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상징세계 - 구미례
제8장
용
3. 호국과 호법의 용
우리나라에서 용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 중의 하나가 바로 나라를 지키고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으로서의 용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용은 장엄하고 신비로운 능력으로 인해 제왕의 상징으로 인식되었으며, 이러한 생각은 용-임금-하늘의 관계로 맺어져 나라를 지키고 왕권을 수호하는 호국신, 호국룡의 자연스러운 탄생을 낳게 되었다. 임금은 하늘에 계시는 천제의 후손으로 받들어졌으므로, 이 천제와 임금의 밀접한 관련을 생각할 때 하늘을 자유로이 오르내리는 용의 존재가 호국의 상징성을 확보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단순히 생각하더라도, 한 개인의 일에서부터 국가의 운명에 이르기까지 하늘의 뜻에 달려 있다고 보는 인간의 한계능력 속에서, 하늘과 인간세계를 왕래하며 무궁무진한 조화능력을 갖춘 ‘용’의 존재는 나라를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상정되기에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 따라 우리나라의 건국시조는 용과 많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부인이 된 알영은 계룡의 왼쪽 갈비뼈에서 탄생되었다고 하고 혹은 용이 나타나 죽자 그 배를 갈라 얻은 동녀라고도 하였다. 또한 신라 탈해왕은 동해변에 떠내려온 큰 궤짝 속에서 칠보, 노비와 함께 발견되었다는데, 7일만에 일을 열어 말하기를 “나는 본래 용성국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일찍이 28용왕이 있었는데 모두 사람의 태에서 나왔으나 나만이 알에서 태어났으므로 불길하다고 하여 궤짝에 넣어 여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하였다. 고려의 시조 왕건의 할머니도 용녀로서, 태조가 된 왕건이 그의 선조를 용궁에 결부시키고 그 용의 혈통을 합리화하기 위해 용비늘 하나를 조작하여 왕통의 상징으로 삼았던 것도 용을 매체로 천제와의 관련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용의 능력과 신성성으로 인하여 국가와 왕권을 수호한다는 믿음과 상징성에서, 호국사상에 따라 호국용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게 된 것은 진흥왕 이후 통일신라를 전후하여 신라에 불교가 융성하게 되면서부터이다.
불교는 용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삼국유사」 등에 무수히 등장하는 신라의 용은 불법을 수호하고 불사를 돕는 호법의 용으로 묘사되어 있다. 불국정토를 이상으로 한 신라는 불교를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 호법룡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나라를 지키고 백성의 평안을 이루기 위해 호국의 용으로 발전시켜, 불법을 지키고 나라를 수호하는 일이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나타냈다. 즉 불교를 통해 순화된 용이 나라를 지켜준다는 이상적인 경지를 창출해 낸 것이다. 이처럼 신라에서 융성한 불교사상은 숭불호국의 용신사상을 낳게 하였으며, 수백 년 동안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워 왔다. 따라서 앞으로 살펴볼 호국과 호법의 용은 신라시대가 그 중심이 될 것이며, 호국과 호법이 함께 어우러진 신라의 독특한 용신사상이 주가 될 것이다. 불교와 용의 관련은 고대 인도의 사신숭배에서 비롯되었다. 인도에는 원래 독사의 위험이 많아 일찍부터 뱀을 숭배하는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중국 용의 모습에 인도 뱀을 신격화한 용의 관념이 혼합되었다. 이때까지만 하여도 단순한 초능력적 존재나 악신이었던 용의 존재가 부처님의 설법 속에서 마침내 불교의 호교자로 그 위치를 굳히게 된다. 이에 따라 용은 불법을 수호하는 팔부신중의 하나로 수용되었으며, 용은 불법을 옹호하고 선신으로 존경받는 팔대용왕으로 분류되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불교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된 용은 불법을 수호하는 선신으로서뿐만 아니라 때로 세간을 파괴하고 해를 주는 악신으로도 등장하여, 전체적으로 인간세계에 커다란 교훈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특히 신라시대의 호국과 호법의 용을 살펴보기 전에, 불교의 여러 경전에서 나타나고 있는 용의 성격 및 역할 등을 몇 가지로 분류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불교에 귀의하여 불법을 수호하는 용의 모습이다. 불교경전을 보면 많은 용왕들이 불교에 귀의하여 불법을 수호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불본행집경」등에 의하면, 석존의 성불한 뒤에 가장 먼저 부처님으로부터 삼귀 오계를 받고 세간에서 최초의 우바새가 된 것이 용왕이라고 되어 있다. 또한 이라발 용왕과 상거 용왕은 석가불의 출세를 기다리다가 녹야원으로 부처님을 찾아가 삼귀 오계를 받고 불교에 귀의하였으며, 부처님의 설법시에 용왕들이 많은 권속을 거느리고 와서 법문을 듣는다는 내용도 여러 경전에서 볼 수 있으며, 「인연승호경」과 같은 경전에서는 대해 용왕이 사람으로 변하여 부처님이 머무는 기원정사로 찾아가 비구니가 되어 수도생활을 하였다는 내용도 나타나고 있다. 둘째, 인간세상에 정법을 펼쳐서 이로움을 베푸는 용의 모습이다. 위에서도 말하였듯이 용에는 정법대로 행하는 선룡과 법대로 행하지 않는 악룡이 있다. 이들 용은 전생에 지은 업에 따라 선룡과 악룡으로 태어나는데 선룡, 즉 법행룡을 때를 맞추어 비를 내리고 세간의 오곡을 성숙시켜 백성을 평안하게 하며 불법승 삼보를 깊이 믿어 수순법행으로 불사리를 수호한다. 이에 비해 악룡은 열사의 비를 내려 세상을 태우고 두꺼비를 삼키고 사토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며 바람을 들이마셔 뭇 생명이 있는 것들을 파괴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악룡의 등장이 단순한 선과 악의 대치로서가 아니라, 그를 통하여 인간세상의 비리나 악행을 바로잡고자 한 인과응보의 교훈으로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세상사람들이 법행에 순응하는가 역행하는가에 따라서 선룡과 악룡이 각각 그 세력을 증대하게 된다. 세간의 사람들이 법에 순응하여 부모를 효도로 공양하고 사문과 바라문을 공양하며 정법을 수행하면 곧 법행룡인 선룡이 세력을 떨치게 되고, 반대로 중생이 법을 어기고 부모에게 불효하며 사문과 바라밀을 불경하면 곧 악룡이 그 세력을 떨치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 경전을 봉안하고 있는 용의 모습이다. 용왕이 바닷 속의 용궁에 경전을 안치 봉장하고 있는 내용이 여러 경전에 전하며, 따라서 경전을 용장이라고도 한다. 「용수보살전」에 따르면,「화엄경」은 오랫동안 용궁에 감추어졌던 경이라 하며, 유명한 화엄사상의 대가 용수는 대룡보상에 의해 용궁으로 인도되고, 칠보로 장엄한 보장안의 경전들을 얻어 그것을 세상에 유포시키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용왕은 대승경전의 수호자로서 간주되고 있다. 이 외에도 부처님 탄생시에 ‘난다’와 ‘우파난다’라는 용왕이 한 줄기는 따뜻하고 한 줄기는 시원한 청정수를 토하여 탄생불의 몸을 씻어 주었으나, 부처님이 나무 밑에 앉아 명상에 잠겨 있을 때 이레 동안이나 큰 비가 계속되자 용왕이 나와 부처님 주위를 일곱 번 돌고 일곱 개의 머리로써 위를 덮어 비를 맞지 않도록 하였다는 등 부처님의 주위에서 부처님을 보호하고 지키는 수호자의 역할도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불교에서의 용의, 불법에 귀의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정법을 수호하고 세간중생의 이익을 증대시키며 경전을 봉안 수호하고 부처님을 보호하는 등, 불교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어떠한 불교국보다도 우리나라에는 용에 대한 신앙이 깊이 자리잡고 있다. 「삼국유사」를 중심으로 불교설화를 기록한 각종 문헌에는 용이 불법을 수호하고 나라를 지키는 초월자적인 존재로 묘사되고 있으며, 사찰의 법당이나 탑 등에 무수히 장식된 용도 모두 호법신으로서의 역할을 나타낸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가 이러한 호법룡의 신앙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 용이 호법신의 위치를 굳히게 된 것은 진흥왕 이후 신라통일을 전후한 시기부터이다. 특히 사찰의 창건연기에서 호법룡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데, 「삼국유사」, 「삼국사기」의 기록을 중심으로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진흥왕 14년(553년) 2월에 궁전을 지으려 하였는데 그 땅에 황룡이 나타났다. 이를 심상치 않게 여겨 궁전을 불사로 고쳐 짓게 되었는데, 이 절이 바로 황룡사이다. 이 때의 황룡이 바로 호법룡이라는 사실은 이후 자장 법사에 의해서 알려지게 된다. 즉 636년(선덕여왕 5년) 당나라로 떠난 자장은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여 불사리를 얻은 후 중국 태화지 옆을 지나게 되었다. 그 때 홀연히 용왕이 나타나 황룡사를 지키고 있음을 밝히고,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의 항복을 받고 태평국가를 이룰 수 있음을 말하였다. 이에 자장은 귀국 후 호법룡이 지키고 있는 황룡사에 9층탑을 세웠다.
호법신의 보호를 받아 창건된 황룡사와 황룡사 9층탑은, 당시 불안한 대외관계 속에서 국민들에게 커다란 희망과 신념을 심어 주었다. 황룡사는 그 건립기간이나 규모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국가적 신앙면에서도 당대는 물론 신라 일대에 있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대찰이었다. 이러한 황룡사를 세울 때 나타났던 황룡이 바로 호법룡으로서, 최초로 등장하는 호법호국의 용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또한 황룡사 9층탑은 주위 모든 나라가 신라를 중심으로 하나로 뭉쳐져 영원한 불국토를 이룩할 수 있도록 두 손 모아 부처님께 기원하는 통일탑,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한편, 자장은 문수사리의 부촉을 받고 영축산 통도사를 창건하여 부처님의 사리와 가사를 봉안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곳의 신지에는 아홉 마리의 독룡이 살고 있었다. 자장은 이 악룡들을 위해 설법하고 수계하여 그들의 나쁜 마음을 조복시켰는데, 9룡 중 다섯 마리는 오룡동으로, 세 마리는 삼동곡으로 가고 오직 한 마리가 남아 그 절을 호지할 서원을 세우므로 작은 못을 만들어 그 용을 머물게 하였다. 이는 설법을 통해 용의 나쁜 마음을 항복받고 호법룡으로 그 역할을 바뀌게 하는 개과천선의 의미를 짙게 풍기고 있다. 이후부터 우리나라의 사찰창건에는 이러한 유형의 설화가 많이 전해지게 되었다. 즉 악룡이 살고 있는 명당을 찾은 고승이 설법을 통하여 용을 감화시킨 뒤 그 자리에 사찰을 짓고, 그 용은 사찰을 지키는 호법신으로 변화한다는 내용이다. 또한 신라 화엄종의 초조 의상대사는 당나라 유학길에서 그를 사모하는 여인 선묘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의상의 인격과 도심에 감복되어 세세생생 의상이 불도를 성취할 때까지 학업에 필요한 물자를 대겠다는 대원을 세웠다. 그 뒤 의상이 선묘를 만나지 못한 채 귀국의 뱃길에 오르게 되자, 뒤늦게 선창가로 뛰어나간 선묘는 멀리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며 서원하였다. “원컨대 이 몸이 대룡으로 되어서 저 배를 무사히 갈 수 있게 하고 스님의 홍법을 도우리라.” 선묘는 곧바로 바다로 뛰어들었다. 용이 된 선묘는 의상의 뱃길을 편안하게 인도하였고 신라에 돌아온 의상을 도우며 호법룡의 역할을 하였다. 특히 의상이 부적사를 창건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의상은 당시 도적의 무리가 들끓던 태백산에 화엄의 중심사찰을 만들려 하였으나 도적들의 방해가 끊이지 않았다. 이에 호법룡이 된 선묘가 스스로 부석이 되어, 공중에 뜬 큰 바위로 도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여 그들을 물리치고 사찰을 창건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찰명을 ‘부석사’라 하였으며, 지금도 부석사에서는 석룡의 모습으로 사찰을 수호하고 있는 선묘호법룡을 만날 수 있다.
이처럼 신라의 호법룡사상은 자장과 의상에 의해 널리 제창되어, 불국정토를 이상향으로 한 신라인들에게 더욱 깊은 불심과 통일에 대한 신념을 불어 넣었다. 마침내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은, 항상 왜구를 염려하여 사후에는 용으로 화하여 왜침을 막으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죽자 유언에 따라 신문왕은 문무왕의 유해를 다비하여 그 유골을 동해 가운데의 큰 바위에 수장하였다. 현재 경주 동쪽 감포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이 바로 그 곳이다. 그 뒤 과연 문무왕은 용이 되어 나타났으며 이듬해(682년)에 신문왕은 대왕암이 바라보이는 기슭에 감은사를 세우고 금당 섬돌 아래에다 동해 쪽으로 구멍을 뚫어 용으로 화현한 대왕이 들어와 쉴 수 있도록 하였다. 그 해 5월 초하루, 동해에 작은 산이 하나 솟아났는데, 그 산 위에는 낮에는 둘로 되었다가 밤이면 하나로 되는 대나무가 나 있었다. 신문왕이 그 산으로 들어가니 한 용이 나타나 “이 대나무를 피리로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할 것입니다. 문무왕께서 대룡이 되시고 김유신이 천신이 되어 이들 2성이 마음을 모아 호국의 큰 보물을 내리도록 하였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에 왕이 돌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었는데,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에는 맑아져서 국태민안을 이룰 수 있었다. 이처럼 만 가지 파도를 잠재워 평온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 하였다. 이처럼 문무왕이 보여준 호국정신, 죽어서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대원을 이룩한 호국사상은, 문무왕에 대한 흠모와 함께 이후 역대왕에게 동해호국룡 신앙으로 계승되었다. 효성왕과 선덕왕도 그 유명에 따라 동해에 유골이 수장되었으며, 혜공왕과 경문왕은 감은사로 행행하여 멀리 바다를 망견하기도 하였다.
한편, 원성왕 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원성왕 11년(795년)에 당나라 사신이 머물다 간 일이 있는데, 그 다음날 두 여인이 내정에 나타나 왕께 아뢰기를 “저희들은 동해룡과 천지룡의 처이온데, 당나라 사신이 데리고 온 하서국인 두 사람이 저희들 두 부룡과 분황사 우물의 용 등 세용을 주술로써 작은 고기로 만들어 통 안에 넣어갔습니다. 저하께서는 호국룡인 저희 남편들을 가져가지 못하게 하옵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많은 사신이 뒤를 쫓아 그들을 만난 뒤 하서인에게 “너희들이 왜 우리나라의 세 용을 잡아가지고 가느냐?”하고 호통을 쳐서 고기를 돌려받아 모두 제 자리에 넣어주니 다시 용으로 화현하였다고 한다. 이 외에도 수십 가지의 용과 관련된 불교설화가 「삼국유사」를 중심으로 한 여러 문헌에서 전해지고 있다. 이들 설화는 단순한 설화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사상과 정신적인 내면세계가 깊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진흥왕 때부터 보이기 시작한 호법호국의 용은, 통일신라 말에 이르기까지 신라의 불교와 국운의 성쇠에 ㄸ라 그 양상과 성격이 변화되고 있다. 즉 진흥왕 때의 황룡은 황룡사 창건의 동기를 제공하였을 뿐 별다른 특색이 없었음에 반하여, 선덕왕 때 자장에 의하여 인식된 용은 호법룡으로서의 적극적인 모습을 새롭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호법룡이 지키는 황룡사에 9층탑을 세워서 삼국을 통일하고 왜적의 침해를 막도록 하였으니, 호법룡에서 한걸은 더 나아간 호국룡으로서의 매우 적극적인 사상성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따로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해룡이 용궁에 비장된 「금강삼매경」의 산경을 신라에 주어 대안대사로 하여금 순서를 맞추게 하고 원효대사로 하여금 소를 지어 강설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전한다. 이 때의 용신은 신라의 불교와 국가를 수호하는 용으로서의 역할은 물론 적극적인 홍법활동까지도 보여주고 있다. 의상에게 여의주를 바친 동해룡, 그의 불사를 도운 선묘룡에게서도 적극적인 활동성을 볼 수 있으며 문무왕의 대원으로 화현한 동해호국룡, 명랑을 용국으로 초청하여 설법을 듣고 황금을 시주한 서해룡 등은 모두 활기찬 호법과 호국의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원성왕 때의 세 호국룡은 한낱 외국인의 주술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잡혀가는 허약하고 무능한 존재로 나타나 있다. 또한 진성왕때의 거타지 이야기에 나오는 서해룡은 사미로 변한 여우의 주술에 맥을 못추는 비참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고 보양을 따라왔던 용자 이목도 주벌을 피하여 법사의 의자 밑에 숨었다고 한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불교가 크게 흥하고 국운이 창성하였던 진흥왕 이후로부터 통일을 완성한 경덕왕대에 이르기까지는 한결같이 활기차고 적극적이던 호법호국룡이, 불교가 침체되고 국정이 혼란해지기 시작한 원성왕 때부터는 무력하고 허약한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그 시대의 정신력과 국력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실로 신라인들은 불국정토의 이상 아래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워오면서 독특한 호법호국룡 사상을 이룩하였다. 숭불호국의 용들이 동해와 서해에서 그리고 사찰과 연못 등에서 신통한 능력과 위엄으로 신라의 불법을 수호하고 국가를 지켰다는 점에서 신라의 불교 국가적 위치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이러한 용들은 불법을 숭상하는 국토가 아니면 머물지도 않을 것이며 불법이 없는 세간에는 출현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라에 있어서의 호법호국룡은 숭불호국의 신라 불교정신이 낳은 필연적인 소산이며 불국정토의 가장 믿음직한 수호자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