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상징세계 - 구미례
제4장
산
1. 탈속과 은일의 상징
2) 불교와 개산
사람들은 왜 산에 가서 도를 구하는가? 도를 구하고자 하는 이들은 왜 산으로 가는가? 우리의 선저들은 예로부터 도를 닦는 가장 적합한 장소로 산을 선택하였다. 불도를 닦는 절, 신선이 되기 위한 수양처, 신의 힘을 얻는 무속기도처 등은 모두 산 속에 있었다. 그 산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의미를 지닌 곳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하늘은 최고의 존재가 사는 이상의 세계로 여겨지고 있다. 선도에서도, 민족 고유 종교에서도 하늘에는 천신이 머물고, 불교의 세계관에서 볼 때도 가장 높은 하늘에는 부처님이 머무는 것으로 상정하고 있다. 기독교에서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한다. 그러나 산 아래의 땅에는 희비가 엇갈리고 생존의 암투가 판을 치고 있다. 따라서 산 아래 사람들은 막연한 구원의 대상으로 하늘을 그리워하며 하늘을 향해 마음의 기도를 올리기도 한다. 이렇듯 이상향으로서의 하늘과 인간세상인 땅의 중간 위치에 놓여진 산, 산은 바로 위로는 하늘과 통하고, 아래로는 세상과 연결되는 곳인 것이다. 이러한 산이야말로 완성된 경지를 추구하는 이들의 정진장소로 가장 적합한 장소라 생각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산중생활은 단순히 속세에서 이상세계로의 상향이라는 일방적인 의미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불교에서는 산에 절을 창건하는 것을 ‘개산’이라하고 절의 창건주를 ‘개산조’라 한다. ‘산을 열었다’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절을 생기기 전에는 산이 닫혀 있었다는 말인가? 절을 세움으로써 비로서 산을 열게 되었다는 뜻일까? 산에 절을 창건하는 것을 개산이라 한 것은 불교가 단순히 속세를 떠나 산중에 은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불교문화를 꽃피운다’라는 관점에서 본 것이다. 신라 선문구산의 개산이 그러하고 의상대사가 전국 열 군데 명산에 세운 화엄십찰의 개산이 그러하였다. 그들은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새로운 문화를 산속에서 꽃피웠다.
한 예를 들어보자. 수행자들은 세계의 중앙에 가상적인 이상향의 산을 설정하였다. 불교에서는 수미산, 도교에서는 곤륜산을 두어 그들의 우주관을 설명하고 있다. 불교의 수미산은 그 형상이 특이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산기슭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점차 좁아지다가 정상에 가까워지면서 다시 점차 넓어져 맨 꼭대기는 편편한 모양을 이루게 된다. 이 수미산은 세계의 중앙에 있으며, 산 아래에는 혼탁한 중생세계가 있다. 도를 구하고자 하는 이들은 먼저 수미산의 산기슭에 들어가면서 마음을 한데 모으고 구도를 위한 자세를 가다듬게 된다. 정진을 계속하여 마음이 맑아지면 산중턱의 사천왕이 있는 세계에 오르게 되고, 더욱 수도를 하여 마침내 정상에 오르면 ‘주객이 둘이 아닌’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수미산의 꼭대기인 이 곳을 도리천이라 하며, 그 중앙의 선경성과 사방에 있는 여덟 개씩의 궁전과 함께 33천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그 위에 있는 18개의 하늘 세계를 지나면 아득한 곳에 부처님이 계시는 것이다. 이것은 공간적인 위치로서의 부처님 자리를 뜻하는 것이지만, 우리나라의 산중사찰에서는 사찰의 조형이 이 수미산을 적용하여 우리나라 특유의 불교문화를 이룩하고 있다. 즉 사찰 입구에 세워진 일주문은 수행자가 일심의 자세로 수미산을 들어서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기둥이 한 줄로만 된 문을 만들어서 구도자의 일심을 상징화한 것이다. 이 문을 들어설 때는 도를 구하는 그 마음이 일심이 되어야 한다.
조금 더 올라가면 수미산의 중턱 사왕천에 해당하는 사천왕문이 나온다. 수미산을 오르기 시작하여 중턱쯤 이르면 많이 지치게도 되고 마음이 해이해진다. 이 때 사천왕이 무서우면서도 조금은 해학이 깃든 모습을 취하면서 힘을 낼 것을 꾸짖는다. 포기하고 싶은 유혹으로부터 구도자를 지키기 위하여 사천왕상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 정상을 향하면, 정상에 우뚝 선 불이문을 대하게 된다. 주객이 둘이 아니요, 세간과 출세간이 둘이 아님을 상징하는 불이문, 이 불이문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도리천의 33개 궁전을 상징하는 33계단을 거쳐야 한다. 불국사의 백운교와 청운교가 33계단으로 되어 있는 것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이 불이문을 들어서면 대웅전이 있는데, 그 중앙에 불상을 안치하는 수미단이 있고 수미단 위에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수미산 위에 부처님이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렇듯 불교에서는 수미산이라는 가상적인 이상향을 통하여 해탈, 즉 부처님의 세계에 이르는 단계를 상징화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의 산중사찰에서는 수미산에 대비하여 불교 교리에 입각한 독특한 사찰의 조형을 창출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산 속 깊은 곳에 사찰과 암자를 조성하여 구도와 중생교화에 힘쓰는 한편 불교를 전파하고 승려를 교육시켰다. 규모가 큰 사찰에서는 산중이라 하여도 사찰의 재정이 확보되어 있었기 때문에 승려들의 산중생활이 짜임새가 있었지만,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산중의 작은 사찰이나 암자는 수도처로서의 기능만을 제공하였을 뿐 생활에는 큰 곤란이 뒤따랐다.
그러나 이들 산중의 작은 암자에도 양식이 끊어지는 일은 없었다. 수행승들이 한여름 석 달과 한겨울 석 달을 암자에 기거하면서 산중 수도생활을 한다. 그들이 암자를 찾아가면 텅 빈 절일지라도 석 달 양식은 있었다. 그 전에 머물다 간 승려가 다음 사람을 위해 떠나기 전에 탁발하였다가 곳간에 넣어두고 갔기 때문이다. 마련된 식량으로 한 철을 난 승려는 그 암자를 떠나기 전에 탁발을 하여 다시 다음 수도승을 위한 양식을 마련해 놓게 된다. 전쟁 중이거나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는 도토리를 매을 찧어 벽에 발라두어서 산중의 구황식으로 삼게 하였다고도 한다. 이는 산중 수도생활의 기본자세로서 누가 말하거나 검사하지 않아도 계속되는 불가의 전통을 이어졌다.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구도자들은 항상 중생의 세계를 통찰하고 염려하면서 중생의 교화에도 힘썼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 ‘입산’이란 완성을 향한 수도, 즉 불교에서의 상구보리를 뜻하며 ‘하산’이란 중생계의 교화, 즉 하화중생을 뜻하는 것이 된다. 특히, 사찰이 세워진 후에야 산이 열렸다고 하는 것은 이처럼 자연 그대로의 산에 진리와 자비의 등불을 밝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학교가 대중화되지 못했던 시절의 사찰은, 승려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을 교육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전국의 십산에 화엄대학이 있어 환한 지혜의 등불을 밝히고 있던 시절의 사회는 결코 어둡지 않았을 것이다.
3) 선도의 요람
사람이 산에 들어가면 선이 된다. ‘선’은 ‘산에 사는 사람’ 또는 ‘인간세상에서 옮겨간 사람’이란 뜻의 회의문자로서, 곧 산인을 뜻하는 것이다. 몽고에서는 ‘선’을 ‘센’, ‘세이’으로 발음하였고, 무당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상도에서는 무당을 ‘산이’라고도 한다. 이 ‘센’, ‘세이’, ‘산이’등의 어원은 몽고계의 ‘샤만’에서 온 것이다. 고대 몽고계의 신도사상에서 비롯된 ‘샤만’은 무당 중 강신이 잘 되는 사람과 신 지핀 사람을 지칭하는 ‘샤안’에서 파생된 말이다. 뒤에 이 ‘샤안’이 중국으로 들어가서 한자로 선이되고 또는 신선이라고도 하여 영가무도하였다. 우리나라의 산은 경관이 빼어나고 물이 맑은 곳이면 어김없이 선과 관련된 명칭을 갖고 있다. 비선대, 와선대, 은선암, 신선바위, 선유폭포... 고대의 신관들은 이렇듯 계속이 깊고 물이 맑으며 수려한 경관으로 된 심산에 입산수도하였다. 신관들이 입산수도한 산을 신산으로 삼았으며, 산에서 수행하는 ‘샤인’을 곧 선, 신선이라 하였다. 역사적으로 볼때 화랑은 국선, 화랑사는 선사, 화랑도는 풍류도라고 하였다. 화랑은 그 지위가 사회적으로 최고위였던 신관에 속하였고 풍류도는 신라 고대의 국교였다. 화랑은 평시에 공기 맑고 수려한 산을 찾아 무술과 가무 등으로 심신을 수행하였다. 이 중에서 음악과 무용인 가무는 신과 교제하는 의식으로 사용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민족적 전통과 습성이 생리화되어 유교를 숭상하는 조선시대에도 유학자는 산수 좋은 곳에 정자를 짓고 거문고와 시를 즐겼으며, 탈속한 풍조를 사랑하는 등 신선의 풍류를 즐겼다.
「설문해자」에 의하면 ‘선’의 뜻은 ‘늙어도 죽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산에 들어가 수행하여 불로장생하는 사람을 신선이라 생각하면 무리가 없다. 신선이 되고자 산을 찾았던 많은 사람들. 그들은 그 산속에서 어떻게 생활하였는가? 그들은 마땅히 선도를 닦으면서 살았다. 선도! 그것은 곧 산중생활의 백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선이 되기 위해 닦는 선도의 비법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마음가짐이다. 선도에서는 무심을 기본자세로 삼고 있다. 즉 「동의보감」에서 “사람이 무심하면 도에 합하는 것이요, 유심하면 도에서 멀어지는 것이다”라고 한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은 ‘마음이 곧 부처’라는 불교관과도 일맥상통한다. 이와 같이, 선도에서는 마음의 다스림을 제일 중요시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연의 순리인 음양과 다섯 가지 기본요소인 목, 화, 토, 금, 수 오행의 조화를 터득하고 그에 따라서 생활하였다.
둘째는 호흡법이다. 선인이 되는 수양법에서 호흡법만큼 득도에 필수적으로 행하여지는 것은 없다. 맑은 공기로 충만되어 있는 산, 그 산은 수행인들에게 우주의 정기를 담은 신선한 공기를 선사한다. 호흡양생법의 대원칙은 ‘토고납신’이다. 낡고 더럽혀진 것을 토한 뒤 신선하고 새로운 것을 들이마신다는 것이다. 먼저 바른 자세로 앉아 배꼽 아래 세 치 지점인 단전에 의식을 집중하면서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그 기운을 단전에 모은 뒤 천천히 내뿜는데, 뿜는 양은 들이마신 것보다 적어야 한다. 이것을 단전호흡법 또는 연기법이라고 하는데 이를 더욱 연마하여 환정법, 태식법에까지 이르게 된다. 환정법은 단전에 모여진 정기를 더 밑으로 보내 음경을 덥게 그리고 굳건하게 한다. 다시 그 정기를 항문 쪽으로 흐르게 하고, 이를 척추에서 정수리로, 정수리에서 단전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범인은 상상 속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정지을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가능한 일이다. 태식법은 태아가 모체에서 호흡하듯 하는 것이다. 이 호흡을 익히면 코로 숨을 들이마시지 않더라도 복식호흡만으로 생명을 존속시킬 수 있으며, 그 정도에 이르면 입 속의 침만 삼키고 오랫동안 가사상태에 빠질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호흡법은 선도에서 정신과 몸을 통일하고 연마하여 득도의 경지에 이르게 하기 위한 수행법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비록 기본단계이기는 하지만 단전호흡에 관심을 가지고 실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셋째는 식이이다. 산속에서 산의 정기를 받은 산삼, 약초 등 기화요초가 많다. 현세에서 되도록 오래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식이에 의한 건강의 유지, 보강이 중요하다. 선인이 식의의 기본으로 삼고 있는 것은, 우선 생기를 많이 함유한 음식물을 선택하는 것이다. 생기를 많이 함유하였다는 것은 화식보다 생식이 주를 이룰 것이며, 따라서 신선하고 생명력이 왕성한 들풀, 성장력이 강한 나무열매, 어린 솔잎 등을 먹고 살았다. 산불에 의해 타죽은 집승이나 노화된 솔잎 등은 생기가 없고 신선하지 못하다고 하여 식이에서는 제외되었다. 잡귀가 없고 신성스러운 것이어야 신선한 선도의 식이가 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또한 선인의 식이는 정력을 보강하는 식이를 주로 하였는데, 그 예로는 소나무의 뿌리에 생기는 복령으로 가루를 만들어 먹기도 하고 떡으로 빚어 식사 대용으로도 삼았다. 회식보다 생식을, 육식보다 채식을 위주로 하였으나, 사슴은 십이지에 속하지 않는 신성스러운 것이라 하여 사슴고기를 육포로 만들어 상식하기도 하였다. 마직막으로는 체력단련을 위한 증강법이 뒤따르게 된다. 이들은 산속의 폭포, 바위, 나무 등을 이용하여 범인으로서는 엄두도 못낼 초인적인 체력단련을 하였다. 쏟아지는 폭포 아래 가부좌를 하고 않아 있는 하얀 도인의 모습, 험한 산등성에서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나는 듯이 오르내리는 모습을 그림이나 글을 통해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역사적 인물 중에는 이러한 선도의 비법에 따라 신선수양을 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전설적인 홍의장군 곽재우는 유배 끝에 고향 현풍의 비슬산 속에 들어가 신체의 운동과 호흡조절로 신선양도하는 선도를 닦았다. 그는 곡식을 끊고 조그맣게 뭉친 송화가루만 먹고 살았다 한다. 또한, 명종 때의 명신 심봉원은 명신으로보다 심양하는 선인으로 더 알려졌다. 태화산 기슭에 집을 짓고 효창노인으로 불리며 하얀 수염을 날리고 산수 속에서 여생을 살았는데, 그의 생활태도가 특이하다. 옷는 반드시 무게를 달아 무겁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게 지어 입었으며, 밥은 반드시 숟갈을 세어서 먹었고 씹는 것도 그 속도나 횟수가 정해져 있었다. 동작과 휴식 또한 조절하였고 마음쓰는 것도 그 심로의 분량을 근량으로 재듯 하였다. 그 외에도 선비 도인들이 산에 들어와 신선풍미에 젖은 생활을 한 일화는 무수히 많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지리산에는 신선이 푸른 학을 타고 다닌다는 한국인의 이상향, 청학동이 있다 하였으니 가히 그 비경과 풍류를 집작할 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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