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상징세계 - 구미례
제4장
산
2. 숭배와 신앙의 대상
3) 진산숭배와 민간신앙
우리 민족의 산악숭배사상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 것은 진산숭배이다. 우리 민족의 시원지로서 핵을 이루고 있는 백두산이나 국조신 또는 성모신이 살고 있는 산들이 특수성을 띤 것임에 반하여, 진산의 개념은 작게는 한 마을에서부터 크게는 전 국가에 이르기까지 일반화된 산악신앙이라 할 수 있다. 즉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한 고을 또는 한 국가의 공동체를 지키고 보호하는 주산을 설정, 민간에서는 물론 국가적인 행사로 이 산에 제사를 지내고 정성을 드렸다. 이러한 진산숭배는 오랜 역사를 통해 면면히 계승되어 왔으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고유한 민간신앙의 형태로 그 맥을 잇고 있다. 진산숭배에 관한 기록은 삼국시대 때부터 발견되고 있다.「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에서는 “항상 3월 삼짇날 낙랑의 언덕에 모여 사냥을 하되, 잡은 멧돼지며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에 제사를 올렸다”고 하며, 제26대 평원왕은 여름 가뭄을 당하여 끼니를 줄이고 산천에 기도하였다고 한다. 또한 부여의 왕은 늙어서 자식을 두지 못하자 산천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대를 이을 아들을 구하였으며, 백제의 경우도 제5대 왕인 초고왕 때 큰 단을 모아서 천지산천에 제사를 지냈다. 신라의 경우는 제5대 왕인 파사이사금이 메뚜기들로 인해 농사피해를 입자 여러 산천에 제사를 지냈으며, 제7대 일성 이사금도 북쪽의 태백산에 가서 친히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이 삼국시대부터 국가의 대소사와 관련하여 제사를 지내는 의식이 빈번하였으며, 나라에 따라서는 국가의 진산으로 삼산 또는 오악을 설정, 나라의 평안과 번창을 기원하였다.
백제에는 삼산이 있었는데, 부여군에 있는 일산(현위치 미상), 오산(부여 동남의 조산), 부산(백마강 서쪽)이 그것이다. 「삼국유사」에는, “국가의 전성기에는 그 위에 신인이 살았으며, 아침 저녁으로 끊임없이 하늘을 날아 왕래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삼국 중 진산숭배의 일정한 체계를 갖추고 있었던 나라는 신라였다. 신라는 삼산 오악을 두고 나라에서 주관하여 산악에 제사를 지냈다. 이 중 대사는 삼산에서, 중사는 오악에서, 소사는 특정한 몇몇의 산에서 지냈다. 신라의 삼산은 나력(경주), 골화(영천), 육례(청도)였으며, 오악은 동악에 토함산, 서악에 계룡산, 남악에 지리산, 북악에 태백산, 중앙에 부악산(대구 팔공산으로 추정)이었다. 오악 중에서 석탈해가 스스로 산신으로 화하여 동쪽의 왜구로부터의 위협을 막고자 한 토함산은 신라 진산의 참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 삼산 오악 등에서는 국가의 수호와 함께 재해방지를 위한 기도, 기우와 풍년 등을 기원하는 제사가 받들어졌다.
「삼국유사」에는 경덕왕 때 오악 삼산신이 때때로 대전의 뜰에 나타나거나 시립하는 것을 보았다는 기록과 함께, 현강황은 남산신이 나타나 홀로 춤을 추는 것을 보았는가 하면 금강령에서 북악의 신이 춤을 추는 것을 보고 따라서 춤을 추었다고 한다. 또한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하기 위하여 단석산에 입산수도한 김유신이 산신으로부터 보검을 받고 삼국통일을 맹세하였다는 이야기도 진산숭배를 담고 있다. 선정을 베푸는 경덕왕 앞에 시립하는 산신과 국난 극복을 위해 애쓰는 김유신에게 보검을 내린 산신, 국사는 뒤로 하고 놀기만을 즐기는 헌강왕 앞에 나타나 나라의 위기를 경고한 산신은 모두 나라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수호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신라말에 승려 도선은 곡령의 산수를 보고 그 맥을 짚어서 왕건이 태어날 집의 터를 점지해 주었고, 왕건은 부처의 호위와 산천의 음우로 고려를 창업하였음을 강조하였다. 고려왕조는 왕건이 산천의 음우로 나라를 일으켰다는 믿음에 근거하여, 신라에 뒤지지 않는 국가수호와 왕실보존의 진산으로 산악을 숭상하였다. 이처럼 왕조 창업의 기틀이 풍수지리설과 맺어진 산악숭배에 의해 형성되었음을 믿은 고려왕조는, 덕적산, 백악, 송악, 목멱산 등의 진산을 두고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 왔다. 또한 재변이나 국가의 위기가 있을 때마다 명산에 기도를 드린 것은 물론이거니와 국가적인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는 산에 대한 가호를 시행하였다. 즉 산에 신호, 덕호, 훈호, 존호, 작호 등을 붙여 높임으로써 그 이름을 영예롭게 하고자 하였다. 그 외에 총정이나 지기같은 상자를 산에다 붙여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산에 대한 가호는 태자책봉, 선왕선후에 대한 가상존호, 대묘친제, 왕의 순행과 같은 국가의 중요 행사에 즈음하여 주로 베풀어졌다. 그와 같은 국가적 행사는 산의 보살핌과 수호에 힘입어 이루어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삼별초의 난이 진압되었을 때 무등산, 금성산, 감악산 등의 음우가 있었다고 믿고 이에 감사하는 제를 올린 것도 산의 가호에 준하는 산악숭배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국가에 변고가 있을 때는 대궐 뜰 안에 산천의 신들을 모셔다가 왕의 친제인 ‘초’를 거행하기도 하였다. 조선왕조에 와서도 고려의 산악숭배를 계승하고 있다. 왕건이 그랬던 것처럼 이성계도 창업을 위한 산신기도를 전국의 명산에서 행하였으며, 조선왕조를 이룩한 태조는 1393년(태조 2년) 명산에 신을 받들어 제사를 지내기로 하였다. 이에 송악의 성황을 호국공이라 칭하고 이령, 안변, 완산의 성황은 계국백으로 삼았으며, 삼악산, 백악, 암이, 무등산, 금성, 계룡산, 치악산 등을 호국백 또는 호국신으로 삼았다. 또한 태조 때부터 국토를 지키는 오악과, 도성 및 나라를 지키는 산인 오진을 정하여 국가수호와 왕조보존을 위하여 제사를 드렸다. 오악은 동악 금강산, 서악 묘향산, 남악 지리산, 북악 오대산, 중악 삼각산이며, 오진은 동진 오대산, 서구 구월산, 남진 속리산, 북진 장백산, 중진 백악산으로 정하였다. 이러한 오악, 오진 외에도 백두산신을 흥국영응왕이라 하여 모단을 세운 것을 비롯하여 지리산에 남악사, 덕유산에 산제당, 서울 북악에 백악사, 남악에 목멱사 등의 제단이 있었다. 이들에 대한 제사는 모두 나라에서 관장하였으며, 매년 중춘과 중추에 택하였고 제사에는 반드시 음악과 문무무가 뒤따랐다고 한다.
한편, 태조 이성계와 산과 관련된 다음의 일화는 조선왕조의 산악숭배를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성계는 조선왕조 창업을 위하여 남해 보광산의 산신에게 “국왕이 된다면 그 은혜에 보답하는 뜻에서 이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어 아름답게 꾸며 드리겠습니다”라는 기도를 올렸다. 그 뒤 즉위한 태조는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그 산에 ‘금산’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국가에서 주관하여 산악을 숭배하고 제를 지내 왔을 뿐만 아니라, 각 주, 군, 현에서도 그 북쪽에 진산을 정하고 그 지역의 수호신으로서 산신을 받들었으며, 백성들은 산신에게 정성껏 제사를 드려 왔다. 이러한 숭산사상은 민간으로 일반화되면서 토착종교 내지는 민속적 신앙으로 깊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즉 산신을 믿고 정성을 드림으로써 지역의 평화와 안녕을 지키고 제액초복할 수 있다는 소박한 믿음은 자연스럽게 우리 민족의 신앙으로 정착이 되었던 것이다. 민간신앙에서의 산악과 산신은 지역수호신의 성격을 가장 강하게 띠고 있다. 지역수호신인 산신에게 지내는 마을 단위의 산신제는, 마을 뒷산에 산신당(산신단 혹은 산제당이라고도 함)을 마련하여 그 곳에서 모시게 된다. 산신제는 그 시기가 마을보다 일정하지는 않으나, 대개 새해를 맞아 초삼일에서부터 상원(음력 정월 대보름) 사이에 지내는 것이 상례이다. 산신제의 진행은 마을 공동의 동제 형식을 취하며, 경비는 마을 공동으로 추렴한다. 산신제를 담당하는 인원은 제관, 축관, 화주 등으로, 이들은 부정이 없는 이로서 생기복덕한 사람으로 선정을 한다. 산신제를 주관하는 사람으로 발탁되면 일정한 기간 동안 목욕 재계하고 여러 가지 금기를 행한다. 이러한 금기는 제관들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산신제를 행하는 마을사람들에게도 해당되어 부정한 행동을 하지 않고 살생을 금하는 것이 보통이다.
특히, 무속으로서의 성황은 진산이나 산신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 오늘날에도 대관령 성황신제, 강릉단오제 등으로 계승되고 있다. 또한 은산별신제나 향산제를 비롯한 지방의 부락제들은 고유의 숭천숭산사상과 무속이 결합한 것으로서, 부락의 수호는 물론 질병과 흉액을 막고 마을의 발전을 기원하는 의식으로 전승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