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의 성과 권력 - 권택영
제3부 에로스의 저항
3. 혼성서술 속의 타자
토니 모리슨과 J.M. 꾸찌에 소설 속의 타자 분석
어떤 식으로 써야 독자를 움직이고 감동을 주어 자신의 뜻을 심을 것인가. 미학이란 이런 개인의 소망에서 출발한다. 그러면서도 예술은 창조자의 유한한 생명을 넘어 시간을 거슬러 살아남아야 하기에 될수록 많은 사람을 움직여야 한다. 그는 한 시대의 요구가 무엇이고 그것을 넘어서 인간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고려해야 한다. 보편적 인간의 요구와 한 시대의 특정한 요구, 그리고 그런 것에 걸맞는 개인의 독창적인 방식, 이런 것들 사이에서 늘 헤매고 고뇌하는 게 예술가가 아닐까. 소설가도 마찬가지다. 시대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통찰하여 기존의 정설을 의심하고, 그것에 도전하는 새로움을 주장이 아닌 느낌으로 표현한다. 미학은 느끼게 만드는 것. 그래서 소설은 감동 속에 한 시대의 사상을 담은 서술전략 혹은 기법으로 시대의 압도적인 문화양식과 함께 변모한다. 19세기 실증주의 시대에는 사실주의 양식이, 20세기 전반부 모던시대에는 모더니즘 예술이, 그리고 20세기 후반부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포스트모던 양식이 존재한다. 소설은 늘 인간과 세상에 관한 이야기이면서도 시대의 문제점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도전에 의해 새로운 옷을 입고 나타난다. 실증주의 시대의 옷은 어떤 색깔과 무늬였던가. 저자가 자신의 서술에 의심을 품지 않고 세상과 인간을 그릴 수 있던 시대의 옷은 실물에 알맞게 지어져서 이질감을 느낄 수 없는 옷이다. 저자는 신처럼 인물들의 마음속을 들락거리고 세상에 대해서도 요약을 서슴지 않는다. 시작과 중간과 절정과 해결이 산뜻하게 내려진다. 많은 인물들을 원근감 있게 배치한다. 주인공은 선악의 갈등을 표출하는 입체적 인물(round character)로 전면에 확대시키고 주변인물은 선악의 단편만을 표출하는 평면적 인물(flat character)로 멀리 배치한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추정해내던 시대에는 소설가가 객관 현실(혹은 실재)을 그릴 수 있다 는 믿음이 있었다.
산업혁명은 물자의 혜택을 귀족이 아닌 평민들도 고루 누리게 하자는 선의에서 이루어지지만 봉건시대 농경사회가 지닌 인간과 사회의 유기적 끈을 파괴시키는 어둠도 낳는다. 민주화와 함께 산업사회는 가치의 기준이 절대자로부터 개인에게로 옮아가야 했고 이런 과도기에 사람들은 심한 소외를 겪는다. 절대기준에 대한 회의. 더 이상 그것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서 그것이 있는 것처럼 믿을 때 나타나는 폭력과 괴리. 19세기말부터 시작된 사상과 예술의 특징은 단 하나의 재현에 대한 의심이었다. 신이 사라진 시대의 예술은 소설에서 저자의 위치가 감소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제 그는 인물을 위에서 조정하는 게 아니라 인물의 뒤로 사라진다. 인물들이 전면에 나서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내적 독백이 저자의 서술을 억누른다. 한 사건을 어떻게 인물마다 달리 보는가 그러므로 여러 인물들의 투명한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 단면을 합성하여 둥글게 만드는 것은 독자가 할 일이다. 흩어진 독백과 서술 속에서 이야기의 시작과 중간과 끝을 찾아내는 것도 그의 몫이다. 그러나 뜻은 좋았으나 그것도 언제까지나 권력을 누릴 수는 없었다. 내적독백과 흩어진 서술은 난해하여 깊은 맛을 음미할 수 있는 고급 독자에게만 호소력을 갖게 되었다. 소설은 역시 읽는 재미와 감동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저자가 사라졌다지만 인물들을 앞세워서 여전히 뒤에서 그의 음성을 보편음성으로 만든다. 이제 더 이상 숨지 말고 당당히 앞에 나와 자신의 음성으로 현실을 그려보라. 그 현실은 어떤 것인가. 현실이 유동적이고 단 하나의 기준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사회에서 개인의 음성이 신의 음성이 되는 것을 피하려고 모더니즘은 우주의 질서, 신화, 보편가치를 내세웠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그것은 절대논리가 되어 중심으로 고착된다. 중심, 기준, 절대논리가 허위임을 드러내고 지금껏 중심에 의해 밀려났던 주변, 즉 타자를 복원시키자. 포스트모더니즘은 단 하나의 재현이 중심주의의 허구임을 보여주는 예술양식이다. 객관재현이 숨긴 타자를 어떻게 드러내는가. 인물의 내적 독백에서 다시 저자의 서술로 되돌아간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전보다 더 강력한 서술로 돌아가면서 지극히 역설적으로 그것이 현실(혹은 실재)을 객관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개인음성임을 암시한다. 자신의 욕망과 입장에서 나온 자의적인 서술이라는 것이다. 이런 역설이 '혼성서술'을 낳는다. 삼인칭 전지적 서술이 되돌아와서 이번에는 인물마다 각각의 입장에 서 서술을 한다. 그런데 그 저자는 옛날과 같은 신이 아니고 한낱 서술자로서 자신의 얘기를 하고 있다. 삼인칭 객관서술과 일인칭 제한서술이 한곳에 있다. 예전의 어떤 시대에도 그리 흔치 않던 삼인칭과 일인칭의 혼합양식이 포스트모던시대에 압도적으로 출현한다. 그리고 최근의 탈식민주의 작품에서 이 혼성서술은 좀 더 확장된다. 중심에 의해 억압되어온 타자를 복원시키는 이 시대 혼성서술을 살펴보자.
이 글은 혼성서술 속의 타자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탈식민주의에서 혼성서술은 각기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탈식민주의 소설인 토니 모리슨의 '가장 푸른 눈'과 J.M.꾸찌에의 '마이클 K의 삶과 시대'를 통해, 타자를 복원시키는 방식은 쓰는 이의 입장에 따라 어떻게 다른가, 삼인칭과 일인칭의 혼합양상을 살핀다. 모리슨은 미국의 흑인 여성이고 꾸찌에는 남아프리카의 백인 남성작가이다. 전자는 주변인이고 후자는 중심인이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데리다의 타자, 라캉의 타자, 그리고 포스트모던 소설과 탈식민주와 소설의 타자를 살펴보면 한 시대의사상과 예술의 양식이 같은 이념에 뿌리 내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1. 포스트모던 소설 속의 타자
죽은 형의 전기를 쓰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을 담은 소설 나보코프의 '세바스찬 나잇의 참인생'은 실제 삶(real life)을 아무리 정확히 추적해도 그것이 허구(fiction)가 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무덤 속의 인물에서 한 번, 주변의 친구들에서 다시 한 번, 각기 자신의 입장에서 굴절된 정보를 주고 그것은 다시 기록자에 의해 굴절된다. 적어도 세 번의 굴절이다. 그래서 죽은 세바스찬의 삶은 그의 자료를 수집하는 동생의 것이고, 그것은 또 누군가 그들이 모르는 제삼자, 즉 작가 자신의 것일는지도 모른다. 탐정소설 식으로 엮어진 이 소설에서 나보코프는 참모습이란 세 번 굴절되어 아무리 객관적 사실의 기록도 쓰는 이의 얘기가 되고 만다는 암시를 한다. 나는 세바스찬이다. 아니, 세바스찬이 나다. 아니 아마도 우리 둘은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다른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다. 소설은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서술자의 얘기일 뿐이다. 나보코프의 '롤리타'에서는 어린 연인을 추적하는 예술가 험볼트의 고뇌가 그려진다. 그는 어린시절을 잊지 못하는 망명작가이고 실체를 파악하지 못해 사실주의를 쓸 수 없는 작가 자신이다. 한편의 장시와 그보다 훨씬 더 긴 비평으로 엮어진 '창백한 불꽃'에서도 객관적인 해석이 얼마나비평가의 주관에 의해 굴절되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그 비평문 속에는 누군가 제삼자의 망명이 암시된다. 글의 객관성을 가로막는 제삼자와 색깔, 그 타자는 누구인가, 나보코프 자신이다. 나보코프의 작품에서 타자는 글 속에 묻혀 암시되는 제삼자로 나타난다. 참인생을 추적하는 전기, 연인의 참모습을 잡으려는 사랑 이야기, 그리고 과학적 분석인 비평 속에서 그런 글들의 순수성을 무너뜨리는 제3의 음성이 있다. 저자가 쓴 글을 곁눈질해보는 또 하나의 응시가 있고 시선과 응시의 교차에 의해 참모습은 슬그머니 무너진다. 삼인칭 서술은 바라보는 나요, 이 객관성을 의심하는 타자는 보여지는 나다. 나보코프의 글에서 일인칭은 글의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은밀히 묻혀서 삼인칭 서술을 무너뜨린다. 지금까지 쓴 이야기는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내 얘기라고. 존 파울스의 '프랑스 중위의 여자'에서 타자는 이보다 조금 더 불거져 나온다. 영국 빅토리아시대의 남녀 이야기와 그 시대상이 삼인칭전지시점으로 서술되다가 갑자기 제 13장에서 작가자신이 튀어 나온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이야기는 모두가 상상에 불과하다. 내가 창조한 인물은 내 마음 속에서만 존재할 뿐 결코 그 밖에서 존재한 적이 없다. 누보로망 시대의 작가가 어떻게 신처럼 쓰겠는가. '찰스는 변장한 나 자신' 일지도 모르고 나는 수필이거나 '시대를 바꾼 자서전'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보로망 시대에 살고 있는 내가 어떻게 빅토리아 시대 이야기를 그릴 수 있는가. 결국 주인공 찰스는 나의 분신이고 이 소설은 위장된 나의 자서전이다. 이 소설에는 간간이 일인칭이 튀어나오고 뒷부분에 가서는 작가 자신이 위장된 모습으로 찰스와 대면하는 장면도 나오지만 서술은 그런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관성 있게 삼인칭 전지서술이다. 그러나 전통적 인 서술과 다른 점은 그보다 훨씬 더 '전지한' 척하는 것이다. 서술자가 인물들 편에 서서 그들의 속마음과 상황을 설명하는 입장서술인데 전통 서술에서 볼 수 있는 극화된 장면은 아주 드물다. 강력한 전지적 서술이지만 결국은 나의 서술일 뿐이니 역설의 폭과 전복의 힘이 그만큼 커진다. 슬며시 몇 가닥 끼어든 일인칭이 압도적인 삼인칭 전지시점을 뒤엎는 효과랄까. 소설은 객관사실을 반영하지만 그것은 작가의 주관과 욕망 에 걸러진 세계일 뿐이라는 암시다. 빅토리아시대 봉건귀족과 신흥자본 계급의 대립, 마지막 봉건지주의 후예인 찰스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뒤집어놓는 프랑스 중위의 여자, 당대의 위선과 계급의 문제가 남녀의 사랑 이야기 속에 묻혀 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작가가 살고 있는 오늘날의 이야기로 유추된다. 나보코프의 위장과 존 파울스의 위장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다. 전자의 경우에는 작가자신 혹은 일인칭이 서술의 표면 위로 튀어 오르지 않고 내용 속에 녹아 있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에는 서술의 표면 위로 간간이 솟구친다. 그러나 종잡을 수 없이 변모하는 연인을 작가가 추구하는 리얼리티로 보는 면에서 '롤리타'와 '프랑스 중위의 여자'가 닮았다. 또 위장한 작가가 인물과 나란히 앉아 문제를 상의하는 '세바스찬 나잇의 참인생'의 열차 속의 장면은 '프랑스 중위의 여자'에서 작가가 인물을 제대로 조종하지 못하고 아니 오히려 인물에 의해 끌려다니는 기법들을 연상시킨다. 소설의 결말을 몇 개로 열어놓아 독자가 선택하게 한 파울스는 저자, 인물, 독자를 동등한 수준으로 놓는다. 셋 모두가 참여해서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는 것이다. 파울스가 나보코프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드러나게 실험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실험이 배태되어 성숙되려면 그만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보코프가 50년대였다면 파울스가 60년대였고 훗날 쿤데라는 80년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역시 흡사한 혼성서술을 사용한다. 의사 토마스는 많은 여성과의 성관계를 통해 우주의 미세한 차이를 느껴보려는 욕망을 갖고 있다. 그에게 생은 그렇게 가벼웠다. 그러던 어느 날 테레사가 나타난다. 그녀는 토마스에게 정절을 요구하고 그가 욕망을 단념하지 못하자 질투 때문에 그를 떠난다. 공산군이 들어 온 땅으로 되돌아오는 토마스에게 테레사는 더 이상 가벼움이 아니었다. 우연히 쓴 글이 문제가 되어 궁지에 몰린 토마스는 유리창 닦이로 전락하지만 테레사와의 사랑은 단념하지 못한다. 이와 대조되는 사비나와 프란츠. 끝없이 배반하는 사비나에 비해 프란츠는 단 하나의 대상에 집착한다. 그러나 먼 훗날 사비나는 토마스의 사랑과 죽음 앞에서 깃털처럼 가벼웠던 자신의 삶을 공허하게 되돌아본다. 언어와 이념의 허구성 사랑과 질투, 의도와 결과의 빗나감, 인간 욕망의 허상을 그린 쿤데라의 소설은 얼핏보면 수필을 연상시킬 정도로 설명이 강하다. 삼인칭 전지작가가네 인물의 입장에서 서술을 하는 가운데 꼭 한군데에서 일인칭 작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토마스를 바라보며 작가는 자신의 소설에 등장하는 네 인물들은 각기 자신의 네 가지 다른 측면이라고 말한다.
흔히 서술의 파편화로 정의하는 포스트모던 서술은 시간적 흐름을 따라가는 일목요연한 서술양식의 와해일 뿐 아니라 시점의 와해이기도 하다. 신처럼 전지적이면서 동시에 이 전지성을 뒤엎은 자의식적 시선이 통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선과 응시의 교차라고 할까. 타자의 응시라고 할까. 얼핏 내비치는 타자의 응시는 자신만만한 주체의 순수시선을 뒤엎고 얼룩덜룩하게 만든다. 그것은 순수현실의 객관적 반영이 아니라 작가의 자의성에 의해 물들여진 혼성이다.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가 교차되듯 객관적 시선과 주관적 응시가 교차된다. 소설에 관한 소설, 혹은 자기반성적 소설에서 타자는 재현의 독재를 무너뜨리는 이물질이다. 순수이성 혹은 절대주체를 무너뜨리는 라캉의 타자처럼 삼인칭 전지시점에 끼어든 일인칭은 순수재현을 전복하는 우수리다.
2. 전복에서 대조로: 탈식민주의 서사
대략 70년대부터 쓰여진 탈식민주의 소설들은 혼성이라는 데서는 자의식적 서사와 공통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소설들이 재현의 순수성을 의심하고 전복하는 응시로서 타자를 은밀히 숨긴다면 탈식민주의 소설은 타자를 서술의 한 부분으로써 당당히 드러낸다. 모리슨의 '가장 푸른 눈'과 꾸찌에의 '마이클 K의 삶과 시대'에서 타자는 어떤 모습을 취하는지 보자. 두 작품이 모두 삼인칭과 일인칭을 섞어 쓴 혼성서술이면서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흥미롭다. 성과 인종과 문화적인 우월의 차이를 의심하고 그것을 동등한 차이로 바꾸는 탈식민주의는 차이를 지우고 동질화시키려는 제국주의에서 차이를 인정하고 공존하려는 다문화적 입장을 취한다. 순수이성, 절대이성을 주장했던 식민주의는 왜 실패했는가. 엄연히 존재하는 주체 속의 이물질, 순수한 재현속에 끼어든 응시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자를 지우고 동질화시키려는 제국의 나르시스적 시선 속에는 소유라는 응시가 숨어 있었고 스스로의 타자성을 지우는 척하던 식민지인의 시선 속에도 응시가 숨어 있었다. 식민지 논리는 주체 속의 타자, 아담의 뼈를 인정치 않은 데서 나온 빗나간 꿈이다. 70년대와 80년대의 소설가로서 모리슨과 꾸찌에는 이런 식민주의가 낳은 파국을 자신들의 입장에서 소설 속에 담는다. 미국의 흑인이요 여성인 모리슨과 흑백 인종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 지식인 꾸찌에는 서로 입장이 다르다. 전자는 그 사회의 타자요. 후자는 지배계급이다. 이들이 보여주는 혼성서술 속의 타자는 어떻게 다를까.
토니 모리슨의 '가장 푸른 눈'
백인의 문화 속에 사는 흑인은 백색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인다. 아니 그것이 추종해야 되는 절대가치라고 믿는다. 어릴 적부터 크리스마스면 부모는 여자아이에게 인형을 선물했다.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인형이다. 늘 보는 낯익은 광고에는 셜리 템플의 웃는 모습이 찍혀 있다. 그녀는 사랑받는 아이의 기준으로 아이들에게 새겨진다. 깨끗하고 아름답게 단장된 집, 정갈하게 정리된 집안, 절제된 매너 이런 백인의 관습과 문화는 그 사회의 미의 기준이 되어 자신의 정체성에 상관없이 그 기준을 따르려 한다.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 다른 기준, 다른 가치를 깨끗이 지우고 동질화시킬 수 있는가.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백인 중심 사회에서 흑인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모리슨의 가장 푸른 눈'은 한 사회가 가치의 기준을 다양하게 두지 않고 단 하나의 백인 문화에 둘 때 일어나는 비극을 그린다. 타자를 인정치 않는 백색 중심주의가 부르는 불행을 여러 측면에서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은 우선 쓰인 방식이 독특하다. 맨 앞 서문에는 교과서에 나오는 낯익은 문구를 인용하고 그것과 같은 내용을 다른 방식으로 두번 인용한다. 표준 맞춤법에 알맞게 띄어 쓴 깨끗한 인용과 달리 불여 쓴 두 개의 다른 인용문은 가치의 기준이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소설은 가을, 겨울, 봄, 여름이라는 네 장으로 나뉜다. 각 장은 일인칭으로 시작하여 십대의 소녀 클라우디아가 화자이다. 그녀는 친구 피콜라와 이웃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 클라우디아의 서술이 짧게 끝난 후 삼인칭 전지서술이 시작된다. 그녀의 부모와 이웃의 과거와 현재가 소개되면서 각각의 파편적인 서술들은 소설의 정점을 향해 모아진다. 조각들이 모여 이불 한 채를 꾸미듯이 '나'의 서술과 삼인칭 서술들이 이어진다. 일인칭 서술은 소녀의 시점으로 쓰이기에 제한적이고 순진하다. 삼인칭서술은 전지적으로 피콜라를 둘러 싼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를 비추어 아버지에게 강간당하고 죽은 아이를 낳는 피콜라의 비극의 원인을 설명한다. 일관성 있는 플롯이 아니라 파편화된 서술들이 조각조각 이어져서 플롯이 생겨난다. 한집이 있고 그 집을 둘러싼 이웃들이 있다. 그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그리고 그 이웃 속에는 그 집을 지켜보는 또 다른 집, 클라우디아의 집이 있다. '가을'에서는 피콜라의 아버지가 집에 불을 지른 사건, 그 애의 첫 월경이 클라우디아의 시점으로 그려진다. 셜리 템플이 그려진 잔으로 많은 양의 우유를 마셔버린 피콜라에게서 독자는 푸른 눈을 갈망하는 그 애의 미래를 보게 된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독자는 피콜라의 가정과 다른 클라우디아의 가정을 보게 된다 어머니는 야단도 치고 소리를 지르지만 아이들의 감기를 보살피고 피콜라를 따뜻이 도와준다. 특히 피콜라의 첫월경과 사랑 받아야 아기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은 사랑을 갈구하지만 찾지 못한 그 애가 푸른 눈을 갖는 환상으로 미쳐버리는 결말을 연상시킨다. 삼인칭 전지저술에서는 피콜라의 가정이 소개된다. 아버지 촐리와 어머니 폴린은 증오에 가득 차 싸우고 그럴 때마다 어린 딸은 눈을 가리고 자신이 그 집에서 사라져 버리기를 기도한다. 그 애는 부모, 친구, 어디에서도 사랑을 받지 못하자 이웃 창녀들과 친해지지만 부모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겨울'에서 일인칭 서술은 클라우디아가 겪는 작은 경험과 그 애의 결심에 관한 것이다. 클라우디아의 언니 프리다는 남자애들한테 놀림받는 피콜라를 그 애들과 용감히 싸워 구해낸다. 프리다는 엄마를 닮았다. 부유한 백인 모우린은 피콜라의 아버지를 모욕한다. 피콜라는 굴욕을 참는다. 그러나 '나'는 굴욕을 참지 않는다. 흑인에게 무엇이 부족한가. 우리는 피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허영도 위선도 없이 우리가 가진 것을 사랑한다. 욕망과 질투는 괜찮지만 시샘은 없다. 이 부분은 어린 '나'의 시선을 넘어 작가 자신의 음성이 새어나오는 부분으로 소설의 주제를 형성한다. 자신이 가진 것을 사랑하고 주장하는 것. 무조건 남의 것을 따르지 않는 것. 이 자긍심이 클라우디아 가정의 특징이다. 삼인칭 서술은 그렇지 못한 흑인 상류집안을 보여준다. 제랄딘의 집안은 깨끗하고 잘 정돈되고 예의 바르다. 그들은 백인의 문화를 그대로 흉내내다보니 부부간에도 사랑을 나누기보다 더러움에 더 신경을 쓴다. 그녀는 자신의 공허함을 고양이를 사랑함으로써 메우고 아들 주니어는 사랑을 받지 못하자 피콜라를 괴롭히고 고양이를 죽인다. 기독교를 믿지만 사랑을 모르고 흑인이면서도 더럽고 추한 흑인을 멸시하는 그들은 백인의 삶을 흉내내는 잘못된 삶을 산다. '봄'. 클라우디아의 서술은 두 집안을 대조한다. 헨리가 프리다를 건드리자 그를 당장 내쫓고 아이들을 창녀의 집에 드나들지 못하게 막는 '나'의 엄마와 백인 딸을 위하고 자신의 딸을 천대하는 피콜라의 엄마가 대조적이다. 특히 피콜라는 엄마를 "브리드러브 여사"라고 부르고 백인 주인의 딸은 그녀를 폴리라고 부른다든지 딸이 더럽힌 주인집 마루를 "나의 마루"라고 말하는 폴린에게 '나'는 분노를 느낀다. 삼인칭 서술은 왜 폴린이 그렇게 되었고 그것이 피콜라에게 어떤 환상을 품게 하는지 보여준다. 한 쪽 다리를 약간 저는 폴린은 열등의식 때문에 남들로부터 고립된다. 그러던 어느 날 촐리가 발을 쓰다듬어 주는 데서 사랑이 싹튼다. 그러나 일자리 때문에 북쪽으로 이사가면서 그녀는 백인들 사이에서 적응을 못하고 흑인들조차 고향사람들 같지 않아 외로워진다. 그녀는 외모에 돈을 낭비하고 술에 탐닉하는 남편과 불화를 빚기 시작한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 치장하는 폴리는 영화관에 드나들며 화면 속의 화려한 여 주인공을 흉내내고 그들의 사랑을 현실에 적용하여 불만을 느낀다. 불만은 증오를 낳아 자신의 가정을 증오하게 되고 그녀의 허영은 백인 상류집안의 하녀가 됨으로써 충족된다. 그들의 삶과 집안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고 충실히 돌보는 그녀는 정작 자신의 것을 혐오하여 식구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허영으로 가득 찬 그녀의 텅빈 자아는 피콜라에게 감염되어 갖지 못한 것을 갈망하게 만든다.
촐리는 어떤가. 어릴 적에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고모 손에 자란 그는 고모마저 죽자 기댈 곳이 없게 된다. 어느 날 숲속에서 흑인 소녀와 사랑을 나누던 그는 백인에게 모욕을 당한다. 손전등을 그의 엉덩이에 들이대며 행위를 계속하도록 협박하는 백인 앞에서 그는 자신의 수치와 무력함을 상대방에게 쏟고 그 애를 증오한다. 그가 대적해야 하는 백인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아버지는 게임에 빠져 그를 거부한다. 그는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자유인이 되고 그것은 무엇이든지 느낄 수 있는 위험한 자유였다. 그는 폴리에게 영원히 갇히는 게 싫었고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되는지도 배운 적이 없었다. 그가 외로움 속에서 술에 취해 딸을 범할 때도 가득 차오르는 사랑의 본능을 쏟아부었을 뿐이다. 아무도 그를 규제하거나 윤리를 심어주거나 진정한 사랑을 보여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피클라는 아버지의 아이를 갖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자신이 파란 눈을 가졌다고 믿게 되는가. 삼인칭 서술은 이웃사람 소프헤드 처치에로 옮아간다. 조상에게 백인 귀족의 피가 섞였다는 데서오는 우월감과 유머를 모르는 우울한 성격으로 떠나간 애인에게 집착하는 엘리휴는 병적인 광인이다. 그는 추상적이고 논리적이며 신과도 대결하겠다는 빗나간 우월감으로 애인이 어떻게 감히 지신을 버릴 수 있나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들에게 꿈을 분석해주고 상담자 노릇을 하던 중 피콜라가 푸른 눈을 갖게 해달라고 하자 그렇게 믿게 만든다. 남을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자 악마가 되어 자신이 미친 것처럼 피콜라도 미치게 만든 것이다. '여름'. 클라우디아는 세상이 무너져도 강하고 느긋하게 미소를 짓는 어머니가 자랑스럽다. 또 피콜라의 아이를 위해 가진 것을 희생시키는 언니를 따른다. 그리고 아버지의 아이를 낳게 될 피콜라의 불행보다 그 아이를 미워하게 될 이웃들이 더 가슴 아프다. 삼인칭 서술은 이제 피콜 라의 분열증과 사람들로부터의 고립을 상징하듯 자문자답의 대화형식을 취한다. 가장 푸른 눈을 가진 나는 가장 아름답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피한다. 질투하기 때문에, 아무 곳에서도 사랑받지 못하던 흑인 아이는 유일하게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으나 그것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모리슨은 흑인 스스로가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백인 문화를 모방하려고 할 때 일어나는 비극을 그린다. 피콜라의 비극은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 모두가 자신이 가진 것을 발견하거나 사랑하지 못하고 갖지 않은 것을 소망한 데서 일어난다. 타자를 인정치 않고 백인 문화를 기준으로 삼아 동질화를 꾀할 때 사회 전체가 허영과 폭력으로 감염된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처럼 타자란 결코 지워질 수 없는 것으로 제국주의적 동질화란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가을에서 시작되어 여름으로 끝나는 이 소설에서 일인칭 제한서술과 삼인칭 전지서술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일인칭 화자인 클라우디아의 가족은 삼인칭 전지시점으로 서술되는 인물들과 대조된다. 그들은 가치의 기준을 자아에 두지 않고 백인의 삶에 두기에 허영과 자학으로 누구도 제대로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제랄딘 가족, 피콜라 가족, 소프헤드. 그 가운데서도 물론 피콜라 가족이 서술의 핵이다. 이에 비하여 클라우디아 가족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자아를 사랑하기에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피콜라 가족의 파멸에 대한 대안으로 모리슨은 클라우디아 가정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일인칭은 삼인칭과 대조의 관계이며 대안이다. 그것은 타자의 음성으로 파멸하지 않는 길이요, 작가 자신의 음성이다. 모리슨은 흑인 여성으로 타자이기 때문이다.
J.M. 꾸찌에의 '마이클 K의 삶과 시대'
흑백인종간의 싸움이 끊임없던 시기에 쓰인 이 소설은 전선이나 결투장면이 조금도 나오지 않는 전쟁소설이다. 한 주변인의 경험을 통해 전쟁이 개인의 삶에 미치는 측면만을 끈질기게 추적하기에 언뜻 읽으면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한 사회에서 밀려난 주변인이 관료주의적 제약에 의해 끊임없이 거부당하다 인간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가는 과정이랄까. 마치 카프카의 '성'의 주인공처럼 K는 보이지 않는 힘,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감시당하고 밀려나고 자신의 삶을 좌우하는 정보로부터 소외된다. 아니 그는 오히려 자신을 거부하는 인간과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자연 속의 일부로 살아가려고 한다. 꾸찌에의 소설이 늘 그렇듯이 여기서도 작가는 사건의 앞뒤를 친절히 설명하지 않는다. 무뚝뚝하고 무감동한 필치로 작가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이 설명보다 일어나는 상황에 초점을 맞춘다. 더구나 시점이 K에게 맞추어져 있어 삼인칭 객관서술이지만 모리슨과 달리 전지적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가끔씩 튀어나오는 질문들. 언제 허가증이 나오는가. 집주인은 어디로 끌려갔을까. 저 군용차량은 어디로 가는가.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 전선은 어디에 있는가. 어머니의 고향은 이곳이 맞는가. 나는 지금 어디로 끌려가는가. 이 수용소의 목적은 무엇인가 등에 관한 해답은 주어지지 않는다. 확실한 정보로부터 차단되어 소설 전체에는 질문과 끝없는 기다림만이 있다. K는 소외되기도 하고 스스로를 고집스럽게 소외시키도 한다. 마치 멜빌의 '바틀비'(Bartleby)를 연상시킬 정도로 그의 거부는 집요하다. 그리고 '바틀비'의 화자를 연상시키는 군의관이 등장한다. 군의관이 화자가 되어 K를 설득하는 2부는 일인칭 서술이다. 그러나 소설의 형식, 결말, 주제는 '바틀비'와 다르다. 소설은 3부로 구성된다. 1부는 삼인칭 제한시점으로 K가 보는 것만 서술하여 K가 모르는 것은 독자도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정보를 차단시키는 기법이다. 2부는 군의관의 시점으로 일인칭 서술이다. 그리고 이 부분이 소설 속의 타자가 된다. 군의관은 물론 순진한 주변인 K보다 전쟁에 관해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작가는 이 부분에서도 정확한 설명을 하지 않고 독자를 정보로부터 차단하기 위해 일인칭 시점을 사용한다. 3부는 다시 삼인칭 제한서술로 K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소설의 중간 부분인 일인칭 서술을 타자로 보는 것은 전체의 압도적 분량이 삼인칭 서술이고 소설은 제목에 암시된 것처럼 K의 삶과 시대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K는 언청이로 태어난다. 그는 머리가 둔하여 늘 남에게 뒤떨어진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의 손에 길러지다가 지진아들이 다니는 기관에 넘겨져 읽기, 쓰기, 셈하기, 청소, 일 등을 배운 그는 열다섯 살에 그곳을 나와 케이프 타운시의 청소부가 된다. 외모 때문에 여자친구도 없고 늘 혼자 있는 게 좋다. 그가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집단이나 기관에 갇히는 것이다. 서른한 살이 되던 어느 날 병든 어머니가 고향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하여 함께 가려 하지만 당국은 여행허가증을 내주지 않는다. 그는 원인 모르게 난장판이 된 주인집에서 춥고 비오는 몇 밤을 지내다 드디어 짐수레에 어머니를 싣고 길을 떠난다. 그러나 허가증 없이는 중심도로로 갈 수가 없다. 군대는 어디론가 이동했고 검문은 수시로 있었다. 어머니는 영양실조로 힘든 여정을 견디지 못해 죽고 K는 화장한 유해상자를 가슴에 안고 간다. 그는 이제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고 어떤 것에도 저항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가슴에 있고 그녀의 코트는 그를 감싸주기에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꿈꾸지 않는다. 경찰과 군대의 눈을 피해 덤불 숲에서 먹고 하수구에서 자던 K는 붙잡혀 집단 노동 수용소로 보내지지만 탈출하여 다시 들판으로 나온다. 골분, 옥수수 속대를 먹으며 고향을 향해 가는 그는 땅에 붙어 사는 게 좋다. 그에게 식사 한 끼와 잠자리를 베풀던 어느 가정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잔인하고 야박했다. 그는 고향 마을에 도착하여 막연히 그 농가를 찾는데 그 집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는 어머니의 유골을 묻고 폐허 속에서 씨를 뿌린다. 그가 도시와 전쟁을 잊어가려는 때 농가의 손주가 탈영병이 되어 나타난다. K는 그의 하인이 될 것을 거절하여 그곳을 떠나 댐가에 굴을 판다. 자유로워지기 위해 곤충, 벌레, 도마뱀을 먹고 사는 그는 작고 여위고 메말라간다. 아무것도 바라지도 기대하지도 않는 그는 붙잡혀 다시 집단수용소에 갇힌다. 먹을 것과 잠잘 곳이 있었지만 그는 인간 속에 갇힌 삶을 혐오한다. 다시 수용소를 탈출한 그는 옛날의 농가 근처 댐가에 굴을 파고 산다. 어머니의 유골이 묻힌 곳이다. 그리고 이런 시대에 사는 방식은 숨어 동물처럼 사는 것이었다. 벌레처럼 살아도 전쟁은 싫고 군인은 싫다. 어느 날 그곳에 산사람들이 나타난다. 철도를 폭파하고 도둑질, 약탈, 방화하는 그들 반란군에게 K는 남몰래 동정을 느낀다. 그들이 떠난 며칠 뒤 군대가 나타나 K의 토굴과 쌓아놓은 호박을 보고 그곳을 반란군의 전초기지로 오해하고 K를 체포한다.
언청이요 두뇌가 좀 느린 것 때문에 K는 사랑 대신 이상한 눈총 속에 살았다. 그는 스스로 고집해서만 자유를 맛본다. 그러나 그 자유는 잇몸에서 피가 나고 정상적인 음식을 먹지 못하는 동물의 삶을 요구한다. 전쟁은 호박조차 마음놓고 기를 수 없게 그를 통제한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거부당하고 스스로 아버지의 법을 거부한다. 상징계는 그를 소외시키고 구속하고 그리고 이제 다시 그를 감금하여 자백을 강요한다. 그는 어머니의 세계, 흙과 자연의 세계 속으로 되돌아가기를 원한다. 어머니는 유일한 안식처요, 땅은 그에게 자유를 준다. 그에게 상상계는 잇몸의 피를 홀리게 하기에 이상적인 도피처는 아니지만 그래도 잔인한 상징계보다는 낫다. 오직 그곳에서만 평화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2부는 반란군의 끄나풀로 오해받은 K가 극도의 쇠약과 음식물 거부로 병원에 이송되어 군의관의 치료를 받는 데서 시작된다. 일인칭 화자인 군의관은 치료되기를 거부하는 환자 K에게 호기심과 동정심을 느낀다. 그는 다른 군인들보다 K를 더 잘 이해하고 도와주려는 듯 보인다. 어떻게 해서든지 음식을 섭취케 하여 원기를 회복시키려는가 하면 K를 순진한 바보라고 믿어 무죄로 석방시켜줄 것을 탄원한다. 그가 입을 잘 열지 않는 K로부터 얻은 정보는 이렇다. 그는 자기를 버린 어머니를 미워했다. 그리고 흙에 적응하지 못해 일상음식을 거부하는 바보다. 그러니 적당히 조서를 꾸며 내보내자. 그는 K에게 집요하게 모든 것을 털어놓으라고 요구한다.
꾸찌에는 2부에서 일인칭 서술을 통해 독자가 스스로 판단할 해석의 공간을 제공한다. 1부의 객관적 서술을 읽어 K에 대해 알고 있는 독자는 군의관이 어떤 오판을 내리는지 보게 된다. 그는 마이클의 이름조차 제대로 불러주지 못한다(이름 끝에 S자를 붙임).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분인 어머니와 땅을 잘못 해석한다. 그러면서도 그가 K에게 매료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K의 모습에서 자신만을 본다. 전쟁이 잘못된 정보에 의해 끝도 없이 계속되는 것에 진절머리가 난 그는 사회로부터 도피하고픈 욕망을 느낀다. 그러나 그의 야망은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K가 사회와 인간에 대해 어떤 야망도 기대도 없는 것을 보며 그는 매료된다. 자신이 그토록 원하면서도 하지 못하는 것을 K는 실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는 K의 무의지적 저항에 상처받는다. 논리화하고 이론화하며 지적 추구에 사로잡힌 그의 야망에 K는 굴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군대가 강제로 K를 구속하려 한다면 그는 치료를 통해 부드러운 방식으로 그를 조정하고 재편성하여 자신의 목적에 맞게 주조하려 한다. K를 자의적으로 읽어내고 K의 얼굴에서 자신의 욕망만을 보는 그는 또다른 상상계에 빠져 있다. K가 상징계를 거부하고 상상계(어머니, 대지)로 돌아가고픈 것은 주변인으로서 의도적으로 취하는 자유의 선택이다. 그러나 군의관은 지배계급으로 거울 단계에 빠져 있다. 그는 상징계에 있는 줄 알지만 사실은 상상계적 착오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는 대상을 먹이고 보살피는 게 자신의 임무라고 믿으며 전쟁과 역사의 우연성과 관료주의의 허위를 잘 알고 싫어한다. 왜 하필이면 나인가?(Whyme?)라든가, 나는 너를 이해하고 있는가?(Have l understand you?)와 같은 마지막 질문은 지성인으로서 그의 고뇌를 잘 표현한다. 그러면서 그는 대상의 철저한 굴복과 복종을 요구한다(Yield!). 이 제국주의적 응시를 독자가 분별해낼 수 있도록 작가는 혼성서술을 쓰고 있다. 이 소설에서 일인칭으로 쓰인 부분은 삼인칭으로 쓰인 부분에 스스로를 비추어서 왜곡된 면을 드러낸다. 독자는 삼인칭 서술에서 이미 얻은정 보를 가지고 '나'의 서술을 대하기에 두 부분 사이의 틈새를 짚어낼 수 있다. 그리고 군의관이 무의식 중에 저지르는 상상계적 착오를 발견한다. 그릴다면 '나'의 서술은 삼인칭 서술의 타자로서 스스로의 자의적 오류를 드러낸다. '나'는 누구인가 K가 사회의 주변인이라면 '나'는 군인이요 지배계급이다. 삼인칭 시점에 스스로를 비추어 보이는 욕망의 시선, 시선과 응시의 교차이다. '나'는 자신의 상상계적 응시를 상징계적 시선에 비추어 보이는 작가자신은 아닐까. 남아프리카의 백인 지배 계급으로서 꾸찌에가 쓸 수 있는 탈식민지 소설은 스스로의 욕망과 자의성을 비추어 보이는 자기반성적 서술이 될 수밖에 없다.
모리슨의 일인칭 서술이 자신의 긍지를 주장하는 '나'라면 꾸찌에의 일인칭 서술은 자신의 상상계적 착오를 비추어 보여주는 반성적인 '나'이다. 전자는 자신이 속한 사회 속에서 주변인이고 후자는 지배계급이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나타나는 혼성서술은 크게 두 가지 특징을 갖는다. 언어와 소설이 객관실재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어 언어, 이념, 실재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자의적인 서술에서 혼성은 삼인칭 입장서술이 압도적이고 일인칭 화자는 슬며시 끼어들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삼인칭 서술의 객관재현을 뒤엎는 전복적인 타자로서 저자 자신의 응시이다. 순수한 재현처럼 서술한 후 타자, 혹은 에로스가 끼어들어 순수를 전복하는 것이다. 탈식민주의 서술에서 타자는 포스트모던 소설에서처럼 전복적이거나 암시적이거나 아주 조금 끼어들지 않는다. 그것은 이제 본격적으로 삼인칭과 자리를 나누어 갖고 삼인칭 서술과 대조의 관계를 이룬다. 그런데 이때 타자는 작가의 입장에 따라 스스로를 주장하기도 하고 반성하기도 한다. 모리슨처럼 주변인인 경우 일인칭 화자는 자신의 긍지와 정체성을 주장하는 쪽이 되고 꾸찌에처럼 지배계급인 경우 일인칭 화자는 스스로의 욕망과 자의성을 반성하는 쪽이 된다. 모리슨의 타자는 가장 긍정적인 인물이고 꾸찌에의 타자는 가장 부정적인 인물이다. 군의관은 나르시스적 응시로 타자를 본다. 상상계적 착오에 빠진 제국주의적 시선이다. 그 다음으로 부정적인 인물은 모리슨의 삼인칭 서술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제국에서 타자 스스로 타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허영에 빠진 인물들이다. 그 다음이 K이다. 그는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제국에서 상징계를 거부하고 상상계로 귀환하려는 소망을 집요하게 실천한다. 그 다음이 클라우디아 가족이다. 그들은 제국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주장하는 인물이다. '가장 푸른 눈'과 '마이클 K의 삶과 시대'의 혼성서술은 서술형식과 똑같이 타자를 인정하는 주제를 담는다. 그것은 삼인칭을 일인칭과 대조시켜 위와 같은 네 가지 인물형을 창조하고 타자를 인정하지 않을 경우에 일어나는 비극을 보여주어 제국을 반성케 한다.
덧붙이는 글
에로스와 권력
자신이 잠깐 살았던 어린시절의 집을 늘 그리워하여 책상 위에 그 그림을 붙여놓고 바라보다가 남의 나라에서 세상을 떠야 했던 사람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교수가 되지 못했고 자신의 출판물들이 불타는 것을 바라보아야 했고 남의 나라로 망명해야 했던 프로이트의 삶에서 가장 절실한 소망은 무엇이었을까. 늘 편견 속에서 우울했던 그는 타인의 마음의 병을 고치기 위해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그에게 절실한 소망은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어린시절이었다. 어머니의 품에서 자신이 유대인인지, 흑인인지, 여자인지, 가난한지, 노예인지 모르던 한때. 사회와 관습의 차별이 우리 삶을 갈라놓기 이전의 충만하던 때. 어머니의 사랑을 흠뻑 받고 결핍을 모르던 때. 프로이트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타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근원적 소망을 생각해낸 것이다. 어머니의 품안에서 느끼던 아늑한 쾌감과 어린시절 인간의 상처는 이때의 꿈이 억압되지만 늘 되돌아오는 데서 생긴다. 평등과 충만과 결핍을 모르던 아주 짧은 한 때가 누구에게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사였지만 심리를 치료했기에 원래부터 꿈꾸던 철학을 하게 되었으니 어쩌면 그가 교수가 되지 못한 것은 신의 뜻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차라리 그는 시인이었다. 가설과 증명과 논리적인 분석을 했지만 그는 마음 병을 치료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문학을 좋아하고 전공하는 사람이 감히 프로이트에 대한 글을 쓰는 작은 변명을 여기서 찾아보려고 나는 이렇게 긴 서두를 내어놓고 있는가 보다. 한 사람의 사상가가 태어날 때 그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이념에 영향을 받는다. 아니 그 자신이 이념을 구조해 나간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반영이든 구조든 사상과 시대는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역시 그가 태어나서 살았던 시대와 무관할 수 없다. 그는 19세기말에 혁신적인 풍토에서 태어났다. 물론 그 이전에도 마르크스를 비롯하여 여신적 사상은 있었으나 그에게 영향을 미친 세기말의 새로움은 다원의 진화론에서 파생된 자연주의 사상과 에너지 불변의 법칙이었다. 인간은 동물에서 진화되었으므로 동물의 흔적을 지울 수 없다. 그러므로 이성보다 오히려 동물적인 본능이 크게 작용한다. 인간의 심리도 실험실에서 관찰하는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에너지는 이동할지언정 총량에는 변화가 없다 등.
가난과 인종적 차별을 겪으며 세상의 사악함, 인간의 이기심을 느낀 그에게 다윈의 사상은 매혹이었다. 인간이 동물로부터 진화했다는 것은 무지와 지복과 리비도에 완전히 지배받는 어린시절이 있다는 가설과 무엇이 다른가. 다만 동물은 늘 그런 상태에 있고 인간은 지식을 생산해내는 차이다. 그런데 인간이 창조해낸 문명은 과연 뜻대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가. 인간만이 갖게 된 신경증의 비극은 바로 진화의 비극이기도 했다. 낙원에서 아담이 지식의 열매를 먹지 않았더라면 인간은 실낙원에서 살지는 않으리라. 인간의 타락을 아프게 그린 밀턴을 그가 그토록 좋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브를 위해 하나님을 거역한 아담은 어머니를 위해 아버지를 거역하는'꼬마 한스'였다. 성경의 창세기를 밀턴이 반복했다면 프로이트는 또 그것을 다르게 반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과학자이면서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 차별이라는 아픔은 그가 인간의 이성이나 이념 너머에 도사린 맹목성과 이기심을 짚어주고 본능과 사회 혹은 에로스와 문명의 관계를 탐색하게 만들었다. 그는 과학자였기에 인간의 의도와는 다르게 빗나가는 역사와 사회의 병리 현상을 하나의 논리로 일관성 있게 풀어야 했고 그 길이 어린시절, 어머니, 아버지에 대한 질투, 한 마디로 요약하여 '무의식'에 있었다. 인간의 상처는 이 근원적 소망인 어머니, 연인, 그리고 흙과의 별리였고 결핍은 바로 그것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 본능과 현실의 갈등이다.
이런 기초 위에서 세워진 프로이트 이론은 개인과 사회의 신경증을 치료하는 것이었기에 사회가 억압한 인간의 원초적 소망을 탐색하며 동시에 바로 그 사회현상을 잘 설명해야 되는 모순을 품게 된다. 전자는 본능을 파헤치기에 현실 전복적 이요 후자는 현실을 설명하기에 그것을 인정하는 보수적 성향을 띠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하나의 문화에서 또 다른 문화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살았다. 19세기말의 자연주의와 20세기 전반부의 모더니즘이라는 사유체계이다. 그러기에 그의 이론은 두 문화를 구조, 혹은 반영했다. 이론 자체가 모순을 지니고 있었는데 또 그 이론이 다른 사유체계에 속하니 단순할 수가 없고 그래서 많은 오해와 논쟁을 부르게 된다. 그리고 아주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부분이 그의 이론이 위대한 이유가 된다. 일관성과 차이(혹은 발음과 다름)가 함께 있기에 늘 우수리를 남기고 읽는 자의 욕망에 따라, 시대의 요구에 따라 다르게 해석, 재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프로이트가 살았던 전환기, 두 개의 사유체계를 그는 어떻게 일관성을 유지하며 어떻게 다르게 반영 혹은 구조하는가 인간이 본능에 지배받는다는 자연주의 사상에서는 무의식의 전복적인 힘이 더 강조된다. 인간이 본능의 노예로 전락하는 자연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나온 실존주의 혹은 모더니즘은 본질에 대한 포기를 선언하고 그 대신 인간의 실존적인 용기를 강조함으로써 이성과 윤리를 되찾으려 했다. 개인의 음성보다 전통이나 신화 등 보편구조로 귀환했던 모더니즘은 전복적인 실험에서 보수적인 초자아로 돌아선다. 그리고 자아가 현실을 조정하는 대상관계를 중시한다. 프로이트 역시 초기에는 무의식의 전복적인 힘을 강조하지만 후기에는 초자아를 감시기관으로 두고 자아가 어떻게 이드를 조정하는가에 더 관심을 둔다. 물론 이런 변모는 무의식의 발견이라는 일관성을 뒤흔들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끊임없이 의식과 무의식, 쾌감원칙과 현실원칙 사이를 왕래했지만 저울의 추가 시대에 따라 어느 한 쪽으로 더 기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프로이트의 글들은 분야에 따라 구체적으로 어떻게 저울 추가 기울며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특히 이런 배경 때문에 그 분야에서는 훗날 해석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그를 둘러싼 여성이론가들의 논쟁, 그의 이론에 근거한 비평이론의 변모. 그리고 사회, 문화비판의 흐름을 보면 그가 쓴 많은 글들이 광범위하게 적용됨을 알 수 있다. 특히 정신분석의 역사는 성이론의 역사라고까지 하는 무의식과 성이론. 그에 못지않게 중시된 예술작품, 작가, 그리고 문학의 본질을 규명한 예술이론. 그리고 문명의 기원을 밝히는 사회, 문명이론의 세 분야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들은 물론 억압된 것의 귀환이라는 하나의 가설로 엮이면서도 각 분야마다 설득력 있게 전개된다. 프로이트가 세상을 뜬 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그는 2차 대전이 채 끝나기 전에 세상을 떴다. 전쟁이 끝나고 냉전시대를 겪고 산업사회가 변모되면서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시각도 달라진다. 60년대를 전후해서 새롭게 일어난 사상체계는 모더니즘이 중시한 현실원칙 대신 현실개혁을 위해 모더니즘이 억압한 쾌감원칙을 부활시킨다. 소위 포스트모던 시대에 라캉을 비롯한 데리다, 푸코가 어떻게 프로이트를 다시 읽는가. 그리고 여성운동, 흑인운동, 제3세계운동의 이론적 근거인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 이론에서 프로이트는 어떻게 부활하는가. 라캉의 무의식으로 돌아가자는 구호에서 출발해서 이제는 그 무의식 자체가 저항을 한다. 에로스의 저항이라는 정치적 힘이다. 에로스의 저항으로 표현되는 최근 문화의 흐름에서 지배와 피지배의 권력관계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에서 많은 전략을 빌어온다. 피지배인의 나르시시즘적 주체 때문에 주인과 노예라는 헤겔 식의 산뜻한 이분법은 더 이상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60년대 이후의 문화흐름에서 현실개혁을 원하는 인간의 욕망을 위해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저항의 힘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런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프로이트의 수많은 연구 가운데서 그가 어떻게 시대의 이념을 낳거나 반영하고 또 시대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반복되는가.
이 책을 쓰면서 용어를 우리말로 바꿀 때 경우에 따라서 의역한 부분을 밝히고 싶다. "Compulsion to repeat"는 물론 강박적인 반복충동을 뜻한다. 그러나 문맥에 따라 자연스러움과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냥 반복충동'이라고 더 많이 썼다. "Infantile Sexuality"는 그냥 '유아기 성'이라고 표현했다. "sexuality"는 성이론, 성에 대한 학문 등 "sex"와 구별되는 단어지만, 문맥에 따라 이론이라는 낱말이 겹치거나 그냥 '성'이라고 할 때 큰 의미의 차이 없이 더 명확히 우리 감각에 잘 들어오는 부분은 '성'으로 표현했다. 압축과 전치에서 '전치'는 경우에 따라 '자리바꿈' 이라고 표현했다. 누군가 말했다. 서양의 문화는 죄의식의 문화요, 동양의 문화는 수치심의 문화라고. 전자는 자신의 내부에 스스로를 지켜보는 초자아를 두는 경우요, 후자는 밖에 있는 타인의 시선을 더 의식한다고. 그러나 오늘날 중요한 것은 밖에 있는 타인의 시선을 안으로 끌여들여 죄의식을 갖는 반성적 자세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동서양의 문화가 다른 점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옳은 것, 좋은 것에서는 서로 통한다는 것이다. 동서 문화의 차이만을 고집하지 말고 그 둘 사이의 차이 속에 존재하는 좋은 점과 공통점을 취하는 자세가 더 현명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것이 나의 작은 지식으로 감히 이 책을 펴내는 변명이다. 다만 더 좋은 글을 위한 초석일 뿐이라고.
1998년 여름 권택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