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상징세계 - 구미례
제3장
꽃
3. 무궁화
1) 나라꽃과 무궁화
무궁화는 우리나라 꽃, 국화이다. 나라마다 그 나라를 상징하는 꽃으로서 국화를 두고 있다. 국화가 정해지는 것은 법으로 공식화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그 나라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과 깊은 관련을 가진 꽃이 자연스럽게 국화로 정해지기 마련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무궁화가 국화로 정해진 것은 법이나 제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면 수십, 수백 가지의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 중에서 왜 하필이면 무궁화가 우리 민족에게 선택된 것일까? 옛날부터 선조들은 매, 난, 국, 죽 사군자의 기품과 절개를 아껴 왔고 모란, 이화의 영화로움과 화려함을 즐겨 애송하였으며, 진달래, 봉숭아 등에 우리네의 정서를 담아 왔다. 이처럼 오랫동안 많은 사랑을 받아 시로 노래되고 그림으로 장식외어 온 여러 꽃들을 생각하면, 문득 역으로 무궁화가 왜 국화로 받아들여졌는지에 대하여 우리는 별로 알고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에 부딪히게 된다. 특히 젊은 세대에서는 하나의 기정사실로만 받아들일 뿐 의문조차 품지 않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여기에 대한 답은 일단 뒤로 미루고, '국화와 무궁화'의 현상학적인 측면을 좀더 살펴보기로 한다. 무궁화가 국화로 굳어진 역사적 시점은 개화기로 잡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화가 법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확실한 고증은 있을 수 없으나, 대체로 이에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문호개방 이후 서구문물이 유입되면서 서양 여러 나라들이 그들 왕실의 문장, 훈장, 화폐 등에 사용한 국화를 접하게 되자, 어떤 이유로든 우리 민족의 마음 속에 나라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꽃으로 자리잡고 있던 무궁화가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국화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무궁화는 민족의 상징이 되어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시기에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하여 왔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정식으로 채택된 애국가의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는 국화로서의 인정을 얻게 된 가장 확실한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에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무궁화가 국화로 적합한가에 관한 시비는 1950년대 이후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지상논쟁까지 벌이며 국화로서의 무궁화에 대한 자격이 평가, 재검토되어 왔다. 무궁화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꽃, 국화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는 측의 근거를 살펴보기로 한다. 한 나라의 국화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는 1. 국토 전역에 분포하는 꽃, 2. 우리나라 원산종으로 민족을 상징할 수 있는 꽃, 3. 민족과 더불어 애환을 함께한 꽃, 4. 이름과 모양이 모두 아름다운 꽃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전제조건에 비추어볼 때 무궁화는 첫째 자생지가 전국적이지 않고 주로 남쪽에 분포하며, 둘째 원산지가 인도이므로 외래식물이며, 셋째 진딧물이 많이 붙고 꽃이 단명허세하며, 넷째 휴면기가 너무 길고 봄에 싹이 늦게 돋는다는 점 등으로 인해 국화로서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국화는 그 민족을 상징하는 꽃이므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꽃이 있다면 충분히 검토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우리가 현재의 무궁화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무궁화에 대해서 충분히 안 다음 위에서 말한 부적합한 사유들이 타당한 것인지에 관해서 각자의 생각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 하면 한 나라의 국화는 단순한 꽃으로서만 평가될 수 없으며, 이면에 간직된 깊은 뜻과 정신을 함께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2) 역사적 의미와 상징성
우리나라에 무궁화가 많이 자라고 있다는 기록은 춘추전국시대에 저술된 동양 최고의 지리서 「산해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군자국 ... 유훈화초조생춘사'라 하여, 군자의 나라에 훈화초가 있어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진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군자국은 우리나라, 훈화초는 무궁화를 가리킨다. 중국에서는 무궁화를 훈화초, 목근, 순영, 순화, 조개모락화, 번리초 등으로 칭하였다. 이로 미루어 우리나라에 무궁화가 피기 시작한 것은 2천 년이 훨씬 넘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임을 알 수 있다. 「지봉유설」에 인용한 고금주에는 '군자지국 지방천리 다목근화'라 하여 우리나라에 무궁화가 많이 피는 것을 예찬하였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는 우리나라를 '근역' 또는 '근화향'이라 불러 왔다. 신라 때 최치원이 왕명으로 작성하여 당나라에 보낸 국서 가운데 “근화향(무궁화의 나라, 신라를 일컬음)은 겸양하고 자중하지만 호시국은 강폭함이 날로 더해간다”고 하였고,「구당서」(737년: 성덕왕 36년) 신라전 기사에도 “신라가 보낸 국서에 그 나라를 일컬어 근화향, 곧 무궁화의 나라라고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하여 보면 고대로부터 중국인들은 우리나라를 '군자의 품격을 갖춘 나라, 무궁화가 아름답게 피는 나라'라 예찬하였으며, 또한 신라시대에 이미 무궁화가 우리나라를 일컫는 꽃으로 사용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고려, 조선시대에 와서도 스스로 근역, 근화향, 근원이라 하여 오늘날까지 '근역'은 무궁화가 많은 땅, 곧 우리나라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무궁화'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고려 중기의 기록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이규모의 글 중에, 친구 두 사람이 근화를 일컬어 한 사람은 '무궁'이 옳다 하고 또 한 사람은 '무궁'이 옳다고 논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이 무렵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무궁화', '무궁화', '무궁화' 등으로 쓰이다가 조선말경에 현재의 '무궁화'로 정착되었다. 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예로부터 무궁화는 우리나라 고유의 다른 이름이 있었으며, 이 우리말에 유사한 한자음을 따서 사용해 오다가 뜻이 좋은 무궁화로 통일되어 쓰여진 것이라 보고 있다. 조선시대에 강희안이 저술한 「양화소록」을 보면 우리나라에는 단군이 개국하였을 때 목근화가 비로소 나왔으므로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일컫되 반드시 근역이라 불렀다 한다... 속명 무궁화라 한다. 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이화(오얏꽃)를 왕실화로 삼았으나 과거에 장원한 사람에게 임금이 내리는 어사화는 무궁화로 사용하였다. 또한 임금을 모신 가운데 베풀어지는 연회에 신하들이 사모에 무궁화를 꽂았는데, 이를 진찬화라 하였다. 이상의 기록들을 살펴보노라면, 막연히 근대 이후부터 민족의 꽃으로 선택되었을 것이라는 무궁화에 대한 일반적인 선입견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무궁화가 본격적인 국화로 등장, 거론되기 시작한 시기는 개화기이다. 당시 윤치호, 남궁억 등 선각자들은 민족의 자존을 높이고 열강들과 대등한 위치를 유지하고자 나라꽃으로 무궁화를 결의하였다. 당시에 만들어진 애국가 가사에 '무궁화 삼천리'라는 구절이 아무런 저항없이 표현된 것도 무궁화가 우리나라, 우리 민족과 오랜 세월을 통하여 인연을 맺어 온 때문이라 볼 수 있다. 1910년 국권상실과 함께 계속된 36년간의 일제 강점기에는 무궁화가 민족정신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존재로서 민족의 가슴에 심어져 왔다. 국권이 상실되던 해 9월 애국지사 황현(1855-1910년)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다음과 같은 「절명시」를 남겼다.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슬픔에 젖었네. 무궁화 이 강산이 이젠 침몰되어 버렸네.
또한 김좌진 장군은 '삼천리 무궁화 땅에 왜놈이 웬일인가'라고 부르짖으며 조국광복을 애타게 기원하였다. 이 땅의 여인들은 우리나라의 지도 위에 8도를 상징하는 여덟 송이의 무궁화를 수놓으며 광복의 그 날까지 민족정신을 심어 나갔다. 특히 남궁억은 무궁화를 통해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확산시키고자 '무궁화동산 꾸미기'운동을 전개하였다. 전 강토에 민족정신의 상징인 무궁화를 심어 무궁화 삼천리를 만들고자 하는 운동을 확산, 고향인 홍천에다 무궁화밭을 가꾸어 해마다 수십만 그루씩 각 지방의 학교, 교회, 사회단체에 공급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그의 행동이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반일적 사상의 발로라 하여, 1933년 이른바 '무궁화사건'이란 이름으로 체포하여 옥고를 치르게 하였다. 일제는 무궁화가 태극기와 함께 민족지도자들에서부터 일반 민중에 이르기까지 민족과 조국을 상징하는 강력한 존재임을 간파하고, 무궁화를 우리 민족과 멀리 떼어놓기 위한 흉계를 꾸몄다. 그들은 무궁화를 볼품없는 지저분한 꽃이라 경멸하여 격하시켰으며, 어린 학생들에게 '무궁화를 보면 눈병이 난다'느니 심지어 '눈이 먼다'고 까지 하여 멀리 피하여 가도록 가르쳤다. 이것으로도 부족하여 국화말살정책을 강행, 무궁화를 심지 못함은 물론 심어진 무궁화를 모두 캐내도록 하고 무궁화를 캐어낸 자리에는 사꾸라를 심도록 하였다. 이는 우리 민족의 혼을 뿌리채 말살하고 일본인화하겠다는 그들의 식민지정책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근세의 명수필가로 알려진 김소운은 광복 후 일본인들에게 한국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라는 내용의 서간체 연재수필을 썼는데, 제목을「목근통신」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일제 강점기에는 무궁화가 그대로 우리 민족의 상징이 되어 왔으며, 그 줄기찬 화기는 민족의 줄기찬 불굴의 정신과 연관시켜 대견스럽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왔다. 그 뒤 우리는 바쁘게 살아왔다. 광복후 채 일어서기도 전에 6.25로 민족의 비운을 맞았다. 전쟁이 끝난 폐허 위에서 모든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기 위해 피눈물 나는 전진만을 계속하여 왔다. 이제 우리는 어느 정도의 여유를 가지고 좋은 것, 아름다운 것에 대한 추구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꽃,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를 상징하고 대표하는 꽃. 여기에는 온 국민이 관심과 의견을 제시할 권리와 필요가 있다. 이제 무궁화가 가지는 꽃 자체로서의 의미와 상징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