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상징세계 - 구미례
제4장
산
3. 지리체계로서의 산
산은 인간세상을 둘러싼, 인간이 생활하고 있는 자연환경이다. 지리적인 측면에서 생각할 때, 산은 그 입지나 지세 등에 따라 인간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작게는 가옥의 배치에서부터 한 부락의 형성, 나아가서는 한 국가의 도읍을 정할 때에도 산과의 조화를 가장 큰 요건으로 여겨왔다. 또한 산의 지형을 이용하여 외침을 물리친 사례는 역사상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으며, 그 지역의 독특한 문화형태나 주민들의 기질 형성에도 산세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오랜 옛날부터 산이나 대지에 자연의 생동하는 힘인 정기나 생기가 있다는 믿음에 따라, 산을 신비하고 기묘한 힘을 가진 실체로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상호 병존되어 왔다. 따라서 우리의 민간신앙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풍수지리사상이 자연스럽게 정착되기에 이르렀으며, 이러한 풍수지리사상은 오랜 기간 동안 우리 민족의 지리관 내지는 토지관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1) 산과 삶의 조화
우리나라는 국토의 7할이 산으로 되어 있다. 국토는 남북으로 길고, 동서 간에 산맥이 놓여 있어서 남.북, 동.서의 지역간에 기온의 차이가 큰 편이다. 특히 산이 우리 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산이 취락 단위의 경계가 되고 지역과 지역 간을 격리시키는 구실을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계들은 지역 간의 특수성 내지 이질성을 형성하게 한다. 우리나라의 대산맥을 경계로 지역 구분의 기본 틀이 이루어지는 것은 바로 산지의 격리 기능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크게는 북부, 중부, 남부지방의 3대 지방과, 그 지방에서 산맥을 중심으로 세부적으로 분류되는 각 지역들은 각기 산업, 일상생할, 사회, 문화 등에 있어서 서로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민가의 생활과 직접적으로 연관시켜 보면, 가옥의 경우 북쪽으로부터 폐쇄적인 전자형의 북부형(함경도), 대청이 있는 ㄱ자형의 중부형(경기, 충청도 북부), 흔히 툇마루가 있는 개방성이 큰 일자형의 남부형(전라, 경상도), 그리고 특수형으로서의 제주도형 등이 형성되게 되었다. 이러한 거주형태 외에도 김치와 여러 가지 계절 음식을 포함한 식생활, 의복, 교통수단 등 생활 전반에 걸쳐 지역에 따라 자연과 적절히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편, 산맥들에는 영, 재, 고개 등이 있어 지역간의 교류가 이루어졌고, 오늘날에도 중요한 교통로들이 이들을 통과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신라 아달라왕 3년(156년)에 계림령로가 개통되었고 158년에는 죽령이 개통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영로는 교통로의 기능뿐만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방비와 안전의 요소가 되기도 하였다. 조령의 관문, 철령의 관문, 삼방관 등과 같이 관문이나 관방이 중요 고개마다 설치되어 성책과 산성문의 구실을 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찰방과 역승을 연결하는 산로가 영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이밖에도 높은 산정부는 통신수단으로서 봉화대의 설치장소로 이용되었다. 봉화가 제도적으로 체계화된 것은 고려 예정 3년(1149년) 봉화식을 사용한 때부터였으며, 주로 국방상의 필요에 의한 것으로 변경의 비상사태를 중앙 또는 기지에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봉화대의 설치방법은 매 30리마다 제일 높은 곳에 봉화대를 두되, 만약 산이 서로 막혀 불편할 때에는 이수에 제한 없이 조망이 가능한 곳에 두었다. 전국의 봉화계통을 보면 직봉이라는 5개 주요선이 있고, 이들 5직봉은 모두 목멱산(서울 남산)의 봉화대로 집중되도록 되어 있다.
산은 또한 그 지세와 위치에 따라 요새로 이용된다. 역사적으로 외적을 무찌르기 위하여 산천의 지세를 천연의 이점으로 삼아 겨레와 나라를 지키며 국난을 극복한 경우가 많이 있다. 특히 지형을 이용하여 산성을 축성함으로써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 산성의 축성은 국경의 설정이 되기도 하였고, 취락 근방에 설치하여 도시국가나 성읍국가의 방책으로 삼기도 하였다. 최초의 산성은 기원전 2세기의 평양성으로, 산을 이용한 취락보호의 성책이었다. 산성은 산마루와 정상을 연결하여 쌓았는데, 대체로 배후와 좌우에 험한 능선이 둘러싸고 안에 시내나 샘이 있는 산지를 골라 성루를 쌓고 골짜기의 좁은 출구에 성문을 세운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의 건축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가능한 한 변형시키지 않고 자연에 순응하고자 한 것이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민가는 자연지리와 기후에 크게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먼저 높지 않은 산을 배경으로 하여, 그 산과 조화를 이루도록 높지 않은 집을 지었다. 알프스 등과 같은 높은 산지의 산악국가들이 그 산을 배경으로 높고 지붕이 뾰족한 집을 지어 조화를 이루게 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높지 않고 완만한 둥근 모양의 산이 많으므로, 낮고 완만한 곡선의 가옥들, 특히 초가들은 한국 민가의 한 전형을 이루고 있다.
산사의 배치는 축을 여러 개 두어야 하였고, 높은 지영일수록 축의 수가 늘어나는 경향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예는 해인사나 부석사 등의가람 배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우리나라의 주택은 주변의 자연 그대로가 정원이 되어, 건축과 자연의 조화 속에서 자연은 인공의 건축을 포용하고 건축은 자연을 인공 속으로 끌여들여 서로 공존하며 자생할 수 있게 하였다. 따라서 우리나라 건축에서의 입지선택은 곧 자연으로 귀환하는 것이며, 귀속이라고 할 수 있다. 건축의 조형미 자체도 깊이와 은은함을 지향하여, 자연계의 질서를 흐트러트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조촐하고 넉넉하게 형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산을 숭배하고 자연을 동경해 온 선조들은 서민에서부터 왕실에 이르기까지 산수화를 곁에 두고 감상하기를 즐겨 하였다. 특히 궁궐의 정전 어좌 뒤쪽에 설치되어 있는 오봉산일월도 또는 일월곤륜도는 권위의 상징인 동시에 송축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이 오봉산일월도에서의 오봉산은 오악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하늘의 은덕 아래 왕권 존속 및 왕실의 무궁한 번창을 기원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해, 달, 물, 소나무와 함께 오악이 설정되어 있는 이 그림은 전통의 오악신앙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으며, 또한 왕의 절대적 권위에 대한 칭송과 왕족의 무궁번창을 기원함과 동시에 조정의 최고 지위를 상징하는 그림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산에 대한 강력한 의미부여는, 실제생활의 여러 방면에서도 산의 조형을 본떠 권위와 길상을 상징하고자 하였다. 즉 산의 모양을 닮은 대감모자를 쓰고 산수가 넓게 펼쳐진 열두 폭 병풍을 배경으로 하여, 좌청룡 우백호의 서안을 앞에 두고 십장생이 수놓아진 보료에 기대어 않은 양반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하였듯이, 산세의 새김은 명당과 취락을 만드는 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지역주민의 기질과 성격 형성에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지세는 북고남저형으로, 북쪽에서 강렬한 산세가 일어나 서남으로 흘러오면서 점차 약세를 보이고 있다. 음양의 이치에서 보면 산세가 약한 곳은 양기가 성한 곳이요, 산세가 강한 곳은 음기가 성한 곳으로, 남양북음이 그대로 적용되어 남쪽은 남자가 준수하고 북쪽은 여자가 인물이 아름다워 남남북녀라는 말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지방 산세와 관련하여 각 지방민의 성격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들이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장백산맥의 줄기찬 영향을 받은 함경도의 주민들은 어떤 일이나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보고야 마는 끈질기고 참을성이 많은 기질을 지녔다고 한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백두산의 영향을 받은 평안도 사람들은 고고한 기질 때문에 타협이나 양보를 모르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굽힘이 없다고 한다. 높은 준령의 지맥이 순하게 서남으로 뻗어서 개활지를 형성한 황해도는 인정 많고 온화하며 정직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팔을 내밀 듯 일자로 뻗은 태백산은 강원도민의 정직한 성품을 길러 속을 줄은 알아도 속이지 못하는 선하고 우직한 바탕을 이루었다. 500년의 수도로 전국의 문물이 집결하는 서울을 비롯한 기호지방은, 도읍지로서의 양명한 기운으로 총명하고 재능이 많은 인물을 다수 배출하였다. 잔산천록의 영향을 받은 충청도는 완만하면서도 호인형으로 남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양반기질을 형성하였고, 동해안을 끼고 뻗은 태백산맥과 중간에서 서쪽으로 흘러간 소백산백의 영향을 받은 경상도 사람은 강인한 투혼으로 일기당천의 호한들이 많고 학문과 예절을 숭상하는 선비의 고장이 되었다. 총명하고 영리하며 예능에 뛰어난 전라도민은 산세의 아름다움에 영향을 받은 것이며, 단결력이 강하고 정의감이 투철한 것도 산세와 큰 관련이 있다고 한다.
[오봉산일월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