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의 성과 권력 - 권택영
제1부 무의식과 성이론
3. 무의식의 부활과 동성애
정신분석과 마르크시즘의 연합
줄리엣 미첼은 원래 영국의 마르크시스트였다. 그녀는 마르크시즘이 후기 구조주의 시대에 어떤 모습으로 변형되어야 할 것인지 고심하던 중프랑스 해체론에서 출구를 찾게 된다. 해체론은 온갖 중심주의의 허구를 들추며 역사상에 그 동안 주변으로 물러났거나 지워져온 것들이 자의적인 구조의 문제였지 자연발생적이 아니었음을 보여주었다. 해체론의 전복적인 기능이 그녀에게 지배와 피지배의 계급문제를 수정할 수 있는 암시를 준다. 마르크시즘은 단순히 자본가와 노동자의 문제뿐 아니라 성차, 인종의 차이, 식민주의 등 다양한 불평등 구조를 포함한다. 그리고 백인여성이었던 그녀에게는 성차별이 해결되어야 할 문제였다. 역사상으로 여성은 늘 노동자였다. 남성 중심주의에 의해 주변화된 여성은 분명히 있으면서도 들리지 않던 타자였다. 가부장제의 매끄러운 논리가 억압한 것이 무엇인가를 들추기 위해 그녀는 프로이트에게 돌아간다. 라캉과 푸코와 데리다가 이성이 억압한 것을 들추는 데 프로이트가 필요했던 것처럼, 미첼도 남성이 억압한 것을 들추기 위해 프로이트가 필요했다. 그의 성이론을 무조건 비판만 할 게 아니라 그 속에 어떤 정치성이 들어 있는가 보자. 프로이트가 지닌 혁명성을 여성의 입장에서 재해석하려는 의도 아래 1974년 미첼은 '정신분석과 페미니즘'을 펴낸다. 이 책은 프로이트를 재해석한 라캉이 영미 쪽에 익숙히 소개되기 전 여전히 '남근선망'이라는 단어로 프로이트가 여성들의 비난을 면치 못하던 때 그를 재인식하는 계기가 된다. 미첼은 프로이트가 당대의 가부장제를 설명했을 뿐 그것을 추천한 것은 아니며 정신분석도 이념의 산물이므로 시대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고 말한다. 인간의 의식을 다루는 심리학과 달리 무의식을 다루는 정신분석은 현실에 저항할 전복적인 요소를 지닌다. 프로이트의 현실원칙과 초자아의 측면에서만 보지 말고 그가 얼마나 억압된 쾌감원칙을 강조했는지 보자. 그러나 현실원칙은 결코 쾌감원칙에서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 그리고 매끄럽게 총체적으로 이어질 수도 없다. 어떤 측면은 거의 관여도 못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환상이나 어린이들의 유희, 어른들의 공상에서 쾌감원칙은 현실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렇다고 현실원칙이 성적 욕망에서 강하게 작용하는 것도 아니다. 성적욕망은 자발적 성애에서 충족되기에 외적 현실에 우선적으로 크게 의존하지 않는다. 위 글에서 자발적 성애란 유아기 성으로 온몸이 성감대였던 시기이다. 그 시절의 쾌감은 오늘날과 달리 남녀 사이의 성기 중심의 쾌락이 아니라 아늑하고 안정된 평화로 아이가 엄마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치 않는 완벽한 충만함이다. 그래서 "쾌락"보다 "쾌감"이란 단어가 더 적절한 것 같다. 현실원칙보다 쾌감원칙을 강조한 미첼이 어떻게 무의식을 마르크시즘과 연결시키는지 보자.
1. 정신분석과 마르크시즘의 연합
미첼이 이 책에서 밝히는 프로이트 재인식은 그의 혁명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라캉과 거의 같은 입장이다. 우선 그녀는 사회와 현실이 인간을 억압하기 이전에 성차는 없었다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여성이론이 얼마나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성이론에 관한 세 글'과 '도라 분석'에서 프로이트는 리비도는 원래 하나였고 남성적이라고 말했다. 남성은 적극적이고 여성은 소극적이라는 구별은 사춘기 이후성에서 나타나고 그것은 사회의 요구 때문이었다. 도라의 무의식에 깊이 새겨진 무의식은 그녀가 아버지와 동일시하여 K부인을 사랑했던 동성애였고 히스테리는 사회가 이것을 억압했기 때문에 나타난 죄의식과 불만의 징후였다. 다음으로 미첼은 프로이트의 나르시스적 주체를 강조한다. 어릴 적에 아이는 자아와 타자와 구별을 하지 못한다. 에코에 의해 보여지지 못하고 물 속에 비친 제 모습만 사랑한 나르시스는 프로이트의 에로스다. 아이는 태어나서 자발적 성애라는 시기를 거친다. 내가 어머니요 어머니가나인 완벽한 지복의 순간들이다. 이때 성차는 없었다. 미첼은 이 시기가 지난 후 나르시시즘 시기를 두어 대상을 인지하지만 그 대상이 자신인 줄 모르는 단계로 해석해낸다. 프로이트는 그의 글 속에서 에코를 언급하지 않았으나 충분히 타자에 관한 언급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첼의 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나르시시즘 단계는 자발적 성애의 단계와 거의 구별되지 않고 라캉의 경우엔 상상계로 읽힌다. 다만 미첼의 이런 주장은 원초적 억압을 상상계 이전에 두고 상상계를 성차가 아직 일어나지 않으면서 에로스와 아가페가 조화를 이루는 단계로 상정했던 크리스테바를 떠올리게 된다. 에로스적인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아가페적 아버지의 개입이 조화를 이루는 단계이다. 어쨌든 미첼은 타자를 인지하면서도 성차가 없던 나르시시즘이 의식을 뚫고 되돌아오며 가부장제 질서를 위협한다고 믿는다. 미첼은 또 양성성을 강조한다. 사춘기 이전에 유아기 성이 있었고 이때 남녀의 성차는 없었다. 남녀 모두에게 남성성과 여성성이 공존했다.그 증거가 오늘날의 동성애다. 동성애는 남성 속에 억압된 여성성, 여성속에 억압된 남성성이 귀환하는 예다. 동성끼리 서로 사랑을 느끼는 것이 유아기 성에서는 이상하지 않았다. 그때는 온몸이 성감대였고 만지고 쓰다듬는 모든 게 아늑한 쾌감이었다. 성이 오늘날처럼 남녀 사이의 것으로, 생식기라는 특정 부위로, 그리고 성에 있어서 남성은 적극적이고 여성은 소극적으로 규정된 것은 사회의 요구 때문이었다. 남녀가 결합하여 가정을 꾸미고 아이를 낳아 길러 사회의 구성원이 되고 노동력을 늘려가기 위해 그렇게 교육받아온 결과다. 그러므로 도라의 히스테리는 원래의 성을 억압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데서 일어난다. 미첼이 짚은 양성성은 오늘날 사회적인 성(gender)을 의심하며 레스비언의 여성 역할과 남성 역할을 적극적으로 탐색하는 퀴어 이론으로 연결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미첼은 동성애에 탐닉하지는 않는다. 거세 콤플렉스 이후의 프로이트에 대해 그때까지 충분히 비난했으니 이제 그 이전의 무의식, 나르시시즘, 유아기 성을 발견한 프로이트를 위해 축배를 드는 것이다. 무의식이 갖는 현실에 대한 저항을 간과하지 말자.사회가 본래의 성을 어떻게 억압했는가. 어떻게 성차별이 이루어지는가를 보는 것은 마르크시스트로서 미칠의 관심사였다. 성차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진리가 아니라 사회적 관습으로 진리처럼 굳어진 것일 뿐이다. 성차가 이데올로기의 산물임을 프로이트가 짚어줬다는 데서 미첼은 존스와 호나이를 비판한다. 그들은 사회적 성을 말한 프로이트를 생물학적 성을 말한 것으로만 오해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그런 오해가 빚어졌을까? 아니 정말 그것은 오해일까? 성차에 저항하는 같은 여성끼리 프로이트를 놓고 싸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프로이트가 지닌 모순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무의식이라는 영역을 설정하여 스스로가 자신의 발견을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이라고 말했다. 인간이 의식의 존재만이 아니라 의식이 조정하지 못하는 거대한 무의식의 영역이 있다는 가설은 마치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태양의 둘레를 도는 혹성일 뿐이라는 것과 다름이 없는 위험한 가설이었다. 그는 또 자신의 작업을 다윈의 진화론과도 비교했는데 인간은 신이 창조한 피조물이 아니라 동물로부터 진화했다는 가설 역시 혁명적이어서 커다란 파문을 몰고 왔다. 무의식 역시 현실을 거스르는 것으로 사회와 관습에 역행하는 저항이었다. 그의 글에서 에로스는 언제나 문명의 반대편에서 그것을 의심하고 그것을 뚫고 솟구친다.
그러면서도 그에게는 또 하나의 모순된 꿈이 있었다. 자신의 혁명적인 가설이 현실을 어떻게든 절실하게 잘 설명해 주기를 바랐다. 현실에 저항하고 현실을 거스르는 가설로 현실을 절묘하게 설명해내야 하는 것이 프로이트의 숙제였다. 물론 그 자신은 이런 모순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저 막연히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하고 느낄 뿐. 예를 들면 그는 여성에게 억압된 동성애가 히스테리를 일으킨다고 암시하고 리비도는 원래하나였다고 말하면서도 "여성성"을 설명할 때는 전형적인 가부장제의 신사가 된다. 여성이 소극적이고 질투와 허영심이 많고 역사상 중요한 일을 하지 못한 것은 거세 콤플렉스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그리고 남근선망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차를 설명할 때 그는 "더 깊이는 모르지만"이라고 조금 망설이지만 어느 사이 깔끔하게 현실 편에 서고 만다. 프로이트는 분명 당대 가부장제 사치를 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아무리 혁명 적인 남성이라도 여성에 대해서만은 보수적이 되는 것도 무의식 탓이 아닐까. 바로 그가 발견한 무의식 말이다. 무의식은 원래 자아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나르시시즘이니까. 게다가 프로이트는 생물학적 성차와 사회적 성차를 혼동하고 있었다. 리비도는 하나였다는 에로스를 말할 때는 사회적 성차를 암시하고 현실의 여성성을 말할 때는 생물학적 차이를 가지고 설명했다. 생물학적 성 차, 그것도 남근의 유무라는 우열의 차이를 가지고 성차를 설명하면서 성차란 자연발생적이 아니고 자의적인 현실원칙의 산물이라고 어딘가 미심쩍은 말을 그는 크게 의식하지 않고 언급했던 것 같다. 사실은 그의 이런 미묘한 모순이 그를 해석하고 재해석하게 만드는 이유지만.
미첼은 그때까지, 특히 케이트 밀렛의 '성의 정치학'(1970)까지 영어권에서 프로이트를 계속 남근 중심주의자로 몰아붙인 것에 대한 대안으로 프로이트를 다시 읽고자 했다. 프랑스 해체론의 영향을 받고 그것을 마르크시즘과 연결시키려 했기에 "억압된 것의 귀환"이 그녀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관심사는 생물학적 성차가 아니라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성차였다. 무의식을 억압한 현실이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구조된 것이라는 가설은 프로이트에게서 받아들이고 성차별이 어떻게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구조되어왔는가를 보는 것은 마르크스의 입김이었다. 문화적인 면에서 보면 성의 법칙도 교환가치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의 법칙을 따른다. 특히 산업화 과정에서 어머니는 노동력을 생산하는 모체이다. 재생산을 위해 일부일처제와 가족이 중시되고 어머니는 가정에서 육아와 가사를 돌보는 소극적 역할을 맡는다. 프로이트는 문명의 기원을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죄의식 속에서 세워놓은 토템으로 본다. 가부장제 역사는 양성성을 억압하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남성적 투쟁의 연속물이다. 남성이 여성성을 잘 억압한 것에 비해 여성은 남성성을 다스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미첼은 가정도 여자만큼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사회가 그렇게 꾸며놓은 것이다. 가장 자연스러워 보이는 가족관계의 인위성을 들추는 면에서 미첼의 주장은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자인 레비-스트로스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그녀가 라캉의 정신분석에 매료된 것도 바로 구조주의가 갖는 '실재의 자의성'이라는 데 있었다. 라캉의 성이론을 영미권에 최초로 소개 한 책, '여성적 성'(Feminine Sexuality: Jacques Lacan and the ecole freudienne, 1982)은 미첼이 로즈(Jacqueline Rose)와 함께 펴낸 책이다. '남근의 의미', '신과 그 여성의 희열', '연애 편지'등 라캉의 글을 모아 다섯 편을 로즈가 번역해낸 이 책에는 두 사람이 쓴 긴 서문이 붙어 있는데 라캉의 여성이론을 알 수 있는 긴 소개문이 된다.
"나는 호나이, 존스, 그리고 라도 등에 반대한다. 그들은 심리적인 것과 생물학적인 것을 같게 보았다. 우리는 정신분석을 생물학, 해부학, 생리학과 별개로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말문을 열며 미첼은 라캉의 작업을 소개한다. 성은 어떻게 구조되고 사회화되는가. 무의식 속에 억압된 소망은 무엇인가. 가장 근원적인 소망은 어머니와 하나가 되고 싶은 욕망이고 그것은 압축과 전치에 의해 왜곡된 상으로 되돌아온다. 이어서 미첼은 이미 밝힌 것처럼 라캉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으로 돌아가 구조주의 언어학을 대입해 성차를 지웠다고 말한다. 언어의 지배를 받는 한 남녀는 모두 남근을 가질 수 없는 결핍이다. 남근은 오직 상상계에서만 존재할 뿐 상징계로 들어서면 억압되기에 그 차액으로 주체는 대상을 온전히 포착할 수 없다. 그는 바라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보여진다. 물위에서 반짝 빛나는 빈깡통도 우리를 바라본다. 우리가 보는 깡통의 모습은 실체가 아니라 나의 바라봄과 깡통의 바라봄이 만나는 어느 지점에서 이루어진 상일 뿐이다. 프로이트의 거세 위협은 사회적인 것으로 외적인 요인이지만 라캉에게 거세는 이미 주체에게 일어난 내적인 결핍이다. 미첼은 여기서 물론 프로이트의 사성적 갈등을 인정한다. 그는 1920년까지는 성이론과 도라분석에서 주장한 양성성과 무의식을 사회적 금기에 저항하는 힘으로 역설하지만 1924년부터 거세 콤플렉스를 강조하고 초자아와 현실의 질서를 설명하는 쪽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미첼의 프로이트 다시 읽기는 그 이전까지 여성 이론가들이 프로이트를 비판하고 정신분석을 보수적인 틀로만 해석해낸 것에서 벗어나는 전환의 계기가 된다. 그녀의 재인식은 마치 라캉의 재인식만큼 여성이론에서 주목받을 만했다. 케이트 밀렛이 '성의 정치학'에서 프로이트를 남성우월주의의 대가라고 비난한 후 4년만에 미첼이 그 흐름을 바꾸어 놓았으니 공헌한 것은 틀림없었으나 그 만큼의 문제점도 있었다. 무엇보다 프로이트 자신이 혁명과 보수의 경계 위에 있었기 때문이고 라캉의 남근 지우기로 해결될 수 없는 부분은 미첼에게도 별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에로스와 문명의 불행한 밀월관계를 유지한 프로이트는 바로 그 긴장 때문에 끊임없이 재해석되지만 바로 그 긴장 때문에 또 비난과 구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가 가장 바쁘게 무덤을 들락날락 거려야 하는 지성인이 된 것은 그의 전 작업이 혁명적인 방식으로 당대를 설명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현상에 대한 불만과 상징계에 대한 단순한 맹신을 경고했지만 그는 왜 사회적 관계가 그런 입장을 취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여성의 입장에서 논하지는 못한다. 그의 글은 그보다 자칫 여성을 허영에 찬 수동적 존재로 보편화시킬 위험을 다분히 안고 있었다. 남성이고 유대인이었던 그는 사실 인종차별과 나치즘의 독선을 경고하고 싶었던 것이지 같은 억압받는 입장인데도 여성이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신경증 치료는 주로 여성을 대상으로 하고 그 결과는 여성보다 인간과 사회의 보편적인 문제로 추상화시켰다. 위돈(Chris Weedon)등 몇몇 여성이론가들이 주장하듯 그는 여성 억압의 구체적인 역사와 상황의 문맥을 간과했던 것이다. 미첼은 중요한 방향 전환은 이루었지만 프로이트를 수정하고 발전시키는 데는 이르지 못한다. 또한 프로이트는 당대 가부장제를 반영했을 뿐 성차를 추천한 것은 아니라는 그녀의 옹호 역시 최근에는 비난을 받는다.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구조되어 정치성을 낳는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최근 이론들은 담론이란 단순한 사회의 반영이라기보다 그 사회를 구성하는 절치적 전략이라는 쪽으로 가고 있다. 미첼은 물꼬를 터놓았고 논쟁은 또 그 다음 사람들의 몫이었다. 프랑스의 이리가레이나 크리스테바가 찬반의 입장에서 그런 역할을 떠맡는다. 미첼과 같은 맥락에서 일하면서도 조금 다른 재클린 로즈는 어떻게 정신분석과 마르크시즘을 결합시키는가 보자.
쾌감원칙과 현실원칙의 긴장관계
라캉의 이론을 영어권에 소개하고 미첼과 함께 긴 소개문을 쓴 로즈는 그 이후 정신분석을 수정하면서 실제 정치적 문맥으로 끌어낸 페미니스트들 가운데 한사람이다. 정신분석의 역사를 여성성의 역사라고 보는 그녀는 라캉을 해설하면서 욕망의 실체와 성을 같은 차원에 놓는다.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은 남녀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남녀의 성합은 완벽한 충족을 미루고 또 미루며 늘 우수리를 남긴다. 성욕이 사라지는 것은 곧 죽음이다. 그러므로 정신분석에서는 충족이 문제가 아니라 우수리, 즉 타자가 있다는 인식이 중요하다. 남근을 지운 라캉은 남근 중심주의자가 아니라 타자를 인식하게 만든 중심주의의 해체자다. 정신분석의 목적은 남근이 존재한다는 신비화 뒤에 숨은 허구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로즈는 말한다. 누가 더 실체처럼 그릴 수 있는가 내기를 했던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이 포도나무를 그렸는데 어찌나 진짜 같은지 새가 날아와 그 포도를 쪼아먹으려 했다. 그는 의기양양해서 상대방을 보며 묻는다. 자, 이제 커튼을 걷고 당신의 그림을 볼까요? 그러나 상대방이 그린 그림은 바로 그 커튼이었다. 라캉이 자신의 글에 인용한 이 고사는 바로 진리란 현현될 수 없는 것, 영원히 베일 뒤에 가리워진 것이라는 해석을 낳는다. 우리는 결코 일류전(illusion)인 그 커튼을 걷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실체처럼 보일 뿐 실체 그 자체는 아니었다. '도라 분석'을 놓고 보여주는 프로이트와 라캉의 차이는 두 사상 간의 차이이기도 하다. 프로이트는 도라가 전이를 일으켜 솔직하지 못했기에 분석이 미완이라고 말한다. 동성애라는 해답을 은폐하고픈 무의식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라캉은 도라와 프로이트 사이의 담론 주고받기에 초점을 맞춘다. 프로이트가 이제 커튼을 걷고 당신의 그림을 볼까요? 하고 물었을 때 라캉은 바로 그 커튼이 내가 그린 그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아무리 자신의 여성성이 가부장제였던 당대를 반영했을 뿐이라고 해봐야 진실은 담론 이전 어딘가에 묻힌 게 아니라 그 담론 속에서 얻어진다는 라캉 이후에 오면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제 그가 기댈 곳은 타자이다. 매끄러운 현실의 계획을 무산시키는 우수리, 언캐니(Uncanny), 되돌아오는 억압된 무의식이다. 로즈는 미첼과 달리 바로 이 타자에 초점을 맞춘다.
로즈는 1993년에 펴낸 책 '왜 싸우는가'(Why War?)에서 욕망의 문제를 현실의 정치적인 상황과 만화, 영화 등 문화영역에 적용하여 정신분석이 현실비판에 응용되는 예를 보여준다. 어린이 만화의 주인공 피터팬이 순진무구한 것은 어린 자신으로서가 아니라 성인의 욕망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영국의 대처 수장은 보수당 당수로서 3년 연속 당선되었다. 그녀의 연설 속에 숨은 폭력을 들추어보자. 여성의 내부에 숨은 공격성을 들추어보면 남성은 공격적이고 여성은 수동적이라는 이분법이 와해된다. 로즈는 페미니즘의 세 단계를 남녀가 동동함을 주장하는 단계, 남녀의 차이를 인정하며 공존을 꾀하는 단계, 그리고 성차 그 자체가 환상이고 해체해야 할 이념임을 보여주는 단계로 나눈다. 여성의 내부에는 폭력이나 이중성이 없는가. 미국의 여성 시인 실비아 플라스(Silvia Plath)의 모순은 시 속에서는 가부장제의 모순을 드러내지만 그녀 자신은 바로 그 제도 속에 즐겁게 복종하는 데 있었다. 정치적인 항의와 동시에 그 제도와 동일시하는 심리가 공존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제까지는 성적이고 심리적인 것의 정치성을 많이 밝혔으니 이제부터는 정치적인 것의 성적이고 심리적인 것을 밝혀 보자고 말한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라캉의 욕망이론, 그리고 데리다의 해체론적 입장에서 그녀는 성차의 문제를 논의한다. 해체론이 자주곤경에 처하는 논리의 아포리아를 로즈는 어떻게 뛰어넘는가. 라캉의 욕망은 남근이 허상이라고 말함으로써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이리가레이는 불평했다. 엄연히 존재하는 성차를 해결할 구체적인 접근을 막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즈는 무의식의 전복하는 힘을 확장시킨 사람이 라캉이라고 보기에 현실원칙과 쾌감원칙의 긴장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현실원칙을 정체성이라고 하자. 정체성과 그 정체성에 대한 저항 사이에 긴장과 갈등이 있다. 매끄러운 가부장제 정체성을 뚫고 그것에 저항하는 정체성 거부가 있다. 그런데 그것은 그대로 돌아오지 않고 상징계의 옷을 입고 위장하여 돌아온다. 그러므로 상징계의 질서를 비판하되 그 상징계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다. "정체성 없는 정치성도 없고 정체성 그 자체에 머무는 정체성도 없다." 억압된 정체성이 되돌아오는데 억압하는 정체성의 옷을 입고 온다. 로즈의 긴장은 정체성의 억압을 거부하면서 혼동과 신경증을 피하는 수단으로서의 정체성을 수락하는 것이다. 무의식과 의식 사이의 긴장이요 쾌감원칙과 현실원칙 사이의 긴장이다. 가부장제의 언어로 가부장제의 허구를 들추자. 프로이트의 쾌감원칙과 현실원칙 사이의 긴장관계를 그대로 성이론에 대입하는 로즈의 전략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문화의 신비를 벗기는 행위가 동시에 억압된 것이 되돌아오는 것이 되는 데 있다. 지금까지 프로이트의 타자성 혹은 무의식을 라캉이 어떻게 부활시키고 그것이 영어권에서 어떻게 마르크시즘과 연합되는지 미첼과 로즈의 경우로 살펴보았다. 이제 무의식이 어떻게 동성애로 발전되는지 에이드리언 리치의 경우를 보자.
3. 에이드리언 리치의 타자 구해내기
원래 모더니즘 계열의 시로 출발했던 리치는 차츰 개성적이고 열정에 넘치는 정치적 시로 옮아간다. 그리고 시뿐만 아니라 산문으로도 유명해진다. 그녀의 초기 시들은 고요하고 절제된 감흥으로 부조리한 세계를 암시하는 형식시 였다. 그러나 60년대 사회상황은 그녀를 기법에의 탐닉으로부터 정치적인 현장으로 끌어낸다. 1973년도 전미도서상을 수상한'잔해 속으로 헤엄치기'(Diving into the Wreck)는 모더니즘에서 완전히 벗어나 여성의 정체성 탐색이 미학과 잘 조화된 시였다. 그후 미학성이 약해진다는 비판을 감수하면서 그녀는 '일상언어의 꿈' (The Dream of a Common Language, 1978)을 비롯한 많은 시집들을 통해 과거와 현재 여성들의 삶을 조명한다. 개인적인 서정시로 공적인 음성을 담아내기에 "에머슨과 휘트먼의 딸"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그녀는 절제의 미덕이나 부정적 수용력보다는 여성끼리의 결속과 여성의 긍지를 평범한 언어로 다듬어낸다. 쉽고 즉흥적인 표현, 끓어 넘치는 분노, 그리고 일상언어로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것을 하나로 연결시킨 것이 그녀의 작품세계이다. 그녀에게 예술의 영감은 여성이라는 존재 그 자체로부터 나온다. "휘트먼은 우리가 순진하고 위대하기를 요구하고 보들레르는 우리의 죄와 지친 혐오를 노래하고, 리치는 우리 자신이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오스트리커(Alicia Ostriker)는 언젠가 말했다. 리치의 대표적인 시 '잔해 속으로 헤엄치기'를 잠깐 보자.
여기가 그곳이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 있다. 여자 인어의 검은 머리칼은 뒤로 물결치고. 남자 인어는 갑옷을 입었다. 우리는 조용히 잔해의 주변을 맴돌다가 배의 밑바닥으로 헤엄쳐 들어갔지. 나는 그녀요, 나는 그 남자라네. 그의 물에 잠긴 얼굴은 눈을 뜬 채 잠들었고 그녀의 젖가슴은 아직도 압박감을 견디는데 ..... (필자의 줄임) 우리는 반쯤 파괴된 도구들 한때는 물먹은 돛대와 헝클어진 나침반으로 항로에 꼭 달라붙었지. 나이면서 너인 우리는 비겁해서든 용감해서든 칼 하나, 사진기 하나, 우리 이름은 빠져 있는 신화 책 한 권을 들고서 이곳까지 함께 다시 찾아왔다.
('잔해 속으로 헤엄치기'의 일부)
나는 사진기, 칼, 그리고 신화 책을 들고 바다 밑으로 내려간다. 그 신화 책 속에 우리들의 이름은 빠져 있다. 탐색의 끝에서 나는 발견한다. 부서진 잔해 속에 들어 있는 정수는 나의 내부에 있는 정수로서 남녀가 공존하는 양성성이었다. 갑옷으로 무장한 남성과 머리칼을 나부끼는 여성, 물먹은 돛대와 헝클어진 나침반은 하나로 묶여 있었다. 나는 발견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다. 나라는 사적인 개인은 신화 책에 오르지 않은 여성이다. 잔해는 역사에 의해 왜곡되고 부서진 여성의 정체성이다. 그리고 탐색을 통해 얻은 새로운 비전은 "나는 그녀요, 나는 그 남자"라는 양성성이다.
바다 속 깊이 가라앉은 파손된 배의 잔해 속으로 헤엄쳐 들어가는 행위와 잊혀지고 파손된 자아 속으로의 탐색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헤엄치는 행위와 자아탐색이 일치하면서 남녀가 한 몸인 인어를 통해 자아의 양성성을 발견하는 이 시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에의 탐험과 흡사하다. 물밑에 잡긴 폐선은 의식의 밑에 억압된 문의식이고 그 속에서 다시 찾은 것은 유아기 성, 혹은 양성성이었다. 인어는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반인반수로 암수한몸을 상징하는 데 적절하고, 돛대와 나침반도 양성을 비유하는 데 적절하다.
양성성은 무엇인가. 프로이트가 도라 분석의 맨 마지막에 얻은 비전이 아닌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겉구조를 헤치고 그 밑으로 헤엄쳐 들어간 곳에 암수한몸인 동성애가 있었다. 현실에 의해 거세되었기에 나 의 이름은 신화 책에 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 억압된 현장을 탐색 해 긴 머리칼에 갑옷을 입은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리치의 또 다른 시 '위력'(Power, 1974)을 보자 프로이트의 잠재된 무의식으로 인해 생기는 사랑과 증오의 양가적 감정을 "위력이 주는 상처" 에서 느낄 수 있다. '나' 는 퀴리 부인의 전기를 읽으면서 그녀의 발견과 그것에 따른 고통을 본다. 방사선의 발견은 위대했지만 그에 따른 피부병과 눈병은 죽는 날까지 고통의 원인이 된다. 이 시에 나타난 창조에 따른 온갖 고통은 여성의 역사요 여성의 위력과 고통을 암시한다. 출산과 육아 등 여성만이 지닌 위대한 힘 속에 숨은 고통을 찬양하여 지금까지 여성은 별로 중요한 일을 하지 못했다는 통념을 깬다. 성스러운 창조 속 에 숨은 폭력이라는 양가성에서 프로이트의 타자를 읽을 수 있고 출산과 육아를 역사적인 일로 승화시켜 프로이트의 여성성에 반론이 된다. 의미가 쉽게 전달되는 일상의 언어는 리치에게 중요하다. 그녀에게 일상 언어는 지금까지 무시되어 왔지만 가장 소중한 여성들의 언어이다. 남성들의 역사 창조에 비해 여성의 출산과 육아는 흔하고 평범한 것으로 무시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 리치는 평범함이 참 진리인 것처럼 여성이 스스로의 역할에 긍지를 느끼고 여성끼리 사랑할 것을 요구한다('일상언어의 꿈'에서). 이름을 잃고 살아온 여성들은 신화의 창조자였으면서도 신화 속에서 지워진 삶을 살았다. 모성신화의 신비화를 의심해보자. 모녀관계를 새롭게 조명하기 위해 리치는 산문을 통해 모성의 역사가 어떻게 왜곡되어왔는지 역사적인 자료들을 더듬어 밝힌다.
'여성으로 태어나기' (Of Woman Born: Motherhood as Experience and Institution,1976)는 여성이 자신의 육체를 사랑하고 출산과 모성의 힘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돕기 위해 쓰여진 책이다. 리치는 구체적인 역사적 예들을 들추어 남성 중심주의 사회가 여성의 역할과 지위를 어떻게 훼손시켜 왔는지 논한다. 가부장제에서 모성은 희생과 같은 단어가 된다. 남성들은 법과 제도를 소유하고 피임, 낙태를 조정했으며 출산학을 통 해 여성들의 심리를 통제하고 훈련시켰다. 여성은 생리라는 배출과 출혈의 더러운 몸을 지녔고 그러면서도 모성은 성스럽고 은혜로운 것이 라는 모순된 심리이다. 리치는 이런 이념이 여성의 출산능력을 질투한 남성들과 자본주의 제도에서 노동력 재생산이라는 목적에 의해 여성을 성스럽게 하여 희생을 당연시한 데 기인한다고 말한다. 남성 사회가 어떻게 제도화된 이성간의 사랑만을 인정했는가에 관해 리치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제도화된 이성애는 수세기 동안 여성들에게 말해왔다. 우리는 위험하고 음란하고, 짐승 같은 정욕의 화신이라고. 그리고 나서는 또 우리는 "열정이 없고" 무감각하고 성적으로 수동적... 등등이란다. 제도화된 모성은 여성들이 지성보다 모성적"본능"을 갖추기를 요구한다... "여성은 가정의 구현이고 그 가정은 모든 제도의 기본이고 사회의 버팀목이라"면서 리치의 모성제도는 프로이트의 사회적 성과 비슷하다. 프로이트는 문명이 사회적인 성을 억압해온 과정을 이렇게 밝힌다. 유아기의 리비도는 적극성으로 동성애와 이성애가 모두 포함된다. 그후 동성애를 이탈로 보고 제도적으로 금기시하고 남녀간의 이성애(heterosexuality)만 인정한다. 그후 다시 일부일처제만을 고착시킨다. 물론 프로이트의 "문명화된 성"은 에로스와 문명의 불행한 밀월관계 속에서 인간의 불행과 그에 따른 신경증의 원인을 밝히는 게 목적이고, 리치의 제도화된 성은남성이 어떻게 모성신화로 여성의 힘을 약화시켜 왔는가 밝히려는 게 목적이다. 그러나 두 이론은 모두 사회가 인간의 본성을 억압해온 점에서 공통된다. 프로이트에게는 문명의 정체를 벗기려는 의도였고 리치에게는 여성의 입장에서 지워진 부분을 복원하려는 의도였다.
리치는 가정이 아버지의 성과 재산을 지속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라고 말한다. 그래서 아들이 중시되고 딸이 경시되었으며 어머니란 희생이 당연한 성스러운 이미지로 이를 뒷받침해왔다. 남성은 지식의 추구자요 소유자였고 여성은 자연과 같은 차원인 탐색의 허상이었다. 리치는 프로이트의 쾌감원칙을 이기적인 닫힌 에고로 해석하여 여성의 육체는 그것에 저항하는 양성성이라고 말한다. 이 책에서 리치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가 남성 중심주의자들이었다고 반박한다. 프로이트는 마조히즘과 사디즘이 같은 욕망의 다른 표현임을 지적하여('본능과 그것의 변모'(Instincts and their Vicissitudes) 피해자의 역사를 서술하는 데 불리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미첼이 밝힌 것처럼 쾌감원칙이 현실원칙을 전복하는 저항으로 쓰일 수도 있음을 리치는 간과한다.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양가성은 주체의 형성에서 쾌감원칙이 원초적 나르시시즘으로 자리잡고 있기에 타자에 대한 감정이 증오와 애정의 양가성을 떤다는 것으로 해석되어야지 그것이 마조히즘이나 사디즘을 권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리 순수한 타자인식이 아니라 상당히 이기적인 것이므로 남을 사랑할 때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리치가 보는 어머니는 어떠한가. 고대 아르카디아 모계중심제 역사를 보면 여성의 힘은 남에게 행사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가 지닌 천부적인 능력이었다. 그녀는 인간을 낳고 치유하는 힘이다. 여사제 주술사, 약제사는 여성에 속한 능력이었다. 이것이 진정한 권력이 아닌가.
가부장제 이전의 시기에 여성은 자연 속에 내재한 힘의 근원이었다. 어머니는 대지요 하늘이요 어둠이요 빛이었다. 그러나 가부장제는 그녀를 흙, 어둠, 무의식, 잠으로 축소시킨다. 리치의 기원으로 거슬러 오르기, 혹은 물밑으로의 탐색은 프로이트의 무의식, 혹은 오이디푸스 전 단계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리치에게 전 단계는 양성적인 여성이었고 프로이트에게는 성의 구분이 없는 양성성이다. 리치에게 전 단계는 단절되지만 프로이트에게 그것은 위장하여 돌아옴으로써 현실을 교란하는 힘이다. 여성의 힘을 두려워한 남성들은 모성을 길들인다. 페르시아의 천지창조 신화에서는 모성을 두려워하여 어머니를 죽인다. 엥겔스의 논리가 뒷받침하듯 부권과 사유재산 제도를 내세워 모계사회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중세의 마녀사냥, 여아 집단 학살, 자학적인 포르노 등 모성 길들이기는 가부장제 신화 그 자체였다. 이런 리치의 지적은 남성이 문화의 발전에 끼친 공로가 큰 것은 그들이 여성의 창조적 모성신화에 맞서고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프로이트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후기 심리학에서 프로이트는 문명이 억압한 모성이 남성의 부러움(envy)에서 비롯된 것임을 암시한다. 가부장제 과학기술은 어떻게 출산 능력을 남성의 소유물로 만들었는가. 남성들은 기술과 도구로 여성 조산원들의 손길을 막아버린다. 똑똑 한 여성들은 마녀로 몰린다. 능력 있는 여성들을 두려워하여 사회에서 몰아낸 는 남성 중심주의, 진통을 여성들에게 내려진 벌로 믿게 만드는 이념들 희생을 요구하는 모성과 개인의 재능사이에서 고통받던 여성 들... 이런 잘못된 모성신화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자신의 분노를 창조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여성의 출산은 성스럽고 그 고통은 승화의 기쁨을 낳는 원천이다. 그것은 벌이 아니라 계몽과 발전을 위한 경험이요 나를 새롭게 탄생시키는 힘이다. 우리는 어머니가 되기 이전에 살아 있는 정신을 소유한 여성이다. 스스로 행동하고 살아가며 독립된 자아를 위해 아이들을 사랑하고 돌본다.
여성의 남아선호 사상이 프로이트에게서 나온 것임을 밝히는 부분을 보면 리치는 "미첼이 그를 재해석하기 이전의 보수적 프로이트만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리치는 말한다. 프로이트는 많은 개혁과 공헌을 했지만 초자아를 강조하고 남근선망으로 여성이 남아를 선호하게 만들었다. 모녀관계를 소외시키고 부자관계를 중심에 놓은 그에게는 개혁의 의지와 시적 과학적 진실이 없었다는 것이다. 리치는 무엇보다 프로이트가 거세 콤플렉스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딸이 어머니를 멀리하게 만든 것에 화를 내고 있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것처럼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지닌 혁신성과 현실원칙을 강조한 초자아는 그 자신도 어쩌지 못한 모순이었기에 어느 쪽을 더 보느냐에 의한 비판과 오해가 필연적이다. 리치는 물론 프로이트의 보수성만을 보고 있는데 사실 그녀의 '가부장제 이전'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단계 이전'과 흡사하다. 모녀관계의 회복과 여성끼리의 도움과 사랑, 그리고 여성 스스로 자신의 육체를 사랑하는 것은 리치의 글이 지닌 핵심이다. 어머니는 딸의 내 면에 강한 자기애를 심어주고 여성인 것에 긍지를 느끼게 기른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어머니는 자신의 분노를 창조적으로 사용하는 삶을 딸에 게 물려준다. 위대한 여성작가, 여성운동가들이 없었다면 여성은 영양실조에 걸렸을 것이다. 수세기 동안 여성을 강하게 길러준 것은 이런 양어머니들이었다. 1979년에 펴낸 산문집 속의 글 '제인 에어. 어머니 없는 여인의 유혹들'에서 리치는 '제인 에어'를 양어머니들의 관계로 읽어낸다. '제인 에어'에서 무엇보다 우리는 정형화된 여성들끼리의 적대관계에 대한 대안을 발견한다. 여성들은 그저 삼각형의 꼭지점 정도가 아니고 남성들을 일 대치하는 정도가 아니라 서로 진실하고 서로 힘이 되어주는 관계를 보여준다.
살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는 여성이론가들이 선호하는 작품인데 이론가들마다 자기 입장에서 달리 읽어 흥미롭다. 길버트(Sandra Gilbert)와 구바(Susan Gubar)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1979)에서 로체스터의 전 부인 버어사를 제인의 억압된 분노로 읽는다. 버어사는 여주인공이 19세기가부장제 사회에 자신을 적응시켜 나가기 위해 억압해야만 하는 분노로 어느 순간 폭발하면서 제인이 독립적으로 자기 길을 찾게 만든다. 그녀는 제인이 긴 시련을 통해 로체스터와 동등한 결혼 생활에 이르게 만드는 동인이다. 한편 스피박은 '세 여성의 텍스트와 제국주의 비판'(1985)에서 버어사를 19세기 영국제국주의 이념에 의해 억압된 유색인종으로 읽는다. 그녀는 제 음성을 갖지 못한다. 제인이 영국제국주의의 가부장제를 뒷받침하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리기 위하여 희생시키고 억압해야 하는 제3세계인이기 때문에 소설 속에서 그녀에게는 분노의 고함뿐 언어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면 리치의 인기는 이들과 어떻게 다른가. 버어사는 거울 속에 비친 제인의 또 다른 자아로서 19세기 가부장제에서 제인이 미친 여자가 되지 않도록 도와준다. 제인은 고아였다. 그녀가 당당하게 혼자 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양어머니들은 누구인가. 어릴 적에는 숙모, 기숙학교에서는 어머니처럼 보살펴주는 템플 선생과 언니처럼 도와주는 헬렌이 있다. 버어사는 제인이 더 큰 자기 발전을 이루는 데 힘이 되는 자아 속의 또다른 자아, 즉 프로이트의 자아 이상(ego-idea)을 돕는 자아이다. 버어사는 힘이 세고 거친 여자이다. 그녀는 거울 속에 비친 왜곡된 제인의 자아상이고 그녀의 광기는 제인이 한 남자에게 종속된 아내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경제적으로 독립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 다. '제인 에어'는 어머니 없는 세상의 딸이 어떻게 어머니 역할을 하는 여성들을 만나 도움을 얻고 자아를 긍정해 가는가 보여주는 소설이다. 버어사를 제인의 억압된 자아로 본 리치의 읽기는 프로이트의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본능적인 자아와 사회가 요구하는 자아의 관계는 버어사와 제인의 관계와 흡사하다. 거친 본능은 언어의 세계로 들어서기 전의 고함이고 그것은 억압되어 완전히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시 나타나 사회적 자아가 현실의 잘못을 바꿀 수 있도록 도와준다. 리치는 여성의 정직성을 주장하는 글에서 '무의식은 진실을 원한다'고 말한다. 여성은 남성 중심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속이고 거짓을 말하거나 진실을 감추고 침묵을 지켜왔다. 그녀는 속으로 "아니오"라고 말하면서도 겉으로는 "예"라고 말함으로써 보답을 받아왔다. 남성에게 정절을 지키는 한 여성의 진실은 중요치 않아 옛날에는 정숙을 가장하고 오늘날에는 오르가즘을 가장한다. 힘없는 자가 살아남는 길은 거짓말을 하는 길이었다.
이처럼 설득력 있는 어조로 여성끼리의 도움과 자각을 주장하는 리치의 여성주의 문학에는 단순히 급진적인 레스비어니즘으로 돌려버릴 수만은 없는 미덕이 있다. 그러나 그녀의 모성의 신화 벗기기 작업은 지나치게 강조될 경우 또 하나의 우월주의를 낳을 수도 있다. 남녀를 차별화 하여서 우월주의를 심을 수도 있다는 게 리치를 비판하는 해체론적 페미니즘의 입장이다. 그리고 그녀의 여성주의를 페미니즘의 두 번째 발전단계에 놓는 이유이다. 첫 단계는 남성과 동등한 지위와 직업을 얻기 위해 여성들이 투쟁하던 시기이다. 그러나 이 운동은 가부장제 속에서 남성과 똑같은 지위를 얻기 위한 것이었기에 사회개혁에 한계를 지닌다. 두 번째 단계는 여성이 남성과 다름을 인정하고 차이를 강조한다. 양성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이것 역시 시간이 흐르면 남성보다 여성이 우월하다는 또 하나의 우월주의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이론이 현실과 유리되어 존재할 경우 현실개혁에 별 도움이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단계는 여성과 남성 모두가 주체 속의 타자를 인정하는 해체론적 입장이다. 이 경우는 앞선 이론가들로부터 정치성이 약하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크리스테바는 그녀의 글, '여성의 시간'에서 위와 같은 세 단계의 여성운동들을 설명하고 그들이 공존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남성의 시간'이 시작과 끝이 있는 닫힌 체계라면 '여성의 시간'은 다양한 이론들이 공존하는 열린 체계이다. 이런 구별은 얼핏 양성성으로 여성의 우월성을 암시한 리치와 무엇이 다르냐는 반문을 낳게 한다. 그러나 크리스테바에게 여성의 시간에서 "여성"은 실존하는 여성을 가리키는 낱말이 아니다. 모성이 상징하는 '코라'가 반드시 여성을 의미하지 않는 것과 같다.
크리스테바는 리치를 제2세대 페미니즘으로 보고 급진적 레스비언의 반사회성을 우려의 시선으로 본다. 모성의 힘이 지나치게 신성화될 경우 상징계를 완전히 거부하는 폭력적 형태들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염려이다. 그보다는 이 세 단계가 공존하거나 심지어는 서로 뒤얽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배제하지 말자 이것이 바로 그녀가 제시하는 '여성의 시간' 이다. 단음조가 아니라 다성적인 것, 경계 위에 있는 유동적인 것, 상호 텍스트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의 시간은 리얼리즘이 아니라 조이스의 모더니즘이나 그 외 다른 실험 작품들도 해당된다. 크리스테바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만일 여성운동이 시간 순서로 일어난다면 여전히 위와 같은 순서로 일어나야 할 것이고 그것들이 공존하면서 지속되어야 할 것 같다. 성차별은 너무도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기에 어머니가 딸을 차별하지 않고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차별하지 않고 여성 자신이 스스로를 사랑하고 여성끼리 도울 수 있는 자각이야말로 페미니즘이 빠뜨려서는 안 되는 우선적 덕목이며 여기에 리치의 여성문학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 지금까지 프로이트의 타자성, 혹은 무의식과 연결 지어 미첼, 로즈, 리치의 여성이론과 여성문학을 살펴보았다. 프로이트의 보수적 측면만을 본 리치의 주장도 자세히 보면 프로이트의 혁신적 측면과 별로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에로스와 문명, 양성성과 단음조, 그리고 무의식과 의식 사이를 끊임없이 오고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이처럼 여성이론에서도 많은 논쟁을 낳으며 지속되어 왔다. 그리고 남녀가 평등하다고 느낄 때까지 앞으로도 논쟁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