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상징세계 - 구미례
제1장
수
5. 관용어로 쓰이는 수
1) 우주의 섭리에 따라 쓰이는 관용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오묘한 자연의 섭리와 이치에 따라 조화롭게 이루어져 있다. 오랜 옛날에 인류는 만물의 생성과 소멸의 주기, 생명의 구성원리 등 신비로운 우주의 섭리를 깊이 연구하였다. 이에 따라 4계절, 12달, 365일, 10진법, 60진법 등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우주인식의 체계가 이루어졌다. 특히 동양에서는 서양과 다른 독특한 우주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우주관과 세계관을 수로 표현하여 체계화시킨 것이 많다. 오행사상을 비롯하여 10간, 12지, 3재, 동서남북의 4방위, 4단 7정 등이 그것이다. 오랜 세월을 통하여 이러한 인식체계가 삶에 다양하게 적용되고 친숙하게 사용되어 오면서 우리 민족은 여러 가지 관용어를 만들게 되었다. 먼저 '4'를 보자, 4는 '죽을 사'자와 발음이 같이 죽음을 연상하는 불길한 수로 인식되고 있음을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병원, 아파트, 호텔 등과 같은 건물에서 3층 다음을 4층이라 쓰지 않고 5층으로 표기하고 있어, 우리 문화권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들이 당황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기피하고 있는 숫자임에도 4는 오랜 세월 동안 4방위, 4주, 4계절 등으로 익숙히 사용되면서 우리의 관념 속에 독립된 관용어로 형성되어 있다. 4라는 숫자의 핵심은 나 또는 우리를 중심으로 하여 동서남북의 사방을 둘러싸고 있다는 인식이다. 따라서 중앙을 지켜줄 수 있으며, 이러한 중심을 둘러싸고 있는 사방은 '전체'로서의 의미로 파악되고 있다. 사해(세계, 온 천하), 사민(곧 온 백성), 사천왕, 사고(생노병사), 사군자(매난국죽), 문방사우(붓, 먹, 종이, 벼루), 사상의학(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 등은 모두 이러한 관점에서 출발한 것이다. '나', '인간'을 중심으로 사방의 기둥에 서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네 가지 요소를 배열함으로써 비로소 중심이 온전해질 수 있다는 인식을 담고 있다. 따라서, '4개의 뿌리' 또는 '4개의 기둥'이라는 4주의 말뜻도 태어난 연월일시의 각 기둥이 나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적인 네 개의 뿌리이며, 나를 중심으로 사방에 서 있어 운명을 좌우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옛사람들은 하늘은 양, 땅은 음기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여 양은 하늘의 모양인 원으로 나타내고, 음은 땅의 모양인 방형으로 표시하였다. 옛 문헌은 보면 하늘은 '상원, 주원' 등으로, 땅은 '사방, 팔방' 등으로 표기하였다. 따라서 사람은 땅에 살고 있으므로 그 주변을 사방이라 표시하면서 자신을 둘러싼 '완성된 전체'로 파악하게 된 것이다. 또한 4는 그 배수인 8과 함께 쓰여져 중복의 의미, 즉 강조의 효과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사방팔방, 사고팔고, 사주팔자, 사팔허통(사면팔방이 터져서 허전함), 사통팔달 등과 같이 같은 의미를 두 번 반복함으로써 원래의 뜻을 더욱 강조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다음으로 5수에 관하여 살펴보자. 예로부터 동양사람들은 우주창조의 근본이 음양오행학에 있다고 믿었다. 앞의 '양수와 음수'에서 음양의 구분을 설명하였듯이, 하늘과 땅이 생겨난 뒤에 음과 양의 두 기운은 다섯 가지 원소를 생산하였다. 이것이 바로 목, 화, 토, 금, 수의 5행이다. 이 가운데 수기와 목기는 하늘의 양명한 기운에서 생겨나고, 화기와 금기는 땅의 중탁한 기운에서 생겨났으며, 토기는 수, 화, 목, 금의 조화로 생겨난 것이라고 보았다. 이와 같이 오행은 음양을 모체로 하여 생겨난 것이며, 또한 오행의 하나하나에는 음과 양의 두 기운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음양과 오행이 조화를 이루어 10간과 12지가 정립되었고, 다시 오행의 각 기운과 직결된 5색, 5미, 5취, 5각 등이 파생된 것이다. 이와 같은 이치에서 동양에서는 5를 모든 것을 갖춘 수로 파악하고 있다. 즉 음양오행의 원리가 모두 갖추어진 완전한 수인 것이다. 방위에 있어서 동서남북에 중앙을 보탬으로써 비로서 5행이 갖추어진 전체로서의 완전함을 뜻하게 되며, 삼색인 청, 적, 황에 백과 흑을 더함으로써 완전한 기본색인 5색이 된다. 짠맛, 쓴맛, 단맛, 신맛, 매운맛의 5미, 인, 의, 예, 지, 신의 5상, 간장, 심장, 비장, 폐장, 신장의 5장, 눈, 혀, 몸, 코, 귀의 5관, 궁, 상, 각, 치, 우의 5음 등이 모두 5행의 이치에서 파생된 것이다. 이처럼 5수는 5행사상의 원리에 따라 '모든 것이 이치에 맞게 갖추어진 완전함'을 뜻함으로써 서양에서는 볼 수 없는 동양 특유의 수 관념을 형성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독특한 수 관념과 함께 우주의 기본 요소인 천, 지, 인 3재를 상징하고 있는 3수는 우리 민족에게 가장 환영을 받으며 즐겨 애용되었다. 앞 부분과의 중복을 피하면서 우리가 쓰고 있는 3수로 된 관용어를 몇 가지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관례 때 세 번 관을 갈아 씌우는 의식인 삼가, 임금이나 왕자, 공주의 배우자가 될 사람을 세 번 고른 다음에 정하는 삼간택, 만세삼창, 하나의 대상에만 마음을 집중시키는 일심불란의 경지인 삼매, 신중히 생각한다는 뜻의 삼고 등이다. 다음으로 12수는, 12지와 일 년 열두 달을 상징하는 수로 사용되는 관용어이다. 우리 민족은 저승에 이르기 위해서는 열두 대문을 통과해야 한다고 보았다. 하나하나의 대문을 지날 때마다 갖가지 시련이 있으며, 인정을 써야만 그 대문을 통과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열두 대문을 통과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으로, 서울지방의 색람굿에서는 '12개의 가시문'이라 표현하고 있다. 또한 무당이나 판수가 경을 욀 때 부르는 장수도 열두 신장 또는 12신장이라 한다. 식생활에서도 임금의 수라상은 12첩을 가장 크게 차린 밥상으로 정하고 있으며, 민가에서는 9첩을 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 외에도 혼인 때 신부를 따르는 계집종을 12명으로 정하여 '열두하님'이라 하고, 열두 대문, 열두 폭 치마 등과 같이 12수를 즐겨 사용하고 있다. 이는 모두 12지와 열두 달의 뜻에서 파생된 관념적인 수이다.
2) 크고 많은 수
우리 민족은 '많다, 크다, 최고이다'등의 의미를 나타낼 때 여러 가지 숫자를 관용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즉 그 숫자가 가지고 있는 값만큼의 크기가 아니라, 관용적으로 사용하면서 그러한 의미를 다소 과장되게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개개의 숫자에 내재된 상징이나 의미보다는 우리 민족의 과장이 깃든 해학과 풍류의 재미를 살펴보는 내용이 주가 된다. 먼저 9수는 9,19,99 할 것 없이 '양의 기운이 가득히 충만된 수'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높다, 깊다, 길다, 많다' 등의 의미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넓은 하늘을 뜻할 때 구천, 구중, 구건이라 하고, '구천구지'라 하면 하늘 꼭대기에서부터 땅 속까지의 사이를 뜻하게 된다. 여기에서는 9수가 넓고 높고 깊음을 모두 나타내는 강력한 수로 사용되었다. '구곡간장'은 깊은 마음속을, '구중궁궐'은 문이 겹겹이 달린 깊숙한 궁궐을, '구절양장'은 산길 등이 양의 창자처럼 꼬불꼬불하고 험한 것을 일컫는다. (춘향전)을 보면 이러한 대목이 있다.
이 몸이 죽은 후에 후생하여 보려드니 금일 상봉 황홀하다. 칠년대한 단비 오고 구년지수 해 돋는다.
여기에서 '구년지수'란 9년 동안 계속되는 큰 홍수라는 뜻으로 '구년지수 해 돋는다'라는 말은 오랜 세월을 두고 간절히 바라던 일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또한 오래 묵어서 자유자재로 잔재주를 부려 사람을 흘린다는 여우는 꼬리가 아홉 개인 구미호라 하였고, 더 과장하여 아흔 아홉 개의 꼬리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썩 많은 것 중 지극히 적은 것을 말할 때는 '구우일모'라 하여 아홉 마리 소의 털 중 하나로 표현하였고, 몹시 먼 나라를 일컬을 때는 '구역'이라 하여 아홉 번이나 통역을 거듭해야만 언어가 통할 수 있다는 뜻으로 과장하기도 하였으며,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경우에는 '구사일생'이라 표현하였다. 이처럼 9수는 많고, 높고, 깊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크고 높은 수로서 길수로 여겨져 왔다. 따라서 신령한 동물인 용의 앞에 사용, 구룡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다. 구룡강, 구룡도, 구룡폭포, 구룡연, 구룡포 등 우리나라의 섬, 강, 폭포, 못 등 많은 자연지명에 사용되고 있다. 또한 임금의 면복에다 아홉 가지의 수를 놓아 '9장'이라 하였고, 아홉 칸으로 나누어진 찬합에 음식을 담아 '구절판'이라 하였다.
다음으로 10수는 뜻하면서 '하나의 굽이를 넘어선 수', '하나의 매듭이 끝난 수'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한 단계를 지우다', '한 굽이를 넘어서다'는 일단락의 의미가 강하게 작용되어 쓰이는 관용어이다. 예로써 '십년감수', '십 년 공부 나무아미타불' 등을 들 수 있다. 십년감수는 위험하거나 위태로운 한 단계를 넘어서 이제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하며, 십 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은 일단락을 지웠다고 자부할 만한 공부를 마쳤으나 공든 탑이 무너지듯 원천적으로 허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 외에도 십년지기, 십목(여러 사람의 눈, 중인의 관찰), 십분(넉넉히, 아무 부족 없이), 십사일반, 십인십색(가지각색), 십전(조금도 위험이 없음), 십중팔구 등을 비롯하여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린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열 일 제치다' 등 격언, 속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제 수의 단위에 따른 백, 천, 만, 억, 조 등을 살펴보자. 먼저 100은 많음을 뜻하는데 가장 일상적으로 쓰이는 관용어 중의 하나이다. 백 개의 성이라는 뜻의 '백성'이라는 말로 국민을 나타냈고, 여러 학자들을 백가, 모든 벼슬아치들을 백관이라 불렀다. 다양하다는 뜻으로 쓰일 때는 백과사전, 백화점, 백방(여러 가지 방법), 백출(여러 가지 모양으로 많이 나옴), 백해무익, 백행, 백화 등이 있고, 많음을 나타내는 것으로는 '백문이 불여일견'을 비롯하여 백록(많은 복록), 백만장자, 백배사죄 등의 말이 있다. 또한 오래고 길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것을 보면 백년손님, 백년가약, 백년대계, 백년해로 등 백 년 동안이나 되는 긴 세월이라는 말을 즐겨 쓰고 있으며, 이 외에도 백일해, 백일기도 등이 있다.
천이라는 수에서 먼저 멀고 길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것은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격언을 비롯하여 타향천리, 천리경, 천리마, 천리안 등이 있고, 오랜 세월 또는 영원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것은 천고불멸, 천추(오랜 세월) 등이 있다. 무게의 무거움을 나타내는 예로는 힘이 썩 센 사람을 일컬어 '천근역사(천근을 들어올릴 만한 장사)'라 하고, 흔히 몸이 힘들고 무거울 때는 '몸이 천근 같다'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비싼 값과 많은 돈을 상징할 때도 천금, 천 냥, 천 석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며, '천금준마'라 하면 썩 좋은 말을 뜻하게 되고 '천석꾼'은 천석을 추수하는 사람, 즉 굉장한 부자라는 뜻이 된다. 속담에서도 많이 살펴볼 수 있는데, '천 냥 빚도 말로 갚는다', '천 냥짜리 서 푼도 본다', '말 한 마디 잘 하면 천 냥 빚도 갚는다' 등이 그것이다. 한편, 많고 다양함을 더욱 강조하기 위하여 천과 만을 함께 써서 과장되게 표현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예를 들면 썩 많은 병마라는 뜻의 '천군만마', 온갖 고난과 시련의 뜻인 '천신만고', 매우 다양하다는 뜻의 천년만년, 천추만대, 천추만고 등이 있으며, '지극히', '매우'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은 천만다행, 천만뜻밖, 천만부당, 천만의 말씀, 천부당만부당 등이 있다. 이 외에도 노름판을 '천냥만냥판'이라 하기도 하며, '천석꾼에 천 가지 걱정, 만석꾼에 만 가지 걱정'이라는 과장되고 해학적인 표현을 즐겨 하였다. 특히 불교에서는 현재겁에 1,000의 부처가 나타난다는 천불신악에 따라 천불공양, 천불전, 천불염, 천불산 등의 말이 생겨나게 되었고, 불타의 헤아릴 수 없이 변화하는 몸을 강조하기 위하여 '천백억화신'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만과 억과 조에 관하여 살펴보면, 만고강산, 만고불멸, 자손만대, 만년설, 만년필, 만수무강, 억겁, 억대 등과 같이 영구적인 오랜 세월을 뜻하는 말, 만리장천, 만리타국, 기고만장, 파란만장, 만리경 등과 같이 끝없이 길고 높은 거리나 길이를 뜻하는 말, 만국, 만금, 만능, 만물, 만반, 만병통치, 만부득이, 만사형통, 만일(만약,만혹), 조민, 조서(모든 백성) 등 많음을 나타내는 말 등 매우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과 관련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옛날에 백성들이 봉기하여 학정을 하던 원이나 지방관을 쫓아낼 때 쓰던 가마를 '만인교'라 하였다. 또한 조선시대 때 많은 유학자들이 연명하여 올리던 상소를 '만인소'라 하였다. '강력한 전체성'의 의미를 지닌 숫자 33이 국민 전체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음에 비하여, 만은 수의 크기로 많음을 나타내어 전체를 상징하는 다소 직접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천, 만을 중복하여 많고 다양함을 강조하였듯이 억천만겁, 억만년, 억만장자, 억만지중, 억조창생 등과 같이 억과 만과 조 등을 함께 사용하였으며, '구만리 장공', '오만날', '오만가지 생각', '오만상을 찌푸리다', '오만소리를 다 한다' 등고 같은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