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상징세계 - 구미례
제1장
수
4. 양수와 음수
음양사상은 한국인의 관념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 불, 선 3교를 우리 민족의 주요 사상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음양사상은 이들 3교의 공통분모로 존재하여 왔었다. 그만큼 음양사상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우리 민족의 심상과 의식구조에 깊이 자리하고 있으며, 현대를 사는 우리들도 음양의 이치를 통하여 세상을 보는 데에 익숙해져 있다. 음양의 원리를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주의 창조는 무극이라는 무기체에서부터 비롯한다. 형체가 없던 무극에서 점차 나타나기 시작한 형체를 태극이라 하고, 태극에서 다시 음과 양의 두 가지 기운이 갈라져 가볍고 양명한 기운은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되고, 무겁고 탁한 기운은 아래로 가라앉아 땅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음과 양의 최초 구분이요, 천지의 창조라 한다. 양은 하늘, 위, 해, 남성 등과 같이 겉으로 드러난 것, 강한 것, 능동적인 것, 남성적인 것을 뜻하고, 음은 땅, 아래, 달, 여성 등과 같이 숨어 있는 것, 약한 것, 수동적인 것, 여성적인 것을 뜻한다. 수에 있어서는 흉수가 기수, 즉 양수이며 짝수가 우수, 곧 음수이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음수보다는 양수를 '길수', '상서로운 수'로 여겨 왔다. 왜 우리 민족은 양수를 더 좋아하였을까? 다음 표를 보면 그 까닭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음양대비표
1.양 동, 정신, 리, 유심, 하늘, 생명, 형이상학 2. 음 서, 육체, 기, 유물, 땅, 죽음, 형이하학
즉 양은 정신·형이상학·이·하늘 등과 같이 보다 높은 차원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고, 살아서 생동하는 생명력을 뜻하며, 우리가 삶을 영위하고 있는 이 세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수의 선택에 있어서도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0, 2, 4, 6, 8 등 보다는 1, 3, 5, 7, 9 등의 수를 즐겨 사용하였다. 그 중에서도 양수가 두번 겹쳐진 설날(1.1), 삼짇날(3.3), 단오(5.5), 칠석(7.7), 중양절(9.9) 등과 같이 중양의 수로 이루어진 날을 '기운이 꽉찬 날', '생명력이 충만한 날'이라 하여 특별한 명절로 삼았던 것이다. 민속에서는 이러한 양수 선호가 확고하게 정착되어 생활의 일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특히 운이나 신령한 힘이 작용한다고 생각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숫자 선택에 많은 신경을 써서 불길한 모든 기운을 떨쳐 버리고자 하였다. 먼저 산삼을 캐는 심마니들의 경우를 살펴보자. 그들은 산삼이 우연히 캐어지는 것이 아니라 산신령님의 뜻이 따라야 한다는 종교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규율이 엄격하고 금기가 많았다. 이들은 입산하는 날짜를 길일로 택하여야 행운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날짜를 택하는 데 신중을 기하였단. 길일을 택하는 방법으로는 음양오행설에 따라 액운이 없는 날을 택하기도 하지만, 대개 양의 날이 액이 없고 길하다고 하여 음의 날을 기피하였다. 산삼을 캐기 위하여 입산을 할 때도 3, 5, 7, 9, 11명 등 홀수로 무리를 지어서 가며, 산속을 끝없이 헤매다가 산삼을 발견했을 때 '심봤다!'하고 세 번을 외친 다음에 삼을 캐게 된다. 출산풍속에서도 음양의 수리를 이용하여 뱃속에 든 아이의 성별을 점쳐보는 여러 가지 풍습이 있다. 임부가 콩을 한 줌 쥐어 그 수가 홀수면 아들, 짝수면 딸이고, 어머니와 아버지의 연령을 더하고 거기에 수태한 달 수를 합하여 홀수면 아들, 짝수면 딸이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습속을 사용, 아들을 상징하는 양수와 연관되도록 수태를 조절하였으며, 이러한 내용은 혼인하기 전의 예비신부에 대한 성교육의 주요한 일부를 차지하여 왔다. 예를 더 들면 부모 나이가 홀수일 때 홀수의 달에 수태하여 건괘로 아들을, 부모 나이가 짝수일 때 짝수의 달에 수태하면 곤괘로 딸을 낳는다 하여 이를 참고하도록 한다. 또한 7.7법이라 하여, 49라는 기본수에 수태한 달 수를 보탠 뒤 그 수에 어머니의 나이를 뺀 수가 홀수일 대 아들이고 짝수일 때 딸이라 하였다. 이처럼 아들을 낳기 위한 습속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 것도 음양사상이다.
한편, 음수와 양수의 사용에 있어 평소 특별히 의문스러웠던 점에 대하여 이번 기회에 추측을 해 본 것이 있다. 그것은 '죽음'과 관련된 음양사상이다. 음양의 성격과 특성에 비추어 보면 죽음이 음이고 삶이 양인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런데 왜 사람이 죽어서 장사를 지낼 때는 반드시 양의 수인 3일장, 5일장, 7일장을 지내며, 죽은 사람에게 제사를 지낼 때 하는 절의 수는 이치에 맞게 음의 수인 재배(2배), 4배를 하는 것일까 하는 점이다. 여기에 대해 관련 분야 학자에게 문의하였으나 해답을 얻을 수 없었으므로 이러한 추측을 해 보았다. 사람이 죽으면 양계에서 음계로 가게 되므로 아직 장사를 지내기 전까지 마지막으로 양의 기운을 듬뿍 받고 가라는 뜻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제사는 이미 저 세상인 음계에 있는 혼백을 불러 정성을 바치는 의례이므로 음계를 뜻하는 음수인 2와 4를 절의 수로 사용하는 것이 된다. 여기에서 재배는 남자가, 4배는 여자가 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여자는 음이므로 음의 수인 두 번의 재배를 하는 것이다. 명절 등에 어른들께 절을 올릴 때는 한 번만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산 사람에게 절을 두 번 하는 경우도 있다. 혼례식날 신부가 신랑에게 두 번 절을 하면 신랑은 답배로 한 번만을 한다. 이는 혼례식이 남자와 여자가 하나로 결합한다는 음양화합의 의미가 큰 의례이므로, 음양의 이치에 맞게 신부는 음수, 신랑은 양수로 절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태어나기 이전부터 시작하여 관례, 혼례, 상례, 제례에 이르기까지 각각 음양의 이치에 맞는 수를 사용하여 행복을 기원하고 재앙을 떨쳐 보리고자 하는 소망을 담아 왔다. 이 외에도 식생활에서는 기본 음식에 반찬을 곁들이는 수에 따라 반상릉 분류하는데, 그 수를 홀수로 정하여 3첩, 5첩, 7첩, 9첩 반상이라 하였다. 이와 유사하게 건축에서도 집의 칸수를 3칸, 5칸, 7칸, 9칸, 11칸 등의 양수를 주로 사용하였으며, 왕실이 아닌 민가에서는 99칸을 넘지 못하도록 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 민족은 짝수보다 홀수인 양수를 길수로 여겨 즐겨 사용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