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보는 눈 - 호미고메 요조
제6장. 역사가는 자기 나름의 시대구분이 있어야
앞 장에서 다룬 시대구분의 문제에 이어서 이 장에서는 현재 시대구분이라는 것이 어떤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지, 바꾸어 말하면 새로운 시대구분을 설정하기 위해 어떠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런 경우 기본적인 관점은 어떠한 것인지를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역사에 대한 관심을 다룬 장에서 역사는 시대와 함께 다시 쓰여지는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만, 역사가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다시 쓰여지듯 역사의 시대구분도 또한 시대와 더불어 새로워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대구분이 역사에 대한 해석과 판단을 기초로 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시대구분이라는 것도 역사에 대한 우리의 해석 및 판단과 더불어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장에서는 일단 근세라는 한 시대를 선정하고, 이 근세라는 시대구분과 관련하여 현재 제기되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를 생각해 볼까 합니다. 앞 장에서는 역사를 3분법적 시대구분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주요한 시대구분으로서 이용되고 있다는 점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3분법은 현대라는 시기를 어떻게 취급할 것이냐의 문제와 관련하여 아주 어려운 곤란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 다시 말해 현대라는 시대는 이름이 없는 무규정적인 시대 규정이 되고 있다는 점과 나아가 현대를 근세로부터 분명히 이질적인 시대로서 구분해 버리면 3분법 자체가 그 근본에서 무너지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의 이야기를 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흔히 근세라고 일컬어지는 시대의 단락은 대체로 르네상스 혹은 리포메이션(Reformation), 곧 종교개혁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근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근세가 전체적으로 하나의 기간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르네상스와 오늘날 사이에 시민혁명-그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이 있습니다-혹은 자유주의 혁명을 그 중간에 설정하고 그 이전을 근세의 전기, 그 이후를 근세의 후기로 나누는 것이 보통입니다.
어쨌든 이 근세의 2분법은 시민혁명이라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변혁을 하나의 기준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민혁명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정치적인 의미를 잃지 않은 한 이 구분은 아직도 타당성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민혁명이 그와 같은 타당성을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지고 있느냐하면 거기에는 여러가지 의미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로, 시민혁명의 목표가 달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9세기 전반 이래 혁명에 의해 달성된 개인의 자유가 도리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다양한 사회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소위 레세 페르(laissez-faire), 곧 개인의 자유방임-이것은 특히 경제상의 자유방임을 가르킵니다만-이 강자에게는 자유를 의미하지만 약자에게는 억압을 의미하는 사태가 초래되었고, 또한 그런 사정으로부터 갖가지 사회문제와 노동문제가 야기되어 왔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시민혁명이 일어날 당시에는 단일한 존재로 파악되고 있던 소위 시민계급 혹은 제3계급이 그 이후 단일한 계급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자유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그에 따라 이 제4계급에 의한 새로운 혁명이 그 깃발을 높이 쳐들게 되었습니다. 이에 맞서 자유주의라는 정치적 입장을 대표하는 시민계급은 그러한 혁명을 회피하기 위해 사회개량 정책을 소리 높이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자유방임주의라는 자유주의 본래의 원칙은 19세기를 경과하면서 여러가지 다양한 요소와 혼합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 후 20세기에 접어들고 나서는 자유주의 시대에 생겨난 새로운 요소가 점점 확대되었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한편으로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사회주의 국가로서 소련이 탄생하는 사태가 일어났고, 다른 한편으로 전후에는 자본주의 국가들 자체내에 자본주의의 대전환을 불어오는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1929년에 시작된 세계 '대공황'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세계적인 대공황을 계기로 하여 그때가지 자유방임에 기초한 자본주의는 더 이상 어쩔 수 없이 원리적으로 전환할 것을 강요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대공황을 극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미국의 플랭클린 루즈벨트는 새로운 정책, 이른바 뉴딜 정책을 제창하면서 거의 종교적인 개종과도 맞먹는 의식상의 변화를 경험했다고 실토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그때까지의 자유주의에 대한 신앙을 근본적으로 재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루즈벨트 자신이 느꼈기 때문에 다름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뉴딜이라고 불리는 이 정책이 자본주의의 아주 커다란 방향 전환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 뉴딜정책의 위헌론, 그러니까 뉴딜정책이 위헌이냐 아니냐를 둘러싸고 미국 전역이 들끓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 문제야 어떻든 이번에는 그 후에 일어난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대량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한꺼번에 성립됨으로써 세계는 이제 동과 서로 양분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이제 19세기 초에 등장한 자유주의 시대는 이미 완전히 과거에 묻힌 시대구분에 속하는 것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시대구분의 문제가 우리 역사가들 앞에 던져져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19세기의 발전을 통해서 사회문제나 사회주의가 논의되는 가운데 역사의 원동력 내지 기본적인 발전의 요인으로서 사회경제상의 변화를 정치적인 변화 이상으로 중요시하는 역사의 사고방식이 등장하였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근세의 2분법은 정치적인 중요성을 기준으로 하여 시민혁명을 그 2분법의 분기점으로 삼았으나 이번에는 경제적인 것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기술의 발전이 바탕이 되어 경제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이것이 다시 역사를 움직여 간다는 사실, 다시 말해 기술이 근본적으로 역사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는 사실이 승인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기술의 발전을 기준으로 역사의 시대구분을 하려는 관점이 대두된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19세기와 20세기가 교차하면서 시작된 산업혁명이 시민혁명 이상으로 중시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나아가 이러한 입장에 서게 되면, 시민혁명이란 것도 이 산업혁명과의 관련 속에서 비로소 역사적인 의미가 제대로 조명될 수 있다는 생각이 뒤따르게 됩니다. 산업혁명은 한마디로 그때가지 우리가 사용하고 있던 사람이나 동물, 혹은 바람이나 물과 같은 이른바 유기적 에너지를 역사상 처음으로 비유기적인 에너지로 대체한 그야말로 획기적인 역사적 현상입니다. 그리하여 비로소 우리는 도구가 아닌 기계를 생산의 기초로 삼게 되었으며, 이러한 산업혁명 이래 이른바 기계와 산업의 시대가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에너지의 전환은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습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산업혁명은 단순히 근세를 둘로 나누는 기준이 되는 데 그치지 않고 인류사 전체를 양분하는 분수령이 된다는 견해까지 나오게 됩니다. 그 결과 한편으로는 근세 전기(前期)라고 불리는 시기, 즉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으로부터 시민혁명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에 부여되던 한 시대로서의 특성이 희박해집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와 같이 기술의 발전을 중심으로 한 사고방식을 산업혁명 이전의 시대에 적용해 보면 유기적 에너지를 이용하던 그 시대에도 여러 단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산업혁명 이전의 사회변화에 대해서도 이러한 에너지 이용의 발전, 즉 기술의 발전을 측도로 하여 단계를 설정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이것 또한 지극히 재미있는 시도일 것인 바, 그렇게 되면 이제까지의 봉건시대면 봉건시대, 절대주의시대면 절대주의시대를 더욱 구체적으로 잘게 구분하는 것도 가능해지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인간과 가축의 힘, 혹은 바람과 물의 힘과 같은 유기적 에너지를 이용하던 산업혁명 이전의 시대는 설사 그 사이를 좀 더 세분하여 단계를 설정한다 하더라도 산업혁명 이후의 시대에 비하면 일괄하여 취급할 수 있을 정도의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한 가지 중요한 점입니다. 그런데 산업혁명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기술의 진보를 기준으로 새롭게 단계를 설정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19세기 전반까지를 증기에너지의 시대였다고 한다면, 19세기 후반의 시대는 이 증기에너지에 더하여 전기에너지가 이용되게 된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나아가 19세기 말에 들어서면 디젤 등의 발명에 따른 내연기관이 새로이 등장함으로써 우리의 기술에 커다란 혁신을 불어일으키게 됩니다. 이 기술이 자동차와 비행기 혹은 여타 각종의 산업기계에 적용되어 위대한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 제2차 세계대전까지의 사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2차 대전 이후가 되면 내연기관의 이용이 더욱 눈부신 발달을 거듭하는 한편 제트엔진, 로케트 같은 것들이 새로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 제트엔진, 로케트의 기술은 우리의 생산 내지 산업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주었을 분만 아니라 우리의 사회생활, 나아가서는 문화 그 자체에까지 막대한 변화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기술의 진보는 여기에서 머물지 않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 또 원자에너지라는, 그때가지의 에너지와는 전혀 질을 달리하는 에너지가 이용되기에 이릅니다. 다시 계속해서 핵융합반응이란 것이 알려졌는데-이른바 수소폭탄의 원리를 말합니다-이것은 인간이 태양을 수중에 넣은 것이나 다름없는 의미를 갖는 사건이라고까지 말해지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산업혁명 이후의 시대도 기술의 발전에 따라서 여러 단계를 설정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맥락에서 근세를 단순히 두 단계로 나누는 것만으로 되겠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 됩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에너지의 이용은 그것이 갖는 획기적인 의미로 볼 때 그 자체 새로운 시대구분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제기인 것입니다.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대학에서 역사를 배워서 그런지 산업혁명을 기준으로 하여 그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는 아주 순조롭게 흐르고 있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자연히 산업혁명을 기준으로 하여 그 이후를 현대라는 시대로 보는 시각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을 곰곰이 따져보면 이제 더 이상 이런 식의 구분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다시 말해 이상에서 언급한 새로운 기술의 발전을 앞에 둔 상황인 만큼 산업혁명에서부터 오늘날까지를 하나의 단일한 역사로 보기보다는 이제 그 안에서 다시 새로운 시대를 구분해야만 하지 않겠느냐는 느낌인 것입니다. 이런 사정을 두고 또 유럽에서는 일찍이 세계 정치의 중심이요 문화의 중심으로서 유럽이 누리고 있던 지위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유럽 몰락관(沒落觀)이 한층 고개를 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현재야말로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날의 탄생이나 다름없는 시기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시대가 나타날지, 우리 모두가 함께 희망과 공포를 품은 채 그것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새로운 시대감각은 말할 필요도 없이 역사상의 다양한 사실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저 단순히 기술의 발달을 한편에 두고 거기에 대응하는 역사의 새로운 단계를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기술의 발달에 대응하여 다양한 역사상의 새로운 사실을 전체적이고 조직적으로 고찰하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상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새로운 시대구분의 의식을 떠받치는 역사상의 사실로서는 세계가 무서운 기세로 좁아져 가고 있다는 사정을 들 수 있을 것이고, 세계의 3대 극점-남극, 북극, 그리고 에베레스트 산-이 정복되었다는 사실도 또한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오늘날 우주시대가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 이 또한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극대(極大)의 세계를 알게 된 것이겠는데, 그 반대로 이제까지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던 극소(極小)의 세계도 날마다 새롭게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역사학자는 이와 같은 과학의 발달을 겁에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역사학자는 그와 같은 발달에 수반하여 일어나는 보다 인간적인 현상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예를 들자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정치 형태가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정치의 형태라고 할 때 시민혁명 이후에는 자유주의를 하나의 정체체제로 간주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리고 이 자유주의는 국가의 존재방식으로는 민족국를 단위로 하며, 주권을 불가결한 요소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른바 주권국가는 근세 이후 국가의 결정적인 특징이 되고 있습니다. 현재에도 여전히 이 주권은 국가의 불가결한 속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주권 개념과 관련하여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아주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주권 개념의 변화가 반드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일어났다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이미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국제연맹이 결성되었을 대에 벌써 그 싹이 트기 시작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알다시피 국제연맹은 국가주권의 벽에 부닥쳐 사실상 아무런 기능도 수행하지 못한 채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다시 국제연합이 결성되었지만, 이 국제연합도 국가주권의 문제에 관한 한 아주 민감해서 국가주권을 부정하려는 발상은 아예 내놓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국제연합에 가입해 있는 각 회원국들도 국제연합 총회의 약관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만은 없는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만큼은 우리가 이 자리에서 주의를 해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연합의 안전보장이사회를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이사회를 구성하는 상임이사국들은 각기 최종적인 거부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국가주권의 절대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지만 결코 그렇게 글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 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 거부권은 얼핏 보면 국가주권의 무제한적인 행사에 의해 일어날 수 있는 예측불가능한 충돌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설치된 측면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안정보장이사회를 포함하고 있는 국제연합이 국가주권 자체에 법적인 의미에서 손을 대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국제연합은 실제에 있어 국가주권을 제한하는 요소를 그 안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세계의 대부분 국가들이 동시에 국제연합이라는 하나의 조직을 갖기에 이르렀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제까지 국제사회는 법적으로 그렇게 분명한 형태로 존재하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국제연합이라는 조직이 결성됨으로써 국제사회는 점차로 많은 법적 제약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실 자체가 국가주권을 사실상 점차로 변화시켜가리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국제연합의 문제와는 또 다르게 최근에 유럽의 경제통합, 즉 EEC(1957년 서독, 벨기에,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그리고 프랑스에 의해 관세 철폐와 노동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경제공동체. 유럽연합 EU의 모태가 된다)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 EEC는 우선 당장에는 유럽 광역시장의 문제일 뿐, 국가주권의 문제와 곧바로 어떤 관련을 갖는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 EEC 헌장을 보면 처음부터 이 시장의 통합이 이루어지고 난 후에는 국가주권의 문제를 검토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EEC를 구성하는 유럽의 국가들은 그 어떤 단계에 이르러서는 각 국가의 주권에 관해 어떤 변화가 오리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되면 결국 유럽의 EEC 국가들은 언젠가는 유럽연방을 형성하게 될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는 현재의 국가주권이란 것이 언젠가는 제한 내지 폐지되리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며, 길게 잡아 역사적으로 고찰하는 경우 이 문제가 EEC의 가장 중요하고 주목할 만한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EEC를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로만 보는 것은 역사의 동향에 눈을 감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이와 같은 정치 형태의 변화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기술의 진보를 불가결한 전제로 하여 일어난 것이고,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을 또 하나의 새로운 시대의 출발점으로 성격지워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시대와 그 구분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보면, 여러분은 아마도 최근에 아주 평판이 높은 미국의 로스토우의 경제발전 단계에 관한 이론을 떠올릴 것입니다. 이 로스토우의 이론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세계의 역사를 대략 다섯 단계의 시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시대는 전통적인 사회, 두 번째 단계는 도약의 조건이 마련되는 시대, 즉 테이크 업(이륙단계)을 하기 위한 선행조건기로 분류됩니다. 그리고 이 테이크 업을 하기 위한 선행조건의 준비기는 대체로 17세기의 초엽까지를 말하는데, 이때까지가 산업혁명 이전의 시기에 해당됩니다. 앞에서 저는 산업혁명을 세계사를 둘로 나누는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고 말씀드린 바 있거니와, 로스토우의 경우에도 이 산업혁명 이전의 시기를 단 두 시기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로스토우가 말하는 테이크 업을 위한 선행조건기라는 것도 지극히 짧은 17세기부터 18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입니다. 따라서 로스토우에게 있어서도 그 이전의 모든 시대는 전통적인 사회로서 일괄적으로 파악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산업혁명을 기준으로 하여 인류의 역사를 전기와 후기의 두 시기로 나누어 보는 관점이 로스토우의 이론에도 여전히 반영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산업혁명과 함께 세 번째로 도약의 시대, 즉 테이크 업의 시대가 시작되며, 이어서 네 번재 단계인 성숙을 향한 전진의 시기가 뒤따르고, 계속해서 현대의 선진국들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고도대중소비시대로 접어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로스토우의 경제발전 5단계 이론은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각각의 시대에 제각기 분명한 성격-주로 경제적인 모멘트를 중심으로 한 것이긴 합니다만-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 로스토우의 이론은 경제상의 통계를 이용하여 국민소득을 기초로 구성된 이론이기 때문에 수학적으로 상당히 엄밀한 규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새롭게 시대구분을 하려는 시도는 비록 그것이 어느정도까지 이용가능한 것이냐는 문제가 남겠지만 꼼꼼하게 검토해 볼 만한 가치는 있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세계사에 대한 3분법적 시대구분이 마르크스주의에 의한 보완을 거쳐 비교적 최근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으로 이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오늘날 여러가지 점에서 문제를 들어내고 있는 상황임을 감안할 때 특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될 문제인 것입니다. 로스토우의 이론은 그러기 위한 하나의 이론일 뿐이며, 우리는 로스토우의 이론 외에도 다른 새로운 이론을 고려해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한 이론으로는 이 밖에도 여러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다만 각각의 역사가는 역시 자신의 전공을 기초로 하면서 사진의 시대구분을 고안해내고 그것을 세상에 공표하여 비판을 받는 태도를 갖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 자신도 전공인 중세사 연구를 출발점으로 삼아 새로운 시대구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상세히 말씀드릴 여유가 없어 아쉽긴 합니다만, 간단하게 한마디만 말씀드리자면 저는 평화단체의 점진적인 발전을 중심으로 하는 시대구분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고 있는 이 평화단체의 확대이론은 말할 필요도 없이 기술의 진보를 기초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즉, 기술의 진보와 함께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확대되어 갑니다. 이와 병행하여 평화단체의 규모가 대규모화되어 간다는 사실, 이것이 제가 역사의 발전에 주목하고자 하는 현상입니다. 평화단체라고 하면 약간의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으므로 말을 바꾸면 그 내부에서 폭력의 행사가 일체 금지되어 있는 단체, 즉 그 안에서는 정당방위를 제외한 그 어떤 폭력행사도 일체 정당화 될 수 없는 단체, 바로 이러한 단체를 저는 평화단체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평화단체를 이렇게 규정할 때 그 가장 최초의 형태는 가족이 될 것입니다. 이때 가족도 내용적으로 살펴보면, 가부장적 대가족에서부터 핵가족에 이르기까지 그 규모가 다종다양할 것이지만 여하튼 그 모든 것들을 가족이라는 명칭으로 일괄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가족적 평화단체는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지역적인 평화단체로서 농촌공동체로 발전하는 경우가 있는데, 특히 유럽에 관한 한 평화단체로서의 성격을 가장 선명하게 갖추어가는 것이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도시는 다시 하나의 영역적 평화단체로서 도시국가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와 병행하여 봉건시대의 크고 작은 지방권력들도 점차로 평화단체로서의 성격을 갖추어가게 됩니다. 이러한 발전이 더욱 진행되면 결국 대제후와 국왕 등이 그들의 직접적인 지배지역을 중심으로 좀 더 커다란 평화단체를 형성하게 되고, 마지막으로 하나의 통합된 평화단체로서 국가가 등장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등장한 것이 바로 근대적 절대제 국가라고 하겠는데, 평화단체로서의 국가가 처음으로 성립되는 것이 바로 이 시기입니다. 주권을 갖춘 국가가 다시 권력균형을 원리로 하는 국제사회를 형성하게 되는 것은 이 시기 이후의 일인데, 이러한 움직임은 최근에까지 계속되는 상황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상태가 결코 영구적으로 계속된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여기서 일단 근대 이전의 문제를 제외하고 이러한 발전의 배후에 있는 기술의 발전만을 고려하면 권력균형을 원리로 하는 국가와 평화단체의 대립은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그 절정에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에 자연히 국가에 의한 폭력의 행사, 즉 전쟁을 국제분쟁의 해결법으로 삼는 데에 제한을 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됩니다. 불가침조약, 군축(軍縮) 등이 모두 이러한 움직임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고, 국제연맹 및 국제연합도 바로 이런 움직임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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