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의 성과 권력 - 권택영
제2부 미학과 사회이론
2. 해결이 또 하나의 문제인 세상 - 프로이트와 토니 모리슨의 '언캐니'
1. 현미경으로 본 어둠의 속
인간의 욕망이 자기애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사회적인 정의는 어떻게 마련되어야 할까. 근원적인 나르시시즘이 무의식 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한 너를 위한 희생이나 민족을 위한 주장이 가능할까. 김형경의 단편 '단종은 키가 작다'와 '헹가래 치기', 그리고 '무거운 어둠'은 개인의 욕망이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재단하는가, 억압받는 민중 혹은 대중의 욕망이 어떻게 이 시대의 영웅을 만들어 내는가, 그리고 모든 탓을 외부로만 돌리려는 대중은 무엇을 간과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런 작품들 속에서 작가는 지배와 피지배의 이분법적인 적대관계를 허물고 그 자리에서 모든 인간의 의식 속에 내재한 어둠의 속을 꿰뚫어보려 애쓴다. 강원도 산골짜기 작은 마을은 일 년에 한 번씩 떠들썩한 행사를 치른다. 화자인 '나'는 영월읍 최대 행사인 단종제를 보러온다. 각 지방에 흩어진 전래 민속놀이를 모아 분류하는 일에 의미를 두었던 나는 단종제가 지방의 유지나 권력층에 의해 이용되는 것을 본다. 예전에는 이씨 문중의 유생들에 의해 이루어지던 행사가 지금은 지배층이 화해운운하며 정치적 욕망으로 굴절시킨다. 겨레와 민족을 앞세우며 자기욕망 채우기에 급급한 것이다. 단종의 키를 자기 욕망에 맞추어 만들어내는 지배층의 이기심과 말없이 한구석에서 단종의 유배를 가슴 아파하며 절을 올리는 농부의 아낙네가 대조되면서 단편 '단종은 키가 작다'는 끝난다. 그러나 단종의 키는 반드시 기득권층에 의해서만 굴절되지는 않는다. '헹가래 치기'에서 민중은 자기들의 욕망 때문에 영웅을 만들기에 언제든지 받치던 손을 놓아버릴 수 있다. 이 단편은 떠받쳐진 소영웅이나 받들고 있는 대중 모두를 비판적인 시각에서 본다 영혼의 자유로움과 삶의 무중력 상태에 대해 얘기하던 한 소박하고 진실했던 무명가수가 민중가수로 떠오르면서 변질된다. 히트곡을 내고 유명해지면서 그는 노래가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해야 한다면서 노동자의 편에 서고 시위현장을 따라다닌다. 그는 더 이상 외적인 환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되어 그가 한때 누렸던 진정한 자유를 잃는다. 언제 그들의 변덕에 의해 땅 위로 추락할지 모르는 그에게 음악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게 아니라 그의 자아 이상(ego-ideal)을 만족시키는 도구로 전락해 버린다.
사회 속에 들어서면서 자아는 타인을 의식하는 자아 이상을 갖게 된다. 이 자아 이상은 사회가 요구하는 '나'이기에 나르시스적 자아와 달리 이타적이 될 것을 요구받는다. 그러나 자아 이상은 순수한 이성이 될 수 없다. 그 뒤에는 사라지지 않고 틈틈이 귀환하는 근원적 나르시시즘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순수하게 이타적이라고 부르는 많은 것들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았을 때 자기애에서 출발한다. 이런 프로이트의 암시는 이 단편에서 한 무명가수의 소영웅주의와 변덕스러운 대중의 속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자아 이상이 자아로부터 너무 멀리 가버릴 때 온갖 출세와 명예에도 불구하고 공허함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편 '무거운 어둠'은 대학의 연극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하여 인간의 영웅심리 속에 도사린 교활한 이중성과 모든 사태를 외부에서만 찾으려드는 민중의 우매함을 그린다. 사실 이 둘의 관계는 동전의 앞뒷면처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카리스마적 지배욕을 그럴싸한 말로 감쪽같이 위장하고 가장 민주적인 체하는 연출자의 이중성을 꿰뚫어 보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런 교활함은 늘 원인을 반대쪽에서만 찾으려드는 인간의 피해의식 위에 뿌리내리기 때문이다. 폭력의 악순환은 바로 망원경으로만 사태를 보는 데 있지 않을까. 작가는 인간의 내부에 잠재한 이기심을 꿰뚫어볼 현미경이 함께 필요하다고 암시한다. 현미경으로 보는 인간의 세계는 지극히 회의적 이어서 사회의 정의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인지 답답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김형경이 현미경을 들이게는 현장은 지금까지 별 의심을 품지 않고 우리가 정의라고 믿어온 것들에 대한 의심이요, 망원경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단순한 추종에 대한 염려이다. 이제 말과 설득, 이념, 지배와 피지배의 갈등에 대한 탈신비화 작업을 벗어나 후기 산업사회의 여러가지 현상에 대한 풍자와 비판으로 넘어가 본다.
2. 현대 산업사회와 주체 속의 타자
인간은 더 많은 사람이 더 편리하게 더 잘 살기 위하여 도구를 사용하고 기술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문명은 인간이 동물과 달리 이성의 소유자라는 자랑스러움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인간이 중심이 되어 이룬 기술과 개발은 거꾸로 인간을 구속하기 시작했다. 자연과 인성의 황폐화는 어쩔 수 없는 인구증가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이성을 너무 믿은 데서 일어난 시행착오는 아닌가. 인간 중심주의의 허구를 드러내고 자연과 인간을 동등하게 대하자. 이성 중심주의가 낳은 예기치 못했던 여러 징후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의도와 결과가 달라진 이유를 겸손하게 찾으려 했다. 우선 이성의 명령이 실천되는 단계에서 어떤 욕망이 개입되는가 보자. 주체 속에는 투명한 실천을 방해하는 타자가 들어 있는 게 아니냐. 인간의 꿈과 개발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을 때 사람들은 자신이 해온 일을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사불란한 시도를 가로막는 이물질인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런 반성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그 시도 역시 타자를 지니기 때문에 시간이 흘러 욕망과 상업주의에 오염되지 않을 수 없게 되지만 그들의 의도는 이성의 투명성을 의심해보고 무조건 앞으로만 치닫는 산업화에 제동을 걸기 위한 것이었다. 김형경의 최근 소설들은 바로 인간이 만든 기계와 후기 산업사회의 징후들이 어떻게 주인을 소외시키고 오히려 그들의 노예로 만드는가를 보여준다. 자동차의 핸들 위에 놓인 손, 컴퓨터의 키보드 위에 놓인 손을 바라보며 '손은 몸으로 돌아가고 싶다'의 화자는 더 이상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손을 본다. 자신의 의지대로 손을 움직이던 시절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어릴 적에 그토록 싫어했던 국수장막. 그러나 아버지도 기계에 의해 손을 잃었고 라면이 나오면서 손의 쓸모를 잃는다. 활력을 잃고 점점 무력해지는 현대인의 아내 역시 그런 남편과 조금씩 멀어진다. 그들은 서로의 가슴속에서 '낮은 곳으로 미끄러져 내리는 단층'을 본다. 이 단편은 아내와 멀어진 남편이 과거를 떠올리면서 손이 도구였던 옛날을 그리워하지만 그것이 인류가 지향해온 발달이라는 과정의 산물임을 의식하는데서 끝난다. 체념, 무력함, 아니 발전에 대한 반성이라고 해야 할까. 분명히 기술의 발달이 부른 아이러니와 함께 이성의 투명성에 대한 회의가 짙게 배어나온다.
무력감은 과거에 대한 향수와 탈출구 없는 현실의 압박감에서 나온다. 단편, '푸른 나무의 기억'은 무력감을 넘어서 아예 현실에 철저히 적응하는 한 도시인의 일상을 코믹하게 다룬다. 그는 늘 호주머니에는 돈 한푼 없으면서 한 번 멋지게 큰 돈을 벌어보겠다는 소망을 품고 산다. 아이디어 시대를 풍자하듯이 그의 머리 속은 갖가지 기발한 돈벌이 궁리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이미 다른 사람들이 거의 다 해버려 늦게 태어난 것이 한스럽다. 무엇에 기대어 살 것인가, 밀가루 반죽처럼 뒤죽박죽인 세상. 그는 도시의 나무처럼 겉은 멀쩡해도 속은 병들어 있다. 비록 나무처럼 언젠가 푸른 들판에서 자라던 기억이 남아 있지만 그는 아주 건강하다. 이 단편의 묘미는 그가 병든 현실에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그 현실에 부지런히 적응해 가면서 스스로를 아주 건강하다고 믿는 데 있다. 오염이 더 이상 오염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너무 깊숙이 그 속에 빠진 탓이다. 독자가 느끼는 건강과 오염의 차이는 주인공이 느끼는 차이와 다르다. 미학적인 거리를 주어 허황한 몽상가를 만드는 아이디어의 시대를 풍자하는 기법이다. 후기 산업사회는 감동이 없는 시대이기도 하다. 충격적인 일들이 매일 쏟아져 나오는 현실에서 사람들은 이미 감각이 무디어 졌거나 힘든 경쟁 사회를 살아내느라 스스로 무감동해 졌는지도 모른다. 그런 사회 속에서 감동을 만들어내기란 쉽지 않다. 텔레비전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팀은 감동을 만들어내기 위해 거짓 각본을 꾸민다. 드라마도 아닌 실제 인물에 관한 원고를 꾸며 쓰는 일을 하면서 화자는 묻는다. 대체 우리는 무엇에 의해 휘둘리고 있느냐고. 이제 어떤 자극과 충격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것인가.
단편 '수레 국화가 말하기를'에서는 기만과 자극의 농도가 갈수록 강해져야 하는 고도의 기술경쟁 사회의 단면이 한 극본가의 고뇌를 통해 비추어지고 있다. '별을 분양해드립니다' 역시 각종 광고 문구로 머릿속이 가득 찬 한 광고 회사원의 허위에 가득 찬 삶을 담는다. 시골의 흙에 묻힌 선배의 새 삶을 돌아보고 광고 만들기란 환상과 거짓을 파는 행위임을 알면서도 그는 그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자신이 만든 문명의 산물들이 거꾸로 그를 가두는 덫이 된다. 김형경의 최근소설들은 이런 아이러니를 광고, 다큐멘터리, 아이디어 지상주의 속에 깃든 환상과 허구를 통해 보여준다. 주인공들은 그런 세계 속에 던져진 채로 잘못되었음을 막연히 느끼지만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무기력하다. 초기의 소설들이 저항과 지배 속에 깃든 타자를 보여주었다면 최근의 단편들은 제도와 흐름의 일부로서 막연히 느끼는 거부감을 보여준다. 잘못이 외부에서만 온다고 믿는 피해의식에 현미경을 들이대고 주체가 지닌 나르시스적 자기애를 보여주던 서술에서 더 이상 저항할 외적인 대상이 사라진 시대에 느끼는 불안감으로 옮아간다. 이런 변모는 무엇을 의미할까? 시대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동구권이 무너지고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 이념의 논쟁이나 저항할 구체적인 대상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성큼 무한경쟁이라는 후기 산업사치의 징후들이 나타난다. 이제 억압의 대상은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억압의 실체도 인간스스로가 즐거이 참여하고 마련해온 산업사회요 기술문명이다. 그러기에 거부감은 인간의 이성이 만든 덫과 인구의 증가와 자연의 소모에서 오는 피할 수 없는 현실에 의한 것이어서 저항보다는 반성과 무력감이 흐른다. 의도한 것과 결과가 빗나가는 모순된 역사가 주체 속의 이물질인 타자의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
이런 시간의 흐름 속에서 김형경이 여러 단편들을 통해 추적해온 주제는 이제 한곳으로 모아져 장편소설로 나타난다. 외적인 저항의 대상이 존재했던 80년대의 학창시절을 돌아보고 시간이 흐른 뒤 그들이 어떻게 변모했는지를 따스한 연민으로 추적한 장편, '거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이다. 지금까지 암시적 배경이던 '달라진 시대'가 확연히 나타난다. 아니 그 자체가 주제이다. 그리고 역시 암시적이던 '나르시스적 주체'가 주제는 물론 기법으로 승화된다. 젊은 시절의 정의감, 맑고 순수했던 현실개혁에의 의지가 이전 작품들과 달리 회의적인 시선으로 전달되지 않고 진지한 열정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그 열정을 알면서도 한 마음이 될 수 없는 저마다의 입장이 무리 없이 서술된다. 마지막으로 서로 사랑하면서도 맺어지지 못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깊은 강이 나르시스의 슬픔으로 작품 전체를 감싸안는다. 지금까지 써온 글들의 총화랄까, 순수한 열정에 대한 공감과 죄의식이 압도적인 분위기여서 무력감 대신에 기대와 동정이 앞서고 여전히 인간사이의 심연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사랑의 진실과 서술기법으로 전달된다. 이제 새들이 제 이름만 부르며 울 수밖에 없는 단절과 시대적인 아픔을 글이 쓰여진 방식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본다. 이 작품의 품위는 무엇이고 한계는 무엇일까.
3. 새들은 왜 제 이름만 부르며 우는가
민중벽화는 80년대 격렬한 대학생 시위문화의 주요한 부분이었다. 민중의 시와 벽화를 중심으로 모였던 다섯 명의 대학생들이 세월이 흘러한 여학생의 자살을 계기로 다시 만난다. 맑고 순수한 의지로 투쟁했던 최민화의 죽음이 나머지 친구들에게 불러일으키는 반향, 그것이 서술의 핵심이다. 따라서 핵심인물인 최민화는 서술의 주체가 아니고 대상이다. 그녀의 존재는 네 인물이 번갈아가면서 서술하는 가운데 형상화되며 아무도 그녀의 열정에 대해 비웃거나 의심하지 않는다. 그녀와 졸업 후까지도 만나고 늘 도우려 애쓰지만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삶을 대하는 시각이 달라 그녀를 구해내지 못한 진은혜, 한때 은혜를 좋아했지만 마 음을 전하지 못하고 고등학교 미술교사의 현실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착 하고 과묵한 구운형, 운형의 묵묵한 인내를 못마땅해 하고 형조의 개인전을 오해하고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기에 결코 남을 사랑하지 못하는 김시현, 그리고 사상적으로 민화와 가장 가까이에 있었고 마지막 죽음의 현장에도 있었지만 결코 그녀를 구해낼 수 없었던 민중화가 민형조. 서술은 이 네 사람이 차례대로 두 번씩 맡아 모두 여덟 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서술자는 내포작가 한 사람이지만 부분마다 시점자가 달라지는 입장서술이다. 하나의 서술자가 운형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다음에는 은혜와 입장에서 서술하기에 문체는 달라지지 않고 중심인물만이 달라진다. 세상을 보는 시각이 개인의 입장에 따라 다르고 그러기에 인간 사이의 단절과 심연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작품의 주제와 잘 맞아드는 기법이다.
심한 두통으로 시달려 정신과 의사를 찾는 운형, 잡지사에 근무하는 은혜, 명상원을 운영하는 시현, 그리고 탄광촌에서 노동하며 그림을 그리는 형조는 어느 날 민화의 죽음으로 한데 모인다. 그들은 서로가 그녀의 죽음에 깊은 죄의식을 느낀다. 죄의식은 경찰이 자살 방조자를 찾는 추리극으로 발전되고 형조가 현장에 있었음이 드러난다. 밤이면 서울의 곳곳에 그려지는 벽화사건의 범인 역시 형조였다. 형조의 재판, 운형의 죄의식이 부른 시력상실, 끝까지 형조를 사랑하고 돕지만 맺어지지 못하는 은혜, 자조 속에서 인도로 고행의 길을 떠나는 시현, 그리고 운형을 사랑했지만 죽는 순간에 밖에 말할 수 없었던 민화의 이야기가 파편화된 서술 속에 묻힌 내용이다. 이런 스토리는 네 명의 시점자에 의해 전달되기에 겹치는 부분도 있고 주로 의식을 더듬기에 행동보다 서술이 더 많아 플롯을 느슨하게 만들고 지루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면서 마음을 전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와 개인을 둘러싼 지극한 고독 그것으로 인한 열정과 방황이라는 젊음의 고뇌가 느슨한 플롯에서 오는 지루한 읽기를 밀어낸다. 또한 비슷비슷하게 착한 인물들 가운데 유독 톡 튀는 인물이 있어 서술의 평면성을 보완해준다. 사실 이 인물이 없었더라면 소설은 감상성이지나치고 인물들 사이의 변별성이 약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바로 김시현이다. 작가는 한쪽 눈을 반쯤 감고 인물들을 연민의 눈으로 보다가 이 인물에 오면 정신이 번쩍난다는 듯이 두 눈을 활짝 뜨는 느낌이다. 김시현은 자기학대와 고독이 묘하게 한 자리에 있으며 세상을 뒤틀린 마음으로 보면서도 그 세상에 누구보다 적응을 잘하는 이중적인 인물이다. 작가가 지금까지 그려온 위선적인 인물들의 총화라고 볼 수 있는데 다른 점은 그의 뒤틀린 삶이 기댈 곳 없는 고독 때문이라는 암시가 있어 풍자지만 냉소보다 연민을 느끼게 한다는 점이다. 그는 왜 사랑을 할 수 없는가 라는 이 소설의 주제를 살리는 데 단단히 한 몫을 한다. 다른 인물들이 막연히 내부의 타자에 의해 오해하거나 전혀 의식하지 못하거나 (운형의 경우) 용기가 없어 말을 못할 때(형조의 경우) 오직 이 인물만은 자신이 원하는 여자를 덥썩 차지한다. 그에게 사랑은 성욕의 해소와 자기과시를 위한 도구이다. 그는 정의를 보면 화가 나고 온당함에는 혐오를 느낀다. 그에게 사랑은 학대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기에 남을 사랑하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명예와 과시욕에 허덕인다.
운형은 은혜를, 은혜는 형조를, 형조는 은혜를, 민화는 운형을 사랑했고 시현은 아무도 사랑하지 못한다. 다섯 사람은 각기 자신의 세계 속에 갇혀 타인의 마음을 읽지 못한다. 마치 새들이 제 이름만 부르며 우는 것처럼. 이 소설은 지나간 운동권 시절을 되돌아본 회고의 서술일 뿐 아니라 자신의 입장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그린 것이기도 하다. 달라진 시대에 더 이상 적응하지 못하고 자신의 한계는 여기까지라고 말하는 민화의 아픔에 공감하면서도 아무도 그녀를 구해내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죽음에 이르는 데 방조한다. 물론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은혜는 약을 구해주고 시현은 죽으라고 소리치고 운형은 그녀를 외롭게 만들었으며 형조는 그녀가 정말로 암에 걸린 것이라고 쉽게 믿어버린다. 이런 설정은 그녀의 죽음을 사회적 책임으로 환원시키는 해석을 내리게도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주체 속의 타자' 라는 문맥에서 보면 그보다는 좀 더 복합적인 해석을 내릴 수 있다. 제목이 암시하듯 인간이해의 한계를 보여주어 우리에게 과연 사랑이란 어떤 형태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진실이 입장의 산물일 때 우리가 의지해야 할 기준은 어떤 것인지 묻는다. 다원화와 다양한 가치가 존중되는 시대를 반영하는 기법이면서도 절대가치를 추구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있다. 결코 되돌아갈 수 없기에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과거, 모르고 흘려보낸 시간들이 아쉽게 작품 속에 녹아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김형경의 작품세계를 '나르시스적 주체의 슬픔'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았다. 인간은 어릴 적에 느꼈던 지복의 순간을 잊지 못하고 성인이 되어서도 그 이상향에 대한 꿈을 결코 버리지 않는다. 자아와 타자가 완전히 일치하던 나르시스적 자기애는 주체형성의 기본이 되어 의식을 간섭하는 타자로 영원히 자리잡는다. 내면에 있는 무의식의 존재가 타인과의 완벽한 의사소통을 가로막고 말의 투명성을 방해하며 의도와 결과를 빗나가게 만든다.
가장 최근에 쓰여진 중편, '민둥산에서의 하룻밤'을 보자. 암선고를 받은 아내가 이혼한 남편을 다시 만나 지나간 시간을 아쉬워한다. 남편은 정보화사회니 컴퓨터니 빠르게 달라지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아내에게 마음 쓸 여유가 없다. 삭막한 도시에서 정 붙일 곳을 잃은 아내는 마음 속에 깊은 골을 키워가고 결국 이혼하기에 이른다. 세월이 흘러 암선고를 받은 어느 날 둘은 다시 만나 그들이 낭비해버린 소중한 시간들을 돌아본다. 왜 좀 더 일찍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던가, 말을 해도 알까말까한데 왜 우리는 서로 마음을 열지 못하는가. 그러나 불투명한 이성을 끌어안고 살기에 우리는 늘 인생이 무엇이냐고 묻고 그런 물음이 지속되기에 소설은 쓰이고 또 쓰이는가 보다. 프로이트가 인간의 심리를 나르시시즘으로 설명한 것은 물론 가설이다. 인간의 자만과 독선을 경고하기 위해, 우리 삶의 한계를 짚어주기 위해 그는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신화로부터 그런 가설을 끌어내었다. 그러므로 이 글은 그런 가설 위에 쓰여진 또 하나의 가설이 된다. 그러나 이 세상에 가설 아닌 진리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프로이트의 글이 주는 품위는 인간의 한계에 대한 깨달음과 타인에 대한 따스한 이해를 통해 올바르게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하려는 데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작가의 품위이기도 하다.
4. 에로스와 문명
혼혈성(hybridity)이란 단음조, 혹은 배타성에 반대되는 용어로 최근이론들에서 자주 언급된다. 하나의 음성과 반대 음성이 공존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논리에서 혼혈성은 바흐친의 대화적 상상력이나 탈식민주의 혼성서술, 그리고 호미 바바(Homi Bhabha)의 문화이론 등 이 시대 사상과 서술양식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바바는 문화적 혼혈성의 근거를 데리다와 라캉, 아니 누구보다 프로이트에게서 찾는다. 의미의 흘러 넘침, 틈새, 양가성, 어김, 모호성, 우수리는 혼혈성과 거의 같은 맥락의 말이다. 무의식이란 의식의 독자성에 어깃장을 놓는 갈림으로 프로이트 이론의 핵심이다. 또한 분석자와 환자사이의 '전이'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신분석은 근원이 어딘가에 온전하게 묻혀진 게 아니라 둘 사이의 욕망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눈덩이처럼 덧붙여지는 대화의 산물이다. 라캉은 프로이트가 암시했지만 인정하기를 망설인 전이를 한층 더 밀고 나가 분석이란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바로 지금 너의 욕망을 묻는 것이라고 말한다. 의미는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표층 위에, 현재의 욕망속에 떠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의 산종 혹은 덧칠해짐을 언어철학에 대입시킨 것이 데리다의 산종이다. 근원의 독자성을 의심하며 의미란 둘 사이의 대화 속에서 덧칠해지며 만들어진다는 것은 의미를 자꾸만 지연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것을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맥으로 확장시켜보자.
오늘날 우리가 "전통 문화"라고 부르는 것은 중국 유교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우리가 중국의 유교 문화를 받아들이기 전에는 불교문화의 흔적이 많았다. 물론 그 이전에는 또 다른 문화의 흔적이 남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화란 무엇인가. 시간이 흐를수록 원래의 것에 외래의 것이 덧칠해진 것이다. 어느 시대의 것을 고유 문화라고 가려낼 수 있는가, 유교 문화라고 하지만 중국과 달리 한국적인 것이요 서구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지만 순전한 서구가 아닌 이유는 문화란 그렇게 순수한 것이 아니고 이미 덧칠해진 것에 자꾸만 덧칠해지는 혼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바바는 이것을 데리다의 산종(dissemination)을 본따 문화의 산종(dissemination)이라고 표현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도 의미가 산종된다는 것이다. 그는 '국가와 서사'(Nation, Narration)에서 한 국가의 개념이 서사임을 암시했다. 역사가 서사이듯 국가라는 개념도 독특하고 고유한 고정불변의 개념이 아니라 엮이고 짜여서 그럴 듯이 꾸며진 서술이다. 그런데 이런 바바의 문화의 혼혈성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전이, 언캐니, 모호성, 양가성, 상징계를 전복하는 우수리인 라캉의 실재계 등이다. 한 나라의 문화는 이미 혼혈적이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덧칠해지는 전이의 산물이다.
문화가 그렇다면 문명은 어떨까. 문명의 기원은 무엇이고 그것의 발생과정은 어떤 형식의 서사일까. 프로이트의 글 가운데 문명비판에 관한 글들을 더듬어보자. 프로이트의 글가운데에서 지금까지 가장 주목을 받지 못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분야이다. 그는 초기에 무의식의 존재를 증명하는 도발적이고 혁명적인 글인 '꿈의 분석'을 비롯하여 '성이론에 관한 세 글', '히스테리 분석의 파편','창조적 작가와 백일몽', '문명화된 성도덕과 현대 신경증'등을 썼다. 이런 혁명성은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양가적 입장을 취하여 그가 강조한 에로스와 리비도는 그것을 억압하는 문명이나 현실원칙과 역동적인 긴장을 이룬다. 이때 나오는 글들이 주체와 성본능을 밝힌 '나르시시즘에 관하여'와 '본능과 그것의 변모', 그리고 미학에서 중시되는 '언캐니', '쾌감원칙을 넘어서', '미켈란젤로의 모세상'등이다. '반복충동'이라는 후기의 중요한 개념이 선을 보이는 시기도 이때였다. 성이론의 혁명성이 '여성성'과 같은 후기 글에서 현실을 설명하는 보수적인 성향을 내비칠 즈음 프로이트는 사회와 문명에 대한 글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욕망과 현실, 혹은 성과 사회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에 그의 사회 문명론이 꼭 후기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초기의 글보다 그쪽에 더 관심을 보이게 된 것은 유대인으로서 나치의 인종차별과 박해가 심해지던 시기였고 그런 현실에 대해 그는 무엇인가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인간은 나이가 들면서 역사에 대해 더 관심을 보이게 되는지도 모른다. 무의식의 발견과 억압된 무의식이 되돌아 오는 것은 그의 글 전체를 통해 일관성있게 되풀이된다. 그리고 무의식과 성이론. 그리고 미학이론은 그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반박되고 재창조되어 왔지만 문명론 분야만은 큰 반응을 일으키지 않아 왔다. 특히 이시대에 와서는 여성이론가들이 무의식과 성을, 서사론자들이 미학이론을 논의하고 부활시켜왔다. 최근에 몇몇 이론가들이 문명분야를 조명하기 시작했지만 그것이 아직 활발하지는 않다. 왜 그럴까. 혹시 그 분야가 지닌 터부가 있는 것은 아닐까. 종교의 기원을 파고든다는.
이 글의 목적은 프로이트의 글들속에 일관되게 되풀이되는 '억압된 것의 귀환'이 사회이론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고 그것이 지닌 한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현대에 어떻게 재해석될 수 있는지 알아보는 데 있다. 다 문화주의, 혹은 탈식민주의에서 멋지게 프로이트를 재해석한 바바의 문화의 혼혈성이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 문화가 어떻게 자리잡는지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프로이트의 문명의 기원 혹은 종교의 발생은 어떤 짜임새로 시작되었을까. 그것은 분명히 동양의 종교관과 큰차이가 있을 것이다. 혁명적이니까. 아니 죄의식의 문화를 낳는 지극히 보수적인 것일는지도 모른다. 혁명성과 보수성 사이에서 늘 긴장을 유지해온 프로이트의 글들에서 무의식의 귀환이 어떻게 되풀이되는지 보자.
1. 에로스와 문명의 밀월관계
인간은 왜 늘 행복해지려고 애쓰면서도 완전한 지복을 맛보지 못하는가. 그렇게도 원하는 대상을 얻었지만 행복은 찰나적인 것일 뿐 다시 마음 속에는 뭔가 공허가, 불만이 고인다. 내일, 내일이면 뭔가 끝이 보이겠지. 그러나 가슴 속의 고동이 멈추는 순간에 그는 삶이 참 허무했다는 것을 느낄 뿐이다. 겨우 이것밖에 안 되는데 그렇게 많은 것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말이지. 이 결핍과 불만은 어디에서 오는가 존재의 근원은 무엇인가. 밥먹고 노동하고 잠자는 시간을 빼놓고 문득문득 삶의 참모습을 더듬지 않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철학자와 예술가는 그것을 파고들어 매개를 통해 표현하려 애써왔다. 누가 더 리얼하게 삶의 실체를 그려 내는가. 물론 프로이트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인간의 불만과 허무를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신경증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더듬어간다. 가장 불만을 다스리지 못하는 밀려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치료가 과학이 되기를 원하면서도 분석이란 기억을 통해 마음을 읽는 작업이기에 그는 가설을 세우고 허구가 개입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후세 사람들은 오히려 이 과학과 허구의 공간에서 그의 위대성을 읽어낸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소망은 무엇일까. 어떤 소외가 가장 치명적인 것일까.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나온 일, 거기서부터 숨 쉬기가 시작된다.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되돌아가는 것. 이것이 삶이라면 탄생도 죽음도 어머니, 대지, 흙과 연결되고 우리가 뿌리내린 이것으로부터의 분리가 우리를 불안과 결핍에 시달리게 한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어머니로부터 시작되고 아버지에 의해 간섭받는다. 비록 떨어져 나왔지만 아직 그녀의 품안에서 잠들던 시절 아이는 평화와 아늑함을 맛본다. 둘 사이를 가로막는 타자를 모른다. 그녀가 나의 결핍을 완벽히 충족시켜 주듯이 나는 그녀의 완전한 연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는 둘 사이를 가로막는 최초의 타자를 의식하게 된다. 아버지다. 그리고 그녀가 이미 아버지의 연인이었음을 알게 된다. 타자의 존재를 알게 되는 순간은 아이에게도 치명적인 순간이지만 인류에게도 원죄를 짓게 되는 순간이다. 낙원의 상실이다. 보기만 하던 아이는 이제 자신이 보여지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버지에 의해 보여짐을 의식하게 되면서 아이는 아늑한 평화와 지복을 잃고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애쓴다.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에 의해 벌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는 아버지에 대해 두려움과 애정, 증오와 사랑이라는 양가적 감흥을 갖게 된다. 억압이 시작되고 불안이 자리잡는 순간이다. 아버지는 현실원칙이요, 사회의 법이요, 문명이요, 종교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가 아무리 현실원칙을 받아들이려 해도 한 번 맛본 지복의 순간을 잊지도 포기하지도 못한다는 데 있다.
유아기에 경험한 최초의 성은 아이의 일생에 영향을 미친다. 그는 늘 그 그늘 속에서 대상을 찾고 그녀가 아닌 것을 알고는 실망한다.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그때 그 시절, 그리고 입맞춤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던 그때 그녀를 결코 포기하지 못하는 것, 이것이 삶의 허무와 존재의 결핍을 낳는 비극의 근원이고 프로이트 이론의 핵심이다. 낙원으로 돌아가고픈 갈망은 끈질겨서 꿈으로, 성욕으로, 말 실수로, 예술로, 문명으로, 그리고 종교로 승화되지만 소망은 결코 완벽하게 충족되는 법이 없다. 어머니와 하나가 되는 길은 오직 하나, 대지의 품에 안기는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머니는 에로스요, 아버지는 이 에로스를 가로막는 문명이다. 그리고 이 셋이 이루는 가족 로맨스가 프로이트 이론의 출발점이다. 그러기에 모르고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여 눈을 찌르고 참회하는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프로이트에게 인간의 무의식적 소망과 비극을 가장 잘 그려낸 신화였고 그 소망이 단념되지 않고 귀환을 꿈꾸며 남아 있기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된다. 에로스와 문명은 서로 적이면서도 친구이다. 에로스를 가로막는 게 문명이지만 그 에로스는 가로막는다고 사라지지 않고 형태를 달리하여 나타나기에 문명 속에 어떤 식으로든 자리를 잡고 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질적이면서도 같은 면인 것이다. 적과의 동침이랄까.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을 제외한 모든 사랑에는 증오가 깃들어 있다. 그리고 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은 결코 마음의 안락을 되찾지 못한다. 아니 반대로 문명이 발달할수록 안락과 평화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그의 글, '문명화된 성도덕과 현대 신경증'에서 찾아보자. 문명이 발달되면 도착적인 성이 줄어들고 가족을 중심으로 안락이 이루어질 것이다. 성이란 즐기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아이를 낳아 잘 길러서 사회에 이바지하기 위한것이다. 인간의 이성은 감성을 누르며 이렇게 속삭여왔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해도 성욕은 형태를 바꾸어 존재할 뿐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사람들은 묻는다. 왜 그리 비밀스런 성이 자꾸만 늘어 가느냐고. 만화, 영화, 포르노, 창녀, 그 외 곳곳에서 금기된 성은 도처에 숨어 있고 호모, 레스비언 등 성도착도 줄어들지 않는다. 아니 시간이 흐를수록 성도착은 더 증가했다. 프로이트는 신경증과 불만에 가득 찬 현대인들의 병적인 증세를 이렇게 설명한다. 아득한 옛날에 인간은 아무런 금기 없이 자연스럽게 성을 즐겼다. 이때 성이란 아주 넓은 의미의 것으로 아이가 어머니의 입맞춤과 포옹에서 느끼는 기쁨으로부터 동성, 이성간의 온갖 전희와 어떤 형태의 것까지 제한이 없었다. 그러다가 사회가 형성되면서 성은 재생산의 목적에만 사용되도록 규제된다. 그러니까 아이를 낳는 이성간의 성행위 외의 어떤 것도 배제되는 것이다. 다음단계는 물론 법적인 재생산, 즉 합법적인 부부 사이에서만 성을 허락하고 그외의 것을 외도, 간통 등으로 배제시키는 단계이다. 배제된 모든 성을 도착이라 불러서 한때 동성애는 위법으로 구속되기까지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성은 규제되고 인간의 만족은 줄어든다.
그런데 금기된 성은 사라지는 게 아니고 주변으로 물러나 더 강한 쾌감을 준다. 쾌감원칙은 현실원칙에 의해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주변으로 물러나지만 형태를 달리하여 성도착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존재한다. '도라 분석'에서 그녀의 무의식에 가장 깊숙이 억압된 성이 동성애였듯이, 그것이 바로 신경증의 원인이었듯이, 금지된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지 만족을 추구한다. 예술가는 성본능을 현실이 인정하는 방식으로 잘 변용시키고 학교와 종교는 이것을 잘 수행하도록 돕는다. 신경증은 이것에 적응을 잘하지 못하는 경우에 일어난다. 프로이트는 유아가 생식의 목적 없이 온몸으로 느끼는 성을 자발적 성애, 혹은 '자기성애'라 이름 붙인다. 이 온몸으로 느끼는 성감대는 성장하면서 퇴화되고 아이를 낳기 위해 신체의 특정부분으로 축소되면서 이성, 혹은 대상을 사랑하게 된다. 이처럼 문명의 발달과 성의 변모는 아이가 성장하면서 겪는 성의 변모와 같다. 온몸이 성감대였던 시절에서 생식을 위한 특정 부위의 성으로 축소되는 만큼 문명은 인간의 기쁨을 축소시켜온 셈이다. 그러나 리비도의 총량은 같기 때문에 자연스런 성이 문명에 의해 축소될수록 밀려난 성은 성도착이란 형태로 귀환하여 한층 더 은밀한 쾌감으로 변모한다. 프로이트는 성이 억압되는 현실과 문명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던진다. 솔직한 사람일수록 억압을 견디지 못하기에 남자보다 여성에게 신경증이 더 많다. 결혼을 위해 억압된 성이 불감증이 되어 행복한 결혼을 가로막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결혼 후 남성은 얼마나 외도를 즐기려 애쓰는가. 전희를 비롯한 각종 도착이 여전히 비밀스레 남는데 억압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사회 도처에 신경증 환자가 늘어날수록 문명의 목적은 오히려 좌절되는 것은 아닌가. 과연 문명화된 성도덕이 인간의 쾌감본능을 희생시킬 만한 가치가 있는가 등... 프로이트의 이런 반문은 얼핏 반문명론자 같은 인상까지 풍기게 한다. 그러나 비교적 초기에 속하는 글이기에 이런 혁명성은 그가 문명을 거부해서라기 보다 그것만이 최선이라고 믿는 인간의 단순한 논리에 반론을 제기하는 일종의 대안으로 보여진다.
애정과 증오가 한 자리에 있는 에로스와 문명의 밀월관계는 프로이트의 모든 글에서 다르게 반복된다. 아버지의 금지와 그것의 상징인 사회의 법을 뚫고 틈틈이 어떤 식으로든 귀환하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 성장하면서 사회의 일원으로 삶의 무게를 힘겹게 느낄 때마다 꿈꾸는 어린시절의 무한한 평화. 사춘기에 이르러 이성에 눈을 뜨지만 사랑한다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는 것만을 깨닫고 물러서는 남녀의 사랑. 삶본능과 죽음본능의 교차 속에서 삶을 연장시키는 소설의 구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백일몽에서 비롯되는 창조적인 작가, 끝없이 환유의 고리 속을 맴도는 대상에의 추구, 쾌감원칙과 현실원칙이 서로 미워하며 사랑하며 이루어내는 서사의 플롯. 그리고 우리들의 삶. 에로스만 있으면 곧바로 죽음이요, 문명만 있으면 지루하고 건조하여 빨리 죽여달라고 애원하던 티토노스(신화 속의 인물로 새벽의 여신 오로라를 사랑하는 그는 늙은 형태로 영원히 사는 게 형벌임을 깨닫는다)의 삶과 다를 게 없다. 죽되 적당한 길이까지 다르게 반복하다 죽는 것. 이것이 아마 에로스와 문명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힌 밀월관계로 우리를 유혹하고 좌절시키며 끌어가는 삶의 동력이 아닐까 싶다. 프로이트의 사회, 문명비판을 좀 더 살펴보기 위해 주체의 문제로 넘어가 보자.
2. 에로스의 가학성
영화나 소설은 늘 사랑이라는 주제를 즐겨 다룬다. 사랑이란 인간에게 꼭 필요한 감흥이면서도 잘못되거나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토록 이야기하고 또 해도 바닥이 마르지 않는 것을 보면 사랑이란 인간의 가장 큰 갈망이면서도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야 되는지 모르는 아니, 안다 해도 실천이 어려운 소망인가보다. 그래서 동양사람들은 사랑이란 받는 게 아니고 주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을 제외하고 그렇게 주기만 하는 희생적인 사랑이 가능할까. 아니 어머니와 사랑 속에도 이기적인 자기애가 숨어 있지는 않은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자기애가 자신과 대상을 불행하게 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프로이트는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이기적인 자기애를 통해 사랑의 한계를 짚어준다. 언제나 그렇듯이 인간에 대한 이상적인 시각을 거두고 그 속에 도사린 사악한 면을 보라는 것이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경험과 소망을 어머니와 유아기의 성경험으로 놓고 그 시절에 대한 기쁨이 원초적으로 자리잡아 성장 후에도 포기되지 않는다는 프로이트의 가설은 주체의 문제에서도 반복된다. 이것이 '원초적 나르시시즘' 이다. 유아는 2세에서 4세 사이 '남근기'라고 불리는 완벽한 자아충만의 시기(auto-eroticism)를 겪는다. 이때 아이의 온몸은 그 자체가 에로스로서 성본능과 에고본능은 완벽히 일치한다. 4세 이후부터 아이는 세상에 조 금씩 눈을 뜨고 자신과 어머니 사이에 타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며 억압이 시작된다. 억압에 의해 성본능과 에고본능은 분리된다. 아이는 사춘기에 이르고 적의와 사랑 속에서 대상을 향해 리비도를 옮겨간다. 그러나 그가 찾은 대상은 어머니가 아니기에, 그의 무의식 속에는 여전히 원초적인 나르시시즘이 억압되어 있기에, 대상은 그를 결코 충족시키지 못한다. 이것이 이차적 나르시시즘이다.
대상을 선택하는 데 나르시시즘이 늘 개입되기에 자아 리비도는 대상 리비도를 방문하고 상처받으며 되돌아온다. 특히 남아는 대상에게 의존하는 정도가 강하고 여아는 원초적 나르시시즘이 강하다. 남성이 사랑에 빠질 때 여성을 더 과대평가하고 그 환상이 끝났을 때 그만큼 평가절하하거나 사랑이 강한 만큼 증오가 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성은 자아충족적인 경향이 강하여 이 무심함이 연인을 더 매혹하고 불안케 하거나 불만을 심는다. 그러나 여성도 대상을 선택하고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에게 대상 리비도가 옮아간다. 그리고 이 여성의 나르시시즘이 자식을 소유하려는 욕망이 되어 며느리나 사위와 불화를 낳기도 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받는 자신을 보기 위한 욕심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자신이 그리 되고 싶은 이상적인 타입과 딱 들어맞는 대상을 어느 날 만난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자아이상'이라 불렀고 우리는 그녀를 연인이라 부른다. 나는 그녀가 되고 싶고 그녀를 내것으로 만들고 싶다. 그러나 어머니를 잃은 나는 연인과의 완전한 일치에 이를 수 없고 깊은 열등감에서 대상을 증오하게 된다. 사랑에 그토록 증오가 깃드는 것이나 자존심의 상처가 깊은 것은 너무도 사랑하는 것이 연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사랑받으면 자존심이 서고 사랑받지 못하면 자신을 비하하게 되기에 자살에 이르거나 반대로 연인에게 상처를 주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가학주의자가 된다. 인간은 애초에 두 대상에서 출발했다. 나와 나를 돌봐주는 어머니다. 남성은 사회 속으로 진입해야 하는 압박감 때문에 대상 리비도가 강하고 이것이 여성보다 더 많은 위험을 낳는다. 여성이 자신에게 의지함에 비해 남성은 늘 대상을 추구하고 상실한 어머니를 찾기에 환상의 폭이 커지고 사랑과 증오의 폭도 커진다. 자아와 자아 이상형 사이의 틈새가 크다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높기에 그만큼 세상을 끌고 나가려는 야망도 크고 오차도 크다.
사랑에서나 세상을 끌어가는 야망에서나 리비도는 이기적인 데서 출발한다는 게 프로이트의 가설이다. 용기도 말도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게 나르시스적 주체가 갖는 한계이다. 사실은 받으려는 것이 사랑이기에 그 반대로 주는 것이라고 가르치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런 프로이트의 원초적 나르시시즘이 갖는 미덕은 무엇인가. 남을 위한다는 착각이 너무도 많은 폭력을 낳기에 차라리 솔직하게 그것을 인정하고 그 다음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뜻이다. 이상론을 포기하고 실존적 자각으로 방향을 바꾼다고 할까. 이처럼 1914년에 쓰인 '나르시시즘에 관하여'에 암시된 에로스의 이기심과 가학성은 그 다음 해에 쓰인 '본능과 그것의 변모'에서 좀 더 명확히 되풀이된다. 여기서 본능은 동물적인 속성이 아니라 인간이 지닌 "본능적인 충동"(drive)에 가깝다. 유아는 처음으로 외계를 인지할 때 자극을 받고 평화가 깨어지는 불쾌를 맛본다. 그리고 자아 보존본능은 이 자극에 강한 방어를 보이지만 다른 한편 대상을 통해 재생산을 하려는 성본능 때문에 강하게 이끌린다. 이 사랑과 증오의 양가적인 감정은 자아를 보존하려는 나르시시즘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의 대상과 하나가 되는 과정에서 맛보는 쾌감은 고통과 불쾌를 동반한다. 자아는 방어본능으로 대상에게 고통을 가한다. 그런데 그 고통은 자기를 처벌하는 고통이기도하다. 사디즘은 곧 마조히즘이다. 그리고 자아는 그 고통이 대상에게서 오는 것이라고 느낀다. 이렇게 성본능은 그 밑에 억압된 나르시시즘으로 인해 자아 보존본능이 되고 대상을 갈구하면서도 적대시하는 이중성을 띤다.
프로이트는 나르시스적인 자아본능과 대상을 추구하는 성본능이 서로 교차되면서 사랑과 성행위가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결국 성본능도 자아를 보존하려는 생산본능에서 나오므로 '쾌감원칙을 넘어서'에서는 죽음본능을 대치시킨다. 여성보다 남성의 양가적 감성이 더 강하고 유아기 성을 잘 극복하지 못한 경우사랑과 증오의 양가성이 강하게 나타난다. 물론 이때의 양가성은 성 이론에서 거세 콤플렉스로 인해 여성이 어머니로부터 아버지로 사랑의 대상을 바꿔야 하는 데서 오는 삶의 이중 적 태도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이 경우는 일관성 없는 성격으로 수동형이 되는 여성성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에로스의 공격성은 자기애가 강하여 대상을 과대평가하다가 소유하고 난 후에 과소평가하는 식의 사랑과 증오의 엇갈림을 낳는다. 에로스의 본질에 이렇게 강한 적의와 공격성이 있다는 것은 문명이 그렇게 매끄러운 이성과 교양의 산물이 아니라는 암시를 준다. 인간이 추구하는 온갖 사치적인 행위 역시 지극히 나르시스적인 자아 보존본능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무의식은 이기적이기에 개인이 모인 단체 역시 이기적인 속성을 지우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익명성으로 인해 양심과 책임감이 지워지고 집단최면에 빠지기 쉽다. 인간은 혼자서는 문화적인 개인이지만 집단 속에서는 야만적이고, 본능에 의해 움직인다. 폭력, 즉흥성, 충동, 변덕 등 무의식 그 자체가 쉽사리 드러나며 사실과 허위, 진실과 거짓의 구별이 흐려진다. 평화로운 지위대가 자칫 폭도로 바뀌는 경우는 혁명의 시기에 흔히 일어날 수 있다. 그룹은 말의 위력에 굴복하며 진실 대신 미망을 갈망한다. 그들은 자신의 이상적 자아를 투시시킨 대장을 뽑고 그의 말에 절대 복종하며 그 대가로 그룹내의 모두가 동등하게 대우받기를 원한다. 남이 더 튀는 것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부여한 환상의 옷을 입은 대장은 그들에게 미망을 불어넣어 광신적 믿음을 불러일으킨다. 그러기에 그룹은 지적으로 낮은 사람들이 높은 자들을 자기에 맞게 끌어내린다. 그룹을 움직이는 힘은 이성이나 동정심이 아니고 동일시이며 그것은 넓은 의미의 에로티즘이다. 개인과 마찬가지로 집단을 지탱하는 근본 에너지는 리비도로 개인이 타인과 동일한 감흥을 일으키는 것 은 에로스에 의해서다. 평등한 사랑이라는 환상에 의해 집단은 뭉친다. 그리고 리비도가 지닌 이기적 속성 때문에 집단은 뭉칠수록 다른 집단에 대해 잔인하다. 박애를 믿는 신도들이 그들과 다른 집단에 대해 그토록 잔인한 것이나 대장이 죽은 후 단원들이 순식간에 뿔뿔이 흩어지는 것은 에로스가 지닌 나르시시즘 때문이다. 에로스의 이기성이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곳을 집단으로 보는 프로이트의 '집단 심리학과 자아 분석'(Group Psychology and the Analysis of the Ego)에서 집단은 개인의 무의식이 뭉쳐진 곳이다. 그러므로 이기성과 나르시스적 환상이 더 잘 드러난다. 집단과 대장은 그의 사회문명이론에서 중심이 되는 '원시적 떼'와 '원초적 아버지'가 귀환한 것이다. 원시시대 인간은 무리를 지어 살았는데 그때 우두머리는 강한 의지와 모든 권한을 소유했다. 그는 자신과 라이벌이 되지 않도록 가장 나약한 막내아들을 후계자로 지목했으며 여자들을 독점했다. 아들들은 이에 반란을 일으키고 아버지를 죽인다. 그러나 혼란이 계속되자 강력한 권위를 지닌 새로운 아버지를 세운다. 대장은 단원들의 이상적 자아이다. 그러기에 둘 사이에는 과대평가와 최면을 바탕으로 굴종과 가학이 오간다. 집단 속에 숨은 폭도정신(mob spirit)을 이해하지 못하면 계몽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군대는 폭도로 변질되기 쉽고 교회는 멤버들뿐 아니라 예수님과도 동일시가 가능하기에 계발이 가능하다.
인간이 스스로의 음성을 내지 못하고 집단의 음성에 휩쓸려 억압된 폭력을 드러내는 폭도정신, 그리고 강한 것에 약하고 약한 것을 짓밟는 비겁한 굴종과 폭력은 작가들이 즐겨 다루어온 주제다. 집단 속에서 인간은 이성의 표피 아래 억압된 무질서와 공격성을 잘 드러낸다. 익명성과 동일시라는 최면에 의해서다. 프로이트는 집단이 이성이 아니라 에로스와 자기 보존본능에 의해 뭉쳐져 있음을 밝힘으로써 많은 작가들이 작품속에서 묘사한 것을 자신의 가설로써 증명하고 있다. 집단이 지닌 이런 마조히즘과 사디즘의 요소를 억제하기 위한 장치로써 문명이 필요했다. 문명은 어떻게 세워지는가. 그리고 과연 인간은 문명에 의해 뜻하던 대로 행복해졌는가.
3. 죄의식과 문명의 기원
프로이트의 가설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과 평화는 어린시절에 누렸던 순진무구의 세계이다. 이때 순진무구는 나를 보살펴주는 대지인 어머니와 나만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절대적인 너와 나의 세계이다. 제삼자가 끼어들지 못하는 상상계, 나와 나의 이상적 자아(ideal-ego)가 완벽하게 일치하는 원초적 나르시시즘, 쾌감원칙, 애정의 세계다. 그러나 낙원에 뱀이 있었듯이 세상에는 타자가 있었다. 의식에 눈을 뜨고 늘어나는 경쟁자를 의식하면서 아이는 법, 질서, 아버지를 받아들인다. 동생에게 어머니를 완전히 빼앗기기보다는 적어도 공평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려는 타협이다. 이때부터 개인의 의식 속에서 상상계는 억압된다. 물론 현실에 의해 억압된 쾌감에의 소망은 결코 포기되지 않는다. 한 가족 안에서 개인의 뇌리에 새겨지는 법과 질서는 이런 과정을 밟는다. 그러면 집단에서는 어떤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오이디푸스가 눈을 찌르고 추방됨으로써 테베시의 재난이 극복되듯이 아이는 거세의 위협을 받고 어머니에의 욕망을 거둔다. 가슴속에 죄의식을 심어주어 사회를 정화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고 원죄를 지어 낙원에서 쫓겨난 후 사회와 문명이 세워지듯이 죄의식은 서구문화의 주춧돌이었다. 프로이트 역시 문명의 기원을 죄의식에 두고 그 죄의식을 부친살해에 둔다. 그러나 그에게 순진무구했던 어린시절은 이기적이고 충동적이고 자아충족적인 에로스이다. 인간이 떼를 지어 살던 원시시대에 무리를 이 끄는 대장은 집단을 지배하고 여자들을 독점했다. 이 원초적 아버지는 자신과 라이벌이 되지 못하는 가장 나약한 막내를 후계자로 정해놓고 권력을 독점한다. 여자들이 탐난 아들들은 불만을 느끼게 되고 뭉쳐서 반란을 일으킨다. 그들은 흠모하고 질투하던 아버지를 죽인다. 그러나 형제들끼리 여자와 권력을 놓고 암투를 벌이고, 혼란과 무질서로 걷잡을 수 없게 되자 아버지를 그리워하게 된다. 그들은 이제 아버지를 상징하는 동물을 내세워 그 동물을 숭배함으로써 질서를 세운다. 이것이 토템이다. 원시시대에는 인간이 자연과 가까웠기에 동물을 아버지로 숭배하는 게 어색하지 않았다. 아들들은 아버지에 대해 느꼈던 흠모와 적의감을 토템의식 속에서 승화시키고 아버지의 존재를 강화한다. 일년에 한 번씩 토템동물을 나누어 먹는 잔치를 벌이는데 그것은 절대자와 하나가 됨으로써 증오를 없애고 존경심을 북돋는 행위였다. 먹고 싶다는 것은 그것과 하나가 되어 그것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다. 실제의 나와 자아 이상 사이의 거리를 없애는 의식이다. 이렇게 하여 다시 세워진 아버지는 원초적인 아버지보다 훨씬 더 강한 아버지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토템과 타부'에서 인류문화의 근원을 추적하기 위해 많은 자료들을 섭렵하며 그것이 부친을 살해한 죄의식에서 출발했고 그 근원에는 흠모와 증오의 양가적 감흥이 숨겨져 있다고 말한다. 아버지를 죽인 죄의식과 후회로 아들은 아버지 대신 세운 토템을 절대 자로 숭배한다. 허구적일수록 더 강렬하게 믿는다. 문명은 이처럼 에로스에 의해 뭉쳐진 집단의 죄의식에 의해 생겨나고 유지된다. 쾌감원칙이 문명을 낳고 현실원칙이 이를 지속시킨다. 오랫동안 토템의식을 되풀이 해온 인간은 어느 사이 죄의식을 내부에 심게 된다. 이제 자신의 내부에 자신의 에로스를 감시하는 초자아를 갖게 되는 것이다. 푸코의 원형감옥처럼 감시는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내부로 잠재해서 자아를 검열한다. 이제 인간은 자신의 내부에 억압된 욕망과 감시기관과 이 둘 사이를 조정하는 자아라는 지형도를 갖는다. 어떻게 이 둘을 배분해야 사회도 유지하고 행복도 누릴 것인가. 이것이 행복의 경제학이다. 에로스는 직접적으로 충족될 때 최고의 만족을 준다. 그러나 초자아는 그 길을 거부한다. 우회하는 수밖에 없다. 삶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우회하는 방법으로 프로이트는 과학과 예술 그리고 술이나 마약 같은 탈출구를 예로 든다. 종교 역시 삶의 고통과 불안을 줄이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에로스의 공격성을 줄이고 억제하거나 우회시키는 것이 문명이다. 그러나 인간의 불만이 고조되면 에로스가 히스테리로 폭발할 수 있다. '문명 속의 불만'(Civilization and Its Discontents)을 쓰면서 프로이트는 인간에 내재한 파괴본능을 감지하고 이를 죽음본능이라 이름붙인다. 삶을 지속시키려는 자아 보존본능이나 성본능과 반대로 에로스가 지닌 가학성은 억압되어 조금씩 분출되는 출구를 찾지 못하면 파괴본능으로 바뀐다. 나치즘의 광기가 유럽을 휩쓸기 시작하던 1930년에 쓰인 이 글에서 프로이트는 집단 히스테리가 역사의 어떤 시기에 분출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본성 속에 잠재한 공격성을 밝히며 종교가 바다와 같은 체험이라거나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등의 이상론이 현실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문명과 에로스의 애증관계를 개인의 문제에서 사회, 문명의 영역으로 확대시키는 프로이트의 일관성 있는 사고를 보게 된다. 문명은 쾌감원칙에서 태어나 현실원칙에 의해서 유지된다는 그의 이론이 이제 종교의 문제에서는 어떻게 적용되는지 보자. 유대인으로 끊임없이 나치로부터 위협받았고 다가오는 대량학살을 감지하던 1930년대, 그는 개인의 심리 속에만 머물 수 없었다. 민족이란 어떻게 유래되는가.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는 무엇이길래 한 종교가 다른 종교를 탄압하는가. 유대인의 선민의식은 어디에서 왔는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은 그렇게 이질적인 두 갈래일까. 이런 의문은 '토템과 타부' 이후 그의 뇌리에 선명해진 흠모와 증오의 양가성, '쾌감원칙을 넘어서'이후 그를 사로잡은 '반복충동'과 연결되어 그에게 도전적인 글, '모세와 일신교'(Moses and Monotheism: Three Essays)를 낳게 한다. 나치의 위협 속에서 오직 주교의 보호를 받고 있었던 그는 이 글을 1934년부터 썼지만 감히 출판을 하지 못했다. 1938년 나이 82세가 되어 독일의 침공으로 런던으로 망명한 프로이트는 이전에 써놓았던 '모세는 이집트인이었다'와 '만일 모세가 이집트인이었다면'에 이어서 제3부 '모세, 그의 백성, 유일신교'를 쓴다. 러시아가 사회주의 혁명과 함께 종교를 아편으로 금지하고,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독일의 원시적 야만성을 보면서 그는 종교란 일종의 억압기제지만 더 큰 폭력을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이 글은 외적인 억압으로 출판을 못한 앞의 부분에 덧붙이고 다시 쓰여서 글 자체가 이미 자신의 반복충동을 실천하고 있는 듯 보인다.
프로이트의 사유는 너무도 낯익은 사실을 의심해보는 데서 시작된다. 모세가 히브리인이 아니고 이집트인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다. 그는 지금까지 모아진 낯익은 자료들에서 그런 낯선 의문의 근거를 찾는다. 전설이나 영웅담의 낯익은 패턴을 보자. 오이디푸스, 파리스, 헤라클레스... 그들은 한결같이 왕이나 귀족의 아들로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난다. 그러나 신탁이나 다른 두려움으로 버림받고 훗날 다시 영웅이 되어 자신의 신분을 되찾는다. 물론 이런 전설은 후세인들이 자신들의 영웅을 합리화시키고 고귀하게 만들기 위해 신분을 상승시키는 예가 많다. 그러나 어찌됐든 모든 전설의 일반 패턴은 '가족 로맨스'(Family Romances)의 경우를 따른다. 어린시절의 부모는 아이에게 최고의 존재였지만 성장하면서 타인과 비교되어 왜소해진다. 아이는 실망으로 아버지를 증오하거나 백일몽 속에서 황제를 꿈꾼다. 모든 신화의 패턴도 이와 비슷하다. 왕이나 귀족 부모 밑에서 태어나지만 초라한 부모 밑에서 성장한다. 그런데 왜 모세의 경우는 그 반대인가. 그는 초라한 부모에서 태어나 귀족 부모에서 성장한다. 히브리인에게서 태어나 이집트 황녀가 기른 것이 아니고 파라오의 딸이 경고를 받고 몰래 물에 띄워 평민이 기른 것이 아니냐. 후에 거국적인 목적으로 반대로 수정되었다면 이집트인이 아니고 유대인이 그리했을 것이다. 이집트인이 모세를 영광스레 만들 이유가 없을 테니까. 그런데 히브리인들이 자신들의 영웅이 파라오의 딸인 것을 어찌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그러니 친숙한 신화의 패턴이 뒤집어진 것이다. 그런데 잠깐, 지금 프로이트가 해석하는 방식은 어딘지 낯익다. 바로 꿈의 분석이다. 내용물이 상징으로 압축되고 다시 옆의 것으로 뒤바뀐다. 신화의 낯익은 패턴이 자리바꿈(displacement)하여 거꾸로 된 것을 의심하고 그는 모세가 히브리인이 아니고 그들의 적이었던 이집트인이 아니었나 의심하는 것이다.
모세는 이집트인이었는데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 유대인으로 만들었다는 가설을 한 단계 더 밀고 나가 보자. 이집트 종교는 다신교였으나 내세를 믿었고 유대교는 유일신교였으나 내세를 믿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이집트의 종교를 유대인들에게 부여한 게 아닌가. 그가 저절로 다른 민족의 법 제정자요, 정치지도자요, 종교의 창시자가 될 수는 없었으리라, 그는 이집트의 패망한 아켄나텐 왕국의 아텐교를 유대인에게 전파한다. 아텐교는 내세를 믿는 유일신교였다. 모세는 이집트만의 관습인 할례를 유대인에게 전파한다. 만약 그가 유대인이라면 무엇하러 적인 이집트의 관습을 옮겼겠는가, 그는 이집트의 귀족으로 야망이 컸으나 왕국이 멸망하자 고센지방의 통치자로 그곳의 유대인들을 선택해 자신의 야망을 이룬다. 그러므로 엑소더스는 평화롭게 이루어진다. 성경 외 유대인들의 문학속에 그려진 모세는 야망, 성급함, 분노 등 이집트귀족의 성향을 많이 드러낸다. 유대교에 나오는 아텐신에 대한고백, 모세라는 이름의 어원, 그리고 "연설이 어눌해서 파라오와 얘기할 때 형 아론의 도움이 필요했다"는 증거들을 인용하면서 프로이트는 다른 글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가설을 뒷받침할 자료들을 제시한다. 모세의 어눌함을 그가 이집트인이었기에 유대말에 어눌했다고 거꾸로 풀이하는 그는 정신분석의 두 가지 방식인 압축과 자리바꿈(전치)을 '서사로서의 역사'에 적용하고있다. 환자의 상흔을 구성의 산물로 보듯이 역사를 구성으로 보는 프로이트는 이제 부친살해와 반복충동을 유대교의 기원에서 더듬는다. 설린(Sullin)의 가설에 의하면 모세는 폭군으로 유대인들에게 그의 종교를 강요했고 백성들은 분노하여 그를 살해한다. 부친을 살해한 백성들은 혼란과 후회의 기간(약 B.C.1350-1215)을 거친 후 아버지를 닮은 한층 더 강력한 유일신교를 세운다. 원래 보잘것 없는 지역신이었던 여호와신은 점점 옛 모세신을 닮아가더니 죽은 아텐신이 부활하듯 강력한 유일신이 된다. 성급한 폭군은 아들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다른 모습으로 더 강력히 되살아 난 것이다. 억압된 것은 사라지지 않고 되돌아온다. 그리고 이스라엘인들이 박해를 견디는 힘이 된다.
정신분석에서 사건이 발생한 후 증상이 나타날 때까지를 잠복기라고한다. 억압된 것의 귀환으로 불리는 잠복기는 모세의 종교가 지워진 후 다시 유일신교가 나타날 때까지의 긴 기간이다. 억압된 아텐 유일신교가 되돌아와 여호와 신과 합쳐져 강력한 여호와 유일신교가 된다. 이것이 증상에의 고착, 혹은 반복충동이다 개인에게 일어나는 신경증과 인류에게 일어나는 신경증은 다를 게 없다. 프로이트는 나치즘의 광기가 폭발하기직전의 유럽에서 무슨 까닭으로 모세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다원에서 영향받은 '토템과 타부'에 이어서 그가 다시 부친살해와 억압된 것의 귀환, 혹은 다르게 반복하기를 주장하는 이유가 곧 밝혀진다. "유대교에 유일신교를 불어넣고 그것이 기독교에서 계속되는 것", 이것만큼 종교사에서 분명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탄생은 원죄의식에서 시작된다. 비록 원초적 아버지를 살해 한 것을 기억하지는 못하나 아들은 죄의식을 느낀다. 예수는 신의 아들로서 인간의 죄를 떠맡고 죽는다. 이제 할례 대신에 구원이 자리잡는다. 선민의식을 버리는 대신 더 강력한 보편종교가 된다. 아텐신은 유대교로, 다시 기독교로, 다르게 반복된다. 예수의 살과 피를 나누어 먹는 의식은 죽은 아버지의 살을 나누어먹는 토템의식과 다를 게 없다. 모세가 첫 메시아라면 예수는 그의 대치자요, 승계자다. 왜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을 박해하는가. 자리를 먼저 차지했기에, 너무나 닮았기에, 부친살해 위에 선 아들의 종교이기에 흠모하고 증오한다. "유대인 증오는 결국 기독교인 증오다." 원초적 아버지의 죽음, 모세의 죽음, 예수의 죽음을 반복으로 보고 그 때마다 더 강화되고 보편적인 유일신교가 태어남을 통해 프로이트는 나치즘의 박해를 분석한다. 종교는 억압되고 무의식 속에 갇혀 있어야만 강력히 되돌아온다. 노래 속에서 영생하기 위해서는 실제 삶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부친살해는 에로스의 공격성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그것에 대한 금기, 즉 문명은 죄의식에 의해 지속된다.
4. 문명의 혼혈성
에로스와 문명의 밀월관계는 프로이트 이론에서 다르게 되풀이된다. 에로스는 어머니요, 문명은 아버지다. 유아기의 성경험은 성인이 되어서도 사라지지 않고 무의식을 형성하여 다르게 되풀이되기에 연인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이 생겨나고 창조적인 작가의 백일몽이 되며 삶을 지속시키는 동인이 된다. 문명과 종교 역시 부친살해와 죄의식이라는 양가적 감흥과 억압된 것의 귀환에서 시작되고 지속된다. 에로스는 순수이고 문명은 타자이다. 순수한 자아에 타자가 끼어드는 것, 이 혼혈성이 바바에게 문화의 위치를 낳게 하고 최근 탈식민주의에 유용하게 쓰인다. 역사가 구성이요, 서사라는 것과 함께. 이제 우리는 모세와 유일신교를 통해 종교나 인종에서도 혼혈성을 발견한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이집트인, 유대인, 기독교인이라는 다른 민족을 한 동아리로 연결시킨다. 그리고 증오가 어디에서 오는가 보여준다. 혼혈성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흔히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라는 두 갈래로 설명되는 그리스 문명과 기독교문명이 프로이트에게서는 하나가 된다. 그는 모세의 전설을 그리스 신화에 빗대어 풀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 파리스, 헤라클레스 등 모든 전설이나 신화와 모세신화는 왜 다른가? 그의 설명은 그리스신화에 기대지 않고는 시작될 수 없었다. 동서문화의 공존, 혹은 모든 문화가 공존하는 다문화시대에 프로이트는 이런 식으로 되읽힌다. 그의 이론 가운데에서도 유난히 혼혈적 특성이 강조된다는 뜻이다. 서양이 죄의식에 바탕을 둔 문화라면 동양은 어떤 문화일까? 누군가는 수치심의 문화라고 했다. 전자가 시건을 안에 둔다면 후자는 시선을 밖에 두는 것이다. 우리 문화는 어떻게 덧칠해져 왔고 지금 어떤 속성이 우세한가. 혹시 에로스가 더 우세한 문화는 아닐까. 우리가 맞고 있는 경제위기는 단순히 수학적인 계산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을 풀어가는 데 에로스가 우세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