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보는 눈 - 호미고메 요조
제10장. 역사의 논리와 상식의 논리
앞 장에서는 역사가 상식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학문이라는 점을 이해하기 위해, 과학에 있어서는 개별적인 사실에 대해서보다 일반적인 것에 대한 신뢰가 더 강한데 비해 역사에서는 정확히 그 반대라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어서 지구의 모양에 관한 후루사이씨의 연구 결과와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각각의 예로 들었습니다. 이제 이장에서는 계속 이어서 역사에서는 왜 개별적인 사실들에 집착하느냐 하는 점을 살펴 볼까 합니다.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결국 역사에서 취급하는 인간적인 현상은 과학의 경우와 달리 실험이나 관찰에 의한 증명이 불가능하다는 데에 그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다비드의 그림을 통해 나폴레옹이 스스로 왕관을 쓰는 데 그치지 않고 한술 더 떠 그의 황후 조세편에게도 직접왕관을 씌워주는 것을 보고 그것이 종래의 전통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의 인식이 올바른 것인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단정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다만 여타의 그림이나 기록 등 그에 관한 사료가 신뢰할 수 있는 한에서 우리는 그렇게 믿고 있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좀더 쉬운 예를 들어 보자면, 우리가 현실적으로 자신의 부모라고 믿고 있는 사람의 자식이 틀림없는지 어떤지를 의심해 본다고 합시다. 그런 경우 우리는 행정관청에 있는 호적부 기록이라든가, 부모의 인격이나 얼굴 모습, 혹은 골격의 유사성, 혹은 자신의 가정에 대한 주위의 태도 같은 것 이외에는 원칙적으로 그것을 증명 할 방법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 자신이 부모의 자식이라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무엇 하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바로 위에서 거론한 것 같은 신뢰를 바탕으로 자신이 부모의 자식이라고 믿고 있는 것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바로 이런 까닭에 이를 거꾸로 이용하여 그로부터 미스터리나 소설 따위의 줄거리를 구성하는 것도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 현상에 대한 우리의 연구는 최후에는 결국 어떤 상식적인 것에 대한 신뢰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의 결론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상식은 경험이나 학문의 연구에 의해 끊임없이 개선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백년 전의 상식과 오늘날의 상식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상식은 결코 그 하나하나가 일시에 검증되어 한꺼번에 동시에 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런 사태가 일어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예컨대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는 것이지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발견됨으로 인해 천문학에서는 근본적인 전환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식은 태양이 아침에 동쪽에서 떠서 저녁에 서쪽으로 진다고 하는 식으로 여전히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고 여기던 때와 같은 상식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의 상식이란 것도 부분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러나 그 변화는 어디까지나 다른 부분에 별로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일 없이 그리고 그 속도에 있어서도 완만하게 변해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그와 반대로 자연과학에서도 상식이나 직감 혹은 경험적인 지식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하나의 질병, 이를테면 암 바이러스와 관련하여 어떤 특수한 곰팡이를 발견하려고 하는 경우에 그것을 연구하는 사람의 직감이나 다년간 쌓아온 경험적인 지식이 어떤 결정적인 힌트를 제공해준 사실도 있었듯이 말입니다. 그렇지만 자연과학이 역사와 다른 점은 일단 상식이나 경험 혹은 직감 등에서 힌트를 얻어 어떤 인식에 도달하게 된 경우라 하더라도 경험이나 직감의 역할은 단지 어떤 인식에 힌트를 제공해주는 데 그칠 뿐이라는 점이며, 따라서 자연과학의 인식 그 자체는 실험이나 관찰에 의해 검증되고 귀납과 연역의 논리에 의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조직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현상을 취급하는 역사에 있어서는 그러한 실험이나 관찰이 불가능하다는 사실, 마지막까지도 도저히 합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요소가 따라다닌다는 사실, 바로 이런 사실들이 역사의 상식적인 성격 내지 구조를 결장하는 매우 중요한 이유가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연과학과 역사 사이의 이러한 차이는 개념을 구성하거나 일반명제를 설정하는 방식에 있어서 존재하는 자연과학과 역사간의 차이를 분석함으로써 좀더 분명하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개념을 구성하는 절차는 어떤 학문에서든지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학문의 성격과 목적에 따라서 현상의 본질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을 가려낸 다음 본질적인 것을 취하고 우연적인 것을 버린다고 하는, 말하자면 추상과 사상(捨象)의 조작을 반복함으로써 완성됩니다. 수학의 경우를 보면 사물 내지 사물간의 수량적인 관계만을 취하고 그 외의 모든 성질을 버림으로써 수학의 개념 내지 일반명제를 설정합니다. 마찬가지로 물리학은 사물의 역학적인 성질만을, 화학은 또 사물의 화학적인 성질만을 취하고 다른 성질을 버림으로써 각 학문 나름의 개념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하나의 개념이 얼마만한 타당 범위를 가지느냐, 또 하나의 일반명제가 얼마만한 타당성을 가지는 것이냐 하는 것은 그 개념이나 명제의 추상성이 어느 정도냐에 달려 있습니다. 다시 말해 대상이 되는 사물의 어떤 특정 성질만을 취하는 식으로 그 성질을 한정하면 할수록 그 결과로 얻어지는 개념이나 명제의 적용 범위는 그만큼 넓어지게 됩니다. 즉, 취해야 할 사물을 추상화하면 할수록 그것이 여러 가지 사물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수학은 사물의 수량적인 성질에만 한정하기 때문에 현실의 사물 속에서 그 개념 속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에 반해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 같은 인간적인 현상을 취급하는 학문에 있어서는 그와 같이 사물의 성질을 추상하고 그럼으로써 그에 대한 개념을 구성하는 데에도 어절 수 없이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오히려 어떤 하나의 복합체, 즉 몇 개의 요소가 합성된 것을 하나의 단위로 하여 개념구성의 기초로 삼는 것이 이런 학문에 있어서는 필연적입니다. 왜냐하면 그 경우 복합체의 각 구성요소는 더 이상 도저히 분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찻잔 한 개가 있다고 합시다. 이때 그 찻잔이 가지고 있는 자연 과학적 성질을 결정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 찻잔의 사회과학적인 성질을 결정하려고 하게 되면 그것을 만든 사람의 노동이라든가, 그것을 생산한 조직 혹은 생산비용이라든가, 혹은 시장에서의 유통경로라든가 등등 모든 것이 그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요컨대 이 한 개의 찻잔도 단순히 찻잔의 일례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사회적 생산의 결과로서 성립되는 것이므로 비할 데 없이 복잡한 성질을 갖는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현상을 취급하는 학문, 곧 인문과학 내지 사회과학에서 사용하는 개념은 항상 복잡한 성질을 띠기 쉽습니다. 따라서 그 만큼 그 개념의 타당성은 제한적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적 사회적인 것으로서 역사와 관련되지 않는 것은 원칙적으로 하나도 없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역사는 지극히 좁은 범위에서만 타당하고, 따라서 그 대신 복잡하고 구체적인 개념을 사용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상은 자연과학과 인문, 사회과학 간의 개념 차이를 형식적으로 살펴본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차이를 한쪽 끝에 있는 가장 추상적이고 보편타당한 수학의 개념으로부터 다른 쪽 끝에 있는 역사학의 개념에 이르기까지 인간적인 현상에 접근해감에 따라 점차적으로 구체성과 복잡성이 늘어나는 점진적인 차이라고 받아들여도 좋을지, 또는 이러한 단계적인 서열의 어떤 지점에 이르러 개념구성 그 자체의 방법이 달라지는 것은 아닌지 하는 점은 당연히 좀 더 깊이 따져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조금 전의 소개 드린 이사야 벌린의 논리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독일의 유명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런 만큼 이 문제를 생략하고서는 역사에 있어서 개념구성의 문제를 논의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일단 여기서 우리가 봉건제라든가 영주의 장원 같은 역사상의 문제에 대해 논의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런 경우에는 우선 봉건제도나 장원의 개념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개념을 구성하는 데에는 어떤 방법과 절차가 이용되는 것일까요? 봉건제도나 장원에 관한 기록을 검토하고 거기에서 나타나는 공통의 성질을 추출해냄으로써 봉건제도 내지 장원의 개념을 구성하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말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방식에 따릅니다. 봉건제도라 할 때 그것이 예컨대 서양의 봉건제도라면 우리는 각종의 기록에 비추어본 후 거기에 기초하여 서양의 봉건제도에 대한 하나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는 것입니다. 일본 봉건제도의 경우에도 그렇고, 또 장원이나 여타 역사상의 현상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음 속에 그려진 상, 곧 심상(心象)은 하나의 이념적인 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을 추상화하여 하나의 이념상을 만들어 가게 되는데, 이념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어떤 봉건제나 장원에서는 아주 분명하게 그 특징을 찾아볼 수 있지만 다른 봉건제도나 장원에서는 그러한 특징을 별로 찾아볼 수 없고, 또 어떤 다른 경우에서는 전혀 그런 특징을 찾아볼 수 없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봉건제도가 존재했던 중세사회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가능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종류의 여러 가지 특질을 우선 적출해내고, 그런 다음에 이런 여러 요소들 상호간에 모순이 일어나지 않도록 이런 요소들 가운데 어떤 것의 기능은 확대하고 또 어떤 것의 기능은 축소하거나 함으로써 그것들의 가장 적합한 관계를 구상해내며, 마지막으로 그것들을 하나의 전체상으로까지 통합해가게 됩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하나의 상식적인 이미지로부터 출발하여 그러한 이미지를 학문적으로 세련시켜감으로써 하나의 이념상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이념형(理念型)이라고 일컬어지는것입니다. 이 이념형과 관련하여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요소들은 서로간에 아무런 모순이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고 했지만, 그러나 그 모순이 없는 관계라는 것은 자연과학에 있어서와 같은 논리필연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적합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이념형은 어떤 일정한 조건하에서 가증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여러 요소들의 기능에 바탕을 둔 일종의 정신적 합성물인 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념형은 현실적으로 존재한 넋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음은 물론, 범주라는 의미에서의 전형(典刑)도 아니고, 또 평균적인 유형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 이념형은 우리가 연구를 함에 있어서 구체적인 사례의 특징을 식별해내고 그 의미를 규정하려 하는 경우 실로 커다란 유용성을 발휘하게 됩니다.
중세의 장원을 예로 들자면, 장원은 일반적으로 많든 적든 자급자족 경제를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교환에 의존하고 있는 경우라면 애초부터 장원이 성립될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일단 여기에 어떤 장원이 있고 거기에서는 어떤 특산물의 생산이 두드러진 양상으로 나타난다고 합시다. 이것을 보고서 우리는 이 장원이 봉건사회의 해체기에 존재하던 장원이라든가 혹은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교환시장을 가지고 있는 장원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장원도 어디까지나 장원인 한 얼마간은 자급자족적인 경제를 영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므로, 얼핏 보아서는 사료에 나타나지 않는 이러한 교환활동에 대해서 거꾸로 사료 쪽에 물음을 던질 수도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이 장원의 특징을 일목요연하게 밝힐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념형이란 것이 적절하게 만들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연구의 관심이나 그 추이에 따라 이념형이 변화하는 경우도 당연히 있게 됩니다. 또 한편으로는 개별적인 사물이나 제도와 관련하여 이념형이 만들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의 발전과 관련하여, 나아가서는 시대의 발전 그 자체와 관련하여 이념형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이념형은 자연과학에서 사용되는 개념과는 아주 커다란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이념형을 이용하여 역사라든가 기타 인간 현상을 연구하고 그 결과로 어떤 인식을 획득했다고 하는 경우 그 인식도 자연과학에서의 그것과는 당연히 크게 다를 것입니다. 이 점은 다음의 예를 보면 아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예는 이사야 벌린이 사용한 것으로, 벌린 그 자신이 막스 베버의 발상을 해설하면서 사용하고 있는 예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사가 나에게 다가와 '당신의 폐렴은 다 나았다. 왜냐하면 내가 당신에게 페니실린을 주사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내가 의사의 설명에 납득했다고 할 때 나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의사의 설명에 납득한 것일까? 그것은 페니실린이 폐렴에 잘 듣는다는 자연과학 및 의학에서의 일반명제가 옳다고 믿는 한 나는 의사의 말에 납득하는 것이다. '페니실린은 폐렴에 잘 듣는다'라는 이 일반명제의 진실성은 반복적으로 행해진 실험과 관찰을 통해서 확립된 것이다. 여기에 오류가 없는 한 나는 그에 따른 처치를 납득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연과학의 경우이다."
이상은 자연과학의 경우에 대해 벌린이 예를 들어 설명한 것입니다. 역사의 경우에 대해서는 제 자신이 고안해낸 한가지 예를 소개할까 합니다. 마르크스가 쓴 역사적 저술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나폴레옹 3세의 쿠테타를 묘사한 저작으로서, 마르크스의 가장 대표적인 역사서술임과 동시에 유물사관의 방법을 가장 훌륭하게 적용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 책입니다. 이 [루이 보타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잡히는 대로 아무렇게나 펼쳐서 읽어보았더니 다음과 같은 문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보나파르트는 완전한 보헤미안에다 귀족 룸펜 프롤레타리아트였기 때문에 비열한 부르조아보다도 더 질이 낮은 투쟁을 할 수 있었다'라는 문장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보나파르트'라는 자는 물론 '루이 보나파르트', 즉 대(大)나폴레옹의 조카인 나폴레옹3세를 말합니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루이 보나파르트는 비열한 부르조아보다도 더 질이 나쁜 투쟁을 할 수 있엇다. 왜냐하면 그는 와전한 보헤미안에다 귀족 룸펜 프롤레타리아트였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 말을 과연 그렇구나 하고 납득했다고 합시다. 물론 저도 그 말에 대해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이런 경우 저나 여러분이 마르크스의 설명에 납득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일반적인 이유에 다른 것일까? 이 점을 설명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여러분은 아무런 생활상의 규칙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또 귀족적 정신을 망각해 버린 영락자는 그 어떤 인간보다도 더 비열한 이기심에 따라 행동하기 마련이라는 마르크스의 생각이 이런 경우에 적절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의 설명에 납득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따지고 보면 이것은 지극히 일면적인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생활상의 규칙을 가지고 있지 않은 보헤미안이라고 해서 반드시 어떤 한가지 방향의 행동만을 하도록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또 영락한 귀족이라고 해서 반드시 어떤 특정한 방향의 행동만을 하도록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문 현상에 관한 설명은 그것이 일면적인 성격을 띰으로써 오히려 강한 심리적 효과를 발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역설적인 설명의 경우가 그 가장 두드러진 예입니다. 마르크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행동을 위와 같은 방식으로 설명한 것은 바로 그 역설적인 논리를 이용하고자 한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런한 일면적인 진리는 그것이 아무리 설득력 있게 보이더라도 역시 일면적인 진리라는 것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습니다. 마르크스가 말을 고쳐서 가령 '보나파르트는 보헤미안에다 영락한 귀족 룸펜 프롤레타리아트이긴 했지만 그래도 비열한 부르조아만큼은 질 나쁜 투쟁을 할 수 없었다'라고 해도 경우에 따라서는 고쳐 쓰기 이전의 말과 완전히 똑같은 정도의 설득력을 지닐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만일 이 보나파르트를 추상적인 A라는 인물로 바꿔놓고 그 인물에 대해 예상할 수 있는 정신적 태도를 상정하는 경우, 그것이 설사 마르크스의 경우와 정반대인 것으로 나타난다 하더라도 조금도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요컨대 '생활상의 규칙'을 가지고 있지 않은 영락한 귀족은 비열하기 짝이 없는 자라는 마르크스의 일반명제는 그 속에 너무나도 많은 불확정적 요소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루이 보나파르트라는 인물과 결합될 때에야 비로소 겨우 일면적인 진리성이나마 띨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설명에 사용되는 인과관계 속에서는 이러한 예가 비일비재합니다. 따라서 자연과학에서 사용되는 'because', 즉 인과관계의 설명과 인간적 현상을 다루는 역사학 같은 학문에서의 'because' 사이에는 결정적으로 다른 그 무엇인가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인간 현상에 관한 학문에서 이용되는 인과 관계의 설명에는 귀납-연역적인 논리가 아니라 이해(Verstehen)의 논리가 작용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자연과학과 역사를 포함하는 인문-사회과학이 자연과학과는 달리 상식적인 성격을 갖게 되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식이 그대로 학문이 될 수 없음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상식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인문-사회과학이 과연 어떻게 해서 하나의 학문으로서의 자격 내지 성격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을 따져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문제도 또한 자연과학과의 대비 속에서 생각해보는 것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자연과학에서는 설사 직감이나 경험에 의해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을 취급하는 경우에도 객관적인 실험과 관찰을 이용하고 또 그러한 방법에 의해 확정할 수 있는 데이터만으로 개념을 구성하거나 명제를 설정하거나 합니다. 예를 들어 자연과학에서는 다른 사람의 슬픔과 기쁨을 심리적으로 혹은 생리학적으로 연구하려 할 때, 다른 사람의 슬픔이나 기쁨을 직감을 통해서 곧바로 이해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래서는 무엇 하나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객관적으로 확정할 수 있는 데이터를 통해서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인간의 심적인 현상이 가지고 있는 생리학적 및 심리학적인 조건이나 성질에 대해 분명한 결론을 얻을 수 있겠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의 슬픔이나 기쁨의 내용 혹은 그 미묘한 차이 등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또 애초에 이런 방식으로는 이해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까닭은 심리학이나 생리학 아직 발달하지 못한 탓이라든가 하는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예컨대 대뇌생리학이 현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하여 뇌의 현상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훤히 알 수 있게 된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자연과학이 밝히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심적인 현상이 가지고 있는 생리적-심리적 조건이지 심적인 현상 그 자체는 아닌 까닭입니다. 이 점을 분명히 염두에 두면, 이제 인간 현상에 관한 학문의 특질을 좀 더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서 만일 이 보나파르트를 추상적인 A라는 인물로 바꿔놓고 그 인물에 대해 예상할 수 있는 정신적 태도를 상정하는 경우, 그것이 설사 마르크스의 경우와 정반대인 것으로 나타난다 하더라도 조금도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요컨대 '생활상의 규칙'을 가지고 있지 않은 영락한 귀족은 비열하기 짝이 없는 자라는 마르크스의 일반명제는 그 속에 너무나도 많은 불확정적 요소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루이 보나파르트라는 인물과 결합될 때에야 비로소 겨우 일면적인 진리성이나마 띨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설명에 사용되는 인과관계 속에서는 이러한 예가 비일비재합니다. 따라서 자연과학에서 사용되는 'because', 즉 인과관계의 설명과 인간적 현상을 다루는 역사학 같은 학문에서의 'because' 사이에는 결정적으로 다른 그 무엇인가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인간 현상에 관한 학문에서 이용되는 인과 관계의 설명에는 귀납, 연역적인 논리가 아니라 이해(Verstehen)의 논리가 작용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자연과학과, 역사를 포함하는 인문 사회과학의 학문적 성격을 가르는 중요한 차이점이고, 동시에 인문 사회과학이 자연과학과는 달리 상식적인 성격을 갖게 되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식이 그대로 학문이 될 수 없음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상식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인문 사회과학이 과연 어떻게 해서 하나의 학문으로서의 자격 내지 성격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을 따져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문제도 또한 자연과학과의 대비 속에서 생각해보는 것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자연과학에서는 설사 직감이나 경험에 의해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을 취급하는 경우에도 객관적인 실험과 관찰을 이용하고 또 그러한 방법에 의해 확정할 수 있는 데이터만으로 개념을 구성하거나 명제를 설정하거나 합니다. 예를 들어 자연과학에서는 다른 사람의 슬픔과 기쁨을 심리적으로 혹은 생리학적으로 연구하려 할 때, 다른 사람의 슬픔이나 기쁨을 직감으로 통해서 곧바로 이해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래서는 무엇 하나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객관적으로 확정할 수 있는 데이터를 통해서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인간의 심적인 현상을 가지고 있는 생리학적 및 심리학적인 조건이나 성질에 대해 분명한 결론을 얻을 수 있겠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의 슬픔이나 기쁨의 내용 혹은 그 미묘한 차이 등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또 애초에 이런 방식으로는 이해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까닭은 심리학이나 생리학이 아직 발달하지 못한 탓이라든가 하는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예컨대 대뇌생리학이 현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하여 뇌의 현상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훤히 알 수 있게 된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자연과학이 밝히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심적인 현상이 가지고 있는 생리적, 심리적 조건이지 심적인 현상 그 자체는 아닌 까닭입니다. 이 점을 분명히 염두에 두면, 이제 인간 현상에 관한 학문의 특질을 좀 더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 현상을 취급하는 작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자연과학자와는 달리 연구의 대상이 되는 현상에 대해 처음부터 아무것도 모른다는 태도로 접근하는 경우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직감이라든가 경험에 의해 알고 있거나 혹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나서 대상에 접근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쉬운 비유를 들어 설명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컨대 우리는 성서의 [출애굽기] 제23장 9절에 유태인에 대한 다음과 같은 계율이 쓰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즉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정경을 아느리라'라는 구절입니다. 우리 중의 어느 누구도 이 말에 공감하지 않을 사람이 없으리라 보지만 어쨌든 이 말 속에서 사용되고 있는 인과관계의 논리는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생리학이나 심리학에 의해 이방인의 조건을 분석한 데 따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보호도 없고 가난하고 배고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이나 연상에 의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귀절의 인과논리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로 우리의 경험이나 연상이 이해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 한에서 인문 사회과학과 같은 학문이 성립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이와 같은 인과의 논리가 언제 어떤 경우에나 성립된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안 쬔다'라고 하는 속담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수염이 석 자라도 먹어야 양반'이라는 말도 있다는 것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도대체 어떤 것이 주어진 조건하에서 가장 가능성이 있는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구체적인 어떤 사상(事象)이 제시되는 경우 그것을 인간 행동의 어떤 패턴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냐와 관련된 패턴의 객관적인 정립, 그리고 주어진 조건하에서의 각종의 패턴들로부터 어떤 패턴을 선택하는 경우 그 선택의 정확성의 확보, 바로 이 점을 우리는 인문 사회과학의 가장 기초적인 수련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조작이 자연과학에서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문 사회과학이 자연과학과 완전히 무관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자연과학의 방법을 이용하는 경우도 결코 드물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통계가 그렇습니다. 또한 자연과학적으로 증명된 확실한 데이터는 인문 사회과학에서도 기꺼이 이용되고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러한 데이터 없이는 인문 사회과학의 작업이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입니다. 또한 자연과학의연구에 의해 우리의 학문의 방법이 정밀해지는 경우도 물론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 사회과학, 특히 역사에 있어서는 기본적인 개념구성이나 명제를 정립하는 작업에 있어 그 방법이 자연과학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긴 인간의 역사를 자연사로서 파악하려는 경향을 마르크스주의에서 자주 엿볼 수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장기적인 현상을 측정하는 경우에나 해당되는 이야기이고, 또 그것도 부분적으로 가능한 데 지나지 않습니다.
이와같이 역사의 연구에 있어서는 역사 이외의 학문의 성과를 이용함으로써 개념이라든가 방법에 있어 항상 개량이 이루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라는 학문의 근본적인 성격에 어떤 변화가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요컨대 역사에 있어서 개념을 구성하거나 명제를 설정하는 데 사용되는 것은 여러 요소들 상호간의 적합적인 연관의 논리와 이해의 논리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성격 때문에 역사라는 학문에는 마지막까지 직감, 기억, 연상, 경험 등과 같은 비합리적인 요소들이 따라다니게 되고, 심지어는 그 속에 그런 요소들이 구성적으로 스며들게 되어 결국 학문 그 자체가 상식적인 구조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경국 역사에는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계기가 따라다닌다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주관적인 계기를 벗어 던질 수 없는 학문은 결국 상대적인 진리밖에 내세우지 못할 것이므로 과학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다는 부정적인 생각이나 회의가 들 수도 있겠는데,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불신이나 회의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하는 수박에 없을 것 같습니다. 즉, 역사에 있어서 주관적인 계기가 아무리 불식하기 어려운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방치해 둘 수 없는 일이므로 그것을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진리로 접근시켜 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노력하는 과정에서 역사학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진보를 해온 것이라고 말입니다. 현재로서는 이렇게 대답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논의를 해놓고 보니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이 책의 전반부에서 논의한 바 있는 '역사의 주관성과 객관성'의 문제로 되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다시금 역사의 연구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주관적 계기의 근원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되돌아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결국 역사와 역사관의 문제 혹은 세계관과의 관계를 묻는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이제 이 책의 마지막 주제로서 역사관의 문제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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