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상징세계 - 구미례
제4장
산
2. 숭배와 신앙의 대상
산은 인간 삶의 근거인 땅을 기반으로 하면서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 있다. 하늘을 경외하고 태양을 숭배해 온 인류는 오랜 옛날부터 끝없이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산을 신성시하여 왔다. 산은 인간세상과 하늘을 연결하는 매개체로서, 그 산에는 하늘의 뜻을 받아 인간의 일을 주관하는 신령함이 깃들어 있다고 믿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사고체계는 또한, 인간이 죽으면 그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곳으로서 산을 설정하기에 이르렀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에서도 발견할 수 있듯이 사람이 죽으면 냇가에 나란히 묻되 머리만은 산을 향하게 하여, 먼 옛날부터 인간의 영혼이 산으로 간다는 신앙이 있었던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언제부터인가는 사람이 죽으면 산에도 묻고 산을 닮은 봉분을 해주고 있다. 하늘 높이 소사 있는 산에 올라, 마침내는 승천하게 될 영혼을 기원하며. 이처럼 인류는 현상학적으로 나타난 이 세상과 하늘, 그리고 관념적으로 형성된 현생과 사후세계를 잇는 신성한 매개체로서 산을 숭상하여 왔다. 또한 하늘의 뜻을 받아 이 세상을 보호하고 인간의 일을 관장한다는 수직강하적인 신성성뿐만 아니라, 현생의 완성을 통하여 하늘에 이르기 위한 중간단계로서의 산에 대한 수직상승적인 설정은, 인간의 적극적인 사고방식뿐만 아니라 인간 내면에 간직된 본질적인 종교성을 접하는 듯하다. 이 장에서는 우리 민족이 산에 부여한 신성관념을 중심으로 하여, 그것이 어떻게 표출되었으며 그 이면에 내재된 우리 민족의 정신과 사상은 어떠한 것인지 등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한민족의 시원지, 백두산
헤아릴 수 없는 태고의 어떤 날, 망망한 만주 평원의 황무한 초원 위에 트는 여명의 빛. 억만고 사람의 자취를 보지 못한 홍안령의 마루턱을 희망과 장엄으로 물들인 때, 체구는 장대하고 근육은 강인한 거인의 일군이 허리에는 제각기 석부를 차고 손에는 강궁을 들고 선발대의 보무로 그 정상에 나타났다. 흐트러진 두발 사이로 보이는 널따란 그 이마에는 인자의 기상이 띠어 있고 쏘는 듯한 안광에는 의용의 정신이 들어 있다. 주먹은 굳게 쥐어 강함을 보이고, 입은 무겁게 다물어 근후함을 나타낸다. 문득 솟는 해가 결승선을 돌파하는 용자같이 일약하여 지평선을 떠날 때 그들은 한소리 높여 “여기다!”하고 부르짖었다. 거인배의 우렁찬 소리는 아침 광선을 타고 천뢰와 같이 울리어 끝없는 만주 벌판으로 달려 내려갔다... 조선 역사의 출발은 아마도 이러했던 것이다. 함석헌 선생의「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가운데, 우리 민족의 출발을 상상한 구절이다. 우리 민족이 떠오르는 아침의 태양을 좇아 동쪽으로 동쪽으로 이동하여 자리잡은 국토. 북으로 호대한 만주평원과 남으로 수려한 한반도에 걸쳐 구름 위로 우뚝 솟아오른 백두산은 이러한 우리 민족의 당당한 출발을 상징하는 개국의 터전, 한민족의 시원지이다. 동해에서 떠오르는 태양의 빛을 가장 먼저 받을 수 있고 신령스러운 하늘의 기운이 충만한 이 백두산을 중심으로 자리잡은 한민족. 이들은 백두산을 태양신이 강림하는 성스러운 산으로 경배하였다. 백두산의 화산 분출은 이러한 관념을 더욱 강하게 심어 주었다. 더욱이 산 정상에 있는 둘레 18.7km, 수심 300m가 넘는 하늘의 못 천지는 신비의 호수로서, 하늘의 신들이 하강하여 목욕하는 곳으로 여겨지기까지 하였다.
「북사」와 「봉천통지」에 따르면, 예로부터 백두산을 찾는 사람은 신성한 백두산을 더럽힐 수 없다 하여 반드시 용기를 지참하였다가 자신이 배설한 일체의 오물을 담아 왔다고 하였다. 또한 산에 오르기 전에는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하니, 세계 어느 곳에도 이처럼 외경된 산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백두산은 하늘과 통하는 영산, 하늘의 뜻이 인간세계를 향해 펼쳐지는 매개체로서의 신산으로 경배되었다. 따라서 고대인들은 이 세상을 다스려 줄 천자가 반드시 이 산에 강림할 것을 믿고 있었다. 이에 환웅은 천심을 따르는 민심을 좇아 환인의 명을 받고 이 산으로 내려왔고, 신시를 열어 이 강토를 다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 민족의 건국신화인 이 단군신화를「삼국유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환인의 아들 환웅이 3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하늘에서 태백산 마루에 있는 신단수 밑에 내려와 신시를 만들고 후에 단군왕검을 낳아 조선을 건국하여 다스리다가, 뒤에 아사달에 가서 산신이 되었다. 이처럼 우리 민족과 백두산의 관계는, 하늘을 경외하고 태양을 숭배하여 그 곳을 향해 높이 솟아 있는 산을 숭상해 온 고대인의 보편적인 산악숭배에서 한 걸을 더 나아가, 국토의 성역이며 통일된 민족정신의 기원점을 이루고 있다. 즉 하늘과 새로운 국토를 연결하는 매개체로서, 천제와 한민족의 맥을 잇는 시원으로서 숭배되었던 것이다. 단군왕검으로 이어지는 민족의 생명이 이 곳에서 기원하고, 바다 멀리 흩어져 있는 작은 섬까지 국토의 맥이 이 곳으로 잇닿아 있으며, 민족역사의 뿌리가 이 곳에 터잡고 있음을 말해주는 구심점이 바로 백두산인 것이다.
백두산이 매개가 된 이러한 신성관념은 이 땅이 하늘과 태양이 밝은 광명으로 축복받은 땅임을 믿는 ‘한밝신앙’을 낳게 하였다. 즉 백두산은 한민족의 시원지인 동시에 백의민족의 긍지인 한밝신앙의 용출지가 된 것이다. 문헌에 처음으로 백두산이라는 명칭이 보이는 것은「고려사」광종 10년(959년)때 “압록강 밖의 여진족을 쫓아내어, 백두산 바깥 쪽에서 살도록 하였다”라는 기록에서이다. 그 이전에는 불함산으로부터 시작하여 단단대령, 개마대산, 도태산, 태백산, 백산, 장백산 등으로 불리어 왔다. 학자에 따라서는 백두산이라는 명칭을 비롯, 한대이후에 불리어진 명칭의 공통점인 ‘백가’에 대하여 ‘희다’는 뜻으로 풀이함이 무난하다고 보기도 한다. 즉 백두산의 산정은 거의 사계절 내내 백설로 덮혀 있을 뿐 아니라, 산정부는 부석으로 이루어져 있어 눈이 아니더라도 희게 보이는 데서 그 이름을 취한 것이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고대 중국인들도 이 산이 매우 신령스럽다는 이야기와 함께 ‘백산’이라는 이름을 듣고 “이 산의 새와 짐승, 초목 등은 모두 희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산 이름중에는 장백산, 소백산, 백운산, 백악산, 백마산, 백계산, 대백산, 대박산, 함박산, 백복산, 백암산, 천백산, 조백산, 비백산 등과 같이 ‘백’과 ‘박’이 들어간 무수한 산들이 있다. 이러한 ‘백’, ‘박’의 명칭들이 단순히 녹지 않고 산에 남아 있는 잔설의 모습에서 취한 것인지, 태양을 숭배하는 우리 민족이 태양의 광명을 상징하는 밝음을 나타내고자 한 것인지는 깊이 고찰해 보아야 할 과제이다.
‘한밝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백’은 희다는 뜻이 아니다. 따라서 백두산은 한반도 곳곳에 솟아 있는 밝은 산들의 으뜸이요, 우두머리라는 뜻에서 그러한 이름을 받은 것이다. 즉 가장 신령스러운 산, 가장 밝은 산, 가장 큰 산이라는 신앙적 측면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한밝’의 구체적인 뜻은 무엇인가? 먼저 ‘한’을 살펴보자. 일반용어로 사용될 때는 1. 크다, 2. 하나이다, 3. 바르다, 4. 근원이다, 5. 최고이다, 6. 길다, 7. 넓다, 8. 많다, 9. 같다, 10. 한결같다 등의 최상급에 속하는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며, 명사로 쓸 때는 1. 하늘, 2. 하늘의 신(하느님), 3. 통치자 등의 뜻을 지닌다. 그리고 ‘밝’이란 본래 광명을 뜻한다. 따라서 한밝이란 큰 밝음, 대광명의 뜻이 된다. 그 큰 광명은 하늘에 있고 그 빛의 근원은 바로 태양인 것이다. 태양신을 숭배했던 조상들의 신앙은 ‘한밝’이라는 두 글자로 상징되었고, 불을 가져다 준 태양신의 아들 환웅이 백두산 신단수 아래에 크고 밝은 새 세계를 열었다는 관념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백두산을 크게 밝은 산, 영원토록 밝은 산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마침내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여 살아가는 한민족은 하늘의 뜻과 태양의 밝음을 계승한 신성함과 깨끗함과 밝음을 지닌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한밝신앙은 한민족만이 가지는 신성관념으로 정착되었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산악숭배는 한밝신앙과 함께 뿌리내리며 민족의 정신적 지주로 맥을 이어 왔으며, 백두산은 그 구심점이자 시원지의 역할을 담당하여 왔던 것이다.
2) 국조신과 성모신
국토의 7할 이상이 산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에는 일찍부터 산에 대한 믿음과 경배가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따라서 각 지방의 산마다 신비스러운 갖가지 전설이 얽혀 있으며, 그 마을을 지키는 산신에게 매년 정성드린 산제를 올려 왔다. 이러한 산신 중에서도 국조신과 성모신은 국가를 수호하고 백성을 보살피는 신으로서 거국적인 숭배의 대상이 되는 신이다. 국조신은 이름 그대로 나라를 세운 인물이 죽어서 된 산신이며, 성모신은 산신으로 인격화되어 신앙되는 여신이라 할 수 있다. 이들 국조신과 성모신은 처음부터 신의 위치에 설정되어 있는 일반 산신과는 달리, 구체적인 인물로 세상을 살다가 죽은 뒤 산으로 가 신의 되었다는 특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먼저 국조신을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국조신으로는 단군과 수로왕, 주몽 등을 들 수 있다. 단군은 백두산 신단수 아래에 고조선을 세우고 나라를 다스리다가 1908세에 아사달로 들어가서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가야의 수로왕은 황천의 명을 예시하고 하늘에서 자색의 줄이 구지봉에 드리워져 탄생하게 되었고, 수를 누린 뒤 역시 산신이 된다. 고구려의 경우도 천계에서 해모수가 능심산에 하강하여 주몽으로 이어지면서 나라를 열었고, 그가 죽은 뒤 고구려에서는 주몽신을 받들었다. 신라 건축 초기의 육촌장은 하늘에서 표암봉과 형산 등의 산정으로 각기 하강하여 천신의 아들인 혁거세를 맞이하였다. 이들 국조신은 한결같이 천신, 산정강림, 개국, 산신으로 연결되는 신관을 보여 주고 있다. 이때의 산은, 산으로서는 그가 강림하는 자리이고 인간으로서는 강림하는 신을 받드는 자리이다. 이러한 경우 땅 위에 우뚝 솟은 백두산이나 구지봉은 천신의 수직강하가 이루어지는 장소로서, 그 아래에 새로운 세계를 연다는 입장에 서게 된다. 즉 하늘과 산의 정상이 하나의 축을 이루어 그 아래에 새로운 국가를 연다는 의미를 내포하게 되는 것이다.
학술적으로는 이 산을 ‘우주산’ 또는 ‘세계산’이라 하고 그 축을 ‘우주축’이라 한다. 왜냐하면, 그 축과 산이 우주의 중심 또는 세계의 중심으로 믿어져야 하는 필요성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 때 이 우주산 또는 세계산은 인체에 비유할 때 배꼽의 관념과 합치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배꼽은 인체의 중심이자 생명력이 연결되어 탄생되는 곳으로, 우주의 천신과 배꼽인 산은 탯줄로 연결되어 새로운 시조를 낳게 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우주산 신앙의 형태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시베리아와 일본 등지에도 널리 분포되어 있다. 우주산 신앙의 특징은 산이 신의 세계인 하늘과 인간의 세계인 땅 사이에 자리잡아 그 두 세계 사이를 연결하는 고리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인간은 산신과 연결된 고리를 통하여 산신을 향해 기원을 하게 되며 산신은 하늘과 연결된 고리를 통하여 인간의 소원을 아뢰어 그들의 소원을 이루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국조신이 나라를 세운 인물이 죽어서 된 산신임에 비해, 성모신은 한 나라 시조의 어머니이거나 왕실의 여인, 또는 국가나 왕을 위해 훌륭한 일은 하고 죽은 사람의 부인이 죽어서 신격화된 경우이다. 손진태 선생은 고대 산신의 성은 본래 여성이었는데 이후에 남성으로 변하게 된 것이라 전제하면서, 이는 고대의 모계중심사회를 반영하는 것이라 보기도 하였다. 이들 성모산신은 국조신이 왕조의 쇠망과 함께 그 숭배의 정도가 크게 약화됨에 반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숭배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성모산이 개국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지 않으며, 여성신으로서의 본능적인 모성애와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 추측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성모산신으로는 경주 선도산에 있는 선도성모, 가야산의 정견모주, 지리산 성모, 속리산 천황할머니 등을 들 수 있다.「삼국유사」에서는 선도성모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신모는 본래 중국 제실의 딸로서, 이름을 사소라고 하였다. 일찍이 신선의 술법을 배워 신라에 와서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인 황제는 솔개의 발에 편지를 매어 보냈다. ‘솔개가 머무는 곳에 집을 지어라.’ 사소가 편지를 보고 솔개를 놓아 보내니 이 산으로 날아가서 멈추었으므로 마침내 거기에 가서 살며 지선이 되었다. 그래서 산 이름을 서연산이라고 하였다. 신모는 오랫동안 이 산에 웅거하여 나라를 진호하였는데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이 아주 많았다. 그러므로 나라가 건립된 이래로 늘 삼사의 하나로 하였고, 그 차례도 망제의 위에 있었다. 이밖에도「삼국유사」에는 선도성모가 처음 진한에 와서 신라의 시조인 혁거세와 알영을 낳았다는 것과 제54대 경명왕의 잃어 버린 매를 찾아주고 왕으로부터 대와의 작위를 받았다는 이야기, 진평왕 때의 비구니 지혜가 안흥사의 불전을 수리하려고 할 때 황금 160냥을 주어 그 일을 쉽게 이루도록 하고 해마다 봄과 가을에 모든 중생을 위한 점찰법회를 베풀 것을 지시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지금도 선도산의 성모사에서는 신라시대 이래로 계속된 향사를 매년 드리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성모산을 찾아와서 정성을 드리고 기도하며 높이 받들고 있다. 다음으로, 김수로왕을 낳았다는 정견모주는 가야산의 산신이다.「동국여지승람」에서는 최치원이 지은「석이정전」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정견모주에 관한 전설을 기록하고 있다. 가야산신 정견모주는 천신 이비사에 감응하여 대가야왕 뇌질주일과 금관국왕 뇌질청예 두 사람을 낳았다.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의 별칭이고 뇌질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다.
사람들은 가야산에 전란의 화가 미치지 않았던 까닭이 모주가 산신으로 있기 때문이라고 믿었으며, 모주가 머무르는 가야산을 신령스러운 산으로 믿었다.「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는 해인사안에 정견천황사를 마련하고 정견모주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는데, 산신제 의식은 최근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또한, 삼신산의 하나로서 신설들이 내려와서 노닐었다는 지리산의 천왕봉에도 성모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태고 때 천신의 딸 성모마고가 이 산에 내려와서 반야도사(일설에는 암천사의 법우화상와 혼인한 뒤 딸 여덟을 낳아서 모두 무당을 만들었으며, 그들을 팔도에 보내어서 민속을 다스리게 하였다고 한다. 다른 무조설로는 석가모니불의 어머니 마야부인을 지리산 신령으로 모셨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시대에는 지리산을 남악이라 불렀는데,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지리산 산신으로 받들고 국가의 수호신으로 숭상하여 봄과 가을에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고려 말기에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에는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지리산 산신으로 모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성모가 태조의 어머니라는 믿음과 함께 지리산은 매우 성스러운 산으로 받들어졌다. 평시에 나라의 태평과 백성의 평안, 재앙의 소멸을 위하여 신사에 기도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고, 장수가 출정할 때에는 축원을 드렸고, 승전한 뒤에는 성모신에게 증작하였다. 그 한 예로서 정지가 1383년(우왕 9년)에 왜구를 물리치기 위하여 남해 관음포를 향할 때 사람을 지리산 성모신에 보내어서 필승을 기원하였던 적이 있다. 그리고 이성계가 창업의 웅지를 품고 전국의 명산에서 기도를 드렸을 때에도 오직 지리산에서만은 재의 소지를 올리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성계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지리산 기슭에서 왜구를 물리치기까지 한 인연 있는 산이지만, 고려왕조의 멸망을 담고 있는 기도를, 감히 위숙왕후를 성모로 삼고 있는 이 산에서만은 올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성모가 있는 산은 신성하고 위대한 산, 넓고 깊은 모성애로 나라의 백성을 돌보는 산으로 존중받아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