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상징세계 - 구미례
제3장
꽃
4. 사군자
1) 사군자의 의미와 기원
사군자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의 네 가지 식물을 총칭하는 개념이다. 많은 꽃과 식물 중에서 특별히 이들을 선택하여 덕과 학식이 높은 사람의 인품에 비유, 군자라 하였다. 그 까닭은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가 뛰어난 아름다움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라, 각각이 높은 기상과 품격을 지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매화는 이른 봄 눈이 채 녹기도 전에 추위를 무릅쓰고 제일 먼저 꽃을 피우며, 난초는 깊은 산 중에서 은은한 향기를 멀리까지 퍼뜨린다. 국화는 늦가을에 첫 추위와 서리를 이겨내며 꽃을 피우고, 대나무는 모든 식물이 잎을 떨어뜨린 추운 겨울에도 푸르고 싱싱한 잎은 간직하고 있다. 매, 난, 국, 죽의 순서는 각각이 꽃피우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순서에 따른 것이다. 이와 같이 사군자는 모든 식물이 두려워하는 추위를 이겨 찬바람과 눈보라 속에서 꽃을 피우고 푸르름을 더하는 매화, 국화, 대나무와 깊은 산중에 홀로 피어 고고히 향기를 뿜어내는 난의 기상을 위한 것이다. 특히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지조와 절개를 군자의 가장 큰 덕목으로 여겼던 유교사회에서는 고난과 악조건 속에서도 꿋꿋이 꽃을 피우는 사군자가 선비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 왔다. 즉 사군자를 통하여 변함없는 뜻과 마음을 나타내고자 하였으며, 고아하고 탈속한 경지를 추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사군자의 발생과 전개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사군자’는 중국의 회화에서 성립된 화목이다. 사군자라는 총칭으로 일컬어지기 이전부터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는 시문과 그림에서 각각의 기상을 취해 즐겨 다루어졌다. 지금은 일반적으로 문인 묵화의 소재로 알려져 있으나, 중국에서는 그림의 소재가 되기 훨씬 앞선 시기에 시문의 소재로 등장하였다. 최초로 대나무가「시경」에 나타난 것을 비롯하여 그림의 소재로도 제일 먼저 기록되고 있으며, 대나무와 함께 매, 난, 국은 화조화의 일부로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북송(960-1126년) 때에 와서 여러 가지 고사나 시문을 통해 이들 네 식물이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되어, 차츰 문인화의 소재로 발달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상징성에서뿐만 아니라 서예의 기법을 그대로 적용시켜 그릴 수 있다는 점에서 사대부 화가들에게 매력적인 화목으로 등장하였다. 남송(1127-1279년) 말기부터 원대(1279-1368년) 초기에는 몽고족의 지배하에서 나라를 잃고 은둔생활을 하는 한족 문인들 사이에,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충성심과 불굴의 정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크게 유행되어 그 의미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정사초의 난초로, 흙이 없는 난초 포기만을 그려 몽고족에게 국토를 빼앗긴 설움을 표현하였다. 그 뒤 명대(1368-1644년)에 들어와서 이들 매, 난, 국, 죽 특유의 장점을 유교적 덕목과 관련시켜 칭송하는 문화적 전통이 수립되어, 사군자라는 총칭이 생겨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사군자의 품격이 높이 평가되어 고려시대부터 시문과 회화, 공예품 등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특히 회화에서는 고려시대에 송, 원 회화의 영향으로 왕공사대부 사이에 묵죽, 묵란, 묵매가 널리 그려졌다. 조선초기에도 사군자가 문인들 사이에 계속 사랑을 받아 왔고 조선 중기부터 독자적인 양상을 수립, 후기에 와서는 질과 양적인 면에서 모두 괄목한 만한 업적을 남기고 있다. 비록 사군자라는 개념이 회화, 그 중에서도 문인화의 화목으로 중국에서 유입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범주를 넘어서서 우리 민족의 기질과 심성에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받아들여지는, 동양 사상의 일맥으로서 파악되어진 것이다. 따라서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는 우리의 선조들에 의해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사랑을 받아 왔으며, 여러 예술 분야에서 주된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이는 꽃, 식물 자체가 지닌 순수한 아름다움보다는 그것이 지닌 상징적 의미, 즉 지조와 절개, 고아함과 품격을 높이 산 것이다. 이제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의 각각에 담긴 의미와 상징성을 고찰하고자 한다.
(2) 매화
서리와 눈을 두려워하지 않고 언 땅 위에 고운 꽃을 피워 맑은 향기를 뿜어내는 매화. 이 매화는 백화가 미처 피기 전에 제일 먼저 피어나므로 ‘화형’ 또는 ‘화괴’라는 별칭으로 불리어 왔다. 또한 봄을 가장 먼저 전해 준다고 하여 일지춘색, 철간선춘, 한향철간이라 하였고, 춘한 속에서 홀로 핀 매화의 고고한 자태는 선비의 곧은 지조와 절개로 즐겨 비유되고 있다. 이처럼 맑은 향기와 아울러 눈 속에서 꽃을 피우는 것이 매화의 특징이다. 선비들은 매화의 곧고 맑은 성품을 노래한 글을 지어 일편단심으로 사무하는 임에게 자신의 간절한 심정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이 때 임은 나라 또는 임금일 수도 있고 자신의 굳은 뜻일 수도 있다. 특히 청초한 자태와 향기로 인해 매화는 아름다운 여인에 즐겨 비유되었다. 옛 기생들의 이름에 유독 매화 ‘매’자가 많이 사용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매화가 아름다움과 함께 정절을 상징하였으므로, 여인들은 매화와 대나무를 함께 시문한 비녀인 매죽잠을 즐겨 착용하였다. 이와 같은 매화의 상징성으로 인해 눈이 덮인 매화나무 가지에 처음 피는 꽃을 찾아 나서는 심매가 문인과 풍류객들의 연중행사로 정착되기도 하였다.
범석호는「매보」에서 천하에 으뜸가는 꽃이라 칭송하였고, 소동파는 얼음 같은 맑은 혼과 구슬처럼 깨끗한 골격이라 평하였다. 강희안은「양화소록」의 화목9등품론에서 국화, 대나무, 연꽃과 함께 1등으로 분류하면서 높고 뛰어난 운치를 취할 만하다고 하였으며, 같은 책의 화품평론에서 강산의 정신이 깃들고 태고의 모습이 드러난 꽃이라 표현하였다. 우리나라의 고시조에 나타나고 있는 꽃 중에서 매화는 도화(복숭아꽃)와 함께 가장 많이 등장하는 소재로 알려져 있다. 시조에서 나타나고 있는 매화는 우리 선인들의 드높은 기개와 굽힐 줄 모르는 지조의 상징으로 애창되어 왔고, 다 썩은 고목에서도 봄기운이 돌면 어김없이 맑은 꽃을 피우는 신의의 벗으로 노래되어 왔다.
백설이 자자진 곳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이색의 이 시에서는 추이하는 계절과 더불어 걷잡지 못할 애상에 잠긴 마음으로 매화를 찾는 지사의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또한 매화는 달과 함께 자주 등장하고 있다. 교교한 달빛 아래 청초한 자태와 맑은 향기를 내뿜는 매화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자연적인 조화와 운치를 한껏 느낄 수 있는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일생을 독신으로 매화와 더불어 은거생활을 한 송나라 시인 임포 이후로 매화와 달의 짝은 더욱 애호되고 있다. 실로 달과 매화는 예로부터 은일처사들의 아낌을 받아 온 고아함의 화신이요, 정절의 상징인 자연이었다. 달을 벗한 매화는 그림에서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 ‘수양매월 이제청절’이라는 화제가 적힌 윤리문자도에는 은나라의 은일처사 백이와 숙제가 수양산에서 달과 매화를 벗삼아 은둔의 일생을 보냈다는 고사가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한편, 우리나라의 매화 그림, 묵매화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은 매화의 꽃송이가 중국의 그림처럼 많지 않다는 것이다. 문화재 전문위원 허영환 선생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아마 우리나라 사람이 성긴 것, 어리숙한 것, 완벽하지 않은 것, 기교를 부리지 않은 것 등을 좋아한 성격 탓’인 것 같기도 하고, ‘한국미술의 바탕을 흐르는 자연주의의 발로’인 것 같기도 하다고 보았다. 이에 반하여 중국의 민족성은 빽빽한 것, 완전무결한 것, 아주 예쁜 것, 되도록 큰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의 묵매화가들이 어지럽게 줄기와 가지를 그리고 수십, 수백 꽃송이를 화면 가득히 그리면서 웅장, 완벽, 섬세를 추구할 때, 우리나라의 묵매화가들은 그러한 화법과 화풍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스럽고 자연스럽게, 무기교의 기교라는 한국미술의 기조를 지키면서 여백의 미와 단순의 미를 추구하였던 것이다. 이는 비록 묵매화가 사군자의 하나로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민족성에 맞게 완전히 소화, 재창조되어 한 단계 높은 미적 수준을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파교심매도(擺橋尋梅圖, 심사정, 비단에 엷은 색, 115.0×50.5cm, 1766,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3) 난초
'난은 비록 한 송이가 피기는 하나 그 향기는 실내에 가득 차서 사람을 감싸고 열흘이 되어도 그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강남 사람들은 난을 향조로 삼는다.' 도곡이 지은「청이록」에 나타난 구절이다. 공자는 난의 향기를 왕자의 향이라 하였다. 특히 동양란은 서양란처럼 색채가 화려하지 않고 꽃도 작으나 담백한 색과 은근한 향기가 그 생명이다. 따라서 난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하는 것은 향이며 고귀함이다. 깊은 산중에 홀로 피어 고아한 자태로 은은한 향을 내뿜는 난은 지조 높은 선비와 절개 있는 여인에 비유되고 있다. 예로부터 ‘유인풍치정여란’, ‘난화사미인’, ‘유란여정녀’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난은 유인, 미인, 정녀 등으로 비유되었다. 또한 난의 독특한 향기를 취하여 유곡가인, 미인향, 군자향, 공곡유향, 군자가패, 왕자지향 등으로 일컫기도 하였으며, 난유유자풍운, 난령인수계라 하면서 난의 고아함을 칭송하였다. 난의 향과 고귀함에 관한 찬미는 기원전 공자시대에서부터 기록이 나타나고 있지만, 충성심과 절개의 상징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은 전국시대 초나라의 시인 굴원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의 자서전적인 장편 서사시「이소」에서 그가 난을 즐겨 넓은 지역에 가득 심었다고 함으로써 그의 인품과 연관시킨 난초의 상징성이 확립되었다고 한다. 이제현은「역옹패설」에서 “일찍이 여항에 객으로 머물러 있었을 때, 어떤 사람이 난을 분에 심어서 선물로 주었다. 이것을 서안 위에 놓아두었는데, 한참 손님을 접대하고 일을 처리하는 동안에는 그 난이 향기로운 줄 몰랐다가 밤이 깊어 고요히 않았노라니 달은 창 앞에 휘영청 밝고 그 향기가 코를 찌르는 듯하여 맑고 그윽한 향기를 사랑할 만하고, 말로써 표현할 수 없음을 느꼈다”라고 하였다. 고려말의 이거인은 난을 재배한 것으로 유명하고, 조선초의 강희안은 우리나라 자생란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사람으로 꼽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난이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말기로 추정되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묵란화로는 조선초 강세황의「필란도」가 있고, 김정희를 비롯하여 이하응, 김응원, 민영익 등은 묵란화의 대가들이다. 난에 관한 시를 남긴 이로는 김부식, 김극기, 이규보, 정몽주, 정도전, 권근, 이숭인, 최경찬, 신위 등이 있다. 난을 그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 한다. 사군자를 계절 순서로 말하면 매, 난, 국, 죽이지만 사군자화를 배울 때는 난, 국, 매, 죽의 순으로 한다. 그것은 난의 생김새가 한자의 서체와 닮은 점이 많아 서화동원의 사상과 걸맞기 때문인 듯하다. 묵죽화가 직선미를, 묵매화가 굴곡미를 보여준다면 묵란화는 곡선미를 보여주는 수묵화이다. 난초그림의 대명사라 불릴 수 있는 완당 김정희의 난화론은 독특하다. 그는 글씨의 정신과 그림의 정신을 구별하지 않는다. “난초 그리는 법은 예사 쓰는 법과 가까우니 반드시 문자의 향기와 서권의 기미가 있은 연후에 얻게 된다. 또 난초그림의 법은 화법이라는 것을 가장 꺼리니 만일에 화법이 있으면 한 붓도 그리지 않는 것이 가하다”라고 하였다. 이는 심의를 존중하고 품격을 높이 보는 문인화의 묘미 설파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청나라의 왕지원은, “난의 성격은 천연고결하여 마치 대가의 주부나 명문의 열녀 같아서 감히 범접할 수 없다. 만약 속필로 그려 그 청고아치를 떨어뜨린다면 차마 볼 수 없을 것이다”라 하였다. 한편, 정몽주의 초명이 몽란이었는데, 이는 어머니가 난분을 깨뜨린 태몽을 꾸고 낳았기 때문이라는 기록이 있다. 난은 또한 자손의 번창과 관련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 경기도 지방에서는 난초꽃이 번창하면 그 집에 식구가 는다는 속신이 전하여지고, 충청북도 지방에서는 꿈에 난초가 대나무 위에 나면 자손이 번창하고 난초꽃이 피면 미인을 낳는다는 속신이 전하여진다.
묵란 - 강세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