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의 성과 권력 - 권택영
제2부 미학과 사회이론
1. 은유와 환유로서의 정신분석학
정신분석이란 용어가 오늘날만큼 폭넓게 사용되는 경우도 드문 것 같다 19세기 말, 신경증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창시된 프로이트의 치료법은 20세기 후반부에 이르러 단순한 심리연구의 차원을 넘어 새로운 학문의 패러다임을 형성하는 바탕이 되었고, 이제는 모든 문화현상을 연구하는 기본적인 틀이 되다시피 하고 있다. 요즈음의 웬만한 이론서에서 '상상계' (the Imaginary)라는 단어는 정신분석의 문맥이 아닌 곳에서도 자연스럽게 쓰여서 보통명사가 되다시피 했다. 무엇이 한 정신과 의사의 사례연구와 사고를 이렇게 보편적인 사상으로 만들었을까? 첫째는 그것이 인간의 심리, 사회적 부적응 욕망과 좌절 등 인간에 관한 연구였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런 연구를 폭넓게 문명사와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이 문명사 속에는 문명의 기원뿐 아니라, 사회현상과 예술까지도 포함된다. 그의 이론이 인간의 욕망뿐 아니라 여성이론, 예술이론, 사회이론 등 폭넓게 논의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넘어서 프로이트의 위대성은 또 다른 곳에 있다. 평생 동안유대인으로 박해받으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많은 연구와 글을 남겼으며, 그 글들이 한결같이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고의 일관성이다. 물론 초기와 후기의 강조점이 다르고, 영역마다 다른 이야기를 하고, 앞선 이야기를 스스로 뒤엎고 수정하기도 하지만, 그의 글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 수많은 다른 이야기들 속에 일관된 프로이트만의 주장, 아니 가설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 가설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되풀이되고 문학과는 어떻게 관련되는가. 프로이트의 글을 중심으로 이런 것을 알아본다. 특히 그가 직접 쓴 예술가, 혹은 작가에 관한 글과 그의 사상이 어떻게 후세 사람들에 의해 작품분석에 이용되는가를 시대별로 살펴본다. 은유가 강조되던 19세기의 '저자의 심리비평', 은유와 환유의 엇갈림이 강조되던 20세기구조주의, 환유가 압도적이 되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비평을 알아본다.
1. 프로이트의 가설
신경증을 치료하면서 프로이트는 환자의 심리 속에 억압된 것을 주로 자유연상법으로 밝혀내려 했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환자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근원적 상흔은 무엇인가. 분명히 사회로부터 금기된 욕망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틈틈이 의식을 뚫고 솟아오른다. 꿈이나 말 실수는 바로 현실에서 억압된 욕망이 의식의 저변에 자리잡고 있다는 증거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의식 밑에 무의식이라는 억압된 본능이 자리잡고 있다는 가설을 세우고 그것이 결코 사라지지 않고 변형된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을 여러 영역에서 보여준다. 그러면 인간의 가장 근원적 상흔, 혹은 억압된 본능은 무엇인가. 프로이트 이론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거세 콤플렉스는 억압된 본능이요, 다른 형태로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근원적 상흔이다. 무의식은 이루지 못한 어머니와 하나됨의 꿈이요, 이 꿈은 한 인간의 무의식일 뿐 아니라 인류 문명의 근원이기도 하다. '토템과 타부'는 인류의 문명이 바로 이 근친상간에의 욕망을 막기 위한 장치로부터 시작되고 그러면서도 그 꿈이 포기되지 않기에 인간의 감흥이 양가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 어머니에의 꿈과 양가적 감흥은 그의 전 이론을 지배하는 핵심사상이다. 이제 몇 가지 예를 들어 그것이 그의 글에서 어떻게 다르게 반복되는지 보자.
2세에서 3세 사이, 아이는 어머니와의 합일을 꿈꾸며 유아기 성을 경험한다. 그리고 이런 꿈은 오이디푸스 단계로 들어서며 아버지의 법에 의해 깨어진다. 사회 속에 들어선 아이는 사춘기에 이르러 대상에게 욕망을 느낀다. 그는 충만을 꿈꾸며 이상적 타자를 향해 접근한다. 그러나 무의식으로 자리잡은 근원적 나르시시즘은 타자에게서 완벽히 충족될 수가 없다. 아무도 잃어버린 고향, 어머니를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 속에는 증오가 깃든다. 그리고 대상을 찾는 여행은 계속된다. 전자가 양가적 감흥이요, 후자가 '페티시즘' 혹은 환유이다. 자꾸만 옆의 것을 짚어서 욕망은 끝없이 지연되고 그 반복충동이 오히려 삶의 동력이 되는 것이다. 라캉의 욕망이론은 바로 이 환유적인 속성을 공식으로 만든 것이었다. 어릴 적에 아이가 맛본 아늑한 어머니에의 꿈은 어머니가 남근을 소유했다는 환상과 일치한다. 남근이란 욕망에 틈새를 남기지 않고 완벽한 충족을 가능케 하는 상징물로 아이가 잠깐 누릴 수 있었던 지복을 의미한다. 그런데 아이는 어머니가 거세되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어머니에게 남근이 없다는 것은 자신에게도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남근에 대한 대체물을 갈망한다. 이것이 페티시즘이다(Fetishism,1927). 페티시즘은 알면서 포기하지 못하는 양가적 감흥에서 나온다. 신발이나 발을 연인의 남근으로 대체하는 것은 쉽게 욕망을 충족시키는 길이다. 우리는 현실이 자신의 소망을 해결해주지 못할 때 우회하거나, 옆의 것을 대신 짚어서라도 충족을 맛보는 끈질긴 나르시시스트이다. 아무도 그 내밀한 환상을 제거해 버리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프로이트의 가설은 주체의 문제에서는 '근원적 나르시시즘'으로, 성이론과 문명이론에서는 근친상간, 혹은 '유아기 성'으로, 예술이론에서는 '무의식'으로, 강박적 반복충동을 설명할 때는 현실원칙에 대응하는 '쾌감원칙'으로 용어를 달리하여 반복된다. 인간은 어릴 적에 경험한 안락을 잊지 못하고 현실과 사회에 적응하면서도 계속 되돌아갈 것을 꿈꾼다. 이 양가적인 감흥을 교육의 힘으로 잘 조절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지금까지 인간의 역사에서 문학과 예술은 이 양가적 감흥을 보여주고 스스로를 반성케 하는 '타자 드러내기'였다. 그러므로 신경증이란 정도의 차이에 의해 나타나는 현상일 뿐 누구에게나 잠재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양가성이 은유와 환유를 만들어내고 프로이트를 문학과 연결시킬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어머니와의 합일이 은유요, 그것을 상실하고 자꾸만 옆의 것을 짚는 것이 환유이다. 그럼 우선 프로이트의 글 가운데 예술 혹은 문학이론에 관한 글 몇 개를 예로 들고, 그의 이론이 훗날 어떻게 해석, 재해석되는지 본다.
2. 문학에 관한 프로이트의 글
미학에 대한정의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 혹은 그 이전부터 여러 견해로 밝혀지지만 넓게 가늠하여 즐거움과 도덕성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 도덕적인 설득이 재미와 감동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 사적인 욕망이 사회적으로 승화되는 것이 문학이라면 프로이트의 글, '창조적 작가와 백일몽'(Creative Writers and Day-Dreaming, 1908)역시 이런 견해와 멀지 않다. 그러면서도 그의 독특한 가설에 뿌리내리고 있어 흥미롭다. 아이는 어린 시절에 유희에의 욕망을 갖는다. 그러나 그 욕망은 성장하며 사회적으로 용납되지는 않지만 결코 포기되지 않는다. 어른이 갖는 백일몽이 그것이다. 창조적인 작가란 사적인 백일몽을 공적인 문학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예를 들면 아름다운 공주를 얻고 싶은 꿈은 그것을 얻기 위한 많은 시련으로 대치되고 그 시련의 과정에서 사회적으로 수용되는 미덕이 암시된다. 작품의 한 구석에 아주 조그맣게 그려진 여인의 얼굴이 사실은 백일몽의 실체요, 위장된 욕망의 핵심인 셈이다. 이것이 환유다. 그런데 이 위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 여인은 바로 잃어버린 어머니, 유아기를 투사시킨 대상이다. 이 부분이 은유다. 물론 프로이트는 여기까지 말하지는 않는다. 그저 성인은 억압된 유아기의 소망을 포기하지 않고 백일몽으로 충족시키며, 예술가는 이것을 작품으로 위장하여 사회에 내놓는다고 말한다. 그가 살았던 당시에는 은유와 환유라는 상징체계, 기호 학, 소쉬르 언어학이 논의되지 않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의 대표적인 책, '꿈의 분석'(1900)이 프로이트가 전혀 꿈꾸지 않은 곳에서 문학과 만나는 것 역시 흥미롭다 "우리가 정신적으로 한 번 소유했던 것은 결코 흔적 없이 잃어버릴 수는 없다." 꿈은 우리가 내적, 외적으로 경험했던 것을 의식이 잊었을지라도 어딘가 그 밖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짚어주는 증거이다. 신경증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대화를 통한 자유연상법을 쓴 프로이트에게 꿈은 환자의 억압된 기억들을 끌어내는 길이었다. 꿈은 무의식으로 가는 왕도, 혹은 억압된 소망이 충족되는 서사였다. 아주 짧게 압축되고 초현실주의적으로 위장된 그림과, 들리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이야기, 꿈은 의식의 빗장이 느슨해지기에, 억압되지만 틈틈이 위장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유아기 소망이 비교적 느긋하게 노출되는 스크린이다. 어떤 꿈사상이 있다. 그것은 두 단계의 위장을 거친다. 긴 내용을 이미지로 압축하고 그래도 마음이 안 놓여 옆의 것을 짚는다. 앞의 것이 은유이고 뒤의 것이 환유이다. 그러므로 분석자는 이런 경로와 반대로 환유를 거쳐 은유로 내려가서 상흔을 찾아내는 것이다. 물론 프로이트는 이것을 압축과 전치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그러나 은유와 환유라는 문학의 중요한 상징체계를 암시한 그의 분석은 훗날 소쉬르 언어학이 낳은 구조주의, 기호학, 해체론의 근간이 된다.
이 외에도 프로이트 자신이 예술에 대해 쓴 글로 '미켈란젤로의 모세상'(The Moses of Michelangelo,1914)과 '도스토예프스키 와 부친살해'(Dostoevsky and Parricide,1928)를 들 수 있다. 앞의 글은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인 모세상을 본 프로이트가 미켈란젤로의 독특함을 밝혀내어 정신분석자의 작품 인기가 훌륭한 비평이 됨 을 보여주는 글이다. 뒤의 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죄의식을 부친살해와 연결시켜 도스토예프스키의 삶과 작품에 연결시킨 글이다. 모세상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다. 원래 성경에 나오는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십계명을 들고 내려와 타락한 민중을 보고 분노하여 십계명이 적힌 돌판을 던진다. 그리고 많은 비평가들은 미켈란젤로의 모세상에 대한해석도 분노로 돌판을 막 던지기 전의 모습이라는 데 동의한다. 수염을 만지는 손과 막 일어서려는 왼발 등, 분노 폭발 직전의 가장 긴장된 순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아주 조그만 손놀림, 수염의 움직임, 석판의 위치 등을 자세히 읽어 그런 일반론을 뒤엎고 그의 모세상은 성경과 달리 분노의 순간을 극복한 자제된 모세임을 보여준다고 풀이한다. 수염을 만지는 오른손을 자세히 보면 엄지는 속으로 들어가 안 보이고 검지만 수염에 닿는다. 따라서 오른손 전체가 수염을 만진다는 해석은 옳지 않다. 수염은 안 보이는 엄지와 보이는 검지 사이에서 쓸어 담긴 형태로 왼쪽을 향한다. 눈과 머리는 오른 쪽을 향해 있고 수염은 오른 손의 압력 아래서 반대쪽을 향한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재현된 모세상 그 이전의 밑그림을 추정해낸다. 1. 오른손에 십계명을 끼고 앉은 자세, 2. 소동을 듣고 분노하여 수염을 누르고 고개를 돌린 분노한 모세, 이때 거꾸로 된 십계명이 손안에서 미끄러져 모서리만 기댄 꼴이 된다. 3. 분노를 자제한 모세, 십계명이 적힌 돌판을 바로 잡으려는 데서 왼쪽수염이 딸려간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것은 3번의 모세다. 프로이트는 고개와 수염의 방향이 엇갈리는 데서 흥미를 느꼈고 위와 같은 해석을 추론한다. 그는 전설 속의 모세가 급하고 발작적인 성격이었음에 비해 미켈란젤로는 내적인 열정과 외적인 자제를 겸비한 더 나은 모세상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미켈란젤로는 율리우스 2세의 무덤을 장식하기 위해 모세상을 만들었다. 그가 더 온화한 모세를 만든 것은 그런 모세를 율리우스 2세에게 바랐고 자신에게도 바랐던 게 아닐까? 모세, 율리우스2세, 미켈란젤로. 이 세 사람이 다 급하고 단호했기에 예술가는 전설적인 모세상을 떠나 자신의 바람을 그 속에 담아낸 게 아니냐고 프로이트는 묻는다. 프로이트의 모세상 읽기는 예술이 창조자의 소망충족의 한 형태라는 데서 다른 글들과 만난다. 그리고 그것이 정신분석이 비평이 되는 이유다. 창조자의 묻혀진 소망은 무엇이었을까를 밝히는 작업. 바로 당대에 풍미한 작가의 전기적 입장에서 작품을 읽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글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되는 한 부분이 있다. 유독 미켈란젤로의 모세상이 프로이트를 유혹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점이다. 바로 엇갈린 두개의 방향, 고개와 시선은 오른쪽을 향하는데 수염은 그 반대쪽으로 향한 그 엇갈림이 아니었을까? 갈등, 양가성, 의식과 무의식의 교차, 쾌감원칙과 현실원칙의 교차 반복... 이런 요소는 훗날 다른 서사론자들에 의해 프로이트 해석을 환유로 끌어가는 동기가 된다. 고개와 시선의 방향만을 본 당시의 비평에 대해 그는 그 반대의 것을 본 것이다. 바로 억압된 부분이요, 무의식이었다. 프로이트는 1927년, 위의 글에 대한 '후기'를 썼는데 여기서 자신이1914년에 추정했던 모세상의 밑그림이 실제로 발견되었다고 말한다. 즉 분노한 모세상(프로이트가 추정한 2번 밑그림)이 12세기에 만들어졌다(Statuette of Moses). 자신의 가설이 역사적인 사실로 증명되었음을 적어놓은 프로이트. 그는 언제나 가설이라는 허구와 역사적 증명 사이를 오가며 가설이 과학이 되기를 바랐고 그러면서도 매끄러운 단선식 과학에 회의적 시선을 던졌다.
성경의 모세상을 자신의 입장에서 읽어낸 미켈란젤로, 그를 또 자신의 입장에서 읽어낸 프로이트, 그렇다면 읽기란 끝없이 자신의 입장을 벗어나지 못하는 알레고리요, 옆으로 가는 춤, 즉 환유가 아닌가. 그러나 프로이트의 글이 이런 식으로 읽히기 위해서는 좀 더 긴 세월을 기다려야 된다. 당대에는 전기적 비평이 문화의 흐름이었다. 부친살해라는 원초적 본능에서 도스토예프스키를 해석한 경우 역시 전기 비평의 한 예가 된다. '도스토예프스키와 부친살해'를 읽어보면, 프로이트는 원죄의 고통을 가장 잘 드러낸 작가가 도스토예프스키였다고 믿었던 것 같다. 마치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전형으로 풀어내듯이 도스토예프스키는 창조적 작가요, 신경증 환자에 도덕주의자요, 죄의식에 가득 찬 자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이런 작가의 양가성을 가장 잘 나타낸 작품이다. 도덕성이란 죄에 끌리면서, 죄를 범하면서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투쟁이요, 갈등이기 때문이다. 본능의 충동과 사회의 요구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위악적인 모습을 보여주기에 그는 스승도, 인간 해방론자도 아니다. 그는 죄를 지켜보는 간수이다. 살인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에고이스트를 골라 자신의 성격을 비추어 보이기에 사실문명은 그에게 감사할 것이 별로 없다. 도박에 미친 듯이 빠져들고, 감옥에 가고, 성추행을 저지르는 감정적인 삶,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성향이 농후한 도착적인 성향, 그리고 예술적 재능, 그에게는 이 세 가지가 하나였다.
프로이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간질 발작을 히스테리로 보았다. 억압된 것이 무의식중에 격렬한 형태로 방출되는 것. 무엇이 억압되었을까. 그는 어릴 때 죽음을 겪은 적이 있다. 아버지에 대한 강렬한 증오와 살해욕망이 자신에게 전이된 것이 아닐까.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시하여 죽으면서 거꾸로 아버지에 의해 죽는다고 착각하는 것 인간의 원죄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하나가 되고 싶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비롯된다. 프로이트의 후기 사상을 지배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문명사와의 연결이 이 글에서 엿보인다. 아담이 이브 때문에 하느님을 거역하듯 인간은 사랑 때문에 아버지를 거역한다. 드미트리가 여자를 놓고 아버지와 라이벌이 되듯이 유아는 어머니를 놓고 아버지와 라이벌이 된다. 그러나 근친상간에의 욕망은 거세 위협에 의해 단념되는데 이때 아버지에 대한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죄의식의 근원이 된다. 아버지를 살해하고픈 욕망이 남아 있어 증오와 흠모의 양가적 감정이 생겨난다. 두려움 때문에 억압된 아버지에 대한 증오는 도스토예프스키에게 강한 내적 양성성으로 나타난다. 증오와 흠모의 양가성, 그에게 있어 죄와 벌은 부친 살해에 대한 자기처벌이다. 도박, 감옥, 소설, 이 모두가 자신을 벌하는 한방식이었다.
프로이트는 부친살해의 욕망을 다룬 극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예를 든다. 먼저 그리스신화로서 '오이디푸스 왕'이다. 그는 모르고 저지르지만 결과에 책임을 진다. 이 극은 논리적으로는 말이 안되지만 정신분석적으로는 말이 된다. 그리스 비극은 개인의 무의식적 욕망을 외적인 신탁(운명)으로 대치해 놓은 것이다. 영국의 비극, '햄릿'에서 부친살해는 아들이 아닌 삼촌에 의해 일어난다. 그러기에 성의 대상인 어머니는 위장할 필요가 없다. 아들은 삼촌에게 복수해야 하는데 하지 못한다. 자신이 할 일을 삼촌이 대신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무의식과 삼촌의 것을 동일시하기에 그는 복수 대신 죄의식에 시달리고, 복수의 행위는 늦춰지고 결국 스스로를 벌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러시아 비극에서 부친살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타인이지만 형제, 즉 같은 아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반은 드미트리와 같은 아들이다. 그리고 아버지와의 라이벌 의식을 공공연히 드러낸다. 알로샤를 제외하고 모든 인물들이 이 죄의식을 공유한다. 조시마 신부는 드미트리에게 절을 한다. 자신의 죄를 그가 대신 지었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발작을 드미트리에게 씌우고 자신의 죄를 이반과 드미트리에게 전가한다. 아니 그의 모든 책에서 죄인은 모두 자신의 분신들이다. 그것이 그가 죄에 그토록 관심과 연민을 보이는 이유다. 그는 독일에 머물 때 도박에 돈을 몽땅 탕진하고서야 작품에 몰두했었다. 죄와 벌과 창작의 연쇄고리이다. 프로이트는 이 글에서 잠깐 '여인의 삶에서 24시간'이라는 단편(슈테판츠바이크 작, 1920)으로 빗나간다. 이 글은 사춘기에 이른 아들이 어머니가 자연스레 자신을 성으로 인도해주기 바라지만 이를 이루어주지 못하자 자위행위(도박)에 빠지고 이에 대한 자기처벌로 자살에 이른다는 이야기다. 한 여인이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데리고 산다. 남성에 대한욕망이 단념된 50세가 넘은 어느 날, 그녀는 도박장에서 젊은 남자의 두손을 본다. 그를 타락에서 구원하고자 그와 함께 밤을 보낸 그녀는 다음날 그와 함께 떠날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그녀는 방황 속에서 다시 도박장에 이르고 그곳에서 도박에 빠진 젊은이는 자살한다. 어머니는 쉽게 닿을 수 없는 여인이었고 그러면서도 무의식 속에서 아들에 대한 전이적 사랑을 막지 못한다.
그런데 여기서 프로이트가 이렇게 빗나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도스토예프스키나, 단편 속의 젊은이는 모두 인간의 삶에서 유아기 성(오이디푸스콤플렉스)과 사춘기 성이 일생에 영향을 미치고 반복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이다. 이처럼 부친살해의 욕망은 억압되지만 사라지지 않고 반복되어 나타난다. 이 글은 도스토예프스키의 간질과 도박을 억압된 부친살해의 욕망에 대한 죄의식과 처벌로, 그의 작품을 그것에 대한 증거로 보면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의식이 남보다 컸기에 도덕적이며 죄인이고, 신경증 환자였고 창조적 작가였음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작가와 작품을 연결시킨 전기적, 혹은 심리 비평에 속한다. 환유를 통해 은유를 캐어낸 다고 할까, 거대한 화산재에 묻힌 폼페이의 도시를 발굴해내는 고고학자 와 유사하다고 할까. 그리고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이르는 정신분석 비평은 대략 이런 방식이었다. 작품을 자세히 읽고 등장인물의 심리를 캐내고 그것을 창조자의 억압된 무의식과 연결시키는 방식이다. 프로이트의 글로 미학의 근본을 암시한 것에는 이외에도 '언캐니'(The Uncanny, 1919)와 '쾌감원칙을 넘어서'(Beyond the Pleasure Principle,1920)가 있고, 해체비평과 관련되는 글로는 '늑대인간 분석'과 '분석에 있어서의 구성'(Constructions in Analysis,1937) 등이 있다. 이 글들은 환유로서의 정신분석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3. 프로이트와 비평이론 :환유를 통해서 은유로
프로이트가 살았던 당시의 비평은 작품과 작가의 전기를 연결시키는 전기 비평 혹은 심리 비평이 압도적이었다. 그것은 그가 신경증 환자의 억압된 상흔을 추적하는 방식과 흡사했다. 작품 속에 나타난 주제나 상징은 작가의 유년기 욕망이 위장되어 나타난 것이라는 소망 충족식의 해석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어릴 적에 품었던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증오의 양가성이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이반과 드미트리의 갈등으로 나타나고 작가 자신의 삶에서는 간질 발작, 도박, 죄의식과 처벌의 모습으로 재현된다. 아들과 아버지가 어머니를 놓고 벌이는 라이벌 의식이 작품 속에서 실현된다.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싶은 욕망은 인간 죄의식의 근원이었다. 이런 전기적 비평은 저자와 인물의 신경증적 이상 심리를 파헤치는 데는 공헌을 하지만 작품이 저자의 사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견을 낳게 되고 신비평이나 구조주의의 도전을 받게 된다. 이제 프로이트의 재해석을 구조주의 쪽과 연결시켜본다. 구조주의는 프랑스에서 일어난 문화이론으로 소쉬르 언어학에 기반을 두었다. 러시아에서 프랑스로 망명한 로만 야콥슨이 프랑스 구조주의의 기틀을 다질 때 사용했던 기본 틀은 은유와 환유의 두 축이었다. 구조주의는 언어가 실재를 지칭하는 발화의 측면에서 구조의 측면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데서 비롯된다. 언어는 한 언어체계에서 오직 한 대상을 지칭한다는 약속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언어는 '다름'의 체계이다. 그것은 '차이'에 의해 의미를 낳는 자의적 체계이고 기의와 기표로 이루어진 약속이지 절대적인 게 아니다. 언어를 통하지 않는 재현이란 없다고 가정할 때 재현된 진리는 얼마나 자의적인가. 차이, 즉 정반의 대칭이라는 것을 절대의미의 자리에 놓아보자. 세상이 해와 달, 음과 양, 이성과 감성으로 이루어진 것이듯 작품의 구조도 은유와 환유의 열린 두 축으로 보자. 진리의 절대성을 의심하며 그것이 자의적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주는 구조주의는 기호가 자의적인 약속체계라는 기호학과 맞물려 종래는 후기 구조주의에 이른다. 레비-스트로스, 토도로프, 바르트의 구조주의는 진리의 자의성을 암 시하면서 그것을 텍스트나 문명연구 정치 사회적 문맥에 적용시켜 신선 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프로이트의 환유를 통한 은유에 이르기는 이제 은유와 환유의 열린 두 축으로 재해석되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진리의 자의성을 암시했으나 구조주의는 정반의 체계를 정적으로 열어놓았기에 반복되다보니 한계를 맞는다. 진리를 정반으로 구조화시켰다는 비난이 다. 뭐니뭐니해도 프로이트를 구조주의 언어학과 연결시켜 후기구조주의 (혹은 해체)로 이끌어간 사람은 프랑스 정신분석자인 라캉이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이제 포스트모던 이론의 핵심이 된다. 프로이트의 어 떤 측면이 해체론 시대의 중심으로 부상하는가. 데리다의 경우부터 보자.
4. 해체론 시대의 프로이트. 은유에서 환유로
구조주의의 정적인 이분법에서 데리다가 넘어서려고 했던 것은 우월의 이분법이었다. 말하기보다 글쓰기를 우월하다고 본 서구 형이상학 체계를 '차연'으로 해체시키고 하나의 논리가 서기 위해서는 반대논리를 억압할 수밖에 없음을 드러낸 '해체'는 억압된 것이 있음과 그것을 귀환시키는 것에서 프로이트와 닮았고, 매끄럽고 단일한 이성 중심주의의 허구를 드러내는 것에서 닮았다. 실제로 프로이트가 쓴 요술 책받침의 원리는 데리다에 의해 '흔적' 혹은 '산종'으로 재해석된다. 특히 프로이트의 '늑대인간분석'이나 '분석에 있어서의 구성', '기억하기, 반복하기, 그리고 작업하기', 그리고 '전이의 역동성'은 근원에 대한 회의에서 해체론과 만난다. 프로이트는 환자가 기억해낸 과거가 현재의 욕망에 의해 굴절됨을 '전이'에서 암시했고 늑대 인간의 치료에서 주를 들어 밝힌다. 어릴 적에 꾼 늑대의 꿈을 중시한 분석가는 신경증의 원인을 찾는다. 유아기에 보았던 부모의 성교장면이 환자의 원초적 상흔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분석을 마친 프로이트는 그가 밝힌 근원이 사후의 것이요, 회고적 산물이기에 허구일 수도 있음을 암시했다. '전이'는 환자가 상흔의 대상을 분석자에게 옮기는 현상으로 정신분석이 은유를 밝히는 과학이라기보다 환유적 속성을 지닌 대화라는 가설로 넘어가는 중요한 개념이다. 일찍이 프로이트는 '도라 분석' (1901년에 분석하고, 발표는 1905년)에서 자신이 실패한 원인을 도라의 전이에 있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녀가 사랑한 사람, 아버지와 K씨를 분석과정에서 자기에게 투사해 솔직하게 과거를 털어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전이의 역동성'(The Dynamics of Transference, 1912)에서는 부정적 전이와 긍정적 전이를 구별하고 긍정적 전이는 분석에서 필수적임을 인정한다. 환자는 현실에 의해 사랑이 충족되지 못할 때 그것을 타인에게 전이하는데 이때 이 전이는 환자의 의식적 기대뿐 아니라 무의식에 의해서도 똑같이 이루어지기에 분석자에게 중요하다. 전이는 저항의 한 형태인데 이때 전이가 의사에게 옮겨져 애정과 친근감으로 바뀌면 치료는 쉬워진다. 프로이트는 도라의 경우에 보였던 불평과 달리 "전이의 현상들은 분석을 힘들게 하지만 결국은 그 것이 치료를 가능케 한다"고 말함으로써 전이를 통한 치료를 암시한다.
프로이트의 이런 변화는 다음 글 '기억하기, 반복하기 그리고 작업하기'(Remembering, Repeating and Working-Through,1912)에서 한 걸음 더 전이를 인정하는 쪽으로 나간다. 환자가 의식하지 못 하는 저항을 분석자가 알려주면 환자는 잊었던 것을 기억해낼 수 있다. 그때 그 기억은 어린 시절에는 모르다가 훗날 이해하고 해석된 일이다. 말하자면 기억은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이미 반복된 것이다. 물론 그는 그것이 반복인지 모른다. 그는 거꾸로 반복충동에 의해 기억한다. 그리고 전이는 이 반복의 한 부분이다. 분석자는 저항의 상태로 이루어지는 반복에서 무엇을 반복하는가 따져야 한다. 이 글에서 중요한 것은 '근원이란 이미 반복된 것'이라는 프로이트의 말이다. 환자의 병이란 분석을 시작한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또 그의 병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동력으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지금까지 우리는 분명히 해왔다. 이 병의 상태는 치료의 현장과 범위 안에서 조각조각 끌어내 지고, 환자가 그것을 생생한 현실의 문제로 경험한다 해도 우리는 그것으로 과거의 것을 추적하는 분석작업을 해내야 한다. 반복의 형태로 나타나는 기억이란 환자의 현재 욕망이 가미된 것이다. 그렇다면 분석자가 캐내는 환자의 과거란 이미 현재 욕망의 산물이 아닌가. 프로이트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중간지대인 '전이'를 중시하고 이것을 잘 다루는 게 분석이라고 말하지만 여전히 거기에서 과거를 추적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라캉과 데리다를 비롯한 현대 해체론자들은 프로이트의 글에서 근원이 이미 반복이고 과거는 현재 욕망의 산물이라는 말을 더 중시한다.
윗글보다 훨씬 뒤에 쓰인 '분석에 있어서의 구성'에서 프로이트는 분석이 비록 고고학자가 과거의 유물을 발굴하는 작업과 같지만 그것과 다른 점도 많다고 말한다. 우선 그 작업은 환자가 제시하는 자료들을 조각조각 다시 짜 맞추는 작업이기에 둘 사이의 연결에 의해 결과가 얻어진다. 심리적 대상은 물건과 다르기에 여기저기 자료는 훨씬 많지만 그것들을 모으는 작업은 훨씬 복잡하다. 그 작업은 분석이라기보다 구성, 아니 재구성이고, 그 조합물은 오직 환자가 마음속으로 수용할 때만 답이 된다. 프로이트는 이 글에서 정신분석이 고고학과 달리 이미 분석자와 환자사이의 대화 속에 존재하고 둘 사이의 욕망 읽기라는 암시를 하고 있다. 근원이 이미 반복이요, 분석은 오직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중간지대인 '전이'에 의해서 가능할 뿐이라는 프로이트의 암시는 정신분석을 진리를 캐어내는 확고한 과학이라기보다. 환자와 분석자 사이의 대화를 통한 욕망 다스리기로 보는 것이다. 진리는 화산재에 묻혀 고스란히 복원되기를 기다리는 폼페이 시가 아니라 이미 둘 사이의 대화 속에 존재하는 표층 위의 것이다. 이것이 라캉이 프로이트를 다시 읽어낸 부분이다. 이제 해답은 환유를 통해 은유에 이르는 것도 아니요, 은유와 환유의 두 축으로 열린 것도 아니요, 단지 환유적인 것이다. 그것은 영원히 '다르게 반복하기'이다. 자꾸만 옆의 것을 짚는 페티시즘이고 상상계와 상징계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끝없이 반복되는 '강박적 반복충동'이다.
프로이트의 유아기 성, 근원적 나르시시즘 등 유아가 어머니와 한 몸이었던 시기를 라캉은 '상상계'(The Imaginary)라 이름 붙인다. 이 거울단계는 대상의 얼굴에서도 자신만을 보는 오인의 단계로서 주체의 근원으로 자리잡는다. 이 시기가 지나 아이가 '아버지의 법'이라는 사회 속으로 진입하는 단계가 '상징계'(The Symbolic)이다. 정신분석에 소쉬르 언어학을 끌어들인 라캉은 언어의 세계로 진입한다는 뜻에서 프로이트의 현실원칙을 상징계라고 표현한다. 라캉은 인식주체가 매끄럽게 통합된 이성만의 주체가 아니라 유아기의 환상인 거울단계 위에 이루어진 분열적인 것이라고 본다. 프로이트에게서 억압된 무의식이 되돌아오듯 상상계는 상징계를 뚫고 틈틈이 되돌아온다. 여기에서 욕망이론이 탄생한다. 욕망은 우리가 대상을 어머니라고 믿고 추구하다가 그것을 손에 쥐는 순간 미끄러지며 그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고 그러기에 다시 또 다음 대상에 다가서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자꾸만 가게 만드는 힘이 삶의 동력이요, 욕망의 미끼(a)요, 상징계를 무너뜨리는 우수리요, 실재계(The Real)이다. 여기서 우리는 프로이트의 유아기 성, 혹은 '근원적 나르시시즘' 이 약 3, 4세에 이르는 시기임을 떠올릴 때 라캉은 프로이트를 다시 읽어내며 명칭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시기도 유아가 언어를 배우는 시기를 고려해 당겼음을 알 수 있다. 프로이트가 어렴풋이, 그러면서도 신념을 가지고 줄기차게 되풀이 해온 무의식을 라캉은 소쉬르 언어학과 결합시켜 구체적인 시기와 용어를 만들어내고 욕망의 본질로 축소시킨다. 그리고 그것이 현대 해체론과 맥이 닿으면서도 더 나아가 정치적인 문맥으로 읽히게 만들었다. 탈식민주의 이론에서 정신분석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특히 프로이트의 용어보다 라캉의 용어, '상상계'가 더 보편화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라캉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미 프로이트가 암시했던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아니 라캉의 입장에서 프로이트를 되돌아보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지만 프로이트의 '언캐니'가 라캉의 '실재계' 혹은 욕망의 미끼, 프티 오브제 아(a)와 거의 같은 맥락에 있음을 밝혀보자.
프로이트의 유명한 글, '쾌감원칙을 넘어서'의 전신이기도 한 '언캐니'는 그가 '강박적 반복충동'이라는 개념에 골몰해 있을 때 쓴 글이다. 이미 1912년에 쓰인 '기억하기, 반복하기, 그리고 분석하기'에서 반복의 중요성을 암시했지만 프로이트는 인간이 쾌감의 즉각적인 충족을 지연시키며 현실을 지탱해나가는 데는 어딘가 반복을 강요하는 충동이 본능 속에 있음을 감지했다. 실제로 어린 손자가 어머니의 부재를 견디는 방법으로 끈이 달린 실패를 집어서 던지고 다시 집어서 던지며 노는 것을 본 그는 "포르트" (저기)"다"(여기) 게임이 바로 인간이 현실을 견디는 본능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이는 어머니가 없는 것을 견디어야 한다. 그래서 실패를 던지며 사라지면 '저기'(fort)라고 말하고 다시 나타나면 '여기'(da)라고 말하기를 반복하며 시간을 보낸다. 이 반복을 향한 충동은 얼마나 강박적인지 쾌감의 충족조차 저지한다. 쾌감의 충족이란 죽음이기에 반복충동이란 삶본능이요, 자꾸만 옆의 것을 짚어서 충족을 지연시키는 현실원칙이다. 환유를 통해 죽음을 지연시키는 충동, 이것이 삶과 서사의 동인이라는 암시는 20세기 후반부 프로이트 해석의 핵심이 된다. 라캉의 욕망이론도 상상계와 상징계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실재계를 낳으며 반복되는데 이 끝없는 되풀이도 결국 죽음을 지연시키는 삶 본능이다. 대상을 보고 그것이 남근, 혹은 어머니라고 믿고 다가간다 (상상계). 포착하는 순간 대상은 환상의 껍질을 벗고 본체를 드러낸다 (상징계). 옆의 것을 짚었기에 그는 또 저만큼 물러나서 손짓하는 대상을 향해 간다(상상계). 이런 되풀이가 우리의 삶이요, 이때 이런 반복을 가능케 하는 욕망의 동인이 '실재계'라는 미끼, 혹은 우수리다. 그러므로 실재계란 그 자체로는 재현이 되지 않지만 인간을 반복으로 몰아넣는 동안이다. 상상계와 상징계의 차액이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상징계 속의 구멍이요, 대상과의 완벽한 동일시를 방해하는 얼룩이요, 타자(The other)이다. 상징계의 매끄러운 동일시를 뒤엎고 낯설게 만드는 어떤 것, 그것은 프로이트의 '언캐니'이기도 하다.
흔히 미학은 숭고함, 아름다움, 매혹을 자아내는 대상과 그런 상황에 대한 연구로만 알려져 왔는데 괴기함, 공포, 낯설음도 미학의 요소가 된다. '언캐니'는 바로 반감, 두려움, 놀람도 미학의 한 요소임을 증명하는 연구다. 서사에서 언캐니를 창조하는 방식은 독자를 불확실함 속에 놓는 것이다. 독자의 주의력을 분산시켜 문제의 해결을 늦추면서도 궁금증을 갖게 만드는 것, 즉시 문제를 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언캐니란 억압되어 반복을 일으키는 원초적 장면이다(Whatever reminds us of this inner 'compulsion to repeat is perceived as uncanny). 억압된 무의식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 반복이 가능하게 만드는 것. 즉 언캐니는 욕망의 동인이요, 동일시를 전복하는 얼룩이요, 통합된 주체를 무너뜨리는 타자'이다. 반복충동은 프로이트 후기 사상의 핵심이었고 라캉은 이 부분에서 많은 암시를 얻는다. 거울 단계를 주체 형성의 기본으로 삼은 것은 반복충 동으로 가는 동인이었다. 그것 때문에 주체 속에 이물질이 존재하고 욕망은 충족을 모르고 계속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반복'이야말로 후기 구조주의, 혹은 해체론의 핵심사상이었다. 환유를 거쳐 은유에 이르던 심리 비평은 은유와 환유의 동등한 입장을 지나 환유로서의 정신분석에 이른다. 삶도 서사도 비평도 죽는 순간까지 옆으로 가는 춤, '다르게 되풀이하기'를 벗어나지 못한다. 은유인가 하는 순간, 합일을 가로막는 얼 룩, 우수리, 타자에 의해 그 꿈이 깨어지고 환유가 되는 것이다.
환유로 보는 정신분석은 해체비평에서 힐리스 밀러 (Hillis Miller)의 '옆으로 가는 춤' 혹은 '반복'적 읽기 그리고 폴 드 만(Paul de Man)의 '독서의 알레고리'와 같은 맥락에 있다. 완벽한 텍스트 읽기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읽기는 우수리를 남긴다. 하나의 인기는 반대적 읽기를 억압하고서만 존재한다. 밀러는 그의 유명한 책, '픽션과 반복'에서 지금까 지의 모든 읽기가 옆의 것을 짚는 반복이었음을 보여준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보자. 주제를 보는 읽기는 쓰여진 방식이 몇 겹으로 되어 있음을 간과했다. 정신분석적 읽기는 마르크시즘적 읽기를 억압한다... 이런 식으로 책읽기란 우수리를 남기며 끝없이 되풀이된다. 드 만의 독서의 알레고리 역시 환유적 읽기이다. 루소를 읽으면서 데리다는 어떤 부분을 억압했는가. 루소를 읽은 데리다를 다시 읽는 드 만의 인기는 다시 그 다음 사람에 의해 전복된다. 그도 역시 반대부분을 억압하지 않고는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통찰에는 맹목이라는 어두운 그늘이 존재하고 이 맹목은 프로이트의 언캐니, 라캉의 얼룩이 아니고 무엇이랴? 통찰 속에 존재하는 맹목은 주체 속에 존재하는 타자이다. 바바라 존슨의 '포, 라캉, 데리다-비평의 틀짜기' 역시 반복으로써의 읽기이다. 포를 읽은 라캉이 무엇을 억압했는가를 드러낸 데리다의 읽기를 존슨이 다시 읽어 데리다가 라캉의 어느 부분을 억압했는지 보여주는 글이다.
환유로서의 비평은 완벽한 읽기가 아닌, 옆의 것 짚기이다. 그리고 이 '다르게 되풀이하기'는 쾌감원칙 너머에 반복충동이 있다는 프로이트의 '쾌감원칙을 넘어서'를 떠올리게 한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서사분석에 적용한 피터 브룩스(Peter Brooks)의 '플롯을 따라 읽기'(Reading for the Plot, 1984)는 쾌감원칙이 어떻게 충족을 우회하여 현실원칙과 교차 반복함으로써 삶과 소설을 지연시켜 가는지 보여준다. 상상계와 상징계가 교 차 반복되듯, 삶본능과 죽음본능이 교차 반복되어 픽션을 이룬다. 욕망 이 즉각적으로 충족되면 곧 죽음이기에 욕망은 충족을 늦추고 길게 우회하여 자꾸만 옆의 것을 짚는다. 탄생과 죽음 사이의 가장 긴 거리는 바로 구불구불한 아라베스크, 그래서 서사도 삶도 반복을 통해 거리를 길게 늘인다. 그가 서구의 사실주의와 모더니즘 소설들을 반복과 전이의 구조로 읽어낸 이 책은 정신분석을 서사 읽기에 적용한 정밀하고 신선한 통찰이었다. 상상계, 혹은 거울단계는 탈식민주의에 오면 정치적인 맥락에서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식민주의자들의 환상을 일컫는 용어가 된다. 백인들은 제 3세계인들이나 흑인들을 자신들의 욕망으로 읽어낸다. 그런데 피지배인들 역시 자신들의 욕망으로 대상을 읽기에 대상의 교화라는 식민주 의자들의 산뜻한 꿈은 깨어진다. 주체 속에는 이물질이 있어 통합된 깔끔한 이상론을 무너뜨린다. 이 우수리, 상징계를 무너뜨리는 실재계는 "타자"가 되어 식민주의가 왜 실패했는지 보여주고 제도적으로는 끝났을 지라도 여전히 존재하는 문화적 식민주의, 혹은 무의식 속에 잠재한 식민주의를 들추어낸다. 물론 타자성(otherness)이란 무의식이 되돌아오면서 의식의 세계를 무너뜨리는 얼룩으로 제국인의 가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식민지인의 욕망뿐 아니라, 피식민지인의 가슴에도 제국주의가 있음을 보여주어 항의 와 함께 스스로를 반성하는 것은 최근 탈식민주의 문학의 특징이다. 누구나의 가슴속에 존재하는 제국, 그것은 타자의 귀환과 함께 무너진다. 미학을 설명하던 프로이트의 언캐니는 이처럼 라캉의 타자가 되어 정치 적인 문맥에서 이용되기에 이른다.
지금까지 프로이트 이론의 핵심을 은유와 환유의 관계로 살펴보고, 그 이론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달리 재해석되는지 간략히 더듬어 보았다. 그의 글들 가운데에서도 문학에 관련되는 것들을 골라 살펴보았고 그 글들 속에서 되풀이되는 사상을 밝혔다. 그리고 후세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읽고 다시 읽는가 더듬었다. 프로이트의 글들이 끝없이 재해석되는 것을 보면 그 자체가 이미 환유적 읽기가 아닌가 싶다. 많은 이론들을 더듬다보니 충분한 예를 들지 못한 아쉬움과 또 하나의 궁금증이 생긴다. 그 다음 시대는 프로이트를 어떻게 재해석할 것인가. 환유를 통해 은유를 탐색하더니 은유와 환유가 대칭을 이루고 다시 은유를 거쳐 환유적 읽기가 된다. 이제 다시 환유를 통한 은유인가? 해체비평이 환유적 읽기였으니 탈식민주의 비평은 이미 환유를 거친 은유 찾기는 아닐까? 그토록 시대를 따라 재해석되니 '무의식은 사라지지 않고 되돌아온다'는 이 단순한 명제는 대단한 진리인가 보다. 물론 확률적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