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상징세계 - 구미례
제1장
수
1. 수와 상징
우리는 생활 속에서 무의식 중에 어떤 수를 선택하거나 일부러 피하기도 하는 특정한 수 관념에 놓여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수에 대한 관념이 관습적으로 정착되어, 특정한 숫자나 횟수가 각종 의례와 민속 등에서 그 중요한 일부를 담당하고 있다. 주변에 산재한 수와 관련된 갖가지 관습, 행사, 습관 들. 꼭 그와 같은 숫자를 써야 할 필연성을 띤 것이 아닌데도 우리는 왜 그러한 횟수와 날짜, 수 등을 사용하는 것일까? 무심히 밟고 올라가는 사찰의 계단 수, 반복으로 익숙해져 제사 때마다 습관처럼 행하는 절의 수에도 깊은 뜻이 담겨져 있으며, 때로는 숫자 하나에 고도의 상징서이 내포되어 있기도 한 것이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민족은 수와 관련된 독특한 문화양상을 가지고 있고, 그 문화권에 따라 여러 가지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우리 민족이 의미를 부여하고 사용했던 수에서는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3'에 관한 특별한 수 관념이다. '3'이라는 수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길수로 삼고 있지만 동양권,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뚜렷한 수 관념을 형성하여 사상계에서부터 민간 풍속에 이르기까지 수 중의 수, 최상의 수로 여겨오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로는 음양사상에서 기인한 양수와 음수의 분별을 들 수 있다. 우리의 조상들이 수를 판별할 때 그 기본을 이룬 개념은 음양의 이치였다. 이 이치에 따라 각 경우에 적합한 양수 혹은 음수를 선택하였으며, 길수나 흉수의 개념도 음양의 조화 여부로 결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셋째는 민속분야, 그 중에서도 특히 출산풍속이나 세시풍속에서는 이러한 상징적인 수가 하나의 중요한 관습으로 정착되어 우리 생활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민속이야말로 인간의 감정을 가장 솔직히 드러낼 수 있는 생활 그 자체이기 때문에 길흉을 나타내고 화복을 예견하는 수가 서민들의 소박한 마음 속에 그대로 흡수되었기 때문이리라. 우리나라의 여러 학자들은 멀리 전국신화인 단군신화에서부터 숫자에 관한 의미를 추적, 연구하여 왔으나 대부분이 특정한 몇몇 수에 국한되고 있으며, 숫자 하나하나에 관한 의미는 성명학에서 다룬 수리 풀이에서만 간략히 개관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성명학과 같은 특수 분야의 수 관념은 가능한 한 배제하고, 한국인의 일반적인 인식에 부합되거나 실생활에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측면에서 그 숫자들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단군신화에 나타난 수 관념
단국신화에 표현되고 있는 수 관념을 살펴보면, 오늘날 우리가 상징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모든 수의 기본개념이 이미 그 시대에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3, 3.7, 20, 100 등 사상과 종교, 철학의 기본 이치에서부터 우리의 민속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부분에 이르기까지, 멀리 4,30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과 닿아 있는 것이다. 단군신화의 내용을 단군 탄생까지 간단히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천왕인 환인은 삼위태백을 내려다보고 아들 환웅이 인간세상에 내려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일을 펴게 할 것을 결정하였으며, 천부인 세 개의 무리 3천을 주어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아래에 신시를 펴게 하였다. 환웅은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 명, 병, 형, 선, 악 등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맡아 다스렸다. 어느날 곰과 범이 찾아와 환웅에게 사람이 되기를 간청하자 쑥 한 줌과 마늘 20개를 주며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굴 속에서 햇볕을 보지 않으면 사람의 형상을 얻으리라" 하였다. 이에 곰과 범은 이것을 먹고 금기하여 곰은 삼칠일(21일) 만에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중도에 이를 어겨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여자가 된 웅녀는 단수아래에서 잉태 하기를 매일 빌었는데 환웅이 잠깐 사람으로 변하여 웅녀와 혼인, 아들인 단군을 낳게 되었다.
이처럼 단군신화에는 3이라는 숫자가 많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3이라는 수는 오랜 옛날부터 신성수로서 취급되었으며, 유달리 3을 좋아한 우리 민족의 수 관념은 단군신화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환인이 인간세상인 3위태백을 내려다보았고 천부인 세 개를 가지고 다스리게 한 것이나, 환웅이 3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에 내려와 인간의 360여 사를 맡은 일, 곰이 삼칠(3.7)일 만이 사람으로 화한 것 등이 곧 그것이다. 태백은 산 이름이지만 3위에 관해서는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확실한 정설이 없다. 다만 '3위'가 천, 지, 인을 통합하는 제단을 일컫는 말이라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에 따르면 3위태백은 제정을 할 수 있는 산을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천부인 세 개란 하늘에서 천자임을 인정하는 도장 세 개, 혹은 천자가 기록한 책자 세 권 등으로 해석되고 있다. '환웅이 거느리고 온 3천 명의 무리'에서 3천이란 많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우리 민족의 관용어처럼 되어 있다. 3천만 민족, 3천리 금수강산, 3천 궁녀, 3천 세계 등 꼭 숫자가 3천이라는 뜻이 아니라 많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단군신화에 나타난 3이라는 수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이 환인, 환웅, 단군 등 3신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셋이면서 실은 하나라는 삼일신적인 존재, 삼위일체적인 존재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단군신화의 삼위일체적인 면은 이렇게 설명되고 있다. 아버지인 환인은 아들인 환웅에게 초월자의 의지를 담아 지상에 내려보내는데 아들인 환웅은 여전히 신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환웅은 인간으로 변한 곰과 혼인, 사람인 단군을 낳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종교학자 이은봉은, 이러한 삼위일체적 사상은 단군신화나 그 밖의 후대 문헌에 비추어 보아 우연적으로 수입되어 삽입된 것이 아니라, 인간 지성이 지닌 필연성과 연결된 한국인의 종교의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고 있다. 즉 삼위일체적 표현은 초월신을 나타내기 위한 인간 지성의 내적 구조와 긴밀히 관계되는 것으로, 물질계를 널리 초월하고 있는 천신의 역할과 의미를 설명하고자 할 때는 이러한 삼일신적인 방법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초월적 세계를 보존하고 연속시켜 이 지상에 그것을 펼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 아버지가 있어야 하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초월성을 운반하는 동반자로서의 아들이 있어야 하며, 그것을 완성시키는 지상세계의 활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환인, 환웅,단군이 셋이면서 하나요, 하나이면서 셋이라는 삼일신적 사상은 이들 3신을 각각 독립된 개체처럼 파악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다만 그 임무만이 달라서 환인은 조화의 주요, 환웅은 교화의 주며 단군은 치화의 주인 것이다. 이상과 같이 단군신화에서 표현되고 있는 최고신이 삼일신적인 요소로 되어 있다는 것에서 이 신의 초월적인 면을 볼 수 있고 우리나라 최고신의 특성을 알 수 있다. 단군신화에 나타난 최고신이 하나이면서 셋, 셋이면서 하나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은 가볍게 보아 넘기기 어려운 것으로, 한국인의 신앙 대상이 매우 확고한 곳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게 한다.
다음으로 단군신화에서 나타내고 있는 수 관념 중 흥미로운 것은 삼칠(3.7)일의 개념이다. 삼칠일은 이레를 세번 지낸다는 것으로, 즉 21일을 뜻한다. 흔히 7이라는 수는 '럭키 세븐(LUCKY SEVEN)'이라 하여 서구인들의 전용품이라 생각하고 있으나, 우리 민족도 7이라는 수를 좋아하였다. 환웅이 곰과 범에게 100일기를 명하였으나 삼칠일인 21일만에 곰이 인간으로 변신하게 되었으니 삼칠일은 신앙적인 의미를 지닌 숫자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7일을 단위로 하여 세 번 겹치는 삼칠일은 오늘날까지 민속에 있어 금기하는 기간으로 되어 있다. 특히 출산풍속에서 중요시하여 아기를 낳으면 초 이렛날, 두 이렛날, 세 이렛날에는 밥과 국을 마련하여 삼신할머니에게 올리게 된다. 또한 삼칠일 동안 출산을 표시하고 액을 막기 위하여 금줄을 쳐 두는데 이 기간 동안에는 부정한 사람, 상일 당한 사람,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 등의 출입을 막아 부정타는 것을 방지하고 있다. 따라서 단군신화에서도 곰이 100일이 채 못된 삼칠일 만에 능히 인간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은 삼칠일이 부정을 쫓고 소원을 성취시키는 주술적 효과를 나타내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며, 삼칠일이 신성을 요하는 기간의 단위로 단군 이래 오늘날까지 전승되어온 것이다.
민족학자 임동원은 환웅이 곰과 범에게 준 쑥 한 줌과 마늘 20개에 관하여 독특한 접근을 하고 있다. 쑥 한 줌에서의 '일'은 '한'으로, '한'이란 말에는 '하나, 많다, 크다, 높다, 거대하다' 등의 뜻이 포함되어 있음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는 환웅이 준 쑥 한 줌이 결코 많은 중에서 한 줌만을 취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짐승이 먹어서 인간으로 변할 수 있는 영초로서의 효능을 발휘하기에 충분한 양의 한 줌이란 뜻이라고 보았다. 또한 그는 '마늘 20개'의 20이란 숫자에 의문을 던졌다. 10이란 수도 있고, 많다는 뜻에서 100개 또는 천 개를 먹으라고 할 수도 있는데 구태여 20개라고 한 데는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것이라 본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원시사회의 수 개념 발달과정에서 손가락, 발가락을 합한 수 20이 바로 사람 한 명과 같은 뜻으로 사용됨을 상기시켰다. 따라서 마늘을 20개 먹으라고 이른 것은 한 사람 몫인 일인분을 먹으라는 뜻으로 재미있는 해석을 내렸다. 마지막으로 곰과 범에게 100일 동안 햇볕을 보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에서는 오늘날과 일맥 상통하는 고대인의 신앙의식을 엿볼 수 있다. 100은 많은 날을 뜻한다. 백의 고어는 '온'이고, 온은 모든 것 또는 전부를 뜻한다. 100일 동안 햇볕을 보지 말고 은거기도하라는 시련과 금기를 요구한 것은, 신의를 얻을 많큼 오랫동안 충분한 수련 근신을 하라는 의미로 파악된다. 현재에도 무속의 100일 치성 또는 사찰에서의 100일 기도 등이 행하여지고 있는데, 그 연원은 환웅의 지시에 따른 곰과 호랑이의 백일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지극한 정성으로 100일 간을 기도하면 신을 감동시킬 수 있으며, 동물에서 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는 계기로도 작용될 수 있다는 고대인의 믿음이 잘 나타나 있다. |