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상징세계 - 구미례
제4장
산
2) 풍수지리사상과 산
(1) 풍수지리란 무엇인가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있는 ‘풍수지리’란 무엇인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풍수지리라는 개념에는 다소 미신적이고 고루한 의미가 깃들어 있다. 그것은 ‘풍수지리’라는 어휘에서 막연히 느껴지는, 실생활과 무관할 것 같은 분위기와도 관련이 없지 않은 듯하다. 글쓴이도 그러한 느낌에서 ‘풍수지리’와 같은 개념으로 ‘지리체계’라는 말을 선택하였지만, 무엇보다 중요하는 것은 그 실체를 올바로 알아보는 일이라 생각된다. ‘풍수’라는 말은 장풍득수에서 비롯된 용어이다. 그 개념을 간략히 요약하며, 바람과 물에서 생산되는 신비한 힘과 땅의 생기, 즉 지덕의 힘을 입어 인간이 자연의 신비한 힘을 감응받고자 하는 사상이다. 대전제는 음양오행설에 근거를 두고서 자연을 대우주로, 인간을 소우주로 보고 자연의 생성원리가 같다는 데에서 출발하였다. 땅 속에 포함되어 있는 생기는 산줄기를 타고 내려온 내맥에 더욱 많고, 이것은 청룡과 백호가 감싸고 있는 혈점에 가장 왕성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 왕성한 생기를 보호하여 향수하려면 외부로 흩어지는 것을 막는 것이 선결조건이 된다. 생기는 바람에 흩어지기 쉬우므로 바람으로부터 깊숙히 감추어져야 하고, 물을 얻어야만 더욱 왕성하게 된다는 것이 기본원리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장풍득수, 풍수라는 말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인간은 고래로 주거지역의 풍토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나름대로의 지리적 사고를 성숙시키고 왔을 것이다. 이러한 지리적 사고는 일정한 형태의 체계를 이루게 되었고, 그 형태는 풍토가 어떠한가에 따라서 매우 다양한 지역적 차이를 나타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풍수지리설 역시 이러한 지리적 사고의 성숙, 발전된 논리체계의 하나로서, 우리 민족 역시 우리가 몸담고 있던 지기의 감지능력, 즉 자생적 풍수지리를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위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중국으로부터 확립된 이론체계의 풍수지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 민족 특유의 독립된 풍수지리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풍수지리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가장 간단히 말하면 명당을 찾기 위함이다. 이와 관련하여 풍수의 영역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는 지세가 왕성한 곳에 나라의 도읍이나 궁궐, 마을, 절, 집터 등을 잡아서 번성을 누리고자 하는 양택풍수이며, 다른 하나는 죽은 사람의 묘자리를 명당에 모셔서 그 후손으로 하여금 발복케 하는 음택풍수를 들 수 있다. 얼핏 생각하면 허황된 미신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으나, 풍수지리 사상에는 자연과의 조화 속에 순응하고자 하는 동양 전통사상의 기본 맥락과 함께 상당한 합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임동권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풍수의 조화는 산과 하천과 방위 세 가지가 일치해야 비로소 가능하다. 이 세 가지 조건은 생활에 있어 절대적인 요소이다. 산이란 옛날에는 수렵의 장소이며, 또 연료를 공급해 줄 뿐만 아니라 장풍에 있어서도 절대로 필요하다. 만일 산이 없다면 장풍은 불가능하며 산이 있음으로 해서 바람을 막을 수 있게 된다. 물은 음료수로서 필요할 뿐만 아니라, 농경생활이나 동식물의 생존에 없어서는 안된다. 또 방위는 양지와 음지를 결정하고 주택이나 농작물의 성장에 영향을 주므로 생활하는 데 있어 등한히 할 수 없다. 풍수설이란 산, 물, 방위의 세 가지 요소의 조화에 의해서, 인류의 생활을 행복하게 하는 데에 적지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현실적인 문제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다."
풍수지리에는 상당한 과학성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대체로 짐승이 살기를 꺼려 하는 땅은 좋은 땅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양이가 살기 싫어하는 짐승이므로, 고양이가 도망가는 집의 땅 속에는 반드시 지하수의 맥이 흐르고 있기 십상인 것이다. 또한 쥐나 개미가 파고 다닌 땅도 좋은 땅이 아니라고 한다. 여기에도 땅 속에 수맥이 지나가고 있다는 것인데, 개미나 쥐는 땅 속에서 살 때 어느 정도 습기가 있는 곳에 집을 짓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풍수지리에서는 산줄기를 ‘용’이라 하고 용이 뻗어오는 내맥을 용절이라 한다. 용절의 모습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성요가 지상에 반영되어 산출기를 이루면서 형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산줄기에는 신비한 생기가 감추어져 있다고 보는 것이다. 용절에도 생기가 다해 버린 사룡이 있다. 그러므로 지덕을 많이 받아 누리려면 생룡을 잘 판별해야 하는데, 이것이 이른바 간룡법이라는 것이다. 또한 용절 중 지덕의 생기가 가장 왕성하고 산수의 정기가 응집된 곳을 ‘혈’이라 한다. 이 혈을 중심으로 아래를 향했을 때 혈을 감싸고 있는 왼쪽 산줄기를 좌청룡이라 하고, 오른쪽 산줄기를 우백호라 한다. 그런데 이 점혈은 매우 정밀한 것이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어도 그 효과를 바랄 수 없다고 한다.
(2) 풍수지리의 실제
풍수지리의 가장 기본적인 취락입지는 배산임수이다. 산을 등지고 물 가까이에 형성된 취락 형태는, 차가운 바람을 막아주는 난방적인 효과는 물론 강이 있음으로 해서 적의 침입을 방지하고 식수 및 교통 등에 매우 편리한 주거지역의 요건이 되는 것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모든 읍취락의 산촌조에 반드시 진산을 명기하고 있다. 취락의 후면에 위치한 진산은 신앙의 대상인 동시에 그 취락을 보호하고 상징하며, 멀리서도 취락을 대표할 수 있는 수려장엄한 산세의 산으로 이루어진다. 그밖에도 진산은 나그네나 외부인들에게 마을의 위치를 알려 주는 표지의 구실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기본 맥락에 따라, 여기에서는 역사상 또는 전설상으로 전해 내려오는 풍수지리의 적용 실제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풍수지리와 관련된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다양하게 전해오고 있다. 이는 중국으로부터 풍수지리설이 도입되었다고 전해지는 신라말보다 훨씬 앞선 시기이므로, 일부 학자들의 주장처럼 삼국시대에 이미 풍수지리설이 중국에서 들어왔는지, 아니면 자생적인 것인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지상에서의 생활상의 요구로부터 적하한 토지의 선택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는 가정을 해 본다면, 자생적인 풍수의 개념이 충분히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먼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조간 등 신하 10여 명을 거느리고 한산의 부아산악에 올라 지세를 관망하고서, 강남의 땅이 북은 한산을 끼고, 동안 고악에 웅거하고, 남은 여택을 바라고, 서는 대해를 막아 천험지리하므로 국도를 정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고구려 유리왕은 위라성이 산수가 험하고 땅이 기름져서 그 곳으로 천도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삼국유사」에는 신라 제4대 임금인 석탈해가 등극하기 전에 풍수상으로 대길지인 호공의 집을 빼앗아 살았다는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석탈해가 임금이 되기 전 어느날 토함산에 올라가 굽어보니, 호공의 집터가 초승달 모양의 길지였다. 이에 남몰래 그 집 뜰에다 숫돌과 숯을 파묻고 말하기를 옛날에 우리 조상이 이 곳에서 대장간을 하며 살았으나 중년에 집을 빼앗겼다고 거짓 송사하였다. 관가에서 나와 땅을 파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오므로 마침내 집터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삼일월인 초승달은 날이 지남에 따라 점점 켜져 가게 마련이므로 이 터에 사는 사람도 그 기운을 받아 장차 크게 되리라는 암시를 주는 것이다. 결국 석탈해가 후일 왕이 된 것도 이에 기인한 것이라는 내용이다.
고려왕조는 왕조의 창업이 풍수지리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에 따라 태조 왕건의 풍수지리에 입각한 도참사상에 깊이 빠져들어, 말년에는 후손들을 경계하는「훈요십조」를 제정하였다. 그 제2조에는 “새로 개창한 모든 사원은 도선이 점쳐 놓은 산수순역설에 의거한 것이니, 절을 함부로 지어서 왕업은 단축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계하였으며, 제8조는 “차령산맥 이남과 금강 바깥쪽의 지세와 산형은 모두 거꾸로 뻗었으니, 이 곳의 사람이 조정에 참여하면 정사를 어지럽히거나 국가에 변란을 일으킬 터이니 등용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또한 고려시대부터 수도를 이전하기 위한 천도논의가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고려의 수도 송도(개성)는 철저한 풍수사상에 입각하여 선정되었다. 송도는 전형적인 장풍국의 땅으로, 주산과 좌우의 청룡과 백호 그리고 남쪽의 주작사라는 산에 의하여 빈틈없이 둘러싸인 일종의 산간분지에 해당되었다. 따라서 방어에는 어느 정도 유리하지만 명당의 규모가 적고 물과 연료가 부족하며 더이상의 발전이 제한받을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었다. 이처럼 한 나라의 도읍을 정하는 일은 그 나라의 운명과 관계되는 일이므로 최대의 국사로 신중히 검토되었다. 고려시대 중엽부터 송도에서 한양으로 천도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무산되기도 하였다. 도선의 비기에 의하면, 한양은 이씨의 왕도라고 이미 예언하였다고 한다. 이에 고려 왕조는 이씨가 한양에 왕도를 창업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한양 땅에다 오얏나무를 심었다가 베고 심었다가 베고 하여, 풍수적으로 이씨의 왕도 자리임을 인정하고 인위적으로 이씨 성을 견제하는 방법을 강구하였다고 한다. 이태조는 조선왕조를 창업하고, 태조 3년(1394년) 10월에 새 도읍지인 한양으로 천도하였다. 한양에 대한 이중환의 설명이다.
"함경도 안변부 철령의 한 맥이 남으로 5,6백 리를 달려 양주의 여러 작은 산이 되고 북동쪽에서 비스듬히 돌아들면서 갑자기 솟아나 도봉산의 만장봉이 된다. 여기에서 또 남서쪽으로 향해 달려가면서 조금 끊어지는 듯하다가 도 우뚝하게 일어나서 삼각산의 백운대가 된다. 여기서 다시 남하하여 만경대가 되며, 한 지맥은 서남으로 달리고 한 지맥은 남으로 내려와 백악(오늘의 북한산)이 되는데, 이 산이 풍수가가 말하는 소위 충천목성이며 궁성의 주산이 된다. 동, 남, 북, 삼방이 모두 큰 강이고, 서쪽은 바다의 조수를 통한다. 백악은 여러 강이 모여 서로 얽힌 사이에 위치하여 전국 산수의 정기가 모인 것이다."
이처럼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의 이상적인 풍수지리를 갖추었다는 한양도 결함이 있다고 한다. 한양의 풍수적인 결함은 동방의 청룡에 허점이 있는 것과 남쪽에 있는 관악산이 음양설로 보아 화기가 왕성한 점이다. 이를 보충하기 위하여 동대문을 세울 때 문 밖에 반월형의 석축을 쌓아서 외풍이 들어오는 것을 인위적으로 막은 바 있다고 한다. 또한 관악산의 화기에 대해서도 해신을 상징하는 해태 석상 2기를 설치함으로써 화귀를 막고자 하였으며, 남대문의 현판을 숭례문이라 칭하여 화귀를 견제하였다고 한다. 경상북도 문경군 소개면 소륜산에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우러 왔던 명나라의 장군 이여송이, 산세가 좋아서 장치 큰 인물이 나와 중국을 해칠 것을 두려워하여 산의 지맥을 잘라 아직까지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또한 경상남도 김해의 구지봉은 이름 그대로 산의 모양이 기어가는 거북의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이는 전형적인 영구하산형이어서, 이 산세대로라면 거북처럼 저력이 있고 오래 버틸 힘이 있어 조선이 언젠가는 또다시 득세하여 왕업을 이룰 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두려워한 일본은 신작로를 낸다는 구실로 거북의 모리 부분인 구지봉의 맥을 잘라 버렸다고 한다. 경상남도 진주시 비봉산에는 왕권의 안정과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해 퍼뜨린 옛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비봉산은 원래 대봉산이라 불리었는데, 고려 중엽 이후 진주에서 출중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뛰어난 인물이 많이 나오게 되면 나라에 반영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하여, 진주의 봉황새를 날려보내기로 하였다. 즉 풍수적으로 보아 대봉산은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상이니 이 산의 혈을 파 없애고 산세를 억누르게 절을 지을 것이며, 대봉산이란 이름 대신 봉황이 날아가 버린 산이라는 뜻의 비봉산이라 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풍수지리설은 미신적인 여러 가지 요소를 함께 지닌 채 우리 민족의 사상체계 중의 하나로 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풍수지리사상의 기본적인 맥락이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을 중요시해야 할 것이다. 아득한 옛날부터 산을 숭배하고 신성시하며 자연과 합일된 인간생활을 영위하고자 하였던 민간신앙으로서의 풍수지리사상의 본질을 깨달을 때, 우리는 우리의 조상들이 이 땅에서 살며 쌓아 온 문화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