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소리 우습게 보지 말라 - 김준호
둘째 마당 : 우리 소리는 힘이 세다
센박으로 시작하는 우리 소리
이제부터는 직접 우리 소리의 바다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우리 소리의 독특함과 매력이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잘 알려진 경기 소리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늴리리야 늴리리야 니나노 난실로 내가 돌아간다
문제는 이 노래를 부르는데 백이면 백 모두 서양식 창법으로 부른다. 서양 창법의 기본은 맑고 깨끗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오페라에서 목 쉰 구두쇠 영감이나 짓궂은 파파 할머니 역할을 맡은 경우가 아니라면 조건 맑고 깨끗하게 노래를 불러야 한다. 서양 노래에는 사실 그게 맞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노래에도 그것이 맞느냐는 거다. 우리 노래를 그렇게 부르면 분위기가 전혀 달라진다. 몸에 와 닿지 않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목청 곱게 늴리리야 하고 불러 보자. 과연 맛이 살아나는가? 그런 식으로는 백 번을 불러도 제 맛이 살아 나지 않는다. 노래의 제 맛을 내려면 프로가 불러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론 그건 그렇다. 그런데 누구나 우리 노래의 맛을 쉽게 살리는 방법이 있다. 박자 하나만 우리 식으로 지켜 주면 된다. 서양 음악하고 우리 음악은 박자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서양 음악은 노래를 할 때, 앞이 여리고 뒤가 센 형태다. 즉, 뒤로 갈수록 세어진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이 창법은 호흡을 한 후, 성애를 거쳐서 입으로 소리가 나오는 식이다. 즉, 호흡-성대-입의 순서다. 요즘 우리가 흔히 부르는 서양식 노래는 모두 이런 식이다. 우리 대중 가요를 부르더라도 마찬가지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여기까지만 불러도 어떤가? 우리 에서는 리 가, 만남은 에서는 은 이, 우연이 에서는 이 가, 아니야 에서는 야 가 세다. 음을 세게, 길게 끌어 줄수록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이 된다. 그래야 노래방에서 점수가 잘 나온다. 오 마아이 러브, 마이 다아알링 하는 서양 대중 가요도 마찬가지다. 한 번 직접 불러 보라. 마침 레코드판이 있다면 한 번 돌려서 확인해 보라. 대중 가요말고 우리가 흔히 부르는 서양 노래 가운데 에델 바이스 를 예로 들어 보자. 이 노래를 서양 창법으로,그러니까 호흡을 하고 성대를 거쳐서 입으로 소리를 내는 식으로 불러 보자.
에델바이스-에델바이스-
여기서도 역시 뒤가 센 방식으로 노래가 나온다. 또 그렇게 불러야 노래를 잘 부른다는 말을 듣는다. 그런데 우리 창법은 서양 창법과 서양 창법과 완전히 거꾸로다. 한마디로 우리는 앞이 세다. 호흡을 해서 성대를 거쳐 입으로 나오는 소리가 아니다. 이를테면 입부터 먼저 만들고 뒤에 성대가 따르는 식,즉 호흡-입-성대의 순서다. 입부터 먼저 만들고 거꾸로 접근해서 에델바이스를 우리 창법으로 불러보자. 자,입부터 먼저 만든다. 호흡을 해서 입을 만들고 한 자 한 자에 생명력을 불어넣듯 부른다. 에델바이스의 에 자를 부르려면 먼저 소리를 내지 말고 입으로 크게 에 자를 만들고 나서 잠시 멈추었다가 소리를 터뜨린다. 이렇게 우리 식으로 에델바이스,에델바이스 하고 부르면 자연스럽게 맨 앞부분에 강세가 주어진다. 마치 밀양아리랑의 날 좀 보소,날 좀 보소 하는 것처럼 들린다.
일하면서 노래하고 춤추는 우리 민족
그러면 왜 이렇게 박자를 센박으로 해서 힘들게 하느냐,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 민족은 일할 때 일하고, 놀 때 노는 그런 민족이 아니다. 일과 놀이가 한데 어우러지고 뭉뚱그려져서 일하는 듯 노는 듯, 노는 듯 일하는 듯 하는 게 우리 민족의 일과 놀이이고 생활이다. 앞에서 비빔밥, 쌈밥을 이야기했지만 일과 놀이도 비빔밥, 쌈밥이다. 신명나게 놀수록 힘이 넘쳐서 일하고, 신명나게 일할수록 놀 때도 흥이 넘친다. 어려운 일을 마치고 직원들끼리 회식을 하면서 노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놀이를 하는 데 노래가 빠질 수 없다. 원래 노래라는 말도 놀이에서 나왔다. 그래서 일과 놀이, 일과 노래는 거의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어울린다. 일만 했다 하면 노래다. 힘든 일을 할 때마다 노래가 들어가다 보니 우리 음악에서는 특히 일 노래, 노동요가 발달했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은 베틀로 베를 짠다든지, 물레를 돌린다든지 할 때 전부 일과 관련된 노래들을 부르면서 했다. 베를 짜면 짜는 동작하고 딱 맞게끔 노래가 짜여진다. 베를 짜는 동작은 이렇다. 차그닥 차그닥 실 왔다갔다. 차그닥 차그닥 실 왔다갔다. 이것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고,직접 동작을 보고 같이 해봐야 안다. 노래를 하면서 맞는지 안 맞는지 한 번 보기로 하자.
형님 형님 사촌형님 시집살이 어떻딥까 아이구 야야 말도 마라 시집살이 개집살이 앞 밭에는 당초 심고 뒷 밭에는 고추 심어 고추 당초 맵다 해도 시집살이 더 맵더라 사아비 방구는 호령 방구 시어매 방구는 앙살 방구 시누이 방구는 고자질 방구 서방 방구만 단 방굴세
일하는 동작하고 노래가 딱딱 맞아 들어간다. 또 물레를 돌리면 물레 돌리는 동작과 노래가 딱 맞게끔 되어 있다.
울어머님 날 섬길 때 딸캉같이 섬겨 주소 섬겨 주소 섬겨 주소 딸캉같이 섬겨 주소
물레를 돌리면서 시어머니한테 부르는 노래다. 이것도 물레 돌리는 동작을 직접 해보면서 부르면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울어머님 날 섬길 때 딸캉같이 섬겨주소 하는 대목에서 사고가 생겼다. 원래는 다음 가사가 섬겨 주소, 섬겨 주소, 딸캉같이 섬겨 주소 인데 그 부분에서 그만 실이 하나 뚝 끊어진 것이다. 그럼 노래를 중단할까? 아니다. 일과 노래는 언제나 함께 간다. 실을 잇는 것도 일이다. 그래서 끊어진 실을 이으면서도 노래는 계속한다.계속하는데 가사가 달라진다.
퉤퉤,이놈의 실이 와 이다지 끊어지노 날이 너무 가물어서 그런가
이렇게 가사는 바꾸면서 곡조는 계속 가져간다. 이 다음 대목은 이렇게 진행된다.
비오다가 볕나들랑 친정어머니 본 것 같고 볕나다가 비오들랑 시어미 본 것 같고
그런데 이 대목은 약간 문제다. 요즘은 방문들이 다 두꺼워 80퍼센트 이상 발음이 잘되지만 옛날에는 한 집에 살면 문은 말 그대로 종이 한 장 차이였다. 따라서 옆방 시어머니에게 다 들리는 것이다. 시어미니가 귀 똑바로 세우고 다 듣고 있는데, 볕나다가 비오들랑 시어미 본 것 같고 했다간 당장 난리가 날 거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들은 이런 상황을 너무나 슬기롭게 피해간다. 어떻게 할까? 실 끊어졌을 때 하던 것처럼 볕나다가 비오들랑 하고서는 노래를 딱 끊는다. 그 다음 시어미 본 것 같고 의 대목은 생략한다. 그냥 생략하면 표가 나니깐 어따,이놈 모기 보래,에구 피가 벌거니 빨아먹었구마 이렇게 사설을 한 자락 집어넣고 은근슬쩍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이건 구렁이 담 넘어가는 것처럼 의뭉스러운 게 아니라 부드럽고도 현명하게 어려운 상황을 처리하는 지혜다. 이렇게 우리 노래는 일하는 동작하고 딱 맞아떨어지게끔 되어 있는 것이다. 여자들 일 노래를 보았으니 이번에는 남자들 일 노래를 보자. 뱃노래라는 게 있다. 배를 젓는 일은 아주 힘이 든다. 그래서 노래가 없으면 얼마 하지도 못한다. 이 뱃노래도 노를 젓는 동작과 딱 들어맞게끔 되어 있다.
어기야 디여라 어기야 디여 어기 여차 뱃놀이 가잔다
이 노래를 서양 창법으로 부른다면 어떨까? 모르긴 몰라도 배가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게다. 일 노래의 리듬도 센박으로 들어가듯이 우리 한국 음악은 전반적으로 박자가 센박으로 들어간다. 이 이치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팔도강산의 모든 노래가 전부 박자가 세다.
제주도, 둥그레 당실 둥그레 당실... 경상도, 어쩔시구 옹헤야 저절씨구 옹헤야 잘도 한다 옹헤야... 전라도, 남원산성 올라가 이화문전 바라보니... 충청도, 천안 삼거리 흥흥흥... 강원도,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 경기도, 짜증을 내엇 무엇하나... 이북지방, 왔구나 왔어, 청천 갔던 배뱅이가 박수무당...
모두들 잘 아는 놀니까 한 번씩 불러 보자. 그러면 전부 박자가 센박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할머니 자장가는 세계 최고
우리 음악은 센박이다. 이렇게 말하면 서양 사람들은 종종 반박한다. 센박 좋다. 일 노래는 센박이 힘차고 좋은데 진짜 박자가 세서는 안되는 음악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장가다. 애들을 재우면서 너희 한국 사람들은 행진곡처럼 씩씩하고 우렁차게 잘 자라, 내 새끼 하겠느냐? 70년대에 세계 자장가 대회가 있었다. 여기서 어느 나라가 1등을 했냐면 한국 자장가였다. 자장가라는 노래는 음악성이나 예술성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자장가는 감감용 음악이 아니라 목적 기능이 앞서는 노래이므로 자장가는 좌우지간 애만 빨리 재우면 된다. 이름만 들어도 질려 버리는 모차르트, 슈베르트, 브람스 이런 대가 선생들의 자장가가 다 나왔다. 그런 세계적으로 유명한 자장가들을 가지고 유명한 성악자들이 달려부여 감미롭게 노래를 부른다.
잘 자라 우리 아기, 앞뜰과 뒷동산에... 잘 자라 내 아기, 내 귀여운 아기...
그러나 그 노래를 듣는 아이들의 눈을 어떨가? 똘망똑망하다. 계속 다른 사람들이 나와 불러도 별 효과가 없다. 아이들은 재미는 있어 해도 잠은 자지 않는다. 다음 차례 나오시오 해서 우리 한국 대표가 나가는데 누가 나가는고 하니 허리가 꼬부장한 할머니 한 분이었다. 이 할머니가 애들이 나란히 누워 있는 방의 문을 열고 들어거더니만 자장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자장가란 것이 통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뿐이었다. 그러나 신기할 일이다. 옹알옹알옹알옹알... 이렇게 딱 90초 가량을 부르니까 흑인애, 백인애, 필리핀애 세 명이 쿨쿨 잠에 빠지는 거다. 서양 사람들은 잔뜩 자존심이 상했다. 서양 사람들의 특기는 뭐든지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거다. 그래서 저 자장가가 어떤 마력을 가지고 있는지 분석해 보자 하고 분석에 들어갔다. 그 결과 그 자장가는 너무나 아기를 잘 재우게끔 구조가 잘 짜여져 있더라는 것이다.
첫 번째 과학적인 근거, 한국의 자장가는 발음이 불명확하다는 것. 옛날 학교 다닐 때를 한번 생각해 보자. 점심 먹고첫 시간 5교시 수업은 잠과 싸우는 시간이다. 어떤 선생님들은 들어와서 또록또록 재미나게 강의를 하시니 잠이 전혀 오질 않는다.그런데 이런 선생님은 꼭 한 분쯤은 계신다.
웅얼웅얼...엑스 자승...웅얼웅얼...괄호 치고...웅얼웅얼...숙제해 와라.
이렇게 한 시간 내내 웅얼대다가 수업을 끝낸다. 이걸 듣는 학생들은 어떨까? 수업 시작 10분도 채 못돼 전부 꾸벅꾸벅 졸고 있다.따라서 불명확한 발음이 졸음을 유도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자장가를 주로 불렀던 사람들은 아래 위로 이가 대여섯 개나 없는 할머니들이다.옛날에는 아기를 워낙 많이 낳다 보니 칼슘 부족으로 나이가 들면 금세 이가 빠져 버린다. 이런 분들이 아기를 재울 때,자신은 발음을 정확히 한다고 하지만 결과는 어떤가?
자장 자장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잘도 잔다 잘도 잔다 잘도 잔다 검둥개야 짖지 마라 우리 아가 잠 잘란다 흰둥개야 짖지 마라 우리 아가 잠 잘란다 느그 아버지 서울 가서 밤 한 되를 사왔네 껍데기는 니 어미 주고 (껍데기는 미운 며느리에게 준다는 얘기다) 알맹이란 내 새끼 먹고 자장 자장 자장 자장
이런 가사를 이 빠진 할머니가 부르면 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 자장인지 짜장인지부터 모를 일이다. 이런 판이니 우리말을 전혀 모르는 서양 사람들조차 저건 뭔가 발음이 불명확한 거야 하고 쉽게 단정지을 수 있는 거다.
그 다음 두 번째 근거는 뭐냐 하면 반복 구조다. 서양 자장가의 경우 논리적으로 1절, 2절, 3절, 4절 딱 짜여져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대게 우리 어머니들이 우리 자장가를 외우고 있는 것은 1절뿐이다. 그런데도 우리 자장가는 밤새도록 불러도 끝이 안나는 노래다. 얼마든지 늘려서 부를 수 있다. 왜일까?시작은 있는데 끝이 없기 때문이다. 무슨 가사든지 막 집어넣어 가지고중간중간에 한 번씩 자장 자장만 해주면 자장가가 된다. 나중에는 애국가 가사도 놓고 유행가 가사도 막 집어 넣는다. 검둥개 흰둥개만 나오는가 하면 보이는 짐승은 있는 대로 다 집어넣는다.
꼬꼬닭아 우지 마라 우리 아가 잠 잘란다 누렁소야 우지 마라 우리 아가 잠 잘란다 새앙쥐야 뛰지 마라 우리 아가 잠 잘란다
밤새도록 불렀는데 애가 안 잔다. 그러면 또 가사가 바뀐다.
애는 안 자는데 우리 서방님은 어디로 출타를 하셨는지 밤늦도록 집에 안 들어오고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다 갑자기 자장가는 신세 타령으로 바뀌어 버린다. 아이구 이놈의 자슥아 빨리 좀 자그라 느그 애비라카는 인간은 어데 가서 자빠져 있을꼬 화투도 못 치는 것이 돈이나 맨날 잃고 다니면 어이구 야야 내 새끼야 니가 니가 크거들랑 느그 아버지같이 술도 먹지 말고 화투도 치지 마라 니는 느그 각시한테 잘 해줘라 자장자장
요련 식으로 해가지고 아기를 재운다. 계속 반복하다 보면 아기한테 최면이 걸리면서 잠이 저절로 들게 된다. 이런 자장가 하나를 분석해 보더라도 모두가 노래의 진짜 목적에 딱 맞게끔 짜여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의 일 노래에서 본 적처럼 자장가에서도 목적에 부합하게끔, 일과 노래가 구분이 안되게 되어 있다. 사실 아이를 재울 때 서양식 자장가를 고집한다면 아이를 재우기도 어렵거니와 또다른 문제도 있다. 서양식 노래는 고운 목소리로 맑게 불러야 하기 때문에 부르는 사람의 목청과 노래 실력에 따라 차이가 심하다. 그러면 원래 목청이 탁해서 고운 노래가 안 어울리는 어머니는 자기 아이를 어떻게 재운단 말인가? 또 원래 소질이 없어 노래를 못 부르는 어머니는 어떻게 해야 하나? 실제로 노래를 못 부르는 어머니가 부르는 자장가는 아이도 못 들어준다. 자던 아이도 깰 판이다. 우리 자장가라면 그런 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불분명한 발음으로 반복해서 웅얼웅얼거려 주면 되기 때문이다. 노래를 아무리 못하는 어머니도 이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다. 보통 어머니나 할머니가 아기를 재우는 모양을 보면,품에 안고 재우거나 젖을 몰려 재우거나 업고 재우는데,또 한 가지 빼 놓지 않는 게 있다. 자장가를 부르면서 꼭 몸을 흔들거나 어르면서 재운다.그리고 자장가의 첫 박을 꼭 센박으로 부른다.
자장가도 센박으로 시작한다. 더구나 노래만 센박이 아니라 아기 재우는 몸짓도 그렇다. 사실 우리 자장가를 보면 조금 희한한 게, 세계에서 아가들을 두들겨패 가면서 재우는 자장가는 우리 것밖에 없다. 서양 사람들은 아아를 재우면서 책을 읽어 주고 뽀뽀를 해주고 하지만,우리처럼 가슴을 토닥여 주지는 않는다. 또 서양 사람들은 아이가 잠들기 시작했을 때 조용히 방을 나간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아이가 완전히 잠들어 숙면을 취할 때까지 계속 자장자장 하며서 가슴을 토닥여 주는 것이다. 그런데 어릴 때 가슴하고 배를 두들겨 주면서 재우면 한방에서 하는 이야기로 오장육부가 튼튼해진다고 한다. 아주 어릴 때부터 두들겨서 키우면 굉장히 좋다. 알타이 민족들이 보통 보면 아이들을 두들겨 재우는데 우리 아기들은 두들겨 맞으면서도 잘잔다. 자장가 자체도 센박이지만 자장가를 부르는 행동조차 센 것이다.
평생 동안 함께하는 4박자
우리 자장가가 아기를 잘 재우는 세 번째 근거가 뭐냐 하면 박자다. 한극 사람들에게 제일 익숙한 박자는 4박자다. 하나-두울-세엣-네엣 이 4박자가 바로 우리 자장가의 박자 구조다. 4박자의 가락이 계속 반복되니까 상당히 지루하고 단조롭다. 그런데 그 점이 바로 자장가에 딱 어울린다. 아이들은 단조로우니가 잠에 빠지게 된다. 서양 자장가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모차르트의 자장가는 느릿3박자이다. 3박자는 홀수 박자이기 때문에 뭔가 완결될 맛이 없다. 쿵작작, 이것만으로 안정감을 찾기 어렵다. 쿵작작작, 이래야 끝나는 맛이 든다. 홀수는 안정감이 없고 짝수는 안정감이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서부터 이 4박자를 느낄까? 바로 어머니의 뱃속에서 이 심장 박도 리듬을 익혀 가지고 나온다. 이 리듬, 어머니의 심장 박동 리듬을 똑같이 옮겨 놓은게 바로 자장가인 것이다. 자장가에서부터 시작되어 한국 사람들은 평생동안 4박자하고 같이 간다.어릴 때 부른던 노래들도 전부 4박자의 구조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 꽃 찾으로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무슨 꽃을 찾으로 왔느냐 왔느냐 호박꽃을 찾으로 왔단다 왔단다
할배 할배 어디 가요 새 잡으로 간다 새 몇 마리 잡았소 다섯 마리 잡았다 내 한 마리 주소 삶아 먹고 지져 먹고 냠냠냠
떽떽 꾸린내야 누가 뀌었나 니기 뀌었나 네가 뀌었나 한 번 보자
이 거리 저 거리 각 거리 진주 망건 때망건 천사 만사 또 만사 도래중치 장독간
전부 4박자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만큼 우리는 4박자에서 편안함을 느끼는민족이다.
세계에서 가장 과격한 사랑가
한국 사람들은 이것을 설명하면 금방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데 외국인들을 앉혀 놓고 이런 강연을 하면 이해시키기가 쉽지 않다. 서양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여러 가지 창법들을 줄줄이 늘어 놓고는, 센박으로 들어가는 음악으로는 행진곡과 같은 군사용 음악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서양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하곤 한다. "코리아 미스터 김, 당신네들이 그렇게 박자가 세다는데 사랑 노래는 박자가 세지 않을 것 같다." 서양 사람들은 박자가 세다가 하면 무조건 신나는 음악이다. 일단 선입견 자체를 그렇게 가지고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슬픈 노래는 단조를 써서 부드럽게 불러야 하고, 기쁜 노래는 장조를 써서 힘차게 불러야 한다. 이게 서양 음악을 하는 방식이자,동시에 선입견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의 슬픈 노래는 어떻게 부른다? 슬픈 노래도 센박으로 간다. 익은 맛, 삭은 맛을 요구하는 우리 음악에서는 서양 사람들과 같은 선입견이 없다. 슬픈 노래도 센박으로 가는데 사랑 노래라고 안될 게 없다. 사실 서양 사람들만이 아니라 지구상 모든 민족의 사랑 노래를 들어 보면 전부 아피 여리고 뒤가 센 창법을 택하고 있다. 그래야 달콤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우리 음악의 창법은 전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우리 음악의 사랑 노래는 가장 독특한 사랑 노래라 하겠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구상에서 제일 과격한 사랑가라고 할 수 있다. 아리랑 노래 가사만 보아도 그렇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말이 쉬워서 발병이지 사실은 다리가 부러져 버리라는 소리다. 날 버리고 가면 다리가 부러진다? 우리 한국의 사랑 노래는 가사부터 이렇게 과격하다. 한국 사람들이 가장 큰 감정의 파장을 일으키는 말이 버린다 , 간다 라는 말이다. 이 아리랑에서도 핵심은 바로 '버리고' 와 '간다' 이다. 여기서 버 와 간에 센박으로 감정 처리를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찡한 감정을 일게 하는 창법으로 자학의 애정 을 극단적으로 표현한다. 즉, 못 먹는 감은 찔러라도 본다는 식의 애정도 아니고 애증도 아닌 묘한 감정의 표현이다. 이것은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얼마나 잘 되는지 보자 는 식의 사랑+용심 이라는 토라짐의 극치다. 이렇게 센박으로 시작하는 우리의 사랑 노래는 언뜻 들으면 전혀 부드럽고 달콤한 것이 아니다. 솜사탕 먹는 것 같은 오, 마아이 럽, 마이 다아알링 이 아니고 전부세게 둥둥둥 내 사랑! 이다. 이건 그대는 내 사랑이오 하고 부드럽게 속삭이는 것이 아니라 넌 내 거다! 하고 부르짖는 거다. 사랑하는 연인의 창문 바깥에서 은은한 달빝을 받으며 부드럽게 세레나데를 불러 사랑을 호소하는 서양 사람들은 우리네 사랑 노래를 들으면 화들짝 놀랄 것이다. 남성들에게서 사랑을 받아만 왔던 서양 여성들이 우리 사랑 노래를 듣는다면 뭐,이런 사람이 다 있나? 하면서 돌아서 버릴 거다. 그러나 우리 강인한 여인네들은 이렇게 힘찬 센박의 사랑 노래를 남성들에게 들어 왔고, 또 반대로 남성들에게 불러 주기도 했다.
장송곡도 씩씩한 우리 가락
자장가와 사랑 노래초자 센박으로 부르는 것에 놀란 서양 사람들은 다시 고민한다. 센박으로 불러선 안되는 게 또 무엇이 있을까? 그렇다, 장송곡이다.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또 질문한다. 좋다. 당신네들 자장가가 박자가 세다는 것도 이해를 하겠다. 사랑 노래가 그럴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런데 진짜진짜 박자가 세서는 안 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게 뭐냐? 장송곡이다. 당신네들은 사람이 죽었는데도 신나게 노래를 부르느냐? 하지만 이것 역시 서양 사람들의 가지고 있는 선입견이다. 박자가 세다 하면 일단은 신나는 음악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우리 음악을 바로보기 때문에 그런 질문이 나오는 것이다. 이별 중에서 제일 슬픈 이별은 뭘까? 죽은 사람과 헤어지는거 아닌가? 죽은 사람과 헤어지는 노래는 바로 장송곡이다. 따라서 장송곡은 제일 슬픈 이별 노래다. 이별 노래만 해도 슬플텐데 장송곡이라 하면 가장 슬퍼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장송곡이라고 하면 서양 음악의 종류이고,우리는 상여 소리라고 한다. 우리 상여 소리와 서양의 장송곡을 같이 비교해 보면 여러 가지가 다르다.우선 노래 이전에 복장이 다르다. 장례식 의상자체가 다른 거다. 우린 흰색인데, 그 사람들은 검정색이다. 우리는 저승과 이승을 명확히 나누고, 죽은 사람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완전히 건너간 사람이라고 여기지만,서양 사람들은 저승도 이승의 연장이다. 기독교에서는 살아서 한 행적이 죽은 뒤의 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서양 사상의 모태가 된 그리스 신화를 보면 신들이 인간 세상에 여러 가지로 간섭한다. 신들도 사람들처럼 사랑을 나누고, 복수를 하고,질투심도 많다. 지하에 스틱스 강이라는 강물을 건너면 바로 저승이라고 한다. 기독교에서는 요단 강 하나 건너면 바로 저승이다. 반면 우리 의식 구조에서 이승과 저승은 강 하나 정도 건너는 문제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세계다. 또 우리는 전생에서 살아온 행적이 사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 다음 생애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다 보니 서양 사람과 우리는 죽은 자를 대하는 태도도 다르다. 예를 들어 서양의 드라큘라나 흡혈귀는 산 사람들과 부단히 교섭하는 살아 잇는 존재지만, 우리의 귀신이나 저승 사자는 이승과는 다른 세계에 속해 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다른 세계인 저승을 겁내지만 서양 사람들은 이승과 저승이 이어져 있다고 본다. 이렇게 인식이 다른 만큼 장례식을 치르는 방식도 크게 다르다. 우리는 장례식 전에 시신을 병풍 뒤에 안치해 놓지만, 서양 사람들은 시신을 멀쩡한 사람처럼 화장을 해가지고 관에 넣어 교회에서 친지들에게 두루 보여 준다. 우리는 염을 한다든가 할 때 시신이 여러 사람 앞에 나오면 울고불고 난리가 나지만, 서양 사람들은 쭉 줄 서서 차례차례로 시신을 한 번씩 보면서 산 사람을 사대하듯이 이야기를 한마디씩 걸고 관 속에 꽃을 던진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서양 사람들과 우리는 장례식 때 흘리는 눈물의 양과 구성 성분도 다르다. 이렇게 문화 자체가 다르니 음악도 당연히 다르다 우리 상여 소리는 서양의 장송곡에 비해 훨씬 처절하다. 죽은 자는 아주 다른 세계,저승으로 완전히 넘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서양 장송곡을 듣고는 정신 나가는 사람들이 없는데 우리 상여 소리를 듣고는 정신이 살짝 나가는 사람이 꼭 있다. 보통 상여가 나가는데 사람들이 쭉 따라가다가 한두 명이 꼭 허튼소리를 한다, 한참 울며 가다가 봉창 두드리는 말을 하는 것이다.
야야, 근데 느그 엄마가 죽었나,느그 아부지가 죽었나?
소리에 취해서 그만 누구 초상인지도 모르는 거다. 하긴 그 사람 잘못만도 아니다. 모두 다 우리 상여 소리가 하도 슬픈 탓이니까. 우리의 상여 소리는 또 지방마다 각기 다르다. 우리나라는 상여 소리 자체가 전 세계에서 제일 많은 나라다. 동네마다 다 다른 것이다. 너무 많아서 분류를 어떻게 하는가 하니 지형에 따라 한다. 산악 지방 상여 소리가 있고, 평야 지대, 즉 논농사 지역 상여 소리가 있고, 바닷가 지역 상여 소리가 있다. 평야 지역을 가면 논농사 짓고 조금 먹고 살 만한 곳이라 상여 소리도 신나게 나간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북망 고개로 나는 간다 서른서이 상둣꾼아 발 맞추어 나아가세 여흐 여흐 여흐 여흐 너거나 넘차 여흐넘
이제 가면 언제 오나 기약 없는 길이로세 여흐 여흐 여흐 여흐 너거나 넘차 여흐넘
복망산이 멀고 먼데 노자 없이 어이 가리 여흐 여흐 여흐 여흐 너거나 넘차 여흐넘
이렇게 평야 지대의 상여 소리는 발을 맞추어 걷기가 수월학 굿거리풍으로 약간 신나게 춤을 추듯 나간다. 역시 발에 맞추어 하다 보니 박자는 센박이다. 하지만 산악 지방에서는 산에 상여를 메고 올라가면 상당히 피곤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장단에 맞춰서 못 가고 주로 노동요 비슷하게 단순하게 나간다.
어허 어허 가자 가자 어서 가자 술로 먹으면 넘어가고 어허 어허 사람도 늙으면 자빠지고 어허 어허
언덕이 많은 산악 지방에서 상여를 메고 올라가는 일은 보통일이 아니다.발걸음을 재게 맞추다 보니 약간 투박하고 단순하게 상여를 놀리게 된다. 바닷가 지역으로 가면 또 다르다.우리나라 바닷가 지역에서는 슬픈 소리가 굉장히 발달해 왔다. 영화로 유명해진 서편제도 따지고 보면 바닷가에서 나왔다. 때로는 호남 지방의 해안가 지역 자체를 보고 서편제 지역이라고도 한다. 바닷가 지역에서 왜 슬픈 소리가 발달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배 잘못 띄우면 줄초상이 한 번씩 나는 까닭이다. 그러다 보니 유독 슬픈 소리가 많다.
여-여-여-어흐너흐 어이 가리 넘차 여흐노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이 진다고 설워 마라 여-여-여-어흐너흐 어이 가라 넘차 여흐노
명년 춘삼월이 돌아오면 너는 다시 피련마는 여-여-여-어흐너흐 어리 가리 넘차 여흐노
우리 인생은 한 번 가면 다시 올 줄을 모르더라 여-여-여-어흐너흐 어리 가리 넘차 여흐노
이것 역시 박자가 세다. 우리는 슬픈 소리조차도 박자를 전부 센박으로가져가는 것이다. 한국 사람한테는 슬픈 소리가 이런 식으로 와 닿는데 서양 사람들에게는 어떤지를 물어본다. 당신,이거 들으니까 느낌이 어떠냐? 이렇게 물으니 서양 사람들은 그 느낌을 이렇게 표현한다. 오장육부가 찢어지는 것 같다. 가사는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느낌은 제대로 전달되는 것이다. 앞에서 자장가의 경우도 아이들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면서도 우리 할머니의 자장가들을 들으며 쌔근쌔근 잠들었다. 상여소리도 그와 마찬가지다. 우리나 서양 사람이나 서로 느낌은 똑같은데 전달하는 방법에서 서로 다른 것이다. 우리는 슬픔을 강렬하게 표현하고 서양 사람들은 슬픔을 연약하게 표현한다. 우리는 슬픔을 큰 양푼에 담아서 전달하지만,서양 사람들은 조그만 접시에 잠아 전달하는 슬픔이다.
모 심는 동작에서 센박이 나온다
우리 노래가 센박으로 나가는데 우리 민족 특유의 농경 리듬 때문이다.모를 심을 때 못줄이라는 것이 있다. 모에 꼬투리를 꽂아 놓은 것을 못줄이라 한다. 모 심는 노래는 모 심는 동작하고 딱 맞게끔 되어 있다. 우리 민족은 몇 분박을 좋아한다고 했나? 3분박을 좋아한다. 우리는 3에 미치고 환장하는 민족이라고 했다. 하나둘셋, 둘둘셋, 셋둘셋, 넷둘셋, 이렇게 3분박으로 된 4박자가 우리가 즐기고 익숙하게 여기는 장단이다. 자,모를 한 번 심어 보자. 모 심는 동작하고 같이 노래를 불러 봐야 노래가 무슨 뜻인지 안다.
모야 모야 노랑모야 언제 커서 열매 열꼬 내달 크고 훗달 커서 칠팔월에 열매 열지
모 심는 동작이 노래하고 딱딱 들어맞는다. 질퍽한 논에서 이렇게 모를 심을 때는 자연스럽게 엎드리는 자세를 취하게 되는데, 엎드리면 배에 압박이 가해지고 힘이 든다. 그렇다 보니 1절 2소절을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나누어서 부르개 되어 소리짝 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것은 경상도 풍의 모심기 소리인데, 호남 지방의 모심기도 이와 비슷하다. 이런 소리들이 수십 가지의 가사로 진행된다. 그뿐 아니다. 모 찔 때 소리가 따로 있고,모 심을 때 소리가 따로 있는가 하면, 점심 때 부르는 소리가 다르고 해거름 저녁 때 부르는 소리가 또 다르다. 이렇게 반복해서 노래 부르며 모를 심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 몸에 우리 장단이 들어붙게 된 것이다. 자사 얘기나 나왔으니 말이지만, 이 모 심는 노래가 가사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른다. 모 심기 노래를 연구해 보면 세상에 이런 노래가 있다니 하고 그 합리적인 구조에 감탄이 절로 난다. 자세히 뜯어보면 대단히 조직적으로 짜여 있다. 1절, 2절, 3절이 조금 재미가 없고 교훈적이거나 고리타분한 내용의 가사가 나오면, 그 다음에는 꼭 웃기고 재미있는 가사가 등장한다. 3대 1의 비율로 중강 해학적인 가사가 들어간다.
모시야 적삼에 반쯤 나온 연적 같은 젖 좀 보소
옛날 우리 어머니들은 브래지어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모시적삼 입고 모 심느라 허리를 구부리면 어떻게 될까? 젖가슴이 훤하게 드러나보인다. 이 부부을 여자들이 부르면 재미가 없다. 그래서 이 부분의 가사를 일부러 몇 개 뛰어넘어서 남자가 부르게끔 만든다. 모 심는 남자들 중에는 짓궂은 사람도 있지만 점잖고 체면 차리는 사람도 있다. 하필 점잖은 남자에게 이 부분이 걸리면 차마 부르지 못하고 슬쩍 넘어간다. 모시야 적삼에 반쯤 나온 연적 같은 까지는 제대로 하다가 짐직 콜록 하고 헛기침을 해버린다. 그래서 가사는 이렇게 된다.
모시야 적삼에 반쯤 나온 연적 같은 콜록(!)보소
이 대목에서 모 심는 사람들은 모두 깔깔거리며 잠시잠깐 허리 한 번 펴고 쉰다. 또 여자들은 이 짓궂은 대목에 대해 나름대로 방어책이 있다. 그 다음 가사는 여자들이 부른다.
많이 보면 병난단다 쌀낟같이 조금만 살짝 보고 가소
또 모두들 웃느라 자지러진다. 일의 피곤함을 푸는데 상사 이야기만큼 재미잇는 게 또 있을까? 이렇게 일 노래들은 배에 힘을 잔뜩 집어놓고 박자가 지속하다가 터지는 식으로 된다. 따라서 노래들이 모두 센박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는 거다. 우리 고유의 센박을 잘 이용한 창법을 가지고 성공한 가수가 있다. 바로 조용필 씨다. 조용필 씨가 처음 불렀던 노래는 바로 이런 스타일이었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정이란 무엇일까 주는 걸까 받는 걸까...
이 노래들은 모두 이런 식이다. 호흡-성대-입,코. 이런 서양식 창법의 노래르 부르다가 그 이후에 사용한 창법이 바로 지속하다가 터지는 우리 창법이다. 이것은 앞이 센 센박이고 입을 먼저 만들고 성대를 거쳐 소리를 터뜨리는 창법이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여름 한낮에 꼬마 아가씨...
일편단심 민들레야...
이 노래들은 모두 이런 식이다. 호흡-입-성대. 조용필 씨는 이렇게 우리 음악을 잘 활용해서 슈퍼 스타가 될 수 있었다. 우리가 워낙 지속하고 있다가 탁 터지는 센박을 좋아하다 보니까 춤도 독특하게 발달했다. 북방형의 춤사위는 봉산탈춤이나 은율탈춤이나 강령탈춤같이 그 박자와 노는 몸짓이 활개를 치듯 힘차고 활달하다. 그 반면에 남방형의 야류, 오광대 계통의 춤은 일(-)자 모양의 온화한 춤사위로 발놀림이 철저하게 박자를 먹으면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손 까딱, 안면 근육으로만 춤을 추는데, 역시 박자에 어긋나는 법이 없이 꼭 짚어 준다. 서양 사람들은 땅덩어리가 넓으니까 씨를 뿌릴 때도 아무 데나 막 뿌려도 된다. 하지만 우리는 좁은 땅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모를 심다 보니까 춤 동작도 작고 오밀조밀해졌다. 문화는 어디서 툭 튀어나와 가지고 되는 게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여기서 조금씩 저기서 조금씩 생겨나고 진화하는거다. 춤이라고 하니까 우리 춤을 굉장히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춤도 소리처럼 우리 생활 속에서 습관화되고 행동화된 몸짓 양식이다. 이런 것들을 여러 개 묶어서 여기다 플러스 예술성 하여 다 합해 놓은 게 바로 우리 춤이다. 모 심는 동작까지 춤이 된다. 우리 할머니들은 눈을 지그시 감고 흥에 겨워 놀면 동작이 굉장히 작게 나온다. 하지만 내면의 큰 신명은 싱긋이 웃는 입 속에 천근만근이다. 이걸 잘 이해해야 우리 문화를 제대로 알 수 있다. 사실은 우리 생활 솎에도 여러 가지가 들어 있다. 원래 사회나 제도는 급속도로 변해도 생활 습관이라든가 문화는 천천히 변하게 마련이다.아무리 세상이 달라졌어도 요즘 아이들도 생활 습관은 무의식적으로 전통을 따르고 있는 게 많이 있다.
앞에서 도구를 들어 여러 가지 설명을 했지만, 그것들 하나하나 우습게 보아서는 안된다. 지구상에 우리밖에 못하는 동작이 뭐라 했던가? 한 손에 숟가락, 젓가락을 두 개 들고 밥 먹는 거다. 요런 동작 하나하나도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쳐다볼 때, 우리 민족 문화가 발달할 수 있다, 그 밖에도 한국 여자들이 이 세상에서 촉감이 최고로 발달했다는 점, 손수건은 우리 문화가 아니라는 점, 이런 것 등 등을 다양한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여러 측면에서 노력이 필요하다. 학교 교육도 손질하고, 매스컴들도 바뀌어야겠다. 우리 것을 자꾸 들려주는 방향으로 변해야 한다. 처음에는 낯설고 힘든 측면도 있겠지만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자꾸 듣고 느끼고 분석을 하다 보면 세계에서 최고 가는 진짜 문화의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우리 음악을 들은 사람들은 지겹다.청승맞다 요런 식으로 이야기들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야기한 어느 내용에서 청승맞은 구석이 있던가? 자장가도, 사랑 노래도, 이별 노래도 과연 청승맞던가? 아니다. 실제 내용을 연구해서 들어가면 전혀 그렇지 않은 게 우리 음악이다. 그것을 모르고 우리 음악은 무조건 청승맞다고 말하는 사람은 문화에 대한 시각을 크게 자겨 볼 일이다. 우리 음악을 제대로 이애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도 관심, 두번째도 관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많이 들려주고 하면 일반인들도 금방 한국 음악을 따라간다. 우선 앞에 말한 횡단보도 신호 음악부터 고쳐 보자.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사회적인 분위기 자체가 늘 우리 음악을 들려주면서 우리의 음악을 확산 시키면 우리 음악의 미래는 그만큼 밝아진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잘 모르는데 남이 우리를 알아줄 리 없다. 우리 모두가 우리 음악을 절대 우습게 보지 않고 깊이 있게 통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