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보는 눈 - 호미고메 요조
제3장 거짓으로부터 나오는 진실
앞 장에서는 과거를 여는 실마리로서의 사료에 대해 몇 가지 말씀드렸습니다. 사료 중에는 과거의 진실을 절달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의도적으로 허위를 전달하려고 하는 사료가 적지 않으며, 그러나 이렇게 의도적으로 조작된 사료도 연구와 비판을 통해서 사료를 기술되어 있지 않은 진실을 이끌어낼 수 있고, 또 그러한 연구를 통해서 역사학의 기초가 되는 사료비판의 기술이 더욱 발달하게 된다는 점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앞 장에 이어서 이렇게 의도적으로 조작된 사료의 실례를 들어 여러분에게 참고가 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 또한 '역사를 보는 눈'을 단련함에 있어 중요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의도적으로 조작된 사료나 허위문서 같은 것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 어디서나 발견됩니다. 그러나 역시 뭐니뭐니 해도 그것은 옛날, 특히 봉건시대에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일본사의 예로는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의 가신이었던 고사카 간세이(高坂彈正)가 작성한 것으로알려져 있는 [갑양군감(甲陽軍鑑)]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일본 제일의 병서'로서 명치 시대의 사학자들에 의해 도꾸가와 초기의 작품인 것으로 단정되고 있는데, 바로 이런 것이 대표적인 위서(僞書)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일본에는 그렇게 대단한 의미를 갖는 위조사료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사소한 것들은 그런대로 제법 많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흔히 발견되는 것은 아마도 가짜 족보들일 것입니다.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족보의 대부분은 도꾸가와 시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들인데, 예컨데 선조의 이름이 源平藤橘로 명기되어 있는 식입니다. (일본의 양대 성씨인 '源'씨와 '平'씨가 뒤섞여 있다) 또 다른 것으로는 허무승법도(虛無僧法度)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도꾸가와 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위조법도일 뿐 막부 시대의 법령은 아닙니다. 이 법령은 도꾸가와 정권이 완전한 안정기에 접어드는 과정에서 각 나라의 낭인(浪人)들이 신분을 숨기며 여행하기에 편리한 승직(僧職)의 특권을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막부 말기 무렵이 되면 막부 자체가 이것을 허위가 아닌 진짜 법령으로 취급했다는 점입니다. 거짓으로부터 나온 진실이라는 얘기가 되는 셈인데, 이러한 예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허위로 작성된 문서가 진짜 문서로 통용되는 예는 도처에 발견됩니다.서양의 중세사를 보아도 이런 류의 예는 무수히 많습니다. 프랑크의 메로빙가 시대에 국왕이 교회와 수도원 앞으로 시장 개설을 허가한다는 취지로 발부하는 특권장은 그 종류가 가지각색이지만 거의 대부분이 후대에 날조된 것이며, 기타 통상적으로 메로빙 국왕이 발급한 것으로 되어 있는 공문서들도 그 절반 이상이 허위로 작성된 문서로 밝혀졌습니다.
중세 시대에 이런 허위문서가 주로 성직자들에 의해 작성된 데는 그 나름대로의 사회적인 배경 내지 원인이 있습니다. 중세에는 교회의 성직자들이 독립된 계측으로는 글을 읽고 쓸줄 하는 유일한 계층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본래부터 충분한 무력을 갖추고 있지 못함으로써 끊임없이 세속의 권력으로부터 압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교회의 성직자들은 아주 빈번하게 이런 식으로 공문서를 위조하여 국왕 내지는 대제후의 특권을 빙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위조는 비단 성직자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계층에서 공통적으로 엿볼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러한 위조문서들은 어디가지나 위조이므로 죄가 됨은 틀림없지만, 그 죄질에 있어서는 악질적인 것에서부터 가벼운 것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이었습니다. 죄질이 가벼운데다 보기에 따라서는 유머러스하기까지 한 예가 있는데,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과 옥스프드 대학이 각기 자기 대학의 역사를 내세우기 위해 벌인 위조문서 사건이 그것입니다. 이 두 대학은 영국의 명문 대학으로서 오늘날에도 부딪치기만 하면 서로 우열을 다투지 않고는 못 배기는 대학들이지만, 과거에 한때 둘 가운데 어느 대학의 역사가 더 오래냐는 문제를 놓고 싸우다가 마침내는 고문서를 위조하기까지 한 에피소드가 아직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물론 좀 더 근세로 들어오고 난 후의 일이었는데, 이 사건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기 전에 먼저 역사적 진실부터 말해두자면 두 대학 중에서 캠브리지 대학이 옥스퍼드 대학에 비해 그 역사가 좀 짧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캠브리지 대학 측에서 자기 대학의 역사가 옥스프드 대학보다 더 오래되었음을 내세우기 위해 위조문서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아직 여왕이 되기 전이었던 엘지자베드 공주가 마침 캠브리지 대학에 방문한 것을 계기로 캠브리지 대학측이 아더 왕이라는 전설적인 국왕을 캠브리지 대학의 창설자로 내세우는 가짜 문서를 만든 것입니다. 그러자 그로부터 얼마 후 이번에는 옥스퍼드 대학 쪽에서 알프레드 대왕이라는 아더 왕보다도 실존 가능성이 더 적은 인물을 끌여들여 그가 바로 옥스프드 대학의 창립자라는 문서를 만들어 당시에 출판된 옥스퍼드 대학사 속에 살며시 끼워 넣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 더 재미있는 것은 이 위조문서를 만든 사람이 바로 당시에 내노라 하던 대표적인 고문서 학자였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같은 두 대학의 문서는 얼마 가지 않아 날조된 것으로 발각되고 말긴 했지만, 설사 발각되지 않았다 해도 그렇게 문제될 만한 사건은 아니라 하겠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여두면 옥스퍼드는 12세기 말경-확실한 연대는 미상입니다만-에 창설되었고, 캠브리지 대학은 1209년경, 그러니까 13세기 초에 설립되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결국 함께 커피나 나누면서 가볍게 농담을 주고 받을 만한 죄랄 것도 없는 이야기지만, 그러나 이런 것과는 종류를 달리하는, 그래서 후세에까지 중대한 영향을 미친 위조문서가 여러 가지 있습니다.
그런 것들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으로 두 가지 정도를 들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들 외에도 더 있기야 하겠지만 그렇게 중요하다고 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 본래의 목적과는 상관없이 문서의 일부 다른 내용이 이용되어 정치적으로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친 예로는 다음에 살펴볼 이 두 가지가 가장 적절한 예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위조문서가 진짜 문서보다 오히려 과거에 대해 더 유력한 증언을 제공해 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아주 훌륭한 예이기도 합니다. 그 하나는 흔히 '가짜 이시도르 문서'라고 불리는 것인데, 정확히 말하면 '가짜 이시도르 법령집'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이법령집은 대략 9세기 중반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지는데, 교황권의 절대성에 관한 주장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서의 진정한 의도는 교황권의 절대화에 있었다기보다 북프랑스의 프랑스 대사교 관구-비단 이곳뿐만이 아닙니다만-에서 특히 문제가 되고 있던 대리사교제(代理司敎制)-이것은 세속권력이 교회권력을 조종할 목적으로 이용하는 경구가 많았습니다-를 배제하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리사교제를 폐지하고 사교의 지위를 세속의 권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사교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교황의 권력을 절대화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초기 기독교 교회 이래 만들어진 진짜와 가짜를 망라한 여러 가지 교황문서, 공의회 결의, 역사상 저명한 사교의 저작물 발췌 및 기타 로마 게르만의 법전 등을 모아 교왕권의 절대성을 입증하려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법령집은 아주 방대한 것이었는데, 전부 약 1만 점이나 되는 자료를 이리저리 끼워맞추는 식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방대한 편찬물로 이루어진 법령집 사이에 진짜 의도하고 있던 대리사교에 관한 위조문서를 슬며시 끼워넣었던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문서를 위조하는 경우에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만 늘어놓아서는 오히려 쉽게 발각되고 말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되도록 진실인 것처럼 보이도록 진짜와 가짜를 교묘하게 섞어놓는 방법이 자주 이용되곤 합니다. 이 경우에는 자료의 배열이 그야말로 교묘하게 이루어진데다가 그 위조문서를 작성한 사람의 이름도 7세기 전반에 활약한 스페인 세빌리아의 사교이자 아주 저명한 학승이었던 이시도르의 이름을 채용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 용의주도하게도 이시도르의 이름을 그대로 빌려 쓴 것이 아니라 이시도르 메르카토르라는 얼핏 헷갈리기 쉬운, 그러나 어딘지 권위가 있어 보이는 이름을 붙인 법령집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 법령집은 위조한 사람의 목적만을 달성시켜주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중세를 통해서 이 위조법령집은 진짜처럼 통용되면서 로마 교황청의 권위를 내세우는 데 있어 유력한 근거로 이용되기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원래의 목적은 그 후로 묻혀 버리고, 이 위조문서에 의해 한껏 높여진 교황권이 계속해서 그것을 십분 활용하는 기묘한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기서 주로 이야기하려고 했던 가짜 문서의 예는 아닙니다.
위조문서의 또다른 예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부장(寄附狀)'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일한 문서로 된 것으로, 바로 앞에서 이야기한 '가짜 이시도르 법령집'과 같이 대규모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미친 영향이란 면에서는 가짜 이시도르 법령집보다 크면 컸지 절대로 그에 못지 않았습니다. 덧붙여 말씀드리면 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부장'은 그 후에 만들어진 위의 가짜 이시도르 법령집 속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것 또한 교황권의 절대성에 근거를 부여하려 한 것으로, 그 내용을 한다미도 간추리자면 교황은 실베스타 1세 때에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로부터 서로마에 대한 일체의 지배권을 할애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문서는 다각적인 연구를 거친 결과 대체로 8세기 중반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지는데, 역시 본래 작성된 동기나 목적과는 다른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점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이 문서의 내용에 대해 약간의 설명을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자면 우선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부장'이라는 문서 이름에 나오는 콘스탄티누스 대제라는 인물이 과연 어떤 인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서양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로마의 황제로서 4세기 초에 로마에서 기독교를 공인한 바로 그 황제입니다. 그때까지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즉위하기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로마에서는 기독교도들이 혹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이러한 기독교를 공인한 것만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기독교에 각종의 편의를 제공해 주는 한편으로 고대 말기의 혼란스럽던 로마제국을 이 기독교를 이용하여 통일하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교회에게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특별히 훌륭한 황제로 받들어졌을 뿐 아니라 기독교적인 중세 유럽에서는 각별한 존중을 받는 황제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황제의 이름을 빌어 문서를 작성하면 그만큼 그 문서의 가치가 높아지는 효과가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황제가 아직 이교(異敎)를 믿던 시대에 아주 몹쓸 병, 즉 문둥병에 걸렸다고 이 위조문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갖 치료를 다 해보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어서 마지막으로 이교 신들의 신탁을 받으려고까지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의 듯을 받은 제사장들의 말에 따르면 이제 막 태어난 갓난아기의 피를 모아 그 피에 목욕을 하면 즉시 나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많은 어린아이들을 모이게 한 다음 그들의 피를 받으려고 했는데, 함께 따라온 아기 어머니들의 비통한 울음에 감동을 받아 그만 갓난아기들을 죽이기는커녕 도리어 선물을 주어 돌려 보내고 말았습니다. 그 날 밤 잠자리에 든 황제의 눈 앞에 사도 베드로와 바울이 나타나 갓난아기들의 목숨을 구해준 것을 칭찬하면서, 황제의 손에 의해 박해를 받고 있는 기독교의 사교 실베스테르-당시 로마 교황입니다-를 찾아가 그의 힘에 의지하라고 일러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황제는 새벽같이 일어나 곧바로 로마의 사교 실베스테르를 찾아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 즉시로 기적이 일어나 황제의 문둥병이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황제는 신의 힘에 크게 감복해 하며 로마 교회에 대해 온갖 선물을 하사하였는데, 구중에서 특히 중요한 선물이 바로 이탈리아 및 그 서쪽 지방에 대한 황제의 지배권을 모두 교황에게 양도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부장'이라는 가짜 문서의 간추린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내용의 가짜 문서가 작성된 것일까요? 그것은 대략 8세기 중반 무렵에 로마 교황청이 처해 있던 사정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 시대의 이탈리아에는 로마 교황청의 권력과 동해안의 라벤나를 중심으로 한 로마 황제의 권력, 오늘날 롬바르디아라는 지명의 근원이 되는 랑고바르도인으로 불리는 게르만 부족의 권력, 이렇게 3대 권력이 할거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북방으로부터는 지금의 프랑스 국가를 세운 프랑크 부족의 권력이 끊임없이 간섭을 하고 있는 형세로, 모두 합해 4대 권력이 합종연횡을 거듭하며 복잡한 관계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8세기 중반에 이탈리아가 처해 있던 상황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로마의 사교, 즉 로마의 교황이었습니다. 로마의 교황은,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라는 로마 황제의 입장에서 보면 제국의 제1사제라는 지위에 있긴 했지만, 중세에서와는 달리 어디까지나 완전히 로마 황제 권력의 밑의 존재였습니다. 즉위를 하려고 해도 황제의 승인을 먼저 얻어야만 했고, 또 원래는 교황이 소집하기로 되어 있는 기독교 세계의 회의인 공회의(公會議)도 황제가 소집하는 경우가 있었으며, 심지어 황제의 날인이 없으면 설사 그 회의의 결정이라도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형편에 처해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로마 교황청은 아직도 완전히 황제권에 종속되어 있어서 독립된 권력이라고는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한 셈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는 또 이슬람 교도인 아라비아인들이 지중해 세계로 진출해온 결과로 동로마의 서방 지배력이 그 만큼 약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탈리아에 직접적인 힘을 행사할 만한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롬바르디아의 랑고바르도 왕국이 끊임없이 로마에 손길을 뻗치며 로마 교회를 위협하였습니다. 로마 교회는 하는 수 없이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의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별로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프랑스에 나라를 세우고 있는 프랑크 쪽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상기해 두어야 할 것은 이 시대, 그러니까 8세기의 전반 무렵에 로마 교황 사이에는 성상예배(聖像禮拜) 문제, 즉 성모 마리아나 그리스도 상, 혹은 성서에 나오는 성화(聖畵)와 같은 성상들에 대한 숭배 문제를 놓고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던 시대였다는 점입니다. 성상예배(정확히는 숭배)는 기독교 세계의 오랜 전통이지만 로마황제(편의상 동로마 황제라고 합니다만)는 주로 정치적인 이유에서 이것을 금지하였고, 이에 따르지 않는 로마 교회에 대해서는 가혹한 탄압을 가하였으며, 심지어는 랑고바르도 족을 이용하여 로마 교회에 압박을 가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것이 훗날 동서양 교회가 분열하게 되는 중요한 이유의 하나가 되긴 합니다만, 어쨌든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로마 교회는 당면한 곤경을 타개하기 위해 프랑크에 도움의 손길을 뻗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 황제와 로마 교황 사이에는 역사상 뿌리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런 관계를 하루 아침에 단절하고 일개 야만 국가에 지나지 않는 프랑크와 동맹을 맺는다는 것을 말처럼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프랑크가 동로마에 신경 쓰지 않고 로마 교회에 원조를 보낼 수 있도록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또 동로마에 대해서도 교황청이 프랑크에 원조를 요구하는 것을 합법화하기 위해 이제 말씀드린 것과 같이 문서를 꾸며냈다고 일단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도 말씀드린 바 있듯이 이 문서에 따르면, 로마 교황은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래 서방의 지배권을 양도받고 있으므로 로마 교황이 이 지방의 정치 문제에 대해 어떤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고 해도 그것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로마 교황이 서방에서 동시에 황제권을 갖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야 그럴 수도 잇는 일이겠지만, 당시 무기력한 처지에 있던 로마 교황이 황제권을 장악하려 든다는 것은 실로 넌센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황제권에 대한 요구를 내세움으로써 로마 교황이 진정으로 얻어내려 한 것이 무엇이었던가 하는 문제가 등장하게 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끊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직까지도 어떤 최종적인 결론이 내려져 있지 않습니다. 동로마의 총독령이었던 라벤나를 중심으로 한 영토 문제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어떤 다른 지배권과 관련된 문제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 어느 쪽이든 간에 그것은 프랑크 국왕인 피핀에게 보이기 위해, 그리고 그것이 동시에 동로마측에 알려져도 특별한 지장이 없도록 하기 위한 배려에서 작성되었다는 사실만은 이 문서에서 사용되고 있는 어투로 보아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문서는 그 후 얼마 동안 사람들의 뇌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가 11세기 중엽, 그러니까 로마 교황권이 이번에는 정말로 중세 유럽의 중심이 되려고 하는 시기에 교황 레오 9세에 의해 갑자기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당시에는 칼 대제의 황제권을 이양 받은 소위 신성로마의 황제권이 독일에 성립되어 있었고, 그 보증 아래 로마 교황권도 서방 유럽 전체를 관할하는 교회의 권위를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머물지 않고 동방의 황제와 서방의 황제 모두로부터 동시에 독립적인 권위를 세우고자 로마 교황은 새삼스레 이 위조문서를 이용하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11세기에 들어 일단 교황권이 황제권에 대해 승리를 거둔 후에는 중세를 통해서 교황권의 세계지배의 근거로서 항상 이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이것이 허위 날조된 것이라는 사실을 당시의 로마 교황이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음은 물론 상대측인 황제도 이에 대해 전혀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 또한 당초 날조할 때의 목적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문서가 이용된 보기라고 하겠습니다. 또 정치적 영향 면에서 이보다 더 커다란 영향을 미친 예는 아마도 다시 없을 것입니다. 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부장'이라는 문서가 날조된 것이라는 사실은 르네상스 시대가 되어 휴머니스트들의 손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이탈리아의 롤렌티오 바로와 영국인인 레디날드 피코크, 그리고 독일의 니콜라우스 크자누스, 세 사람이 거의 동시대에, 그러니까 15세기 중반에 서로 독립적으로 이 문서가 날조된 것임을 입증한 것입니다. 그 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연구가 거듭되어 그 문서의 허위성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이나 그 문서가 작성된 시기에 대해서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몇 가지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이상에서 든 몇 가지 실례를 통해 밝혀졌듯이, 사료들 가운데는 진실을 전하는 것도 있지만 또 애초부터 의도적으로 날조된 것도 없지 않습니다. 또한 진실을 담은 기록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작성한 사람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서 필연적으로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르게 마련이기 때문에 그것이 반드시 객관적인 진실을 전하고 있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료 그 자체의 진실성, 나아가서는 사료에 기록된 내용의 진실성을 밝히는 작업은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 가장 기초적인 작업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대략 17세기 이래로 아주 치밀하고 용의주도하게 사료를 비판하는 기술이 개발되었습니다. 이러한 기술 중에는 거의 법칙적이라고 해도 좋은 만큼 널리 적용할 수 있는 원칙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몇 가지는 우리의 일상 생활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여기므로 이 자리에서 간단히 소개할까 합니다. 그 첫 번째 원칙으로서 '침묵의 논단'이라는 원칙이 있습니다. 침묵의 논단이라는 것은 사료에 언급이 없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해당 인물이나 사건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는 규칙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좀 더 재미있는 원칙이 있는데, 것은 '금령(禁令)이 존재하는 곳에는 반드시 그에 대응하는 사실이 존재한다'라고 하는 원칙입니다. 침묵의 논단이라는 원칙은 사료에 나와 있지 않다고 해서 반드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지만 이 '금령 운운'하는 원칙은 정확히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어떤 법률이든 금령이 없는 법률은 없습니다. 예컨대 유럽의 중세사를 보면 교회법상 성직자는 결혼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실제로 교황의 칙서나 공회의의 기록 등을 보면 되풀이해서 그러한 금령을 규정해 놓고 있는 부분이 많이 나옵니다. 이것은 당시에 결혼하는 성직자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단순히 일반론 차원에서 금령을 규정해 놓는 경우란 처음부터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중세의 기독교 성직자들은 공공연하게 혹은 은밀하게 오늘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결혼을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료비판의 원칙은 비단 사료를 연구함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적용할 수 있는 원칙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신문을 읽는 경우나 뉴스를 듣는 경우에도 이런 원칙을 활용하면 그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어떤 사료로부터 정말로 아무런 오류가 없는 사실을 이끌어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문자로 서술된 사료로부터 객관적인 사실을 끄집어낸 것이 곤란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술사료 이외의 재료를 이용하여 사료를 보완할 필요가 있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고고학상의 발굴물, 옛 시대의 화폐, 인류학상의 유물, 혹은 인간의 습속이나 전설, 나아가서는 언어, 지명, 지리 기상학 및 천문학상의 자료 등 여러 종류의 다양한 재료를 동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과학기술의 진보에 따라 역사에 대한 보조과학의 성과가 역사를 연구하는 데 응용되어 많은 효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이런 경향은 갈수록 두드러질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것들 중에서 특히 흥미를 끄는 것은 항공사진을 이용하는 방법입니다. 그것은 예를 들면 옛날의 경지제도(耕地制度)를 복원하는 데에 이용되는 것인데, 보통 때에는 군대의 발전이라는 그림자에 가려져 전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옛날 밭의 형상 따위가 고도가 높은 상공에서 찍은 사진에는 또렷이 떠오르는 점을 이용한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제1차 대전 후 영국에서 개발되어 주로 근대적 엔클로져 운동이 전개되기 이전의 경지 형태를 연구하는 데 이용된 것인데, 오늘날에는 훨씬 더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그리스 시대에까지 응용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방법이야말로 기술적인 진보가 사료 내지는 과거를 여는 실마리를 넓혀나가는 가장 재미있는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특별히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설사 이런 새로운 형태의 사료라 하더라도 기타 고고학, 인류학, 지리학, 천문학, 기상학, 지진학, 언어학, 민속학 등이 제공해주는 보조적인 사료는 그 자체로서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못한다고 하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우리에게 말을 하지 않는 사료, 즉 유물적(遺物的)인 사료는 그것으로 하여금 말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다른 재료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그 재료란 역시 서술자료, 즉 연대기나 전기 등과 글로 쓰여진 사료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거듭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런 종류의 사료 역시 그 나름대로 갖가지 제약을 가지고 있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사료를 해석하는 데는 당연한 말이지만 아주 힘든 훈련이 필요할 뿐 아니라 세심한 주의를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시대가 크게 다른 서술사료를 작성한 사람의 심리나 의식을 항상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는 점에 우리는 더욱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작성된 사료가 고대의 것이든 중세의 것이든, 아니면 그것이 좀 더 새로운 시대의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작성한 사람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가지고 있던 상식, 도덕관념, 종교의식, 또는 정치적인 사고방식 등은 우리들의 그것과 반드시 일치하지만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아니 일치하지 않는다기보다 원칙적으로 다르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이 글로 써서 남긴 것을 읽을 때에는 항상 그 사람들의 그런 심리적인 태도를 고려하면서 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깊이 명심해야만 합니다. 예컨대 중세의 사료 등을 살펴보면, 교회에 대한 토지의 기부나 농노의 해방과 관련하여 그와 같은 행위의 이유로서 항상 경건한 종교적 동기가 서술되고 있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러나 실은 그것과는 정반대되는 목적이 그 속에 숨겨져 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렇게 숨겨져 있는 목적을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역사연구에 있어서 항상 중요한 작업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일단 그렇게 숨겨진 목적을 찾아내게 되면 이번에는 중세의 인간도 역시 적어도 이해관계에 있어서는 우리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구나 하는 식으로 쉽게 단정해 버리고는 무엇이든지 우리의 생각을 그대로 중세의 사료를 해석하는 데 끌고 들어가 버리기 쉽습니다. 이것은 누구나가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이로 인해 이런저런 잘못, 그러니까 과거를 무리하게 현대의 사고와 관습에 따라 해석해 버리는 잘못을 범하게 되고 그리하여 결국에는 역사를 크게 왜곡해 버리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인간의 사고와 감정을 이해하고 사료를 읽어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역사를 공부함에 있어 언제나 반복해서 문제가 되는 보다 중요하고 또 보다 어려운 문제, 그러니까 요컨대 역사에 있어서 주관성과 객관성이라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또다른 관련 속에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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