 간에 가족을 장려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기를 높이고 주인의 소유가 되는 노예 아이를 낳으며 이들을 자기 집에서 노예로 부리거나 처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노예의 결혼은 안정성이 없었다. 부부나 아이들은 다른 주인에게 팔려가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질 수 있었다. 깨진 결혼은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무덤의 비문은 주거의 변화나 부부의 어느 한편이나 양쪽 모두가 해방되는 것과 상관없이 노예들의 결혼이 오래 지속되었음을 보여준다. 다른 사람의 변덕에 의해 좌우되는 삶 속에서 노예들은 결혼이 안정적이기를 바랐다. 파머로이는 하층 계급 사이에서의 결혼의 주요한 동기는 애정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상류 계급 사이에서의 성공적인 결혼과 이혼을 고무한 정치적 동맹은 중요한 요인이 아니었다. 하층 계급 사이에서 이혼이 자주 일어났는지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일부 묘비는 이들 사이에 결혼이 오래 지속되었음을 보여주며, 한 번만 결혼한 여자를 칭찬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노예들이 가족을 이룰 권리를 갖지 못했다는 사실은 노예제의 주요한 특징의 하나이다. 이것은 생산 관계가 가족 관계를 규정한 극단적인 예를 보여준다. 노예제 착취 관계는 종족의 번식을 부정할 정도로 가족 관계를 종속시켰다. 그러나 또한 이러한 가족, 종족의 번식의 부정이야말로 노예제 사회를 붕괴시킨 주요한 요인의 하나였다. 즉 노예의 공급을 자연적인 번식이 아니라 정복 전쟁에 의존한 것은 노예제의 지주인 동시에 그 한계였던 것이다.
이 한계는 정복 전쟁이 한계에 부딪침으로써 드러났다. 노예제의 말기에는 로마 주위의 모든 지역이 거의 정복되어 포로를 잡기 위해서는 멀리까지 나가서 전쟁을 해야 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비용이 너무나 많이 들었고 설사 승리하여 포로를 잡아오더라도 별로 이익이 남지 않게 되었다. 노예는 점점 귀해지고 값이 올랐다. 노예 공급의 한계는 노예 노동의 낮은 생산성과 함께 노예제를 붕괴시킨 중요한 요인이었다. 노예의 값이 점점 비싸지는 데 비해 노예들은 자유로운 농민들이 똑같은 땅에서 생산해 내는 것의 3분의 1 내지 2분의 1밖에 생산하지 못했다. 게다가 노예는 틈만 나면 도망을 갔으므로 감독 노동이 점점 더 많이 필요했다. 이러한 낮은 생산성은 노예들이 결혼을 못해 사기가 떨어지고 노동할 의욕을 갖지 못한다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노예제가 한계에 부딪치자 노예 소유자들은 거의 몰락한 과거의 농민, 즉 시민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고 농사를 짓게 하여 그 일부를 대가로 받는다든지, 작은 집을 짓고 남녀 노예를 같이 살게 하여 노예의 가족 생활을 인정하면서 노동 용구와 가축을 소유하게 하고 일정한 토지를 맡겨 농사를 짓게 하고 생산물의 일부를 가져가는 방법을 쓰기 시작했다. 이것이 봉건제의 시초이다. 그 후의 착취 사회는 피지배 계급이 가족을 이루어 종족 번식을 보장하는 것을 그 재생산의 주요한 축으로 삼았다. 또한 부족하긴 하지만 드러난 자료들은 애정에 기초한 결혼이 지배자들 사이에서보다 피지배자들 사이에서 보존되고 발달해 왔음을 보여준다.
노예 남성과 노예 여성의 관계를 보면 노예 남성이 같은 처지의 노예 여성에 대해 지배 계급에서와 같이 억압자로서 군림하지는 못했으리라고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많은 경우에 노예들은 결혼조차 할 수 없었으니 가부장적 권리는 있을 수도 없었다. 단지 남자 노예들은 농업과 같은 주요한 산업을 담당하고 여러 가지 지적인 노동에 종사할 수 있었음에 반해 여자 노예들은 주로 가내 노동과 매춘부로 이용당했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가 피지배 계급 사이에서 남녀간의 불평등을 낳을 가능성을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노예들 사이에서는 이 가능성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그 가능성은 봉건 시대에 이르러 현실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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